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금요기도회 설교

2025-06-20 · 마태복음 5장 17~20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오늘은 금요일마다 진행하고 있는 마태복음 시리즈 일곱 번째 설교입니다.

저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교회 세우기는 곧 사람 세우기입니다. 사람을 세워간다는 것은 복음으로 한 사람의 회심을 돕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 안에서 방향을 잡아주며, 함께 그것을 살아내도록 목양하고, 그 결과 말씀과 성령으로 자라가는 사람들의 모임, 즉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이 공동체가 깨어진 세상을 충만하게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이 되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 가는 것이 성경의 비전입니다.

저는 이것보다 명확한 성경의 비전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고, 제가 하나님의 꿈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사람을 세워가는 것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목사’가 나오는 유일한 본문은 에베소서 4장 1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비전을 위해서 목사를 세우셨다는 구절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원어로 ‘목자 즉 교사’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목회자의 역할과 정체성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목자(목양자)여야 하고, 교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사역 정체성을 절반은 ‘성경 교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성경 교사’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기도 하고, 그를 통해 여러분이 말씀을 깨닫고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 제가 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배워서 남 주는 인생이 저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고, 제가 배우는 이유는 저의 배움으로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살펴볼 부분은 설교자의 신학적 해설과 함께 배워야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5:17-20까지를 성경 공부하듯 잘 분석하여 우리 안에 말씀의 깊이를 더해보고 싶습니다.

저도 제법 오랜 시간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는데, 단골 질문이 하나 있다면, 구약과 신약의 온도 차이나 연결성에 관한 것입니다. 신약을 통해 배우는 것은 실제적이고 지금의 교회 분위기와도 잘 맞는데, 구약을 통해 배우는 것은 너무 상징적이거나 모호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구약에 수없이 나오는 ‘율법’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너 왜 이렇게 율법적이야?” 이 말이 의미하듯이 율법은 우리에게는 부정적이거나, 지금 시대의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와 교회에서는 마치 구약 무용론 같은 입장까지 나오기도 합니다. 설교도 신약에만 집중해서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구약은 그냥 참고 자료, 부교재 정도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율법이 그렇게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면, 우리에게 구약은 매우 두껍고 의미 없는 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은 구약의 터 위에서만 온전히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구약을 놓치면 우리의 신앙은 균형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는 신약이라는 개념이 없었죠. 오직 구약의 가르침만 존재하고 있었고, 구약의 신학적 토대 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모든 유대인들의 성경 이해와 신앙생활을 뒤집고 개혁하려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약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이단아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방향성은 사람들의 생각과 매우 달랐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실제로 구약이 율법서와 선지서로 이뤄졌으니까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예수님이 구약의 전통을 모두 폐하러 온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뭐라고 말합니까?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하게 하다’에 사용된 단어는 ‘플레로’ 동사인데, ‘가득 채우다’라는 뜻입니다. 가득 채워서 더 이상 채울 것이 없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즉, 율법이 요구하고 바라보던 일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하게 채워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이 목표했던 그 목표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하게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취된 것이죠.

“율법을 성취했다.” 우리는 이 표현이 잘 와닿지 않습니다. 예언을 성취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율법을 성취했다니요. 그런데 성경은 참 놀라운 책이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시죠.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했다고 표현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라고 적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렇게 적으면 선지자가 예언한 것으로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부러 순서를 바꿔서 율법의 예언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이 예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반적으로 ‘율법’(토라)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이 안에는 단지 계명과 규례만 있는 것이 아니죠.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약속, 메시아에 대한 예표들이 담겨있습니다. 즉, 율법은 행동 지침서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가리키는 예언적 책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율법도 예언자처럼 ‘장치 오실 그리스도’, 그분에 의해 주어질 ‘하나님 나라’를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모든 성경은 나를 가리켜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예수님은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그것을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구약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마지막 인물을 ‘세례 요한’으로 봅니다. 요한의 마지막 예언이 무엇입니까? “내 뒤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세례 요한까지는 '예언의 시대'였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끊임없이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기다림'의 시대는 끝났고, '이루어짐'의 시대, 곧 성취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구약의 모든 약속은 다시 의미가 생기고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말씀, 지나간 말씀이 아니라, 그 모든 의미가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해석은 놀랍게도 신약에 의해서 살아납니다. 이제 구약은 성취의 관점에서 읽혀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한 그 모든 것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약의 신앙과 신학, 말씀의 요구 등을 뒤집어 없애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성취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성취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어서 보시죠.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새한글) 아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까지는 점 하나, 획 하나도 율법에서 사라지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요.

