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앙기초’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설교 시간입니다. 사실 제가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매주 말씀을 전하며 인도하심을 받다 보니, 이 신앙기초 시리즈를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전해야겠다는 기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로써 열다섯 편의 설교가 진행되었는데, 이 전반부 파트의 핵심 주제는 바로 ‘복음의 토대(Foundation)’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초’라고 하면 가장 쉽고 기본적인 ‘베이직(Basic)’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앙의 기초는 단순한 초급 단계를 넘어 우리 신앙의 전 인격을 지탱하는 ‘토대(Foundation)’를 세우는 작업입니다. 건물이 높고 견고하게 올라가려면 기초가 단단해야 하듯, 우리 신앙도 이 토대가 흔들리지 않아야 올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토대 위에서 창조, 죄, 심판, 약속, 예수님, 십자가, 그리고 오늘 다루게 될 부활까지 복음의 핵심 가치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첫 번째 파트를 마무리하면서, 창조부터 시작되었던 그 이후에 어떻게 보면 계속해서 일하셨던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가 오늘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었는지를 함께 보고자 합니다.
지난 3주 동안은 십자가 시리즈를 설교했습니다. 십자가 시리즈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이 설교는 저에게 있었던 십자가에 대한 세 가지 질문 때문에 이 세 가지 설교를 하게 된 거였어요.
(What) 무엇인가? 십자가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로부터 탈환한 사건이다.
(Why) 왜 일어났나?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으로 이것이 가능했다.
(How) 어떻게 되었나?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하기에 충분하기에, 사탄의 거짓말에 빠지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하면 된다.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어요. 거기까지가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이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무엇을 이루셨는가? 오늘 그것을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1. 왜 부활인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인간에게 찾아온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을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까요. 우리가 ‘숨이 붙어있다’는 표현을 하지요. 생명이 붙어있으면 산 것이고, 생명과 단절되면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죽음의 상태에 우리를 이르게 합니다. 제가 복음적 비유로 자주 사용하는 이미지가 있죠.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 <물에서 멀어진 물고기>와 같이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는 존재론적 공허와 고갈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싼 여러 공허와 불안과 끊임없는 결핍의 갈증 등이 여기에서 왔다고 성경은 진단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없는 공허를 채우려고 여러 방면으로 몸부림치지만, 생명의 근원이 차단된 우리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직면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의 영원한 생수다. 내가 이 생수의 근원이다.” 이런 얘기를 하나님이 하시는 거죠.
성경은 그러니까 우리의 상태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후에 영적인 영적 합병증, 즉 죽음의 증상들이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였나요? 구원이 필요했을까요? 아니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가 이미 구원의 상태인데 왜 구원이 필요하겠어요. 근데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구원을 다시 주기 위해서 일하셨다는 것이 신앙기초 시리즈의 이야기였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고전 15: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오늘 본문에는 ‘한 사람의 원리’가 나옵니다. 모든 공동체에는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여러분, 제가 사귐의교회 대표입니다. 제가 대표자 증명서를 가지고 은행에 가서, 교회를 대표해서 어떤 계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효력은 우리 교회 공동체 전체 미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원죄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체결한 하나님과의 사람 사이의 첫 언약이 있었죠. 그때 사람의 대표는 누구였습니까? 아담이었습니다. 그가 언약의 대표였고, 그가 언약을 위반했습니다. 아담의 후손, 즉 아담의 혈통 안에 속한 사람은 모두 언약 파기의 결과에 직면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억울해할 게 사실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도 꼭 아담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도 아담과 같이 그 자기중심적 태도를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아담이 배신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미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으니까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참여자이며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쉽게 예를 들면, 우리 모두가 이 계약의 어떤 빚을 지고, 파산하게 된 거예요. 해결책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을 대신해서 누군가가 이 언약적 파기의 결과를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언약을 맺으면 새로운 관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된 우리의 이 채무를 감당하고 새로운 계약을 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이미 죄와 모두가 연합하여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서 새로운 언약을 맺을 무죄함의 자격, 제로 베이스(Zero-base)의 자격이 없는 거예요. 우린 다 이미 죄와 연합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죄가 있는데 다른 어떤 모든 죄의 삯을 감당하고 “새로운 언약을 맺읍시다”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적어도 첫 사람 아담은 처음 언약을 맺을 때, 죄와 연합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무죄하고 무흠한 상태였습니다. 