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믿음이란 무엇인가" / 강정규 목사

2022-07-24 · 히브리서 1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성경 66권에는 모두 ‘장르’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동화와 같은 이야기 형식입니다. 보통 역사서에 이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떤 것은 시와 같고 어떤 것은 격언 모음집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편지와 같은 형식의 글도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설교하다보면, 이런저런 장르의 책을 모두 만나게 되고, 설교자 또한 각 장르에 맞게 설교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역대기나 열왕기를 다룰 때는 거의 조선왕조 500년 대하드라마 다루듯이 다루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작가와 같은 마음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편지글이긴 하지만, 내용은 무척이나 교리적입니다. 교리적이라는 것은 신학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학자의 글과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편의 신학 논문이나 에세이 같은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설교와 같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이 책이 완전한 설교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면 히브리서는 ‘재미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현실적이고 실용적입니다.

저 또한 지난 세 편의 설교를 여러분에게 전함에 있어서 첫편은 사건의 재구성 방식으로 준비해서 히브리서의 전반적인 이해를 도모했고, 그후 두편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전하였습니다. 어차피 개념을 설명할 것이라면, 확실한 개념정리를 이 책을 통해 하는 편이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히브리서의 네 번째 설교이자 마지막 설교인데, 오늘의 설교 또한 신학적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히브리서 하면 쉽게 떠올리는 ‘믿음’에 대하여 정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며 고민하며 이 설교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저 제가 하는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를 갖고 오늘 말씀을 잘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감히 오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이 더이상 믿음이라는 개념을 흔들리지 않도록 해보고자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해야 믿음의 삶을 살든지 말든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분명 이 설교에서 전하는 내용을 여러분이 잘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깨닫고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믿음 공동체라고 말하기도 하고, 우리를 ‘신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자는 믿는 사람, 불신자는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럼 도대체 믿음이 뭡니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바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저같이 집요한 인간들은 꼭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무엇입니까?

일단 히브리서의 이 정의는 이렇습니다. ‘실상’이란 단어는 ‘실체’ 혹은 ‘확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체는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무엇을 의미하죠. 그리고 확신은 주관적으로 갖는 마음입니다. 이 두 단어를 통합하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의 정의가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곧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현실적인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우리에게 ‘실체’로 주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 11:2)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또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초월적이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엇의 실체가 믿음으로 확증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발휘한 결과입니다. 믿음을 발휘하면 그로 인해 보이지 않고 초월적인 일들이 확증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11:3부터 이어지는 믿음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의 목록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장에 나온 사람들에 대해서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한번 이 설교 이후에 읽어보십시오. 믿음의 모본들에 대한 이야기는 11장 3~31절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이런 식으로 믿음으로 살았던 인물들이 기록됩니다. 18번에 걸쳐서 ‘믿음으로’라는 표현이 문장 맨 앞에 등장합니다.

1) 창조에서 노아까지(3-7절).

2)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8-22절).

3) 모세에서 라합까지(23-31절).

그리고 32-38절까지는 부가적인 모본들에 대해서 다룹니다. 모두 믿음으로 고난을 헤치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에 따른 삶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속성입니다. 믿음은 살게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증거가 됩니다. 믿음은 항상 행동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구원이 실체로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을 발휘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초월적인 믿음은 현실로서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어렵죠? 어렵게 느끼시면 잘 듣고 계신 것입니다. 어렵게 쓰여 있으니까요.

그래서 조금 더 쉬운 개념으로 바꿔서 설명해보려 합니다.

히브리서의 첫 설교 때, 우리는 히브리서의 기록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 <박회심 형제>를 독자로 삼았습니다. 박회심 형제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회심을 하게 됩니다. 회심이란 마음을 바꾸는 것이죠. 바로 내 삶의 초점, 방향,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심을 다른 말로 거듭남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은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와 함께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내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회심은 그 결단입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이것을 가장 쉽게 설명한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일 것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유산을 상속 해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고 모욕입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챙긴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버지가 찾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살면 자유롭고 좋을 줄 알았으나, 그는 곧 자신의 것을 다 탕진하고,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삶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생존조차 위태롭게 된 것이죠.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곳에는 더 이상 아버지처럼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선대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가 굶주릴지라도 먹을 것 하나 따스하게 건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자신이 감히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저 아버지의 종으로라도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죠. 그것이 아버지를 떠나서 살아가는 삶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가 용기내어 아버지께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안아주시고, 그를 위해 잔치를 여시고, 그를 다시 아들로 삼고 사랑합니다.

