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광야의 수업 시간표" / 강정규 목사

2022-06-26 · 사무엘상 21-3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오늘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도 익히 알다시피 우리는 매일성경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매일성경이 6년마다 성경을 일독하기에, 저희도 6년 동안 설교를 한다면 성경 전체를 설교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3년 반의 여정을 그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러므로 첫 6년은 모든 책을 처음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이번에 사무엘상을 다루며, 이 기회에 사무엘상을 정독하신 분들도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여정에서 설교의 초점은 여러분이 사무엘상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 각권의 흐름을 가급적 놓치지 않고 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톺아보기를 통해 사무엘상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다뤘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21~31장의 본문을 <광야학교>라는 제목으로 나눴습니다. 오늘은 21-31장의 광야학교를 멀리서 학교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광야학교의 수업이 어떤 것이었는지 광야의 여정을 시간표대로 분류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교시. 거짓말 (놉 / 가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도망치죠. 그는 ‘놉’ 지역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피합니다. 아히멜렉이 다윗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니,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서 도망중이라는 이야기를 숨기고, 사울의 비밀스러운 임무 수행 중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떡 다섯 덩이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음식을 요구한 것으로 절박한 다윗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내어줍니다. 엄밀히 말해서 다윗이 이것을 먹는 것은 제사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후에 마가복음에서 이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며, 율법보다도 생명이 우선임을 설명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급히 오다 보니 무기를 못 챙겨 왔다며, 무기를 빌릴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보관 중인 무기가 골리앗의 칼이었습니다.

(삼상 21:9) 제사장이 대답하였다. "그대가 엘라 골짜기에서 쳐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을, 보자기에 싸서 여기 에봇 뒤에 두었습니다. 여기에 이것 말고는 다른 칼이 없으니, 이 칼을 가지고 싶으면 가지십시오." 다윗이 말하였다. "그만한 것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것을 나에게 주십시오."

다윗은 무기가 없는 상태에 있다가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기뻐합니다. “그만한 것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표현이 뭔가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바로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칼을 주었을 때, 그것을 다윗이 다 내려놓고 나아가서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이랬던 다윗이 광야로 나가서 처음 한 일은 거짓말이요, 칼을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다윗에게서 드러나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상황에 함몰되어 그것에 집중하니, 이제는 눈에 보이는 칼이 더 든든한 것이죠. 그리고 잘못된 선택도 합니다.

(삼상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며’ 도망합니다. 그래서 간 곳이 어디입니까? 가드 왕 아기스입니다. 여러분, 가드. 이 지명을 기억하시나요? 블레셋의 성읍이고 무엇보다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골리앗의 칼을 차고 사울을 두려워하여 간 곳이 블레셋 가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알아보고 말합니다. “저 사람은 ‘사울을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의 주인공 다윗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윗이 듣고, 이번에는 블레셋 왕을 두려워하여, ‘미친 척’을 합니다. 머리를 성문에 찧고, 입에 거품을 물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린 것이죠. 다윗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했나 봐요. 아기스가 미친 녀석을 왜 데려왔냐며 내쫓습니다. 그 길로 다윗은 아둘람 굴로 도망합니다.

다윗의 거짓말, 그리고 거짓 연기. 그렇게 그는 상황과 현실 안에 함몰되어 살아갑니다. 그의 초점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그가 예상치 못한 엄청난 피바람을 불어 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지 못해 분노하고 있을 때, 그 옆에 에돔 사람 도엑이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운 사건을 사울에게 고합니다. 사울은 화가 잔뜩 나서,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불러서 그 사실을 추궁합니다. 그리고 도엑을 통해 아히멜렉과 제사장 85명을 죽입니다. 또한 제사장의 성읍인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모든 것을 다 죽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아말렉에 헤렘(진멸)을 명하셨을 때는 하지 않고, 이스라엘 제사장 마을에 ‘헤렘’을 실행한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분노가 무자비한 살상으로 잘못 튄 것입니다.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만 간신히 도망하여 다윗에게 피신합니다. 아마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다윗은 자책을 하며 많은 것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는 아비아달을 보호해주고, 바로 이 아비아달이 후에 다윗을 도와주는 제사장이 됩니다. 사울이 제사장에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제사장 그룹과 사울은 완전한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제사장 중 남은 사람들은 이 일로 사울을 지지하지 않고, 다윗을 따르게 됩니다.