근데 아담 이후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죠. 이것만으로도 왜 예수님이 오셔야 했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왜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실제로 이게 성경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한번 고린도전서 말씀을 두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성경의 신학은 정말 논리적이거든요? 성경은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마지막 아담’ 그리고 ‘둘째 사람’. 이는 왜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에 굉장히 주목하거든요. 무죄하신 예수님만이 새로운 언약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일컬어서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아까 대표성 원리 말했죠? 여러분 제가 사귐의교회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이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그 효력을 같이 얻어요. 근데 만약 이 공동체에 속해 있다가 공동체를 떠났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언약과 무관해집니다. 반대로 제가 계약을 맺을 때 없었어도 그 이후에 교회 등록해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언약의 효력에 들어와요.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대표가 되어서 했습니다. 예수님이 맺은 언약에 예수님의 공동체는 효력을 받습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예수님께 내 삶의 주인임을 고백하면서, 흔히 말하는 회심 공동체, 교회 공동체,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면 예수님이 맺은 새 언약에 우리 참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가 있으면, 우리의 이전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새로운 언약 앞에서 이제 함께 살게 됩니다. 언약의 대표성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것입니다. 첫 언약에서 사람의 대표가 아담이었습니다. 새 언약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을 맺는 거예요, 그런데 이 새 언약의 대표로 누가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원래 예수님은 이쪽(하나님 편)이잖아요. 이쪽에 있으면 언약을 맺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 쪽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하셨어요.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인류의 대표’가 되어서 나아간 겁니다.
우리가 새 언약을 의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신실하신 그리스도. 그래서 이 언약이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 중 한 사람이 우리를 대표하였다면, 우리는 첫 언약의 실패와 같이 또 다른 실패를 두려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대표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우리는 나를 맡기고 그분과 연합함으로, 그분이 이루신 구원과 회복과 영원한 승리에 우리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위대한 이야기를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대표자 아담의 결과를 함께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대표자 예수님의 결과를 또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실패와 새 언약의 체결이죠.
이 새 언약에 참여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그분이 이루신 새로운 삶을 함께 누린다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 그 새롭게 시작된 ‘생명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생명의 삶’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죽음에 속해 있는 삶을 생명의 삶으로 바꾸셨어요. 사실 그 이야기가 부활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이루신 그 부활에 참여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쉽게 말해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앞서 말했던 ‘죽음의 증상들’을 극복하고 벗어나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증상들은 공허한 거예요. 불안한 거예요. 두려운 거예요. 외로운 거예요. 끝없는 갈증이 있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고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의 증상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갑니다.
말씀이 말하는 ‘통치의 구조’를 잘 살펴봅시다. “한 사람의 범죄”, 이 한 사람은 아담이죠. 그 결과 어떻게 되냐면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왕 노릇 했습니다. 여러분, 사망과 우리 가운데 누가 위에 있다는 거예요? 사망이 우리 위에 있다는 거예요. 죽음의 통치 아래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가 있었죠.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여기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가 누구일까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그분으로 인한 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의’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우리에게 의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뀌었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한 분 예수를 통하여서” 이제는 “왕 노릇 합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이해가 되세요?
아까는 우리에게 왕이 누구였다고 말하냐면 ‘사망’이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이제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합니다. 죽음의 밑에 있던 우리가, 그 두려움의 밑에 있던 우리가, 죄의 밑에 있던 우리가 이제 생명 안에서 더 이상 그 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더 이상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해주는 거예요.
이전에는 깨어진 세상 가운데서 죽음이 우리의 왕이었습니다. 우린 그 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근데 주님 안에서 이제 우리가 어떻게 바뀌었다고 말하냐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가 생명으로 다스리는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더불어 우리가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나님과 함께 생명으로 이 세상을 통치합니다.
