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우리는 예배 때마다 이 문구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헬라어로 쓴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천국’이라는 단어와 ‘하나님나라’라는 단어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헷갈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표현은 ‘천국’입니다. 천국이라는 표현은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이죠. 풀어쓰면 ‘하늘나라’가 됩니다. 그럼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일까? 그 의미를 알고 쓰면 같다고도 볼 수 있고,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쓰면 틀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예는 조선시대 왕에 대한 것입니다. 왕을 왕의 얼굴을 가리키거나 왕의 옷을 가리키거나 왕의 보좌를 가리킬 때, 직접 왕을 거론하지 않고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관례이죠. 그래서 ‘용’에 빗대어 용안, 용상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용안’이라는 것이 실제 용의 얼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얼굴을 가리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소통의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용안이 좋지 않으십니다’라는 의미가 왕의 얼굴을 보며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을 영어로 번역해서 ‘dragon face’라고 할 경우에, 그것이 실상은 ‘king’s face’를 지칭하는 것을 알 때에는 문제가 없고, 모르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 이것과 같습니다. 천국이라는 표현은 3편의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곳에는 모두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유는 마태복음의 독자가 유대인이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기 때문이죠. 마치 우리가 왕을 ‘용’에 비유하여 부르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빗대어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하늘’이라는 말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영역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하늘 공간 - 공중 어딘가 - 우주 어딘가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용안’을 보며 ‘왕의 얼굴’이 아닌 ‘용 대가리’를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의미는 공중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에 계신 것을 말하며, 하늘보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쓴다면 ‘하나님 나라’이던, ‘하나님의 나라’이던, ‘천국(하늘나라)’이던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한국에서 사용될 때 우리 안에 생겨버린 편견입니다. 한국의 토속 신앙과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 문화 안에는 이미 ‘저승’ 혹은 ‘천당’이라는 이 세계와 구분된 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막연하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 짓게 된 것이죠.
한국 안에 있는 이러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활용하여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초창기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 문구가 유행을 했습니다. 분명히 귀에 꽂히는 메시지였으나, 그로 인하여 성경이 말하는 ‘천국’을 우리가 알고 있는 ‘저승’이나 ‘천당’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오해를 낳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귐의교회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배웠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들으신 분들은 이것에 대해서 이해가 좀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는 ‘천당’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 다른가?
1) 죽음 이후에 영이 가는 곳이 아니다.
2) 어떤 특정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영이 들어가고 거기에 못 들어간 영은 구천을 떠돌고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모든 자가 부활하여 ‘몸’을 입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 부활의 몸을 입고 맞이하는 곳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있어요, 없어요? 지금 설명한 부활하여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그 하나님 나라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국잔치가 열리는 그 천국’입니다. 악한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영생의 세계. 이것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죠.
왜냐하면, 순서가 있는 것이죠. 우선, 주님의 ‘재림’이 있어야 합니다. 재림하시면 모든 죽은 영이 부활하여 ‘부활의 몸’을 입고, 살아서 주를 맞이하는 사람은 변화되어 ‘부활의 몸’을 입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과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사람이 구별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생각을 깨우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몸’이 부활하여 참여하게 된다는 점을 많은 경우 모른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몸이 지금 우리의 몸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을 썩을 몸,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몸으로 구분하니까요. 이것은 성경에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행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고전 15:51)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고전 15:52)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고전 15:53)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죽은 신자들과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성경이 말하죠. 그렇습니다.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의 증언을 보시죠.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의미한다고 했어요. 구약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이고 ‘왕’입니다. 구약은 구원자인 메시아가 오셔서 지금의 죄악된 세상을 이기시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소망하며 기다렸습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고대한 것이죠.
