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예수, 우리의 복음

2026-05-24 · 마태복음 1장 21~23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신앙의 기초를 세워가는 11번째 설교입니다. 우리는 이 시리즈를 통해 죄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함께 다뤄왔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와 심판 가운데 놓인 인간을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확인하고 있는 것은, 성경은 결국 하나의 큰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원 프로젝트의 중심이신 예수님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인카네이션(Incarnation), 성육신에 관한 이야기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갑니다. 죄가 하나님을 떠나버린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의미한다면, 심판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 방치하지 않으셨고, 심판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심판의 문제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님과 함께하는 회복을 위한 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창세기에서 죄가 시작된 후 곧바로 나타났습니다.

창세기부터 하나님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 시대의 방식으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옛 언약의 시대라고 표현한 ‘구약 시대’에도 늘 하나님은 그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일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살아갔습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이 자신을 살려줄 수 있는 것처럼 붙들고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링반데룽’하며 살아갑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붙들다가 무너집니다.

제가 구약을 정리하면서 한마디로 표현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해볼 만큼 해봤잖아. 이래도 모르겠어?” 어떻게 보면 구약은 하나님 없이 살아보려 했던 인간의 긴 실패의 역사입니다. 지난주 설교와 연결해서 표현해 보자면, 구약은 탕자의 비유 속 둘째 아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붙듭니다. 그리고 결국 무너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더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떠난 사람에게만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굉장히 중요하게 반복해서 다루는 것은 ‘착각’의 문제입니다.

신앙기초 세 번째 설교였던 ‘하잘알’을 기억하십니까?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만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편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다루십니다. 왜입니까? 요나 역시 하나님의 마음과 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탕자의 비유로 표현하자면, 요나는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습니다. 집 안에 있습니다. 떠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의 마음은 모릅니다. 아버지의 기쁨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도 모릅니다. 가까이 있는데 가장 멀리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둘째 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놓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우상숭배에 빠졌던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첫째 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믿는 것 같은데,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 종교는 있는데 연결은 잃어버린 사람.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 둘째 아들도 필요했습니다. 첫째 아들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들 모두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 신약은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복음. 신약의 용어로는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마태복음’은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성경을 보면 ‘마태복음’은 ‘카타 마타이온(Κατὰ Ματθαῖο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영어의 ‘according to Matthew’입니다. 한글로는 ‘마태에 따르면’,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이라는 의미입니다.

마가복음은 ‘카타 마르콘(Κατὰ Μᾶρκον)’, 누가복음은 ‘카타 루칸(Κατὰ Λουκᾶν)’, 요한복음은 ‘카타 이오안넨(Κατὰ Ἰωάννην)’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것을 ‘마태의 복음’, ‘마가의 복음’, ‘누가의 복음’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증언하고 싶은 복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가 기록한 복음이신 예수. 마가가 기록한 복음이신 예수. 누가가 기록한 복음이신 예수. 요한이 기록한 복음이신 예수. 복음서가 말하려는 중심은 결국 예수님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뜻이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 그가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들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이 일과 관련이 있게 된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전혀 그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변을 보십시오. 2000년 전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여, 모두가 심판에서 벗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심판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회복의 방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으니, 너도 그만 심판 가운데 살고, 어서 와서 구원의 삶을 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단절이라는 표현으로 죄와 심판을 설명했으니, 연결이 지금 당장 가능하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결하고 싶어도 연결할 대상이 없거나, 연결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선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내 상태에 대한 성찰과 고민, 아픔이 있어야 구원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계에 작동되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와 단절된 삶을 살면서 단절의 결과를 경험합니다. 그것이 공의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원하게 되고, 그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그 존재에 대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세계, 깨어진 세상에서 느낀 악의 모습이 없었다면, 그는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고, 망나니와 같은 자신을 기꺼이 맞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로는 복음이 나의 현재적 삶은 구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를 힘써 가르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내 삶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내 영혼이나 구원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적 심판과 현재적 구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에, 복음이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경험하는 구원이 죽음 이후에나 나의 삶을 바꿀 것이라면, 그것은 지금 나에게 ‘예수님이 나의 삶을 구원하셨다’는 진심 어린 감격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선명한 복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보험과 같은 ‘안도감’ 정도가 될 뿐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이 전하고 싶은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내 삶을 새롭게 하는 예수님, 그분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가 복음이시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고백이었던 이유입니다.