2교시. 리더십 (아둘람 공동체)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에서 엄청난 연기력으로 도망하여 유다 남부지역의 아둘람 굴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다윗의 가족 모두가 도망하여 옵니다. 이것은 사울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부랑자들, 인생의 낙오자들이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사울의 통치에 문제가 있다는 암시이죠. 사울은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었고, 그 피라미드 구조에 계층이 생깁니다. 구약학자 ‘부르그만’은 사울의 지지계층과 다윗의 지지계층은 사회학적으로 완전히 달랐는데, 사울의 지지층은 주류 시민이었고, 다윗의 지지 계층은 소외계층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들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우두머리’가 됩니다. 현실은 자신의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늘 내 신앙하나 감당하기 버거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돌보게 하시는 사람들을 맡기실 때도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훈련이죠.

우선 다윗은 가족들을 모압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럼 우리는 왜 다윗이 모압으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학자들은 다윗과 모압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주목합니다. 다윗의 증조모가 룻이죠. 모압 출신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모압의 친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맡기는 것까지는 허락하시지만, 다윗이 그곳에 머무는 것은 막으십니다. 다윗의 수업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갓 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유다로 오도록 명령하십니다. 이 의미는 거기서 안전을 찾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리는 23장에 가면 600명으로 늘어나 있습니다. 다윗은 이들을 이끌고 10년이 넘는 광야의 여정을 함께 합니다. 광야 이야기 마지막 쯤이 되었을 때 다윗은 꽤나 성장해 있었습니다. 다윗 무리의 본거지 시글락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약탈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 등이 모두 적군에게 끌려갑니다. 이때 다윗의 부하들이 슬픔에 빠져 다윗에게 책임을 물으며 죽이려고 하는 일도 있습니다.

아마 그런 일이 다윗의 광야 초반에 있었으면 다윗은 확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광야의 훈련은 그의 초점을 여호와께로 더 향하게 하였죠.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아말렉을 기습하여 승리하고, 약탈당한 여인과 물건들을 모두 되찾게 됩니다. 이 전투에는 다윗의 무리 600명 중에서 400명만이 참여합니다. 200명은 지쳐서 낙오한 것이죠. 다윗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줍니다.

(삼상 30:22) 그러나 다윗과 함께 출전하였던 군인들 가운데서 악하고 야비한 사람들은, 거기에 남아 있던 이들이 못마땅하여, 자기들과 함께 출전하지 않았던 군인들에게는 되찾은 물건을 하나도 돌려 주지 말고, 다만 각자의 아내와 자식들만 데리고 가게 하자고 우겼다.

(삼상 30:23)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달랬다. “동지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쳐들어온 습격자들을 우리의 손에 넘겨 주셨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오.”

다윗의 무리는 악한 자와 불량배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본성은 연대성보다는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세상도 내가 취한 것은 나의 것이라 여기는 태도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혹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주인이 다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이런 상처 많은 사람들, 깨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면서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력에 대한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결코 꽃길을 걸어서 왕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야생에서 피어났고, 품기 어려운 사람들을 품어가며 그는 리더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신정 안에서의 리더십.

3교시. 배신 (유다 지역)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압에 있는 다윗을 하나님은 유다로 돌아오게 합니다. 다시 훈련의 자리로 데려오신 것이었죠. 그때 블레셋이 ‘그일라’ 지역을 쳐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때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이것은 도피 여정에서 다윗이 처음 하나님께 묻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그일라로 출격하여 블레셋 족속을 물리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이 반대합니다. 유다에서 사울의 눈에 띄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도 가슴 졸이는데, 블레셋과 싸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일라로 가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나아가서 그일라 주민을 구합니다.

하지만 부하들의 걱정대로 사울은 이 소식을 듣습니다. 우려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 자를 나의 손에 넘겨 주셨다.”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는 것은 경건치 못한 사람의 특기입니다. 사울의 출동을 알게 된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 뜻을 묻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듣게 된 내용은 그일라 주민이 사울에게 자신을 넘기리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죠.

다윗은 그일라의 어려움을 도왔지만, 그일라 주민들은 다윗을 배신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다윗은 급히 600명의 부하를 데리고 ‘십 광야’로 피신합니다. 하지만 십 사람 중에서도 몇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이 왔음을 밀고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마온 광야로 도망합니다.

