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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시스!

2025-07-06 · 요한계시록 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오늘부터 한 달간 여러분과 제가 나눌 이야기는 신약성경 가장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에게 이 책은 낯설고 어렵고, 누군가에게는 두렵기까지 한 책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마무리됩니다. 창세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준다면,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시작이 중요하듯, 결말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결말을 자주 놓쳐 왔습니다.

창세기는 우리가 모두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이 많습니다. 세상과 인간이 창조되는 과정부터, 죄가 시작되기 전에는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 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는지, 그래서 우리는 그 후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이 모든 정보가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 수많은 성경 메시지의 ‘결론’입니다. 결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이 16부작 드라마를 보는데, 마지막 편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미쳐버리는 거죠. 그런데 이 결론이 아직 미완성이 아닙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저희는 이미 2019년에 요한계시록을 4회에 걸쳐 설교한 바 있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요한계시록 첫 설교 제목이 <빼앗긴 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교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책에 속합니다. 일단 내용이 우리에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잘못 설교하면 이단으로 몰리기도 쉽습니다.

설교자들도 요한계시록을 연구해서 설교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설교자에게도 부담이 되고, 성도님들도 읽으려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교회에서 그렇게 멀어져 버린 책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우리가 이 책을 누구에게 빼앗겼습니까? 이단들에게 뺏겼습니다.

이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요한계시록의 비밀을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며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우리만이 이 게시를 해석할 수 있다며, 말도 안 되는 해석법으로 더욱 말도 안 되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결과 그 이단의 교주가 요한계시록이 기다리던 보혜사라는 결론에 이르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신천지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요한이 기록했지만, 요한은 이 내용의 참된 의미를 모른다고 가르칩니다. 요한도 몰랐던 이 예언의 실상을 누구만 알고 있다고 말합니까? 교주 이만희만이 계시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들이 바로 이 결론으로 가면, 누구나 거부감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이곳저곳을 짜맞추기 시작합니다. 사실 성경 해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됩니다. 참고로 제 전공이 성경 신학입니다. 이단에서 여러분이 성경을 배우면 짝이 딱딱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속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성경을 인용해서 뭔가를 주장하면 맞는 얘기라고 안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정말 그것을 의미하는가? 분석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들도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성경 본연의 의도와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오용을 가장 잘 하는 곳이 이단입니다.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한 문장만 떼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천지 강사가 가르치는 유명한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신천지 강사 : 성경에 보면 천사들 조직이 4그룹으로 되어 있다고 나옵니다. 4개 그룹의 우두머리가 천사장입니다.

이단 사역자 : 천사가 네 그룹으로 있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신천지 강사 : 에스겔서 28장에 있습니다.

(겔 28: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성경에서 천사를 ‘그룹’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읽은 거예요? Group. 모임을 뜻하는 영어단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한 단어만 가져와서 의미를 연결합니다. 그래서 이단의 성경해석을 소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방식이라고 합니다.

‘원숭이 엉덩이’가 빨간 것과 ‘사과’의 빨간 것을 연결합니다. 여기까지는 설득력이 있죠. 그리고 또 ‘사과’의 맛있음과 ‘바나나’를 연관 지어서 연결합니다. 이런 식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으면 무조건 연결합니다. 성경 전체를 여기저기 돌고 도는 것이죠. 그러면 이 이야기의 끝은 결국 ‘원숭이 엉덩이 = 백두산’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약속된 목자’가 돌고 돌아서 ‘교주 이만희’라고 결론을 내리는 성경 공부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성경의 온전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소외되고, 또 이단들에서는 오용되는 요한계시록. 저의 목표는 이번 요한계시록 두 번째 여정을 통해 다시 이 고귀한 말씀을 우리 품에 품고 새기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과 낯설다는 두려움을 다 이겨내고 저와 함께 힘차게 요한계시록의 여정을 시작해 봅시다.

우선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버려야 될 가장 중요한 편견은, 이 책은 해석하기 어려운 미래의 수수께끼 같은 일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당대의 사람들이 읽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내어 모두가 돌려보고 공식적인 모임에서 낭독하고 가르치라고 보낸 회람용 서신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 편지의 내용을 당시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감춰진 비밀이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비밀이었습니다. 바로 이방인들, 특히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리에게는 뜻이 감춰진 비밀문서였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야 하는데요. 크게 2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네로 황제 치하였다는 의견과, 다른 하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쓰였다는 것입니다.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모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때였습니다.

조금 더 지지받는 의견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인데요.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했던 네로 황제 말기에 로마는 혼란에 빠집니다. 내란이 일어나고 네로는 결국 자결을 합니다. 황제가 줄줄이 단명하고 사라졌습니다. 이 격동기를 끝낸 것이 베스파시아누스입니다. 그가 황제가 되어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그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유대 반란군을 멸망시킨 후 황제가 됩니다. 티투스의 뒤를 이은 이가 바로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입니다. 그는 로마를 다시 네로 이전의 강력한 제국으로 회복시키고 전성기를 맞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로마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위용을 자랑하며 천하를 호령합니다.

