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호세아서를 설교로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청소년부 주관예배도 있고, 12월에는 교회의 비전과 사역에 대한 설교의 시간도 있기 때문에, 매일성경 흐름에 따라 설교를 하기 위해, 호세아, 아모스, 말라기서를 각각 한 번씩 설교할 예정입니다.
사실 14장에 이르는 호세아서를 한 번의 설교로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호세아서의 주제는 계속 반복됩니다. 이 책은 역사서처럼 에피소드가 많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동일한 주제가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의 설교이지만,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심도 있게 다뤄보고자 합니다.
호세아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약의 파노라마>를 통해 다룬 내용을 최대한 써먹으면 됩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분열왕국 시대에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기 전에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북왕국은 19명의 왕 중에 선한 왕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화나’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외치죠. 뭐라고 외칩니까? ‘회개하라, 아니하면 쫓겨나리라.’ 바로 그 선지자로 북왕국에 가서 활동했던 것이 ‘호세아’와 다음 주에 다룰 ‘아모스’인 것입니다.
예언서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설교로 담아내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기억하시죠? 그러므로 호세아서는 북왕국에 대한 고발과 더불어 그들이 심판당하지만, 미래에 회복될 것을 소망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북왕국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 때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서, 25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 당하는 것을 모두 목격했습니다. 호세아서는 그 25년의 기록에 대한 모음집으로, 시 형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실 시로 기록된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라는 것은 뉴스 기사와 다릅니다. 내용이 조금 상징적이고 몽환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글을 읽으며 이미지를 상상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를 여러분이 읽으면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조금 모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이 설교를 통해 조금 더 선명하게 이 책을 통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자 합니다.
1. 말도 안 되는 명령의 이유
아마도 여러분이 ‘호세아서’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고멜’이라는 호세아의 아내입니다. 호세아서 1~3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것이 초반부부터 워낙 강렬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호세아서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가 호세아서 전체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말씀을 그대로 읽어가자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조금은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주신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호세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른 남자와 잘못된 관계들에 있었는지, 결혼한 후에 그렇게 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여인이 외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립니다. 그리고 자녀 셋을 낳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호세아를 버리고 외도를 합니다. 가정은 망가져 버립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명령하십니다. “외도한 네 아내를 찾아서 그녀가 내연남들에게 진 빚을 다 갚아주고 데려와라. 그녀를 용서해라. 다시 그녀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용납하라.”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합니다.
성경에는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노아에게 적어도 수십년에 걸쳐 방주를 지으라는 것도 그렇죠. 아브라함에게는 아버지를 버려두고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100세에 나은 아들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죠.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과 ‘외도한 아내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것’ 중에 뭐가 더 힘들까요? 둘 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이런 명령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감당해낼 만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시죠. 그리고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은 이삭을 죽이기 전에 취소하고 거두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는 진짜로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호세아에게도 무리한 명령을 내리시지만, 사실 그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먼저 행하신 일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놔두고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품기 위해 힘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호세아는 자신의 삶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편에 섰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선뜻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자기 삶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타내는 것에 순종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가정을 통해서 나타내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호세아와 하나님 마음이 같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멜의 모습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도 애초에 배신의 싹이 많이 보이는 민족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배신’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내팽개치고 배신한 것이죠. 배신하는 인간, 사랑하고자 힘쓰는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붙잡고 계셨던 것이죠. 참고 용서하시며 결국 약속하신 가나안 입성까지 이끌고 가십니다. 그 사이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결혼생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약속의 땅에서 이제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국가를 세우고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통일왕국 120년, 북왕국 136년, 도합 250년의 기간 동안 북왕국 백성들이 보인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고멜의 모습이었죠. 메시지 3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명령하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라. 네 아내를 다시 사랑하여라. 지금도 최근에 사귄 남자와 침실에 누워 있는 네 아내, 너를 속인 네 아내를 말이다. 하나님인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듯, 그녀를 사랑하여라. 마음 내키는 대로 온갖 신들과 놀아나는 그들을 내가 여전히 사랑하듯 말이다.”
