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 예배 설교

2020-07-03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큰 길을 만드시는 주 / 빛되신 주 / 예수 열방의 소망 / 하늘 위에 주님 밖에 / 멈출 수 없는 사랑

기독교 강요에 대해서 두 번째 나누는 시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도 기독교 강요를 잘 모릅니다. 교단의 차이 등으로 인해서 접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책이지만, 스스로 그러한 담을 뛰어넘고 싶은 마음이 들고, 기독교 전체에 주어진 소중한 유산을 공부하고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보다 한걸음씩만 앞서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하나씩 공부해가며 그 안에서 깨닫는 메시지들을 정리해서 여러분과 나누는 것으로 우리의 길을 정해보려 합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는 기독교 강요가 쓰인 배경을 중심으로 나눴다면 오늘은 칼빈의 삶을 잠시 살피고, 기독교 강요의 첫 페이지를 열어 3가지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누군가는 극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루터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는 삶에서 극적인 일들을 경험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온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반면, 그냥 서서히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케이스도 있죠.

바로 칼빈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회심의 경험은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다양하게 만드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시죠.

성향도 보면, 루터가 다혈질적이고 투사적인 사람이었다면, 칼빈은 조용하고 섬세하며 소극적인 학자 타입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던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의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어떠한 모습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을 하고자 종교개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스트라스부르’라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뜻과 달리 전쟁으로 인해서 스트라스부르로 가지 못하고 제네바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네바는 당시에 매춘과 향락이 난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 도시의 개혁을 위한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칼빈이 그의 동역자들과 제네바의 교회를 개혁하며 도시에 영향력을 주기 시작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사탄의 역사도 시작되는 법이죠.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심지어는 칼빈이 강단에 서자 테러를 저지르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끝내 도시에서 추방당합니다.

첫 번째 메시지.

칼빈과 같이 하나님을 위해 힘쓰는 사람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은 찾아온다는 것이죠. 그가 제네바에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만, 그를 찾아오는 것은 핍박이었습니다.

사실 칼빈의 삶에서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과부가 되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성도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 결혼의 행복함도 9년 밖에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의 아내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결혼 후 9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을 위해 살지만, 그의 아내는 오랜 투병생활을 경험하고 일찍 죽게 됩니다. 또한 칼빈의 별명이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삶이 세상이 모두 바라는 방식으로 구별되어 좋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를 믿으면 탄탄대로만 걷고, 무병장수하며, 더 월등한 능력을 얻는 것 말입니다. 사고가 났는데 비기독교인은 모두 사망했는데 기독교인만 모조리 살았다면... 모두가 머리가 좋아져서 서울대에 간다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겠죠.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안에 믿음의 진실성은 더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들도 병에 걸립니다.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만 유별난 특수성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환경은 더 나은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겨내고 소망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상황 안에서 주님이 나와 동행하심으로 나를 위로하시고 붙잡아주시며 소망케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칼빈은 제네바에서 쫓겨난 후, 늘 가고 싶어 했던 스트라스부르로 갑니다. 그곳은 박해받던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새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칼빈과 뜻이 맞는 사람들이 많이 잇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도 그는 기독교 강요를 개정하죠.

칼빈은 3년 동안 자신이 머물고 싶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살지만, 제네바의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고, 결국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 오게 됩니다. 칼빈은 자신이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닌, 가야만 하는 곳이었던 제네바를 향해서 다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23년 뒤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사역하게 됩니다.

칼빈은 교회를 변화시켰고, 교인들은 흩어져서 도시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제네바가 철저하게 개혁됨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여러 나라에 개혁의 물결은 더욱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두 번째 메시지.

여러분. 진정한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바로 역사의 주관자이고 우리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서 진정한 개혁은 시작됩니다. 그는 도시의 개혁을 위해서 먼저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씁니다. 예배의 회복과 말씀의 선포에 힘쓰자 서서히 제네바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역교회입니다. 넓게는 양주와 경기북부, 작게는 옥정동을 담당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저는 이것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세상은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경주 최씨 부자를 들어보셨습니까? 원래 부불삼대라고 합니다. 부는 3대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부자였던 경주 최씨는 무려 300년간 만석 이상의 부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목표했던 것이 있었죠.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말라.”