하지만 결국 궁지에 몰려 다윗은 사울에게 포위당하게 됩니다. 그때 사울에게 갑자기 한 가지 소식이 날아듭니다. 블레셋 족속이 쳐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다 잡은 다윗을 포기하고 블레셋 족속과 싸우러 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사해 근처 ‘엔게디’로 피신합니다.

다윗은 유다 이곳저곳을 피신하여 도망했습니다.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경험합니다. 사람을 믿을 수 없음을 그는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그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다윗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안전은 그분께 있습니다. 그 오랜 기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쫓기는 데도 안전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입니다. 홀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위에 600명이 함께 있었는데 모두 지키고 공급하셨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고 나아간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그분의 임재. 그것이 중요합니다.

4교시. 원수 갚음 (엔게디 / 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돌아온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음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정예부대 3,000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러 갑니다. 엔게디에는 굴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곳 중 한 곳에 사울이 볼일을 보려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필 사울이 들어간 굴은 다윗이 숨어있는 굴이었습니다. 우리도 경험하지만 밝은 곳에서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시야가 안보이죠. 반면 어두운 곳에 적응해 있는 사람들은 잘 보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지 못하고, 다윗의 무리는 사울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삼상 24:4) 다윗의 부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드디어 주님께서 대장님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날이 왔습니다. '내가 너의 원수를 너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니, 네가 마음대로 그를 처치하여라' 하신 바로 그 날이 되었습니다."

아까 사울도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상황이 유리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다윗에게 이런 약속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신하의 조언을 따르면 다윗은 사울을 죽여야 하지만, 다윗은 몰래 사울의 겉옷 자락 일부만을 자릅니다.

겉 옷자락을 자른 다윗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3가지 정도로 의견이 나뉩니다.

1)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 왕권 찬탈의 의도가 아님을 증명

2) 사울을 죽이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 : 왕의 겉옷 자락을 벤 것 (왕권 상징)

3) 사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드러난 것 : 다윗의 내적 갈등과 고민

세 가지 의견이 모두 가능성이 있는데, 세 번째 부분이 성경의 흐름으로는 가장 유력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때문인데요.

(삼상 24:5) 다윗은 자기가 사울의 겉옷자락만을 자른 것 뿐인데도 곧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되었다.

다윗의 마음에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는 표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다윗의 인구조사 후 느낀 감정의 표현과 같습니다. 즉 그의 안에 내적 갈등과 고민이 있었고, 그것을 일부 자기 뜻대로 행하였다가 양심에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그만큼 이 순간 다윗에게 깊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0년이 넘는 도피 생활. 사울만 죽이면 더이상 자신을 쫓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매번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을 죽일 기회에서 다윗이 갈등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그 상황에서 옷자락을 자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좋지 않은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느꼈는지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다윗이 그만큼 내적인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 가운데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시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임마누엘 칸트 : 양심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늘에 별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것.

여러분. 양심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셔야 해요. 하나님은 양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묵상은 성찰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민해보고 내 삶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목표를 왕이 되는 것으로만 삼았다면, 그는 무조건 사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표를 이루는 과정의 중요성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방법과 과정이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쩌면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과정과 방법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26장의 ‘십 광야’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반복됩니다. 두 이야기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장소 : 엔게디 광야 / 십 광야

다윗의 위치 : 사울이 들어간 굴 / 사울의 진영

사울의 상태 : 홀로 있었음 / 부하들과 함께

증거물 : 사울의 옷자락 / 사울의 창과 물병

알리는 방식 : 굴 밖에서 사울에게 / 멀리서 아브넬과 부하들에게 소리침

이번에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을 알고 사울의 진 친 곳에 침투합니다. 이때도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사울은 자고 있었죠. 그러나 다윗은 이때도 가만히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나옵니다.

24장과 26장에 기록된 이 이야기에서 다윗은 조금이지만 더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24장에서는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옷자락을 자르지만, 26장에서는 신하들이 죽이자고 할 때, 처음부터 거부합니다. 24장에서는 사울을 악한 사람으로 비유하며 이야기했다면, 시종일관 사울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내 주’라는 표현이 3번이나 나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으로 성장해가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종인 사울을 자기가 죽인다면, 그것은 자기의 기분대로 행하는 것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임을 알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사울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위해서 그는 자신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는 믿기 때문입니다.