하나님의 이 명령을 받고 호세아가 이것을 자기 삶으로 순종하여 내기까지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엄청나게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이것을 명령하실까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상처받으신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럼, 호세아는 어땠을까요? 호세아는 이 일에 순종하면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같은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이것이 지금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지금 하나님 마음이 내 마음과 같겠구나.”
우리는 호세아의 이야기를 보면서, 호세아의 순종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런 일을 시킨 것이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고멜이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한 것이 대단하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내어주셨고, 호세아가 고멜을 용서한 것이 대단하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보다 수백 번 더 용서하고 품기 위해 결단하셨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찾아가 말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나와 같이 살 것이오, 몸을 파는 일, 여러 남자들과 놀아나는 일은 이제 끝이오. 당신은 나와 같이 살고, 나는 당신과 같이 살 것이오.” 이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행하신 자기 백성을 향한 결정이고, 이 사랑이 있기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죄를 선명하게 이해할 때, 복음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호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우리교회 식구들은 풍삶초를 통해서 정리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서 몰아내었던 ‘아담의 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아담이 범했던 죄의 원형적 모습이 우리 모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중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이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바로 지난주에 청소년부가 극으로 표현했던 ‘탕자 이야기’입니다.
탕자라고 불리는 둘째 아들이 꿈꾸던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께는 내가 필요한 것만 얻어내면 되고,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아버지 간섭 없이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이 마음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필요는 해요. 그런데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신이길 원할 뿐, 나에게 어떤 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싫습니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다른 범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법 없이도 사는 존재’라고 불릴지라도 그 중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추구하고 있을 때,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 문제인가? 그것도 그렇게 잘못인가? 저는 이 질문이 매우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문제인가’의 측면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도 할 수 있고, 저런 선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결과를 안다면 우리는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할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을 택해서 더 유익한 삶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선택해야죠.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탕자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는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와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들의 선택이 아버지와 관계를 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중에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음, 당신은 아직도 그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는군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제가 선택한 길이 무엇인지, 그 삶에 어떠한 것이 주어지는지 당신도 한번쯤 관심을 갖고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복음은 누구에게나 말해줄 수는 있지만, 아무나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선택한 그 선택, 성경이 죄라고 하는 그 선택이 내 인생의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배신했다고 무슨 복수를 하겠다고 우리를 찾아와 못살게 구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괘씸하다고 아들이 망하게 뭘 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질서와 원리가 있는데, 죄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선택한 무지에 가깝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마주하게 되는데, 자기중심적 삶이 ‘자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만이죠. 성경은 이 문제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잠수를 하는데 산소통이 귀찮다고, 필요 없다고 여기며 바닷속으로 뛰어든 것과 같습니다. 잠깐은 자유롭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숨이 막힌 삶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망가졌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만나서 조금씩 치유되고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점점 너그럽고 온유하고 다른 사람을 품으려고 애씁니다. 만약에 주변에 그런 모습이 없는데 자기가 좋은 신앙인이라고 말하면 믿지 마십시오. 적어도 회복의 과정 중에 있어야죠.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삶은 반대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욱 깨지고 상하는 것입니다. 고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까칠해지죠. 누가 배려하고 살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마음이 고갈되어 있으면 그렇게 못 살아요. 자기가 죽겠는걸요. 항상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감정의 위기가 오고 조금만 마음의 한계가 오면, 툭 하고 이기적이고 아직 치유되지 않은 모습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세상입니다. 세상의 삶이 더 어려운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내기 때문입니다. 서로 더 큰 상처와 아픔을 만들어내고, 서로를 힘겹게 해요. 세상과 삶에 대한 소망보다는 절망을 더욱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로 인해 생겨난 참혹한 결과입니다.