새한글성경이 더 원어의 어순에 맞는 번역입니다. 율법의 점 하나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죠. 언제까지요?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때까지 율법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하늘과 땅이 사라지면, 그때는 율법도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우선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강조 어구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는 의미와 유사합니다.

강조 어구로 보자면, 결국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결단코 율법의 작은 것 하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기한의 한계인 ‘모든 것’은 무엇을 지칭할까요? ‘율법’은 단수이므로 ‘율법과 선지자’를 동시에 지칭한다고 봐야 합니다. 즉 구약성경 전체가 성취될 때까지는 율법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구약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메시아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약의 모든 예언의 성취입니다. 성취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온전한 완성은 재림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구약에서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회복되기 시작했으니, 그 성취가 시작된 것이죠. 그러나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성취의 과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취가 멈추거나 실패하지는 않습니다. 이 성취의 주권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취의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이제 ‘율법’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율법의 권위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율법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니 권위가 흔들릴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은 권위를 갖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성취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율법은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율법의 완성이 예수님이고, 율법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성취하셨으므로 율법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권위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경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전까지는 ‘율법’이라고 표현했다가 여기에는 ‘계명’이라고 바꾸어 표현하십니다. 성경은 섬세하죠. 이는 과거의 율법이 성취자 예수님에 의해서 재해석되어야 하고, 그렇게 재해석되어 주어진 새로운 명령을 지칭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고,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대보다 그것을 더 원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온전케 하십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메시아의 율법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의 성취에 비추어 새롭게 재해석해야 합니다. 십계명까지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성취된 율법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버리는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양용의 교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 것은 못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작은 자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사람의 전제는 계명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말씀도 무시하고, 말씀을 우리 가운데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일하심도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할 수는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여기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율법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서 경고하며, 율법과 예수님의 관계를 바르게 밝혀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0절을 말씀하십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더욱 좌절하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새한글로 이 말씀을 읽어볼게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것보다 더 넘어서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재림 이후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바리새인의 의가 좀 작아야, 우리가 그 허들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죠. 당시 예수님의 시대 청중들에게 가장 큰 의를 가진 무리를 꼽자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바리새인’은 의인의 대표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자들로 여겨졌고, 그들과 가장 반대 쪽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심판의 1순위로 꼽혔던 사람들이 ‘세리와 창녀’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을 잘 지키고자 만들었던 기준에 의한 것이었죠. 율법에서 이들이 실천하려고 애썼던 것에는 할례와 음식법과 안식일법 등이 있었습니다. 할례는 당연히 행했고, 음식도 가려 먹었습니다. 음식은 기준이 비교적 명확히 제시되어 있으니 그렇게 실천하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율법의 기준대로 살고 싶었으나, 가장 해석이 어려웠던 것이 ‘안식일법’이었습니다. 안식일 법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것을 온전히 지키려면 무엇을 우선 규정해야 합니까? ‘일’이죠. 일을 규정해야 안식일에 일을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들은 39가지로 일의 종류를 규정합니다. (밭을 가는 것, 씨를 뿌리는 것, 불을 때는 것, 밥을 짓는 것, 사냥하는 것, 가죽을 벗기는 것, 털을 깎는 것, 천을 짜는 것, 염색하는 것, 세탁하는 것, 장사하는 것, 물건을 내가는 것, 여행하는 것, 글 쓰는 것 등)