내란으로 자멸할 것만 같았던 제국이 건재함을 과시하고 오히려 더 강력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로마의 각 지방 정부에서는 자발적으로 ‘황제숭배’를 시작합니다. 앞다투어서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당시 로마의 합법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로마의 다른 종교나 황제숭배에 참여하지 않죠.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신을 함께 섬기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교회가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으니, 막 잡아가고 죽이고 했단 말이죠. 순교를 각오해야 했어요. 그것처럼 로마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희생과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로마의 가치와 요구에 타협하고 동화되느냐? 아니면, 여러 실제적인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예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유지하느냐? 바로 이 시기에 주어진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데, 로마제국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 정체성과 사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반대에 저항하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교회를 일깨우는 책이 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드러내어 가르치면, 그 자체가 로마 지배 아래서 엄청난 위험 부담이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구약에 있는 묵시적인 상징 언어를 가져와서 기록합니다. 이미 구약에는 다니엘이나 에스겔과 같은 예언서에 다양한 상징 언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가 구현해 보면 이렇습니다. 제가 한번 한국인이라면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바다에서 학의 날개가 펼쳐지자 수많은 적이 무너졌고, 거북이의 호통 후에는 승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제가 지금 말하는 이 이야기가 어떤 장면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우리는 알죠.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국인에게 ‘학’과 ‘거북이’ 이야기는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수많은 상징적 이미지들은 모두 구약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구약성경이 없다면 요한계시록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에 요한계시록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약의 상징들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과의 연결은 아까 ‘원숭이 엉덩이’처럼 억지 연결이 아니라, 성경의 통전적 의미 안에서 그 뜻을 모두가 객관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이것이 현대의 ‘유럽연합을 의미한다, 짐승의표가 베리칩이다, 바코드다, 백신 맞으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성경의 기본적인 해석에 어긋난 쓸데없는 선동주의적 언어들입니다. 그런 선동주의로 사람을 모으면, 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단스러운 모임일수록 마치 그들만이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스라이팅 합니다. 여러분 혹시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절대 넘어가지 마십시오.

요한계시록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시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이 책의 시작을 보십시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절은 ‘속히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 계시는 2000년 후의 베리칩이 될 수가 없는 이유이죠. 몇몇 선교단체나 대형교회 목사들조차 그런 거짓 뉴스에 속아서 성도들을 또 다른 거짓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면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신앙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읽은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서민 혹은 노예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일과가 시작하기 전 이른 새벽이나, 일과 후 저녁 늦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임에서 한 사람이 나와서 요한계시록의 두루마리를 펼치고 이 글을 낭독한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있습니다. 3절이 그것을 반영하죠. 읽는 자와 듣는 자.

읽는 자가 나와서 이 두루마리의 첫 단어를 크게 외치며 읽기 시작합니다. 한번 제가 요한계시록의 원어 버전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음성) 어떤 단어가 들리시나요? ‘아포칼립시스.’ 그것이 ‘계시’ 혹은 ‘묵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언의 의미는 ‘덮개를 들추어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굉장히 독특한 문학적 장르입니다. 보통 이 묵시문학은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힘으로 현재 상황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용됩니다. 절망의 늪에서 피어오르는 소망의 꽃이 ‘묵시’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에는 환상이나 상징적 이미지가 많이 사용된다고 했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위로부터의 청사진’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비슷합니다. 당대의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다니엘이 하나님의 청사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도 묵시문학으로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요한계시록이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요한을 하나님의 환상 중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두루마리 예언을 선포하도록 하십니다. 이 두루마리는 교회가 이 땅에서 바벨론(로마)의 옷을 입고 등장한 사탄의 통치를 극복하고, 어떻게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청사진입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을 읽는 자는 이 말씀을 읽고 나면 ‘지켜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요한계시록이 머나먼 미래에 대한 꿈과 같은 이야기라면 말씀을 듣고 지킬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실천할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읽고 듣고 지키라’는 이 요한계시록의 시작은 이 말씀이 당시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당시의 독자들에게 이 말씀이 무엇을 요구했고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야, 우리도 요한계시록을 한 달 동안 나누면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편지를 쓰는 방식은 모두 비슷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발신자, 수신자, 인사말로 편지를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축복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는 서신서들도 대개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계 1:5a)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요한이 발신자이고, 수신자는 일곱 교회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이 그러하듯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라는 인사 문구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인사말에도 이 책의 주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는 예수님에 대한 표현도 지금 이들의 현재적 고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인사말에 담긴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입니다. 혹시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보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보이죠. 그리고 성령님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라고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은 완전함이나 충만함을 의미하므로, 온전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읽힙니다. 하나님을 찾으셨습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3장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관하여 묻습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내가 어떤 분으로 소개합니까?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세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번역하면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자가 되는 존재이다. 줄이면 ‘나는 나다’입니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에서 이 부분을 ‘에고 에이미 호 온’이라고 번역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이죠.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지금 이것을 차용하여 성부 하나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에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인사말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뒤따라 나옵니다.

