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4과 / 성령님은 누구신가 (1) / 강정규 목사

2021-09-10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새신자반 주제는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그 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 연약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고, 그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성령의 오심이었을 것입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이것은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육체로 거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고,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의 동행이 없으면 두렵고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이 경험됩니다.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의 이야기, 교회가 탄생하고 땅끝까지 복음이 퍼져나가는 이야기는 바로 성령님과의 동행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그 성령님께서 교회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셨으며,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부터 우리가 이 장을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그럼 성령님은 이때부터 계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태초부터 함께 계셨습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 바로 성령님이죠. 요한복음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곧 예수입니다. 즉 태초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창조에 앞서 존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적 개념이 있는데 ‘삼위일체’입니다. 영어로는 ‘트리니티(TRINITY)’라고 부릅니다. 저도 이것을 세상의 것으로 예시를 들어 설명해보려고 몇 번을 시도해보았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세 위격이 하나의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또한 세 분입니다.

오래전부터 이것을 인간의 언어로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예시이죠. 저는 교회에서 목사이고, 일터에서는 사장이고, 집에서는 남편이며 아빠입니다. 각기 다른 존재로서 역할을 수행하지만 저는 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교회에 있으면 집에 없고, 집에 있으면 일터에 없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 다른 곳에 동시에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H2O를 갖고 설명하는 것도 유행했었는데, 같은 한계에 부딪힙니다. H2O가 액체로는 물이고, 고체로는 얼음이고, 기체로는 수증기이죠. 한 물질이 3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한 번에 각기 다른 존재로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이것은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해 못 한다고 거짓인가?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언어와 생각으로 설명을 못 하는 것입니다.

원래 존재론적 한계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제가 몇 차례 예를 드는 것처럼, 하루살이는 다음 주를 알지 못합니다. 바닷속 물고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존재 못 한다고 그들의 이해 이상의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 이상의 것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그들보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다 알까요? 우리 은하라는 우주 안에 아주 작은 공간의 신비도 다 풀지 못했는데...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전부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광대한 하나님, 세상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보다 크신 하나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 그분이 스스로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기로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절대 알지 못할 존재가 하나님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하고 터득할 수 있다면, 그는 초월자이기는커녕 우리 인간보다 더 작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는 풀리지 않는 비밀로서 성경이 말해주는 대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이것은 규명할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크고 높고 신비로운 하나님에 대해 경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분이고, 또한 세 분으로 존재하시면서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은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사역을 담당하셔도 그 사역은 분열되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 성자 하나님의 구원,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완벽한 일치와 조화와 통합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매우 차별성을 갖습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저급한 신관이 ‘다신관’입니다. 이 땅에 수없이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는 인식입니다. 산마다 산신이 있고, 마을과 거리마다 수호신이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신들이 많으면 무슨 문제가 발생합니까? 그만큼 각각의 활동 영역이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신과 함께>와 같이 화장실 지키는 신은 그곳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입니다.

그보다 조금 발전된 신관이 ‘일신관’입니다.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의 신이 한 나라나 민족을 다스린다는 신관입니다. 다신관에 비하면 신의 활동 영역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신도 국경을 넘어서면 영향력을 상실합니다.

그것과 관점이 다른 신관은 ‘범신관’입니다. 이것은 천하 만물과 만인이 모두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경배 대상으로서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에게는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신관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신관은 ‘유일신관’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거리와 마을과 산과 국경과 지구, 인류의 역사와 우주 만물을 그분 뜻대로 다스린다는 신관입니다. 하나님만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을 때도, 하나님의 하늘 보좌가 비어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하늘에 있든, 바닷속에 있든 언제 어디서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예수님께 기도해도, 성령님께 기도해도 우리는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세분이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파를 나누고, 눈치를 보면서 곤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예배한다고 예수님이 삐치는 것 아니야?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계시면서 ‘나는 왜 안보냐?’ 하시는 거 아니야?”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분이 하나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예배해도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늘 주목하고 싶은 분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소개했습니다. 보혜사는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얻는 ‘파워’가 아니라... 우리 옆에서 인격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으로 소개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혹 우리는 성령을 ‘능력’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아이템’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 하나님과 우리가 사귐을 통해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충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풀파워로 장착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설령 우리의 기도가 비록 서툴고 어눌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성령님을 좇아 살면서 인격이 변하고 삶이 변해가고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를 위로하고 돕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또한 예수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 부릅니다. 그분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진리의 영입니다. 오직 진리로 말씀하시고 진리를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진리와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깊이 사귀는 사람은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고, 그의 삶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누가 성령충만한 것인가? 혹시 오늘 이 기도회 이후에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지는 못한다 해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진리가 배어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은 또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광대하시고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가는 것도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가능합니다. 또한 그 말씀이 필요할 때마다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새신자반 책을 보면 이재철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는데 제 버전으로 옮겨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목사입니다. 만약 제가 길을 걸어가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갑자기 달려와 제 얼굴을 쳤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목사인 제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만약 그 순간 제가 목사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맞받아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면, 한 대를 더 맞더라도 보복보다는 참으려 힘쓸 것입니다. 만약 더 나아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까지 제게 생각이 난다면... 그 사람을 이해하려 힘쓰고 미워하지 않고, 더 잘 대해주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인성과 저의 성품으로는 되지 않는 것들이 많지만, 성령께서 내게 생각나게 하시고 말씀하시기에 제 삶이 조정되고 달라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님은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 때로는 우리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꾸짖어 주시는 것이라 말합니다.