절호의 기회 앞에서 그는 함부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능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까지 용서하고 포용하는 모습으로 다윗은 성숙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5교시. 하나님의 막으심 (마온 / 블레셋)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두 번의 이야기 사이에 바란 광야 ‘마온’에서의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배치라고 보입니다. 사울 이야기 사이에 등장하는 다윗의 상대는 ‘나발’입니다. 이름의 뜻 ‘어리석음’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원래 이름은 아니라, 이 사건과 관련하여 붙여진 별칭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특이점은 그의 이름이 소개되기도 전에 그의 ‘재산’에 대한 소개가 더 먼저 나오는 것은 그만큼 부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나발의 가축 떼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었기에, 양털 깎는 축제의 날 다윗은 나발에게 종들을 보냅니다. 재산을 보호해 준 것에 대한 답례의 선물을 받기 위함입니다. 다윗이 소년 10명을 보낸 이유는 그 정도의 선물을 받을 것을 기대한 것이죠. 다윗 무리의 주업이 ‘용병’과 같았기 때문에 이것은 무리한 요구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시종일관 모욕적인 언어도 다윗과 그의 무리들을 욕보이고 비하합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에서 죽이지 않은 2개의 이야기 중간에 나발의 이야기가 있는 것은 의도적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사실상 성경은 나발을 ‘사울과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5:36은 나발이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열었다고 표현합니다.

다윗의 트라우마는 사울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울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이기에 참았지만, 나발에 대해서도 다윗이 참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 다윗은 나발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응징하러 나섭니다. 이는 다윗 또한 사울처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대로 행하는 모습이 사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상대방을 죽일 힘이 있는 상황, 즉, 다윗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엇나갈 위기에서 경고하시죠. 사울에게도 그러했던 것처럼, 다윗에게는 ‘아비가일’이라는 나발의 부인을 통해 깨닫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필요에 맞는 것을 지혜롭게 준비하여 다윗에게 찾아가고, 분노한 다윗을 말립니다.

(삼상 25:26) 장군께서 사람을 죽이시거나 몸소 원수를 갚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도 살아 계시고, 장군께서도 살아 계십니다. 장군님의 원수들과 장군께 해를 끼치려고 하는 자들이 모두 나발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삼상 25: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그대를 보내어 이렇게 만나게 하여 주셨으니, 주님께 찬양을 드리오.”

다행히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들으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습니다.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멈추지 않았더라면, 이 사건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아비가일은 나발에게 다윗과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나발은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죠.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 두 번째 살려준 후, 다윗은 무리를 이끌고 블레셋 땅으로 향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간적으로 영리한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있으면 끊임없이 사울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쫓아오기 때문입니다. 아예 다른 나라의 영토로 들어가서 사울의 추적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다윗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대적인 블레셋에서 안전을 찾으려고 한 것이죠. 그러나 다윗의 이 선택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있어서 크나큰 위기를 만들게 됩니다.

다윗은 블레셋에서 1년 4개월 동안. 블레셋 왕 아기스의 봉신으로 생활합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요구하여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받아 거주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 전쟁에 블레셋의 장수로 참여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윗이 이것을 거부할 수 없죠. 거부하면 배신 아닙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아기스의 편에서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상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다른 지도자들은 전쟁에 나선 다윗을 알아보고 아기스에게 그를 제외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전쟁 중에 다윗이 반역할 것을 걱정한 것이죠.

그러므로 아기스는 무척 아쉬워하고, 미안해하며 다윗을 전쟁에서 배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기묘합니다. 만약 이때 블레셋의 다른 지도자들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블레셋 측 장수로서 이스라엘과 싸우게 되는 것이었기에, 그렇다면 다윗이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스스로 이 일을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것의 참된 의미를 다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다윗을 위기로부터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마터면 동족들과 싸울 뻔한 위기를 넘긴 것이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러 차례 확신을 주셨음에도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간 것은 다윗의 한계이고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위기의 순간에 다윗을 지키시고 위기의 상황을 모면케 하십니다.

6교시. 반면교사 (사울)

사무엘이 죽은 후 사울은 무당과 같은 사람들을 이스라엘에서 쫓아냅니다. 이제 그런 영적인 것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태도와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고,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두려움을 느낀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고자 하지만, 어떠한 대답도 그에게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울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신하들에게 명하여 신접한 여인(무당)을 찾습니다. 엔돌 지역에 죽은 자를 불러올리는 무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울은 황급히 변장하고 그리로 직접 갑니다. 사울은 그 무당에게 죽은 자를 불러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여인은 거절합니다. “사울이 이 나라에서 무당과 박수를 모조리 잡아 죽인 것을 알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 그런 일을 시켜 죽게 하려고 합니까?”