(계 1:5b)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은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반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살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어진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이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있으셨고, 그에 걸맞은 신실하심으로 참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신실한 사랑을 보이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진 것이죠.

하나님의 구원 결정과 예수님의 신실한 순종,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우리를 성령께서 동행하며 지키심으로 우리는 회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찬양 문구에서도 요한계시록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죄에서 해방한다’는 것은 우리가 짓는 죄도 있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죄의 세력,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해방하시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십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의 체제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는 새로운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제사장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고 우리가 완성해 가야 할 사명인 것이죠.

어쩌면 이 짧은 표현 속에서도 요한계시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세력, 바벨론의 유혹, 핍박과 타협의 시대 속에서 누가 ‘나라와 제사장’의 정체성을 지키며 끝까지 신실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약속은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그 남겨진 약속입니다.

(계 1: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계 1: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처음과 끝이 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열고 닫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을 그분이 열고 닫으십니다. 창조자이자 종말의 심판자가 되십니다. 그는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4에서도 나왔고 8절에서도 나오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표현을 우리가 잠시 멈춰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 이것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금 부자연스럽습니다. 두 가지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우리는 언제나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시간을 바라봅니다. 인간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이 표현에서는 뭐가 먼저입니까? ‘현재’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성을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나중에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을 바라보며 지금은 막연히 기다리는 내세주의적인 종교만이 아니라, 지금 내 삶에 실존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마주하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현재적 신앙의 종교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기독교 신앙은 반쪽짜리도 되지 않습니다. 앞서도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하실’이 아니라, ‘나라로 삼으신’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현재성,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불행해집니다.

구원은 깨어진 세상으로부터의 회복이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내 삶 속에서 그 회복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에는 회복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어딘가에서 지금 누수가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함께 맛볼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것입니다.

신앙은 현재적 경험이 없이 미래에 올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내 삶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라 상식입니다.

둘째, ‘지금 계신 분, 전에 계셨던 분.’ 만약 이 흐름대로 표현한다면...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형용어구라면 무엇이 되어야 자연스럽습니까? 현재에 계시고, 과거에 계셨고, 미래에 계실 분. 혹은 영원히 계실 분이라고 해야 자연스럽겠죠?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오실 분, 장차 오실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장차 어디에 오실 분입니까? 이 땅에, 이 세상에 오실 분입니다.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미지의 세계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의 언어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하나님 편에서의 미래는 이미 완성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미래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현재로 그 미래를 가져오고 계신 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바라봐야 할 소망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합니다. 이번 주에도 요한계시록에 관련된 꽤 많은 강의를 듣고 책도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 강의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세상 역사는 한 편의 영화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 제작을 마친 감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영화의 결론을 알죠. 그러나 첫 시사회에 관객과 함께 참여해서 그 영화를 함께 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역사의 결말을 다 알고 계십니다. 다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역사에서 함께하시며 현재를 보고 계십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최종적 승리를 가지고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해 오고 계신다.”

그들의 현재는 너무 불안합니다. 무섭습니다. 로마에 대적하는 자신들의 미래가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태초에 시작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초월 세계에 완성되어 있고, 하나님은 그 초월 세계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로 가져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기억나십니까?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 이 이야기는 지금 만물이 충만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하면 태초의 온전함을 잃어버리고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초월 세계의 것을 이 세상에 주십니다.

하나님이 초월 세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초월 세계의 비밀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초월 세계에 계시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생명을 이 땅에 불어넣으십니다.

깨어진 세상에 가득한 사탄의 피라미드 구조, 약육강식과 힘의 지배가 뒤덮은 이 세상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이 땅에 생명의 씨앗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씨앗을 품은 자들 안에 회복, 그 충만함이 시작됩니다. 그 사람들이 영적으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이 땅에 남기고 간 복음이 ‘교회’로 열매를 맺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나타난 충만함. 교회는 충만함을 잃어버린 세상 가운데 충만함을 회복해 가는 유일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 이 깨어진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십니다.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마 18: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 18: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교회는 깨어진 세계 안에 임한 하나님의 초월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로서 하늘과 땅을 연결합니다. 교회를 통해 이 땅으로 하나님 나라가 한 걸음씩 소환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이 놀라운 일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보여주다가, 요한계시록에서 그 완성에 대한 확신에 찬 고백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 이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그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로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갖고 미래로부터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절망의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가 그를 바라보며 예배할 수 있는 기독교 희망의 본질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부분적으로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현재 나를 둘러싼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방식이 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결말에 의거하여 우리의 삶과 현재를 해석해 내고, 신자다운 믿음과 삶의 기준을 세우며 주님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현실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위축되고 타협하고 무너져 버린 내 삶의 부분들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그것을 세우기 원하십니다.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저에게는 말씀이 가장 큰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강력해 보였던 바벨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영원할 것 같은 로마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반대로 박해 가운데 사라져 버릴 것 같던 그 기독교 신앙은 지금 여기에 이렇게 또 다른 교회로, 예배로, 성도로 살아 숨 쉬지 않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삶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아포칼립시스! 베일을 걷고 진리를 드러내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그것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우리의 삶을 그 진리 안에서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