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여러분, 참 반갑습니다. 전도사님의 귀한 말씀과 공동체 설교를 거쳐, 3주 만에 ‘신앙기초 시리즈’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이 12번째 시간인데, 아시겠지만 우리가 신앙에 대해 꼭 알아야 할 핵심들을 하나씩 정리해 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11번째 설교였던 <예수, 우리의 복음> 이후 3주의 시간이 지났으니,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 그 내용을 잠깐 되짚어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세 가지가 핵심이었습니다.
첫째, 복음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대놓고 떠나 방탕하게 살다 망가진 ‘둘째 아들’ 탕자 같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교회 안에 있고 늘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정작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착각 속의 ‘첫째 아들’에게도 복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둘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둘째, 복음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시대에 이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황제에게만, 그것도 세상이 뒤바뀌는 거대하고 큰일이 있을 때만 쓰던 단어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무시무시한 단어를 나사렛 예수에게 붙여 고백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내 삶의 기준과 세계를 완전하게 전복시키고 바꾸시는 분임을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소원이나 들어주고 내 삶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나 ‘도우미’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어 일어나던 근원적인 목마름과 공허함을 채우시기 위해, 진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다시 ‘연결’해 주시고 우리 삶에 완전하게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복음에는 늘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곳에는 늘 사람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 마주 두고 보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하게 달랐습니다. 이곳에 앉아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복음은 현재 내가 속해 있는, 예수 없는 나의 삶이 얼마나 깨어져 있는지, 내 삶이 얼마나 한계 가득한 비참한 상태인지를 절절히 깨닫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구원이자 생명, 즉 진짜 ‘복음’이 되십니다.
반면, ‘내가 원하는 방식’의 구원자를 기대했던 유대인 지도자들이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쉽게 실망의 대상이 됩니다. 날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내가 필요할 때 와서 기도나 들어주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있다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결국 이런 질문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내 삶에 일하고 계신 게 맞나? 왜 내 삶은 그대로지?”
구약적 메시아관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조차 감옥 안에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요한을 다시 깨닫게 도와주셨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통해, 우리도 복음 앞에 다시 바르게 정돈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진짜 사랑의 근원, 하나님의 사랑
오늘부터 우리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이야기인 ‘십자가’에 대해서 다루려고 합니다. 아마 앞으로 몇 주간은 이 십자가 이야기를 계속하게 될 텐데, 특별히 기독교는 십자가를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것을 사랑이라 하시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니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성경의 답으로부터 찾아가야 합니다. 사랑에 대해 성경이 가장 명확하게 정의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낳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참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서만 진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의 수많은 영화와 노랫말이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진짜 사랑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해가 많습니다. 특히 사랑을 단순한 ‘느낌’이나 ‘감정’으로만 생각할 때 오해가 생깁니다. “전 그게 진짜 사랑인 줄 알았어요” 하는 뒤늦은 후회가 왜 생깁니까? 우리가 바른 사랑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순간의 내 감정만큼은 아주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토커도 감정은 충만합니다. 분명히 잘못된 사랑, 사랑이라는 착각이 존재합니다.
가장 빈번한 예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저지르는 수많은 실수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사랑이 옳고, 내가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통제하고, 내 욕심을 관철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고, 내 중심적인 사랑을 주장하고 있는 경우가 부부 사이에도, 연인 사이에도 허다합니다. 비단 그뿐입니까? 목사인 저도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내 중심적인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서조차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참된 이타적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나 '간장 종지' 같습니다. 내 안에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사랑의 근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참된 사랑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이어지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브 앤 테이크’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바로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 즉 ‘전부’를 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전부를 내어주신 사랑을 받아 수혜를 입고 공급받은 자라면, 우리 역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계산 없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성경은 이어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현장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사랑의 결정판입니다. 이 사랑에 힘입어 내 삶이 변화되었다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평생 붙잡고 자랑할 최고의 희생과 사랑이 됩니다. 내 이야기가 되어 살아있는 감격이 됩니다. 복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주님이 없던 ‘회심 이전의 삶’과 주님을 만난 ‘회심 이후의 삶’의 거대한 간극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가치를 알기에 주님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없던 여러분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진짜 내가 예수님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라는 고백이 진짜 있으십니까? 솔직히 아직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복음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2. 내 기분이라는 프레임과 현대의 우상