신약은 그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자신의 나라를 이 땅에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라고 전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온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냐면, 죄악된 세상의 백성인 우리를 해방시키는 자유의 선언, 죄에 대한 승리가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악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메시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금요일에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 것처럼, 십자가의 보혈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았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기에 그분은 다 이루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제자’는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나라로 사람을 부르고 초청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죠? 하나님 나라가 왔다면 어디 있나요? 동일한 질문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했죠.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이 땅의 나라처럼 영토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나라’는 영토가 있어야 해요. 내가 미국에 갔다는 것은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직접 그 땅을 밟는 것을 의미하죠. 영토가 있고 경계가 있어요. 이것이 우리의 세계 안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구원’을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입장권처럼 여겨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 미국 시민권/영주권 이런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라이센스는 한번 얻으면 지속 되잖아요. 구원에 대해서도 한번 받으면 끝. 우리의 생각과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구원을 이해하면 자꾸 그렇게 정리를 하게 되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토가 있는 나라가 아니고, 구원은 한번 받으면 끝나는 티켓이 아니죠.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많죠. 사랑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다 있다고 믿죠. 하나님 나라를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왕권’입니다. 통치와 관계의 개념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미국 대사관은 한국의 땅에 있습니다. 주소는 한국에 있어요. 그런데 그곳의 통치는 미국에 있습니다. 거기는 누구의 땅입니까? 미국 땅입니다. 공간보다 앞서는 것이 ‘통치, 왕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했습니다.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오셨으니까.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희 안에 있다’ → 엔토스 = 안에(within) or 사이에(among)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기 있을리 없으므로, ‘사이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바리새인 사이에 서계신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시작하시는 왕이므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시됩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 ‘오는 것’입니다. 임하는 것.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을 사로잡은 악한 영의 통치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를 왕으로 인정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죠. 그러므로 내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뭐라고 부르냐면, 바로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안에 구원이 시작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통치를 현재적으로 경험합니다.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여러분의 가정 안에, 직장 안에,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나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을 초청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주님의 재림과 부활의 때에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기간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미와 아직’(already, not yet)이라고 부릅니다. 시작되었지만 여러분이 그 통치를 거부하고 떠나가면 완성된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티켓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티켓은 한번 소유하면 끝이지만, ‘통치’는 한번 받았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나의 왕이셔야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이미 세상을 이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왕 되심과 그의 일하심을 믿으며, 최후 승리의 그날까지 믿음을 갖고 주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야구’로 비유했었죠. 지금 우리의 상황은 9회말 상황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역전 끝내기 홈런을 친 것과 같습니다. 공이 넘어갔고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다만 아직 우리는 1루-2루-3루를 돌고 있는 과정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분이 홈을 밟는 그 순간입니다. 이미 공이 넘어갔기에 승리가 뒤바뀌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최후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세상을 바라보며 당당하고 이미 승리의 기쁨 안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기신 세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교의 절반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볍게’(?) 설명을 했습니다. 관심이 생기고 궁금하신 분은 계속 저랑 신앙생활을 해가며 배우고 새기며 따라가면 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니까요. 특별히 우리가 오늘 다룰 홍해사건 또한 이러한 이해 속에서 바라봐야 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재앙/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애굽에서 나온 ‘출애굽’은 우리에게는 ‘구원’의 과정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의 바로의 지배를 벗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간 것처럼, 우리는 죄악된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해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이곳이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에요. 무슨 분기점이요? 애굽의 통치가 끝나느냐, 아니면 다시 애굽의 삶으로 돌아가느냐의 분기점입니다.