이때 변장한 사울이 여인에게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삼상 28:10)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걸고 그 여인에게 맹세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당신이 이 일로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을 것이오."

뭐, 맹세할 것이 있나요? 자기가 사울인데. 그리고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을 잘 보시면, 신접한 여인이 어떤 의식을 하기 전에 사무엘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이 나타나게 된 것은 신접한 여인의 주문과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올리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사무엘서 초반 한나의 기도 가운데 나타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음부에서 올리기도 하신다는 고백이죠.

(삼상 28:13) 왕이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땅 속에서 영이 올라온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인은 ‘영’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영’에 사용한 단어가 ‘엘로힘’입니다. ‘신’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사무엘의 혼을 어떤 신적인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죠. 그런데 죽은 혼을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은 이곳뿐입니다. 이것은 신접한 여인도 처음 경험해보는 현상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올 수 있느냐? 이런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신 사건입니다. 사무엘이 나타나서 사울을 꾸짖습니다. 사울의 실패 원인은 주님께 순종하지 아니한 것에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며, 그의 왕권이 넘어간 것과 죽음에 대해서 예고합니다.

이때 사울의 반응은 망연자실하여 포기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울이 하나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따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느 것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는 없거든요. 그러나 사울의 마지막 모습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의 뉘우침이 사무엘상에 없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 때,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듣고 뉘우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회개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메시지 성경을 쓴 유진 피터슨은 사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울의 모습은 감성에 빠져 있는 영성일 뿐이다. 행동의 변화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가 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그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어떤 깊은 마음의 요동함을 느꼈다고 해도 회개는 아닙니다. 행동의 변화가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패하게 됩니다. 사울은 후퇴하다가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끝내 사울의 삶은 하나님 중심된 삶으로 오지 못한채 끝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상은 사울의 죽음으로 끝나며 마치는데, 이 대서사의 마지막 한 컷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찾아와 장사를 치러주는 장면입니다. 왜 이 장면으로 사무엘상이 끝날까요? 바로 사울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을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사람들의 인정은 얻지 못하였던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때, 사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 승리를 거두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그 사울. 사무엘상은 그 사울의 모습을 회상하도록 만들며, 우리에게 그의 마지막 모습과 대비하여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을 마무리합니다.

거짓말, 리더십, 배신, 원수 갚음, 하나님의 막으심, 반면교사. 오늘 우리가 정리한 6가지 광야 수업의 주제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훈련받고 계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어쩌면 다윗이 경험하지 않는 또 다른 수업이 우리에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 맞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사무엘상을 묵상하며, 다윗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다윗은 왕이 되고 싶어했을까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가는 과정은 개인의 권력욕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해가는 그 사명의 자리를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윗도 그것을 이해하고 묵묵히 나아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구원을 결혼의 과정으로 비유한다면, 회심하여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아가는 것,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구원의 시작점이며, 이것이 결혼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식하고 다음날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고 결혼생활을 꿈꾸며 결혼식을 하는 것처럼, 구원은 우리 삶의 끝에 놓여야 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충만하게 누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고, 아직 하나님을 몰라서 헤매이고, 깨어진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시기에...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일컫는 교회와 성도가 그 일에 함께 동참함을 통하여 주님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동행하며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요.

우리가 결혼한 이후로도 함께하는 시간들 속에서 성숙하고 깊어지듯이, 저는 신앙의 여정이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며 더욱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그리고 그 안에서 나도 사랑받으며 회복되어가는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야학교. 팸예배 나눔 가운데 이것에 대해 나누며 제 안에 이런 마음이 생겨서 나눴습니다. 저는 광야학교를 졸업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그 어떤 평안함보다 하나님이 계시는 광야학교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더 소중함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저 저의 바람이 있다면, 광야학교 안에서 조금 더 성숙함을 배워서, 그 하나님의 시간들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되고, 누군가를 도와서 함께 잘 통과해나가도록 조금은 끌어주고 밀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도종환 시인의 시집 가운데, ‘담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저는 이것이 교회라고 새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를 찌르는 아픔, 그 공허함과 절망의 벽을 넘어, 소망의 나라로 나아가라고 부르신 교회, 그리고 성도들입니다.

나의 고백을 넘어 너의 고백, 나의 복음을 넘어 너의 복음, 나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가족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