사랑 많은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이 너무 커서 아들이 저지른 모든 잘못보다 그를 다시 만난 것에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는 우리가 회심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성경은 인간의 원래 자리가 ‘하나님 없는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이 없는 삶이 더 좋다고 여겨서 배신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상처를 두고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돌아온 자들을 다시 아들로 맞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 후의 이야기를 그의 제2의 인생이라면,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회심이 돌이킴이고, 그것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며, 그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단회적 사건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들이 정신을 못차리고 다시 예전 버릇이 도져서 아버지를 떠나게 되면 구원에서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간곡한 권면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이 주어지고 그 개념들을 종합하여 정리할 수 있지만, 성경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구원사건을 정확한 어떤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경험하는 구원의 사건을 여러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 부분에서 성경이 더 인위적이지 않기에 좋습니다. 획일화된 표현이라면 오히려 저는 인간이 각본을 썼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각자가 누리고 있는 구원의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전달하고 초청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은 이 구원의 삶을 ‘영생’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자칫 영생을 ‘영원무궁한 불로장생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여 살아가는 삶에 대한 표현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께 속하여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집안이 아니라 나라라고 표현하면, 아버지가 왕되심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주인된 삶이고,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즉, 탕자의 경우는 하나님 나라를 버리고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하나님 나라로 회심하여 돌아와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에게 주실 ‘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얻는 것이 우리가 누릴 최고의 상급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면류관은 하나님께 속하게 될 성도들입니다. 성경의 상급은 철저하게 ‘구원’에 대한 표현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어떤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하나님을 다시 누리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신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최근에 양육을 하면서 나눴던 질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럼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가? 은혜로 주어지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구원이라면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일까요, ‘은혜’일까요?

지난주 설교를 통해 다룬 것은 구원의 원리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싶지만, 우리가 세상의 죄에 물든 상태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해결을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는 속죄의 제사를 십자가에서 드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새언약’을 맺은 백성이 되어, 속죄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하시는 원리라면, 이것은 은혜로 이루어지나요? 믿음으로 이루어지나요? 정답은 둘 다 필요합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자,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은혜에 의하여(by grace) 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둘 중에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은혜 없이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구덩이에 빠져서 살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줄을 내밀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줄을 붙잡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게 온 은혜를 붙잡은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을 수반합니다. 내게 다가온 은혜를 붙잡은 것, 내게 다가온 은혜를 받아들인 것, 그것에 반응한 것이 믿음입니다.

자, 그런데 믿음에 행동이 수반되는데, 9절에 보면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구덩이에서 제가 구출된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로 인해 살게 된 다음에 내가 구원받은 근거를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누군가 내게 줄을 내려줘서 제가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 줄을 멋있게 잡았기에 산 거야”라고 내 행위를 자랑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잡긴 잡았죠. 그러나 그것이 나를 살게 한 것이 아니라, 내게 내밀어준 구원의 손길 때문에 내가 산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살려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구원의 과정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깨어진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깨어진 세상에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주인됨을 거부한 결과입니다. 그로인한 심판은 우리의 마땅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죠. 은혜는 값없이 주신 것, 내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 즉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정의를 이렇게 내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전인격적 반응이다.’

하나님의 진리, 즉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깨달으며, 그것을 사실로서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은혜가 없다면 믿음을 발휘할 기회도 없지만,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은혜에 대하여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것이고, 은혜가 내 앞에 왔어도 내가 붙잡지 않으면 나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로서 자신을 보여주셨고, 그 앞에서 우리가 반응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핵심은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오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게 믿는 것’, ‘간절히 믿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얼마나 ‘세게’ 믿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믿는 일에 세게 믿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진리는 그냥 진리로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런 예화를 말했잖아요. 만약 제가 음식을 잘못 먹고 속이 더부룩하고 배가 살살 아픈데, 소화제 대신 두통약을 먹으면서 이거 먹고 꼭 나을 것이라고 세게 믿으면 나을까요? 배가 아플 때는 그냥 소화제 잘 챙겨 먹으면 됩니다. 두통약 먹고 “믿씁니다~~!!” 하고 굳게 믿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바른 것을 바르게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한 2가지 특성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첫째, 믿음은 주어지지 않은 은혜를 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것을 내가 필요하다고 떼를 쓰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받아들이고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둘째, 모르는 대상이나 모르는 사실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 알지 못하는 신에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확실한 사실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복음의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모본들의 첫 구절도 그렇습니다.