성경에도 이 모습이 나와요.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게 된 아담의 후예도 그랬습니다.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질투하게 됩니다. 분노는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이 삶에는 여러 가지로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모습들이 존재합니다. 힘으로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차지하는 일부가 있죠. 그러나 불안할 것입니다. 자신이 힘으로 그것을 얻고자 수많은 사람을 짓누르고 끌어내렸듯, 이제 누군가 자신에게 그것을 행할 일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소망 없는 이 세상을 그저 즐기며 살아가는 것을 택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오직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은 자신의 공허한 인생을, 남자를 만나서 짧은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채워갔습니다. 사실 그것이 절대 영원한 채워짐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수많은 배신과 떠남을 통해 이미 여인인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다섯 남자의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지금 함께 사는 남자를 ‘남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그 갈증뿐인 삶에 필요한 궁극적인 생수가 되어주려고 그녀를 찾아가신 것이죠.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호세아의 아내 또한 비슷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2장에 보면 고멜의 말이 나옵니다.
(호 2:5) 그는 자랑하기를 '나는 나의 정부들을 따라가겠다. 그들이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고, 내가 입을 털옷과 모시옷과, 내가 쓸 기름과 내가 마실 술을 댄다' 하는구나. 그렇다! 그들의 어머니가 음행을 하였다. 그들을 배었던 여인이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그녀는 결혼을 했고 자녀를 낳았지만, 그것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꿈꾸는 자유로운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화려한 옷과 향수와 술 파티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신을 진짜 사랑해주고 채워주고 책임져줄 남자는 없었습니다. 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쾌락의 대상들이었을 뿐이죠. 결국 그녀는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호 2:7) 그가 정부들을 쫓아다녀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찾아다녀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이제는 발길을 돌려서 나의 남편에게로 돌아가야지. 나의 형편이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좋았다' 할 것이다."
호세아서가 말하는 정부(애인)는 무엇을 비유한 것인가? 우리의 삶을 채워줄 것이라 기대하는 하나님 외의 다른 요소들입니다. 풍삶초에서 4P로 대표되는 것들이죠.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을 찾아다니는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나를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헛된 시간과 물질을 쏟다가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예를 얻는 것에 매진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깨닫고 나면, 거기에 내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사는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유튜브만 찾아봐도 ‘인맥 관리’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 그것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조언하는 것들도 넘쳐납니다.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갖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삶은 끝없는 경쟁의 연속일 것입니다. 거기서 운 좋게 필사적으로 승리자가 될 수는 있겠으나, 주변에는 경쟁자와 적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외로움에 빠질 것입니다.
4P의 핵심인 돈. 그것이 내 인생을 책임져줄 것이라는 신앙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돈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음식은 먹다 보면 그만 먹어야겠다는 몸의 반응이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에 대한 욕심을 갖고 살면 말 그대로 끝이 없습니다. 저도 제법 다양한 수입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많이 가졌다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을 본 적은 정말로 못 본 것 같습니다. 항상 그 눈은 나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들을 향해 있으니까요. 아시겠지만 성경에서 돈과 하나님은 두 마리 토끼입니다. 돈을 좇다 보면 그만큼 하나님과는 멀어져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보통 그래서 돈에 욕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 놓쳐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그냥 인생의 어느 때고 붙잡기만 하면 되는 존재라면, 저는 편히 놀다가 말년에 하나님을 꼭 붙잡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니, 저부터 그것이 진리라고 여기면 그렇게 살면 되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어떤 존재를 만나서 더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인생에서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좋은 인생을 살았을텐데...” 물론 지금이라도 만났으니 다행이지만,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시간이 우리 행복의 풍성함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에서 봤을 때는 손해였습니다. 포도원이 하나님 나라에 비유되는데, 일찍 들어오나 늦게 들어오나 구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같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과 더 오랜 세월 그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것은 관계적으로 볼 때는 가장 귀한 것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깨어지고 망가졌던 그 삶이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되며 새로워지는 과정을 우선 거치는 것이죠. 그리고 회복된 그 삶에 이제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과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 안으로 돌아온다는 것에서만 보면, 예수님을 일찍 믿으나 늦게 믿으나, 일찍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나 한참 방황하고 회피하다가 느지막이 마지막 순종을 하는 것이나, 같아 보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한 지점과 그 안에서 회복되어가는 과정, 그 이후에 그분을 온전하게 닮아가며, 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경험하는 그 풍성한 삶의 측면에서 볼 때, 저는 깨닫고 조금이라도 일찍 돌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요구할까요? 