그들의 300년은 어떻게 마감되는지 아십니까?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재산은 나라의 교육을 위해 지금의 영남대학에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멋지게 300년의 부를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은 늘 한 도시를 바라보실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때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땅에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모여서 함께 최고의 예배로 하나님을 높였다면, 흩어져서 삶으로 거룩한 흔적을 남기자고 말합니다. 거룩한 흔적이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남기고, 사랑을 실천하고, 모든 영혼들에게 행복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면서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서 너희들의 삶의 방식으로 주변 나라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땅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그 땅을 살아갈 백성들에게 특별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께 한걸음씩 나아가서, 이곳에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견고히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실제로 칼빈은 제네바를 변화시키고, 그곳에 학교를 세웁니다. 여기서 10명의 교수와 함께 성경과 신학, 언어 등을 가르쳤습니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다시 유럽 곳곳으로 흩어져서 종교개혁자로서 사역하게 됩니다.

저는 교회의 DNA는 ‘제자 되고 제자 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고, 또 누군가가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1564년 죽으면서, “현재 당하는 고난은 다가올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잠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무덤에는 묘비도 없고 무덤의 흔적조차 잘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꿈꾸며 나눴던 ‘무익한 종’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우리 사귐의교회가 무익한 종의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서 살 되,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으로 족할 수 있기를...

지난 금요기도회 때 나눈, 기독교 강요의 첫 설교에 이어 지금까지 기독교 강요가 무엇이고, 그것을 기록한 칼빈의 삶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직 기독교 강요의 내용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죠.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음 시간이 될 텐데요, 오늘은 끝으로 이 책의 ‘헌사’를 통해 마지막 세 번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강요는 ‘헌사’를 다루며 시작합니다. 헌사란 누구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의미이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눅 1: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행 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행 1: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것과 유사하게 기독교 강요는 프랑스의 국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치는 헌사로 시작합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프랑수아 1세는 개신교의 핍박자였습니다.

그가 개신교를 핍박한 것은 개신교도들이 종교적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와 같은 과격한 폭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로마시대의 초대교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프랑수아 1세에게 개신교도들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들인지 설명하고, 변호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기독교 강요를 편지로써 쓰게 된 것입니다.

헌사의 몇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왕이시여! 나는 이 편지를 통해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밝히고자 합니다. 왕이시여!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핍박을 멈추시고 그릇된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프랑수아 1세께서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편견 없이 공정한 조사를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왕의 직분을 나쁜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왕의 직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핍박당하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변호에 귀를 막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복음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무시하는데, 복음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며, 성경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메시지.

저는 기독교 강요 헌사의 이 부분을 보면서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우리는 복음답게 대하고 있는가?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과의 대화에서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왕들과 총독들 앞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전했으며, 때로는 그로 인한 핍박과 박해가 있어도 그는 단 한 번도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헌사를 읽고, 또 성경의 몇몇 부분을 떠올리며, 이 시대 앞에, 세상 앞에 가끔씩 움츠러드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복음을 당당하게 외치고, 우리가 교회 밖에서는 이것을 외치고 나눔에 있어서 당당하지 못하다면, 과연 정말 하나님이 내게 자랑인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일까?

물론 전함에 있어서 지혜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지혜로운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용기가 없어서, 삶이 부끄러워서, 불편해질까봐... 복음이라는 의미가 기쁜 소식인데, 이 기쁜 소식을 세상 앞에 자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이곳에 모여서 주님을 높이고 예배하며 자랑하는 우리들입니다. 이곳에 건물이 있어서 교회가 아니라, 주의 성도들이 있기에 교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그 복된 소식을 전하는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참된 교회의 발자취를 남겨 주십시오.

헌사 마지막 부분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참된 교회란 하나님 한 분과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경배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표지는 말씀의 순전한 선포와 성례의 적법한 시행에 있습니다. 또 종교개혁 교리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잠들어 있는 교회를 깨운 것입니다. 왕이시여! 그릇된 비난을 조심하시고 무죄한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선처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릴 것입니다.

1536년 8월 1일. 바젤에서 칼빈.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 이후의 모든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날마다 개혁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잠들어있는 교회가 종교개혁으로 깨어났던 것처럼, 세상 앞에 움츠러든 내 복음의 열정이 깨어나길 기도합시다. 내 예배의 마음이 깨어나길 기도합시다. 코로나로 인해서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우리의 영성이 깨어나길 기도합시다.

비록 내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마주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내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이 시대를 책임지는 주의 교회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꿈꾸는 그러한 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