얼마 전에는 카드 문제로 상담사와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카드 배송은 금방 해 주는데, 2주일이나 되어도 도착하지 않아서 정작 사용할 때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좀 언짢았습니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그 사람은 내가 목사인 것도 모르지요. 그러니 제 안에서 좀 짜증 섞인 말투가 나왔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성령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마 제가 목사인 것을 아는 사람한테는 체면 때문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이 나를 모른다고 내 감정대로 행한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서 조금 더 따스한 말투로 제가 직접 배송 기사와 통화를 해서 해결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경우 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내 뜻대로 가는 삶을 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오늘 예배 대신에 불금이니, 나의 유익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면...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 결정을 하기 전이나 혹은 그 후의 과정이라도 성령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그분께 묻고 듣고자 한다면... 저는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들이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설교를 들으며 양심의 찔림을 받는다면 저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의 조명 아래 있는 사람의 양심은 절대로 죽지 않는 법입니다. 진리로 찔림 받은 양심은 언제나 싱싱하게 살아 있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옳은 길, 더 바른길을 향해 나아갈 동력을 얻는 것입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끝으로 성령님이 하시는 또 다른 사역은 우리를 진리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양심을 꾸짖어 주시는 것으로도 우리를 돕고 계시지만, 만약 거기까지만 행하신다면 우리의 양심은 중압감에 질식하든지, 아니면 타성에 무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책망에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신 후에, 우리를 친히 진리 가운데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어느 아버지나 그러하듯이 자녀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는 경우가 있지요. 5년 전, 저희 딸이 7살 가을에 두발자전거를 가르쳤습니다. 보조 바퀴를 떼고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이죠. 한 시간 정도 두발자전거를 타는 법을 가르쳤지만, 제가 손을 놓으면 기껏해야 5미터 정도 가고 멈출 뿐입니다.

속으로 “운동신경이 없나?”, “겁이 많아서 소질이 없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시간 타고 온 후, 두발 자전거를 가르치는 것을 포기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몇 주 동안 자전거를 타러 함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더 많은 연습의 시간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도 좀처럼 쉽지 않았고, 자꾸 체념하게 되었습니다.

4번째 자전거를 타러 나갔을 때, 유하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0미터 정도씩 가기도 하고, 자꾸 비틀비틀하지만, 용케 안 넘어지고 조금씩 더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5번째 자전거 타기를 가르치러 나갔을 때, 이제 코너를 혼자 돌아서 다시 저에게 오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계속 자전거가 넘어질까 봐 쫓아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이제는 혼자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지켜봐 주면 되었습니다.

그 뒤로 갑자기 제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제 이 아이가 자전거를 혼자 탈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근처 공원에 가서 함께 자전거를 타기로 했습니다. 공원을 끝까지 왕복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는 꿈꾸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뒤로는 이제 건하를 뒤에 태우고 아내와 딸과 함께 중랑천에 자전거를 타기도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교훈에 이 예화를 말씀드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는 과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자꾸 넘어지고 비틀대기 때문에 우리는 꾸짖고, 격려하며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다가 이제 어느 정도 혼자 나아갈 수 있으면 그때부터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삶에 성령님께서 동행하고 계심이 너무나 좋고 감사합니다. 이 기쁨과 이 행복을 저는 이곳에서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함께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인간이기에 딸이 조금 서툴면 자꾸 체념하고자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중단없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때로는 잘못된 길로 갈 때 꾸짖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친히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그러한 분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며 함께 기도로 나아갈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요? 괜찮습니다. 주님은 그런 여러분을 돕기 위해 오늘도 기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능력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분과의 사귐과 교제함을 누리십시오.

이 시간 우리의 찬양으로, 우리의 기도로 주님께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