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말레

2026-06-18 (올린 날짜) · 고린도전서 10장 1~13절 · 이세훈 형제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네. 말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우리 지금 매일 성경으로 우리가 말씀을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러한 선물을 거룩한 신분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요.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우리가 받은이 구원의 여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오늘 말씀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먼저 선포하게 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0장 1절과 2절 말씀을 우리가 한번 시작해 볼 텐데요.

한번 말씀을 읽어 볼까요? 잠시만요. 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에 있었고 바다가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새를 받아 우리에게 하게 되었습니다. 네. 바울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홍의 바다를 건 사건을 세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죄의 신분 즉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홍해바다의 장사를 지내고 바다 건너편에 가나안을 향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그런 선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의 여정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약속의 땅을 향해서 이루어 가는 구원의 삶 바로 광야가 시작된다는 것이죠요. 문제는 우리가 광야라는 그 현실을 마주할 때 일어납니다. 어, 구원의 자격은 저희들이 받았죠. 하지만 아직 내 삶과 인격은 자격 다운 상태로 변하지 못한 우리는 그 광야라는 현실에 목마음과 그리고 그런 뜨거운 열기 앞에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민수기 14장을 보면요.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둔 가데스 바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원망하면서 울부짖습니다. 우리 민수기 14장 2절에서 3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을 원망하였다. 온 대중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사랑의 땅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사람이 우리가이 광야에서도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왜 우리를 이땅으로서 가아죽게 하는

왜 우리의 아들과 자식들을 사로잡히게 하는 차라리로 우리가 되어다. 여러분들 어떤 모습이 보이십니까? 예쁘십니까?이 이 모습들이 여러분들 어 우리가이 말씀을 보게 되면 정말로 이들 마음속에 어떠한 마음이 있는지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채찍질을 당하고 쇠사슬에 묶여서 탄식하던 그 애굽 노예의 시절이 지금 마주한 광야 훈련보다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다. 이렇게 추억하는 것이죠.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내 삶의 작은 광야 그리고 광야

같은 고난이 찾아오면 주님을 원망하면서 옛 죄의 습관과 세상의 안락함을 추억하곤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우리는이 인생의 광야를 만날 때마다 왜 자꾸 흔들리고 왜 옛버릇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끄집어내는 그 고린도 교회 문제가 바로 영적 자만심과 방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고 또한 세례를 받았고 또한 상어 성찬에 참여한다고 그 종교적인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만해하고 있었습니다. 나 이제 구원받았어. 그리고 나는

내 신분은 이제 완벽하게 안전해라고 이야기하니 이제 내가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내 욕망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이렇게 방심했다는 것이죠. 바울은 바로 그 자만심의 콧대를 꺾기 위해서 오늘 본문 3절부터 11절을 통해서 아주 무섭고 어쩌면 엄중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도 다 똑같이 구름 아래에서 신령한 식물 만나를 먹었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는 것이죠. 고린도교인들처럼 완벽한 영적 은혜와 특권을 다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대다수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은 결국 가나안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비참하게 엎드려져 멸망당했습니다. 여러분들 여기에서 기독교라는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뀝니다. 여러분 인간이 영어로 무엇입니까? 인간은 영어로 휴먼입니다. 어 제가 얼마 전에 무자무사 어 무가치함이라 그 넷플릭스 하는 무자무사를 보면서 거기에서 휴먼빙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알고는 있었지만 아 맞다라고 깨달으면서 어 말씀의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해 내야만 가치가

생기는 휴먼 두잉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랑받는 휴먼 빙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을 무언가를 행해야 되는 세상에서 성과를 내야만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세상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 존재 자체로 이미 그 어떤 것보다 우리는 가치가 있고 귀하다는 것이죠. 과거 우리가 살던 애굽은 어땠습니까? 벽돌 몇 장을 구었느냐? 그런 행위로 우리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잔인한 노예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영적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러한 신분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이 바뀐 그 참된 존재는 반드시 삶의 자리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거룩한 행동이 나아지기 마련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홍해를 건넜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놀라운 신분이라는 선물을 얻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여전히 애굽 노예 시절에 그 죄악된 행동들이 그대로 튀어나왔습니다. 신부는 바뀌었지요. 그러나 그들 안에 아직 하나님의 은혜와 정체성으로 채워지기에는 은혜를 경험해 놓고도 금방심하고 금방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에요. 바울은 본문 11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함께 큰 목소리 한번 읽어 봅시다. 한 것은 우리가 되게

하는 것이며 너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보하니라.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이 비참한 실패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깨우치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본보기 거울이자 지도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명확히 붙들지 못하고 나 구원받았으니까 괜찮아라고 자만하고 방심하는 순간 우리 역시 삶의 자리에서 언제든 옛사람으로 모습으로 자꾸 가려고 하며 그리고 무너질 수도 있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이 자만함으로