(출 14: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출 14: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출 14: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애굽이 열 재앙을 경험하며 넋이 나가 있다가, 막상 이스라엘 백성이 떠나가니까 마음이 변했어요. “안 돼” 다시 잡아와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서 병거를 갖추고 다시 잡으러 출발합니다. ‘선발된 병거’라는 표현은 ‘특수 부대’라는 의미입니다. 애굽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러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는 항상 이러한 과정이 있어요. 여러분이 세상과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하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꼭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은혜가 있으려고 하면 어려움이 있어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영적인 싸움이 꼭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일을 잘 해석해야 해요. 내게 사탄의 공격이 들어오고, 뭔가 그런다면 그것을 잘 분별하고 이겨내야 해요. 또한, 지금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충만하신 분들은 그 불이 꺼지지 않게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사탄의 공격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통치와 주님의 보호를 요청하셔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안돼요. 어느 누구도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기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여 광야로 나왔으나 지금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가까이 옵니다. 위기의 순간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처럼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가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광야에 하나님 계시다면서, 광야에만 나가면 된다면서...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통치를 받는가? 그것이 그 나라의 백성인가 아닌가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열재앙이 애굽에 몰아치고, 유월절의 구원을 경험했을 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할렐루야’ 하던 그들이, 이제 위기가 오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다시 예전 삶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얼마나 못 볼꼴 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하나요? 이것을 저 멀리 있는 과거의 출애굽기로 두고 읽으면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 나의 이야기로 가져와 읽어보면,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이 나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어제는 찬양하다가, 오늘은 불평하고, 어제는 감사를 하다가, 오늘은 한숨을 내쉬는....
그런데 우리의 모델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이스라엘을 보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세를 보며 나도 그와 같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두려워말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께 믿음으로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여러분.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나를 흔들어대는 모든 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같은 상황 속에 서 계십니까? 맞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홍해를 만나고 애굽의 군대를 만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내 삶에서 해결을 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믿음으로 볼 때, 홍해는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애굽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승리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출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출 14: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출 14: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출 14: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출 14: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스라엘은 원망했습니다. 눈 앞에 현실을 보며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원망을 하나님은 하루 사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꿔놓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홍해와 애굽은 둘 다 어찌할 수 없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이고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그 강력한 군대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전멸되고, 홍해는 이제는 극복하지 못할 장벽과 어려움의 현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노래하는 신앙의 경험과 고백이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어려움도 항상 그런 것 같습니다. ‘어려움의 자리’가 넘어서면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걸림돌’이 넘어서면 ‘디딤돌’이 되어 그것을 밟고 한걸음 성장하게 됩니다. 내 삶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넘어서고 되돌아보면 주님이 가장 강력하게 나를 붙들고 계셨던 고백의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은 홍해 사건을 통해서 얼마 전까지 모세를 원망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신뢰하고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모세의 리더십은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것이죠.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시며 일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모든 일을 경험하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이제 그들이 애굽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광야로 나아온 것입니다. 광야는 그러나 중간 과정입니다. 광야가 끝이 아니라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는 통과해야 하는 일하심의 영역입니다. 광야에서 이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의지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의지할 때, 이들에게 광야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 10: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저는 홍해에 대한 이 해석을 굉장히 의미 있게 봅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름 아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이 중요하죠. 사도바울은 홍해를 건넌 그 일을 ‘세례 받은 것’과 동일시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세례는 신약 시대에 시작되었고, 출애굽의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모세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리도 없습니다. 즉, 이것은 세례식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홍해를 건넌 사건이 곧 세례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보통 물에서 베풀죠. 원래 요단강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도록 하는 행위를 통해 세례를 진행했습니다. 이유가 있죠.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이전의 나는 그곳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이죠.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홍해는 애굽의 삶이 끝나는 곳입니다. 바로의 통치가 끝나는 곳입니다. 이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홍해를 건넌 경험, 하나님 안에서의 시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다시 돌아가시지는 않았는지요. 불쑥 불쑥 다시 애굽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요? 이미 끝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옛사람의 모습이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내가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홍해에서 끊어버리고 수장시켜 버려야 할 옛 사람의 모습, 바로의 통치와 같이 여전히 나를 옭아매어 하나님의 통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분별하고 그것을 주님께 내어 맡기십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은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계속 이뤄지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왕 되실 때입니다. 명목상의 왕이 아니라, 진짜 그분이 나를 다스리고 내가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을 때입니다.
세상은 놓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 여러분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고 가고자 힘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이미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넘어서고 우리는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울 것이니 두려워 말라.”
오늘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갑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주의 통치가 있어서 그곳에는 세상의 것이 힘을 쓰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우리가 주님을 기대합시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멘!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