그런데 하나님이 성경에 아무리 이런 사랑을 기록해 두셨어도,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이 일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거나, 여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주는 것만 하나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분들이 종종 보입니다. 어떤 날은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셔!” 하고 감격에 겨워하다가도, 그다음 주에 삶이 조금만 힘들어지면 “하나님은 날 사랑하지 않으시나 봐” 합니다. 한 주 더 지나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하죠. 왜 그럴까요? 기분이 태도가 되고, 내 감정이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에 휘둘리는 신앙 태도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게 오는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해석하기 시작하면 100% 오락가락합니다. 신앙의 기복이 생기고 늘 불안해집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거대한 장애물이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프레임(틀)을 가지고 하나님을 봅니다. 내가 정해놓은 기준이 있습니다. ‘이걸 해줘야 나를 사랑하는 거지.’ 이 프레임으로 하나님을 찾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아무리 일하고 계셔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프레임에 딱 맞아떨어지는 다른 대상을 찾게 되는데, 성경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내 프레임에 맞춰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삶을 좀 더 윤택하고 부유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런 존재가 나의 신이라면, 이 자리에서 굳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삼성전자 주식이 나의 신이고, 이재용 회장이 나의 신입니다. 그가 잘되어야 내가 잘되니까요. 일론 머스크나 테슬라가 신이고, 내 삶의 평안을 보장해 줄 대통령이 신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의 힘을 더 경배하고 더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 깨어진 세상의 쥐엄 열매와 아버지가 느끼는 안타까움
그러나 복음은 깨어진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는 작은 소원 몇 개를 들어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존재 자리를 바꾸고, 내 삶의 기준 자체를 바꾸며, 내 세계를 전복시키는 사건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하나님이 이를 위해 어떻게 일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아주 특별하고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기준을 따르기보다, “하나님, 필요 없어요. 내 삶의 기준은 내가 정할래요” 하며 떠나버렸습니다. 그것이 에덴에서 인간이 저지른 죄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모습과 정확히 똑같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배신감을 느끼셨습니다.
(사 1:2)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배신감을 느끼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보면, 하나님이 느끼신 배신감보다 훨씬 더 크게 일어난 마음이 있습니다.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보며 느끼시는 ‘안타까움’과 ‘긍휼’입니다.
탕자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느낀 배신감보다 더 컸던 마음은, 어긋난 선택을 하고 잘못된 길을 간 아들이 맞이하게 될 비참한 결과를 너무나 잘 알기에 찢어지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너희는 왜 스스로 죽으려고 하느냐!” 자멸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자식을 보며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버지의 안타까움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우리의 상태를 곳곳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본래 ‘죄의 종’이었고,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상태였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곳에는 죄가 통치합니다. 빛이 없으니 어둠밖에 없고, 생명의 근원이 없으니 사망과 절망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진 세상, 깨어진 삶’의 실체입니다.
탕자의 원래 자리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품이었고, 그 집의 유업을 이어받을 존귀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더 좋은 삶을 살겠다고 떠난 인생의 결과는 돼지우리였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 하지만, 그것조차 주는 이가 없는 비참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탕자 이야기에서 가장 위대한 전환점은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 탕자가 번뜩 ‘제정신이 들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친구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머저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삶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그저 돼지우리 속에서 뒹굴며 쥐엄 열매 하나 더 얻으려고 추구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망가지고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이것이 원래 우리 인생의 운명이고 창조의 결과라면 도리가 없겠지만, 성경은 이것이 ‘죄의 결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를 전면 역행합니다. 창조 때 생명을 주셨으나 죄는 사망을 주고, 빛을 주셨으나 어둠을 주며, 질서를 세우셨으나 다시 혼돈케 만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여 깨어진 삶을 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풍성함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깨어진 세상에서 허덕이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런데 깨어진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악독한 방식인 약육강식, 무한 경쟁, 영적 목마름을 ‘당연한 순리’로 여깁니다. “세상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그 안에서 조금 더 올라가고, 조금 더 성공하고, 조금 더 가지려고 발버둥 칠 뿐입니다. 돼지우리 안에서 쥐엄 열매 몇 개 더 쥐었다고 행복해하는 인생이 됩니다. 이 답답한 모습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질타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 “우리는 부자야, 부요해서 부족한 게 없어”라고 자평했습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남들보다 쥐엄 열매 조금 더 가졌다고 안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너희는 진짜 실상을 모르는구나. 너희는 공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는데 스스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바로 곁에 계시는데도, 돌아올 생각은 안 하고 평생 터질 웅덩이만 붙들고 파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저 현재의 삶 안에서 레벨업하려고 애를 씁니다. 