그리고 우리가 방심하다가 무너지고 현실의 그 시험 앞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는 그런 통곡하며 우리가 엎드려지던 그 광야 위에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내 존재를 지키고 어떻게 해야 내 존재를 넘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말한이 비참한 실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절망할 때 유독 전혀 다른 믿음을 보여줬던 한 사람 우리는 갈렙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갈렙 누구신지 아시죠?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12명의 정탐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열명의 정탐꾼은요. 눈앞에 거대한 안악 자손을 보면서 두려워하며 떨었고 그들의 말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마저 밤새대로 통곡하며 원망하였죠. 하지만 갈렙은 환경을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바로 그 정탐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눈물로 원방하던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오직 갈렙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우리 다 함께 민수기 14장 24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렘은 그 마음이 달라 나를 온전히 따았은즉 그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드리니 말씀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하나님은 갈렙을 갈렙이 주님을 온전히 따랐다라고 인정하십니다. 여기에서 온전히 따르다의 히브리 언어의 원어가 말레입니다.이 말레이 단어의 핵심의 의미는 바로 가득 채우다입니다. 여러분들 갈렙은 40세의 정탐꾼으로 갔고요. 헌신한 이후에 45년이라는 기학인 광야의 세월을지나 백발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노인이 되어서도 여호수아의 14장에서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청년 때와 똑같은 믿음으로 외칩니다. 갈렙의

세월의 흐름과 그리고 척박한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 그 빙이라는 유지 그 빙을 유지하면서 당당한 믿음의 발걸음을 걸어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45년 동안 거친 광야를 걷는 내내 그의 심령 속에는 세상의 두려운 소리나 애굽의 시절의 안락함 등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자기 심령을 가득 채웠고 영적인 말래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라는 그 신분을 얻었음에도

왜 자만하고 방심하며 작은 시험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집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말래하지 않고 세상의 소리와 염려, 내 상처와 욕망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지요. 우리 인생 위기에서 튀어나오는 반응은 평소 내 안에 무엇을 가득 채웠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요. 광야에서 자만하다가 쓰러져 간 그 이스라엘 조상들의 비참한 실패를 거울로 보여 준 뒤 이제 오늘 본문의 핵심 결론이자 위대한 복음의 선포로 우리를 이급니다. 다 함께 우리

본문 12절과 13절을 우리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험밖에 다른 신앙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으로 시험에 보는 것을 하나님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로게 되셔서 여러분이 그 신앙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바울은 경고합니다.서 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내 힘과 내 종교적인 열심 어쩌면 내 대단한 그런 행위 나의 영적 자만심 방심 이것으로서 우리의 광야 같은 세상을 버텨보겠다고 자신 만만하게서 있는 자들은 반드시 넘어진다는 것이에요. 내 결단이라는 그 작은 컵 내 결단이라는 그 작은 컵은 광야의 뜨거운 유혹과 그런 유혹과 많은 모래바람 가운데에서 우리는 바로 바닥이 나고 지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이 광야의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거예요. 방금 읽었던 13절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시령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 개혁제 개혁 계정에는 피할 길을내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이 피할 길은 요셉의 상황과 되게 비슷해요. 여러분들 요셉 아시죠? 여러 상황 가운데에서 많은 유혹들이 있었습니다. 근데 유혹 가운데서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버틸 거야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바로 그 피했습니다. 바울은요. 시험이 오면 버텨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실 테니 실제로 피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마음을 주시는 것이냐? 이것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는 거냐? 그것이 꼭 아니고 그 넓은 의미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도 하실 거고요. 어떤 사람에게 경고를 듣게도 하실 거고요. 양심이 찔리게 하시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떠날 기회를 주시고 환경을 바꿔 주시는 등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겁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출구를 선택하느냐입니다. 요셉은 출구가 생겼을 때 도망을 선택했어요. 반면 이스라엘은 늘 방법을 주셔도 어땠습니까?

원망했지요. 우리라는 그릇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으면서 그분께 우리가 붙어 있을 때 우리는 피할 출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머물 때 내 인생이라는 그 컵에 거친 한복판에 마르지 않고 영원히 주님의 약속과 주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는 우리의 영적 만가 경험할 수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이것이 13절에 나와 있는 바로 그 미쁘신 하나님 한결같이 신실하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예비해 두신 완벽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볼 텐데요. 사김의 사김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주간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내 심령에 만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거창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주 작고 구체적인 결단에서 사실은 시작되는 것이지요.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배일 수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와 주신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여서 우리가 먼저 예배에 나오고 그 주님과의 사김을 누리는 것이지요. 또한 그 안에서 우린 회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삶의 예배에서도 우리는 또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 우리 많은 풍삼 시리즈에서 얘기하는 텐텐을 이야기하지요. 이것을 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쉽나요? 쉽지 않습니다. 저도 텐텐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빼먹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쉽지 않지만이 세 번을 채울 수 없을 때에도 우리가 3쓰 3쓰3 아니면 파브 5파 5파 이렇게 우리가 작은 것으로부터 주님 앞에 머물려고 하는

그 노력이 우리의 한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주님께 잠잠히 귀를 기울여 봅시다. 성령님께서는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성령님께서는요. 탄식하신다가 아니라 탄식으로 우리에게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얼마나 든든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 길을 기울릴 수 있는 이러한 노력부터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가장

귀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김의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혼자서는요. 그 광야의 바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은혜를 누리고 은혜를 나누면서 격려하면서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과 기도와 공동체 안에 주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가 자발적인 순종을 했을 때에 우리가 그렇게 한 걸음을 내밀었을 때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게 말래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내 힘으로서 보겠다고 방심하지

않고 우리가 피할 길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안에 온전히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 봤습니다. 컵에 말래를 했을 때 우리가 채운다 할 때 물을 채울 때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라는 우리 물 가운데 그냥 컵을 담그면 넘쳐 흐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우리가 머물렀을 때에 우리가 그 삶에서 존재가 바뀌었고 우리의 삶이 참된 승리의 삶 두잉을 할 수 있음을 우리가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 사기의 교회 성도님들 우리 이러한 마음으로 한 주간 또한 살아가며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