거기에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늦게 누린다는 것은, 그전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삶을 살면서 더 많은 상처와 깨어짐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급성’은 ‘심판의 현재성’ 때문입니다. 깨어지고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 그 삶을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 충만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순간 구원이 시작되기에, 회심이 빠르고 회심한 이후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잘 따라가며 그분의 온전함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그 삶을 더 오래 그리고 더 깊이 누릴 수 있는 복된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제 삶을 통해서 영혼들이 회심하거나, 혹은 영적으로 회복되고 성장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것은 진짜로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에게 어떤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저는 증언자입니다. 저는 제가 누리고 제가 배운 것을 최선을 다해 소개하고 고백할 뿐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정말 힘이 세요. 그래서 그냥 제가 그것을 잘 소개해서 그것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변하고 회복되고 성장하기 시작해요. 저도 그것을 보면서 매번 놀라요. 복음은 정말 엄청난 것이네.
제가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제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저에게 주어진 1년의 시간에서도 제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면, 꽤 많은 사람의 영혼이 변해가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삶에 주어진 시간이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합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죠. 제게 주어진 삶의 길이는 하나님께 달린 일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고, 저도 좋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 한 영혼 한 영혼이 변화되는 것을 볼 때 정말로 기쁩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이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 저는 그 마음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이겨내요. 왜냐하면 나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목사로 살아가는 직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은 우리가 먼저 복음을 누리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그 삶입니다. 저는 목사는 언젠가 하나님이 그만하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여기까지구나.’ 그런데 복음을 전하여 영혼의 회심을 돕고, 성장케 하는 일은 제 생명이 붙어 있는 날까지 하고 싶어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저는 제가 누리는 그 복음으로 여러분을 초청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기로 결단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3. 하나님은 왜 화가 나셨는가?
호세아서는 잔뜩 화가 난 하나님에 대해서 보게 합니다. 적어도 예언자 호세아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격정적인 분노입니다. 진리가 분노하는 것은 2가지입니다. 우선 ‘진리’는 ‘비진리’에 대해 분노합니다. ‘사실’은 ‘거짓’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사람들이 비진리를 진리라고 여기고, 진리를 비진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분노하시는 것은 충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고 무지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호 4:1) 이스라엘 자손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주님께서 이 땅의 주민들과 변론하신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고 알고 따라올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있었는데, 여전히 이 백성이 하나님을 사실상 오해하고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한탄합니다.
저도 저를 처음 만난 사람이 저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괜찮아요. 모르니까요. 그런데 저와 신앙생활을 꽤 오래 해온 사람이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면, 마음이 아프죠.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런 마음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동체에 주신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고 뜻입니다.
(호 4:6)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네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버리니, 나도 너를 버려서 네가 다시는 나의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겠다. 네 하나님의 율법을 네가 마음에 두지 않으니, 나도 네 아들딸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
제사장에게 가르쳐 준 것을 버렸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이것은 신약의 관점에서 풀어보자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의 진리이고, 우리에게 주신 복음에 대한 무지입니다.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특별히 제사장도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제사장도 이익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4장 8절에 보면, 제사장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으면서 살고, 내 백성이 죄를 더 짓기를 바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이나 제사장이 똑같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장이나 예언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에서 어긋난 삶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호세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릇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을 치고 돌이키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나는 하나님을 잘 알아”라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인지도 몰라요. 이스라엘은 율법에 명시된 제사의식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이렇게 예배를 주일마다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잘 섬기고 있고, 잘 안다고 착각했습니다.