내 삶의 무가치함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나보다 조금 못난 사람을 보면 우월감을 느끼고, 나보다 조금 잘난 사람을 보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깎아내리며 내가 올라가려 합니다. 정확히 돼지우리 안에서 쥐엄 열매 가지고 싸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맛보는 찰나의 성취감에 중독되어 그 삶을 무한 반복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돌아갈 아버지가 없고, 새로운 생명의 방식이 없다면 이것은 완전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4. 십자가의 참된 의미: 리뎀션(Redemption), 우리를 향한 탈환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찾으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돼지우리에서 완전하게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 속으로, 우리가 빠져 있는 시궁창 같고 절망적인 어둠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이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명확합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을 지나갈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전 몇 닢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존재와 삶이 통째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꿈도 꾸지 못한 채, 그저 오늘 하루 먹고살 파편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에게 동전 몇 개 쥐여 주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눌러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걷게 하고 뛰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내 삶에 쥐엄 열매 몇 개 더 얹어주는 작은 위로가 아니라, 내 존재와 가치와 삶의 이유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온전하게 해방시켜 완전히 걷고 뛰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리뎀션(Redemption)’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과의 연결(Connect)이라면, 십자가는 리뎀션입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한자어로 ‘구속(救贖)’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오늘날 청중들에게 거의 죽은 단어입니다. ‘구속’이라고 하면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 노래가 먼저 생각나거나, “남자친구가 날 너무 구속해”, 혹은 “구속 수사” 같은 부정적인 단어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리뎀션’의 의미를 오늘 우리 언어로 가장 정확하게 풀어보자면 ‘되찾기’, 더 강력하게는 ‘탈환(奪還)’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지배와 사탄의 통치 아래 결박되어 있던 우리를 피 값으로 되찾아오신 ‘영적 탈환 사건’입니다.
로마서 6장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삯’은 일하고 받는 월급입니다. 즉, 죄의 지배 아래서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사망이라는 월급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사망이라는 월급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와 우리 사이의 모든 계약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히 끊어내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내가 너 용서해 줄게” 하시는 감정적 용서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빼앗아 오신 탈환 사건입니다. 이 구속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죄의 통치 아래 발목 묶여 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탄이라는 존재가 아주 질 나쁜 빚쟁이 같아서, 이미 법적으로 다 청산되었음에도 사기꾼처럼 수시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내 어깨에 툭 앉아서 은밀하게 속삭입니다. “야, 강 목사. 너 옛날에 나랑 청산 안 한 죄 있잖아. 너 옛날에 그렇게 살았잖아. 너 지금도 넘어지는 죄인이잖아.”
우리를 자꾸 옛 죄의 자리에 얽매려 하고 정죄합니다. 그때 우리가 당당하게 꺼내 밀 수 있는 영적 보증서, 영적 영수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탄이 참소할 때 우리는 진리 위에서 선포해야 합니다. “사탄아, 너랑 나는 이제 관계가 끝났어! 꺼져!”
우리가 차마 거친 말을 쓰진 못하지만, 영적으로는 단호하게 “꺼져라!”라고 명해야 합니다. “너는 죄인이잖아”라고 정죄할 때,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신 십자가를 붙들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충 용서하시고 여전히 돼지우리 같은 죄의 권세 아래 방치해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린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를 완벽하게 탈환하셔서 완전히 새로운 삶의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존재가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그래, 용서한다. 이제 다시 돼지우리 가서 놀아라” 했겠습니까?
그렇기에 십자가는 ‘새 창조(New Creation)’입니다. 태초의 아름다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죄 아래 묶여 살던 ‘역(逆)창조’의 상태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다시 새 창조의 백성으로 돌려놓으신 사건입니다. 로마서의 표현으로는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의의 종’이 된 것이고, 골로새서의 표현으로는 ‘어둠의 권세’ 아래 살던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완전히 이민 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서 겪어야 했던 모든 삶의 깨어짐이 회복되었고, 죄의 정죄함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미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놀라운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5. 복음의 양극단: All or Nothing
설교를 마무리하며, 목회자로서 가지는 깊은 안타까움 한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주일마다 목청을 높여 피 토하듯 복음을 전하지만, 복음 앞에서는 늘 성도들의 삶의 태도가 극명하게 나뉩니다. 복음은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소식(All)’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됩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 내내 그랬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이렇게 탈환하셨으니 내게 이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생겼다! 세상 것 조금 없으면 어때?” 하며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끄떡없이 복음을 전부(All)로 붙잡고 나아갑니다. “남들 다 하는 거 너는 왜 못 해? 너 참 가치 없다”라고 세상이 조롱해도, “내 삶의 가치를 왜 네가 판단해? 예수님이 나를 바꾸셨는데!” 하고 당당히 전진합니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매주 설교를 들어도 복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됩니다. 여전히 세상의 시선에 그대로 흔들립니다. 돈 없다고 위축되고, 좋은 차 탔다고 자랑하고, 하나님보다 나를 기쁘게 할 다른 세상 것들을 마음껏 쫓아다니며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와서는 그저 세상에서 치이고 상처받았으니 위로해 달라고 ‘작은 위로’만 구합니다.