복음은 본래 종교적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유앙겔리온’이라는 이 표현은 매우 고유한 표현임을 설명드린 적이 있지요. 나라 전체가 들썩일만한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복음이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로는 어떤 것에 빗댈 수 있을까요? 2002년에 한국이 월드컵에서 승리하며 4강에 올랐다는 소식?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의 팀이 창단 처음으로, 혹은 몇십 년 만에 우승했다는 소식? 아니면 내가 산 주식이나 부동산에 엄청난 호재가 찾아왔다는 소식? 물론 그런 소식들도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밤잠을 설칠 만큼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앙겔리온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결정적인 소식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세계의 질서를 바꿀 만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는 소식. 나라의 방향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 달라질 만큼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역사로 표현한다면 광복의 기쁨과 조금 비슷했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이제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유앙겔리온은 바로 그런 수준의 소식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로마 시대에는 이 단어를 함부로 황제 외에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반역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 사람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단어를 가져다가 ‘예수님’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경험하는 구원의 감격을 표현하고 싶은데, 세상에 있는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래도 그중에 가장 강력한 단어, ‘유앙겔리온’을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 바칩니다.

저는 예수가 복음이라고 믿지만, 이것을 덮어 놓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내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고백하게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이 왜 복음인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성육신 하셨습니까? 인간의 탄생과 같은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플레로마’,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기 위한 실제적인 준비를 하십니다.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이야기이죠.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예비부부를 그 통로로 부르십니다.

이는 구약부터 준비하셨고 예고하셨던 약속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구원자, 즉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몇 가지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그것을 거짓 없이 이루어갈 때 우리는 메시아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3:15에 나오는 ‘최초의 복음 선포’에 보면,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떤 이야기인지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나, 예수님 동시대의 사람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 의미를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상 유일한 동정녀 탄생의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유대인의 모든 족보는 남성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의 족보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라는 개념이 유대인의 계보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죄를 해결할 구원자는 ‘여자의 후손’으로 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가장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 1:16b)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구원자는 또한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누구를 통해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까? ‘요셉’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마리아’가 주인공이고 ‘요셉’은 조연이 아닙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가 되어줘야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이 완성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요셉’의 계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라는 신실했던 이 커플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를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격적입니다. 마리아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시죠. 그녀가 순종합니다. 요셉에게도 이 일에 대해서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를 떠나려는 마음을 접죠. 요셉도 마리아도 이 일에 믿음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요셉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요셉과 마리아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전해준 이름입니다. ‘예수’, ‘예슈아’라는 이름의 뜻이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다’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그가 오신 이유는 ‘구원을 주시려고’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들이 그들의 죄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죄의 영향 아래 심판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단순히 우리를 ‘잘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가운데 ‘좋은 가르침’과 ‘위로’를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이뤄주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죄’의 문제,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로 인한 심판을 ‘죽음’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실제로 생명이신 예수님과 끊어졌으니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 결과 해바라기가 해를 잃어버린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는 근원적인 공허함과 영적 목마름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드라마의 제목에도 나온 것처럼 ‘무가치함’이라고 표현하든, 결핍이라고 표현하든, 우리가 경험하는 깨어짐의 상태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버린 것, 그로 인한 단절. 이것이 죄와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생명의 근원’이 이 세계 가운데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창조 세계에 생명을 주셨던 ‘말씀’이, 이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첫째 아들과 같은 내면의 공허함이나, 둘째 아들과 같은 외적 망가짐을 모두 바꾸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이를 번역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근원적 공허함을 회복하고 새롭게 하여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가 그 단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입니다. 그가 임마누엘입니다.