(호 8:12)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호 8:13) 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지금 하나님이 화가 나신 것은 저 교회 밖에 하나님을 아예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모를 수밖에 없죠. 호세아가 고멜의 태도에 대해서 화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화나는 것은 이방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충분히 역사 속에서도 경험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모인 우리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즉, 우리도 착각할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우리는 내 멋대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교정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호세아서는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호 6:3a)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알다’라는 단어가 중요해요. 히브리어 ‘야다’인데, 이것은 인격적인 앎, 곧 ‘사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참된 사귐’입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배운 앎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식에 경험과 고백이 동반된 앎입니다. 저는 이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입니다.
우리교회에 오시는 분 중에도 저를 유튜브로 먼저 보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도 저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저분이 사귐의교회 목사님인 것을 알아.” 경찰서에서 저에 대해서 조회하면 수많은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사귐’이 아니지요. 유튜브를 보고 멀리서 저를 아는 분이 저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저를 경험하면서, “목사님은 저에게 이런 분입니다.” 말할 수 있을 때 사귐이 생긴 것입니다.
지식적인 앎이 필요해요. 그것이 시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그 앎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를 성경을 통해 배워서 입술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지식적인 앎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삶의 고백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전능함을 의존해서 살아보면서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이 아닌 관계적 앎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다.” 머리로 이해했어요. 거기서 그치면 지식입니다. 그럼, 이제 진짜로 내 삶의 공허함을 채울 대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 내 안에 그분으로 인한 회복과 구원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전심으로 고백하게 될 때, 그것이 진짜 ‘앎’입니다.
호세아서에서 왜 이스라엘의 예배를 위선이라고 책망합니까? 형식적이고 의무적이고 습관적인 예배로 이 시간을 때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귐이 없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좋아요. 그런데 내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성경을 통해, 말씀을 통해 한 가지라도 정말로 알았다면, 그것이 ‘지식적인 앎’에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지식으로 끝나면 그것은 사실상 모르는 것입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머리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섬긴다고, 예배한다고 수없이 말하지만, 사실상 내 삶이 진짜 섬기고 추구하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에 있다면, 바로 그것이 거짓되고 위선 된 이스라엘의 예배입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영성으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알아야 관계가 시작됩니다. 지식 없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힘써 배워야 해요.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에서 멈춰서도 안 됩니다. 이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면, 우리도 얼마든지 실패한 이스라엘에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녹록하지 않아요. 우리의 삶은 우리가 깨달은 것을 실천해나가기에 정말 어려움이 많습니다. 정말 이 시대에 주를 섬긴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상황과 환경을 볼 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핑계가 되기도 너무 쉬워요. 사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을 추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워서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상황과 환경이 좋고 나쁘고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내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아는 만큼 그것을 내 몸으로 담아내어 주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삶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호세아서가 그토록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호세아서가 보여주는 하나님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포기할 마음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포기하지 않고, 그 악한 아들, 못된 아들을 찾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예배 안에서 어쩌면 이 중에 누군가의 마음을 그렇게 두드리고 계시고, 깨달았으면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다가, 이제 조금씩 주님을 향해서걸어오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 사람의 그 한걸음의 변화를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느 순간 조금씩 깨달은 그 하나님께 이제 나도 용기내어 나의 삶을 드리고자 고백할 때, 그 회심의 날에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처럼 기뻐하시고, 탕자였던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회심한 대부분의 성도님들. 주님을 붙들고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길을 잃은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멈춰 서 있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반쯤 뒤를 돌아선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주님은 그래서 오늘도 호세아의 목소리를 통해 다급하게 당신을 향해서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돌아서야 해.” 지쳐 있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나를 바라보고 다시 나아오렴.”
우리의 모습이 썩 아름답지 않아도, 주님은 당신을 원하십니다. 안아주시려고 기다리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주님께 나아갑시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깊은 그 사귐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