참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짓밟고 이겨야지, 왜 세상에 휘둘리다가 교회 와서 겨우 알량한 위로만 구합니까?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은 전무 아니면 전부(All or Nothing)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안타까움을 구구절절 피력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내용을 오늘 이 시대의 언어로 재해석해 들려드리겠습니다.
“십자가에 달신 예수의 이야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 이상하게 들립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게 무슨 해결책이 된다는 거야? 2,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누가 죽은 일이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인데? 그런 뻔한 종교 이야기 말고, 내 삶에 당장 현실적인 재테크나 자녀 교육법이나 좀 알려줘.’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그저 낡은 종교 이야기나 비현실적인 신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부르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합니다.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가장 많은 정보를 가졌으며, 가장 뛰어난 분석을 하는 전문가들과 인플루언서들이 저마다 세상에서 삶의 해답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눈부시게 발전하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외로우며,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이 미련하고 시시하게 여기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요구합니다. 유대인과 같은 이들은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 눈앞의 골치 아픈 문제부터 해결해 보세요! 기적을 보여주세요!’라고 말합니다. 헬라인과 같은 이들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논리적인 데이터가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전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미련하고 답답하게 보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무력한 길을 택했지? 왜 굳이 죽어야 했지? 왜 사랑 때문에 손해를 보지?’
오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아직도 세상의 방식으로 살겠느냐? 아니면 나의 사랑을 믿고 따르겠느냐?’ 세상은 힘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하셨고, 세상은 올라가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내려오셨으며, 세상은 밟고 살아남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력해 보이는 십자가가 오늘도 우리를 살립니다.”
유명한 목회자였던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은 십자가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십자가는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당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과분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결론: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이 위대한 일을 행하셨고, 최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십자가 설교 이후에도 성도 여러분의 반응은 여전히 극명하게 나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는 세상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통치 가운데 머물며 옛 삶을 되풀이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아! 내 삶이 마침내 사탄에게서 탈환되었구나!” 믿고 선포하며 나아가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 이 두 신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설교 앞에서 우리는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자문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 세상의 통치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깨어진 세상에서 남들보다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쥐엄 열매를 얻으려고 피 터지게 투쟁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노예 같은 삶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세상의 통치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자유케 했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 끌려다니지 마십시오. 더 이상 세상의 조건에 목매어 속박당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제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를 알게 된 우리에게, 이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더 이상 꺾을 수 없는 거친 ‘운명’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들고 계십니까?
여전히 세상이 말하는 삶의 양식과 돈의 힘을 더욱 의지하고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평생 교회 마당을 밟아도, 내 옆에서 복음 때문에 손해 보고 낮아지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미련하게 살지?” 하며 비웃을 것입니다. 만약 이 자리에 그런 분이 계신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바로 오늘 복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진짜 구원이 시급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서 제발 벗어나라고, 십자가는 오늘 당신을 향해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주시는 그 찬란한 ‘새 창조’가 내 안에 이미 일어났음을 깨닫고 전율하며 고백하는 분들이 계실 줄 믿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탈환되어 내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소유가 되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제발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 주십시오!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기껏 배설물처럼 떠나왔던 그 죄악된 자리, 주저앉아 구걸하던 옛 자리를 미련 가득한 눈으로 다시 돌아보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배신하고 다시 세상의 야만적인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신 그 거룩한 주님을 끝까지 따라갑시다. 나를 위해 전부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이번 한 주간 십자가가 바꾸어 놓은 내 삶을 자랑스럽게 붙들고, 세상 한복판에서 진짜 ‘그리스도인답게’ 당당하게 살아내시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