제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준비하며 증언하였다고 말씀드렸죠. 그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구원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는 몰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기대 속에는 메시아가 행할 구원에 대하여 강력한 회복과 심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습니다.

(마 11: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계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로마에 대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르치고 전도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요한이 묻는 것입니다. ‘오실 그이’, 메시아가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아니라, 다른 이를 내가 기다려야 합니까?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답을 하시는지 아세요?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은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의 현실적 문제에 심취하여 당장 로마를 물리칠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나라는 그런 정치적인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정치적 혁명으로도 얻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근원적 문제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기대할 수 없었던 삶, 나병환자가 기대할 수 없었던 삶, 듣지 못하는 자가 기대하지 못했던 삶, 죽은 자가 기대하지 못했던 삶, 가난한 자도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그런 삶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는 메시아에 대해서 알았어요.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것도, 베들레헴에서 탄생한다는 것도 모두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말씀으로 자신의 시대, 자신의 삶, 예수님이 하고 계신 일을 해석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예수가 복음이라고 하는 오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어떤 분들은 “예수가 복음인데 왜 세상이 그대로인가?”, “예수님이 오신 지 2000년이나 되었는데, 왜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편에서 누군가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삶이 온전하게 변했다면서, 황제에게만 사용되는 최상의 표현을 가져와 그것으로 예수님을 높이고자 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예수님을 자신의 모든 것처럼 여기며 그를 송축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같은 시대에 살고, 같은 예수를 보고 있어도, 어떤 사람은 예수가 무슨 메시아냐고 말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을 보면, 그가 절대 세상을 구원하고 있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이것 또한 성경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는 같은 예수님을 만나도 누군가는 눈이 열리고, 누군가는 더 완고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눅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눅 12: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눅 12: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일부러 사람들을 싸우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까지 상반되게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구원이고, 복음이고, 생명입니다. 내가 얼마나 깨어져 있는지, 내 삶의 가장 깊은 문제가 무엇인지, 내가 정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반드시 복음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기대한다면, 예수님은 쉽게 실망의 대상이 됩니다.

내 뜻을 이루어주는 분. 내 계획을 성공하게 만드는 분. 내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분. 그 정도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이렇게 묻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예수님이 일하고 계신 것이 맞습니까?” “정말 하나님 나라는 오고 있는 것입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행히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기대가 아니라 말씀으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저의 사랑 성도 여러분들에게 말씀으로 계속 도울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조금씩 더 예수님에 대해서 진리 안에서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 내 삶에 지금 가장 필요한 근원적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 초기 신앙의 역사 속에는 우리나라의 현실적 가난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외적 고난과 어려움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제법 잘살게 되어서, 이전에 비하면 여러모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합니까? 예전보다 더 많이 누리며 살아갑니다. 더 편하고 편리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더 행복합니까? 자유합니까? 다른 의미의 고통들이 우리를 옭아맵니다. 짓누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 자신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남들 만큼 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실패감. 끊임없이 나를 평가하는 세상의 기준들. 내 존재를 의미 없게 느끼게 만드는 비교와 경쟁.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깨어짐. 함께 살자니 상처받고, 혼자 살자니 외롭고 공허한 삶. 어쩌면 이것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또 다른 영적 질병이고, 영적 맹인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진짜 우리가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바꾸시려고 오셨는지. 우리 삶에 그저 좋은 조언자나 도우미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를 다시 연결하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끊어진 생명의 근원에 우리를 다시 이어 붙이시는 분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의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복음으로서의 예수를 바라봅시다. 내가 기대한 방식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입시다.

말씀으로 내 삶을 다시 해석해 냅시다. 그럴 때,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정말 큰 위로와 빛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당당하게 외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예수는 나의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