그런데 여행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디까지가 여행일까요? 제가 이렇게 세 발짝 가면 이건 여행일까요, 아닐까요? 어차피 안 지키려는 사람은 관심이 없지만, 율법의 일점일획도 잘 지키고 싶은 사람은 고민이 듭니다. 그래서 이것도 결정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모여서 결정합니다. 2000규빗까지는 괜찮고 그 이상은 안 된다. 2000규빗이면 900미터입니다. 저희 집이 교회에서 1100미터입니다. 저는 안식일에 교회에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밥을 먹는 곳이 거주지로 봅니다. 그러다 보니 멀리 부득이 가야 하는 사람들은 안식일 전날에 900미터쯤 되는 나무 밑에 미리 음식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900미터를 가서 거기서 밥을 먹으면 거기가 집이므로 리셋입니다. 다시 900미터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인간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렇게 우리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에도 제가 경건한 사람들일수록 지키려고 했던 것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는 돈을 안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버스도 안 타고 교회를 걸어 다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많이 걸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대 유대인들의 경건 생활을 보시면서,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시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안식일이 ‘쉼’이 아니라 ‘짐’이 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율법이 ‘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짐에 억눌려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애초에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쉼’을 주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죠. 여기서 쉼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휴대폰을 꺼두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충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캠핑을 많이 갑니다. 저는 주말이 가장 바쁜 사람이니까 캠핑을 못가다가, 그때 누구를 따라서 잠깐 주일 오후에 캠핑장을 가봤어요. 물론 신선하고 재미도 있었는데,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세팅을 1시간 넘게 하고, 30분 앉아있다가, 다시 음식 준비를 1시간 동안 해서 먹고, 30분 앉아있다가 설거지를 하고, 다시 1시간 정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쉼인가? 힐링인가? 저는 캠핑을 잘 모르고 그 맛을 모르니, 그냥 밖에서 추운데 고생하다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그 고생이 쉼이고, 힐링이고, 재충전이죠.

사실 하나님이 안식일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을 통해서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것을 채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에 집에서 늦잠 자면 더 육체적으로 쉼이 되죠. 교회에 오려면 얼마나 귀찮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봉사도 하고 사역도 하고 운동도 같이 하고 밤늦게 들어갔는데, 그게 더 채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 가운데 시간을 보냈는지가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빠진 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행위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율법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나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런 것은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캠핑을 왔는데, 함께 온 사람들과의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뭔가를 짓고 만들고 완성하는 것에만 빠져서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과 같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에 지나친 열심을 낸 나머지, 율법이 예언하고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관계’에는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예언하는 예수님이 와도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의 모든 행위는 실상 자신들을 위한 ‘의’였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나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심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제자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커야 한다는 말은, ‘관계’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의와 바리새인의 의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만큼 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관계’가 있으면 ‘행위’는 없어도 된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어디에도 누구도 이야기 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거부했지만, 의의 행위는 매우 강조하여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그분의 통치안에 있으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의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단, 제자들의 행위는 자신의 노력에 의한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은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서 그리스도 통치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크나큰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기대되는 의는 하나님의 통치, 은혜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려 했습니다. 그것을 외식하는 행위라고 말하죠.

그러나 제자에게 나타나는 선한 행동은 자기의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말고, 칭찬받으려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한 제자의 의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회심한 후,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내게 전에 없었던 마음이 시작되고, 그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내 삶에 어떤 새로운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것이 내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의를 잘 이해하십시오. 그것은 나의 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나를 높이거나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직 내 안에 새로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그것이 참된 제자의 의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왜 제자의 멍에가 더 쉽고 가볍다고 말합니까? 그 해답은 28절,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의 의는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만 가능한 행위인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그런 의였다면, 제자의 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겠다는 일에 따른 결과입니다. 나를 통해 나오지만, 내가 주권을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의는 하나님 나라의 결과이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현재적 통치의 결과이자, 미래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 중심적 삶을 사십시오.

구약은 예수님을 기다렸고, 신약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십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일이 예수님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묻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예수님이 원하는 곳을 향해 나도 함께 서고, 그분을 따라서 함께 걷기 위한 고민을 하십시오.

(2)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순종의 삶을 사십시오.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을 위한 순종’이었지만, 제자의 의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순종’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말씀을 통해 듣는 하나님의 음성, 기도를 통해 주님과 나누는 마음… 이 관계가 순종의 출발점입니다. 말씀을 단지 의무로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을 향한 신뢰의 표현으로 순종하십시오. 그때 우리의 행위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의 열매가 됩니다.

(3)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참된 의를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의 ‘의’는 내가 만드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나타나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의를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일을 사모하고 그 비전에 동참하십시오. 교회와 가정, 직장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나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 통로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 열매를 볼 때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십시오. 그것이 참된 제자의 의입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삶. 그것이 곧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삶. 그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내 육신의 본성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우리 이 기도의 시간,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가 바라보며 그분께 피하여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