(히 11:3)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믿음이 시작됐나요? 성경이 말해주는 사실에 근거한 반응으로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정확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성경이 말해주는 창조에 관한 진리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고 갔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간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에게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2: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모본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반응을 한 것입니다. 모르는 존재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어떤 추상적인 신에 대해 믿음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바를 열심히, 강하게, 믿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전인격적인 수긍’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에 반응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열심히 빌테니, 아무나 와서 내 기도를 들어달라는 것은 샤머니즘입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진리를 명확히 깨닫고, 내게 최선의 길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당시 최강대국인 이집트의 왕자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하고, 그로 인해 내가 누리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그가 누리는 지위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죄악의 즐거움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죄악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내가 당연하게 누려도 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되고, 그것이 나를 얽매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단호히 거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믿음의 행위는 그의 삶에 고난을 가져다 줍니다. 그럼에도 그가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이유는 그 길의 의미를 알고, 그 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에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작년이 개척 후 목회 5년차였는데, 작년에 제가 참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이렇게 목회하며 계속 살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을 보내며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이 몇가지 있었는데... 그것이 제 태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목회는 원래 힘든 것이구나. 앞으로 더 힘들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목회는 정말 소중한 것이구나. 앞으로 더 소중하게 여겨질수도 있겠구나’ 목회가 힘든 것은 변함이 없지만, 무엇을 위해 왜 힘든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방법임을 확실하게 깨달으면서 ‘목회의 힘듦’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힘들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을만한 담대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힘들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을 언제나 쫓아가야죠. 그만하라고 하면 멈추기도 하구요. 그래도 주님이 제게 원하시고 맡기신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쁘게 하고 싶습니다.

결국 히브리서가 전체 서신을 통해 히브리서를 받는 <박회심>과 같은 사랑하는 영적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겨내자’입니다. 내가 지금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은혜의 감격을 고백할 수 있어야만, 시험과 고난을 이겨내며 주님 편에서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장의 수많은 예시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진리에 기초한 믿음을 붙잡고, 현재의 삶에서 당면하는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 11:27)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현재의 삶에서 마주하는 시험과 고난을 견디어냈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사실 무고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구원은 순종으로 이루어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순종은 내 안에서 삶의 방향을 말씀해주시는 성령님에 대한 순종이지요.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아까 예화에서 구덩이에서 생명줄을 붙잡고 올라가는데, 중간에 나뭇가지가 나를 찌른다고 하여 그 줄을 놓겠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붙잡은 것이 무엇인줄 안다면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고난이 오더라도 절대 놓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우리가 가는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면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하여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헤치고 나아가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어쩌면 고난은 하나님의 편으로 증명되는 시간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반드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도 그 과정을 통해서 ‘나도 너와 함께하고 있다’ 말씀해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분은 신실하셔서 약속대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늘 은혜의 손을 내밀어주시며,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의 삶에 함께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이 표현이 참 좋았습니다.

(히 12: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회심한 이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이를 때까지 그 믿음의 경주를 우리는 해나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육상 경주에 자주 비유합니다. 육상 경기에서는 달리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장애(짐)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은 심플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경주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닙니다. 마라톤과 같은 긴 경주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위한 인내입니다. 올바른 길을 향하여 지치지 않고 달리면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에서 박수를 받는 것은 1등만이 아니죠? 그 경주를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려온 주자. 사람들은 그 마지막 주자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믿음의 경주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믿음의 경주를 바로 믿음장에서 언급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증인되어 지켜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 경주를 마친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경주를 다 하고 이렇게 승리한 것처럼, 너희들도 꼭 이겨내렴. 우리를 둘러싸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대신 해줄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함께하고 있음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서 함께 승리합시다.

흘러 떠내려 가지 마십시오. 신앙의 위기 앞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주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말씀의 진리를 굳게 잡고 믿음의 결단을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히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의 믿음은 가장 든든한 성경의 진리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서 있는 사람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러서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