원래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어요. 원래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모습이었어요. 원래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우리에게 창조할 때 기대하셨던 바였습니다. 죄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을 뿐이었죠. 근데 다시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누리게 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성경을 보면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가 이전과 달리 새롭게 살게 된 이 삶의 모습을 굉장히 다양한 언어로 사실 말하고 있어요. ‘구원, 영생, 새 생명, 거듭남, 하나님의 자녀 됨,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신부, 새 창조 등.’
이런 겁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이전과 다른 어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더 이상 불안에 쫓기지 않고 더 이상 공허함에 시달리지 않고 어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어요. 이게 너무 좋아요. 근데 이 삶이 세상에서 주어진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깨어진 세상에 있으나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거예요. 이걸 내가 경험하니까 너무 좋아요. 알려주고 싶어요. 근데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언어로도 말해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을 다양한 언어를 통해서 설명해 주는 거예요. “이게 구원이야. 곤경에서 네가 구원받고 구출된 것처럼 이게 구원 사건이야. 이게 영원한 생명을 사는 거야. 이게 새로운 생명을 사는 거야. 이게 다시 태어난 거야. 이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삶이야. 이게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사는 거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거야, 새 창조가 된 거야.” 여러 가지 언어로 설명하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모두가 그리스도의 이 승리, 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받게 된, 살 수 있게 된 그 풍성함을 누린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이것을 설명하는 언어들입니다.
원래 창세기에서 우리가 누리던 삶이 세상을 다스리는 삶이었어요, 원래 우리가 누리는 삶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 가운데 시작되면서 우리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였고, 하나님과 단절된 채 죽음을 향해서 죽어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것을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흐름이 ‘뒤집힌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이루신 그 승리의 핵심, 그 부활의 어떤 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입니다.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은 사망의 통치 아래 있었는데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사망의 통치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이긴 게 아니라 그 부활에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하나님과 맺으시며 우리를 초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삶, 그 새로운 언약으로 우리가 참여하게 된 것, 그것은 우리가 이제는 창조되었다가 망가졌다가 새로운 창조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망가지고 깨어진 우리에게는 끝없는 의심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왔다고 말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가 많고, 반면 나를 괴롭히는 죽음의 증상들은 우리의 삶에 너무나 선명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세상의 통치가 여전히 강력한 것 같고, 당장 이 세상이 나에게 말하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하는 이 패러다임에 순응하여 살지 않으면 나는 이 세상 가운데서 도태되고 낙오자가 될 것 같은 위협이 우리에게 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위협 누가 주는 것입니까? 깨어진 세상이 주는 것이고,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달랐을까요? 그들도 똑같았어요. 그들도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이 엄청난 분이에요. 그러니까 “이분과 함께 있으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뭔가 다른 삶을 경험할 수 있겠다”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따라다녔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들어가시니까 “드디어 뭔가 세상이 뒤집히는 일이 일어나겠구나”라고 기대했습니다. 근데 그 기대가 어떻게 됩니까? 산산조각납니다.
믿었던 예수님이 속절없이 세상의 힘에 굴복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의 통치를 깨기는커녕 로마의 통치 아래서 가장 강력한 형벌인 십자가에 달리는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거짓된 참소 하나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대와 너무나 다른 예수님의 무력한 마지막 모습은, 그전까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들뜬 기대해 가득 차 있었던 제자들에게 모든 의욕을 꺾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두려웠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로 그러한 그들의 삶, 시선, 그들의 세계관,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뒤집어 준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이 그들에게 준 메시지를 아주 간단히 말하면 이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도 괜찮다”는 겁니다. 아니,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이 없다”라는 것을 그들에게 경험시켜 준 시작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납니다. 그 사건은 그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이 있었냐 없었냐 논쟁에서, 우리가 부활을 신뢰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뭐예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아까 했듯이 가장 두려워서 떨고 방문을 꽁꽁 닫고 숨어버렸던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갑자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들이 거리로 나와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요! 내가 믿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이렇게 외치는 그들의 변화를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활은 제자들에게 하나의 사실을 선명하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이전의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에서는 죽음이 끝이에요.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면 그대로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그들에게 준 건 뭐냐면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라는 마음인 거예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이 가르쳤던 그 삶이 진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스스로 몸소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 따라가도 될까? 여러분 고민할 때 있지 않습니까. 내가 정말 설교대로 내가 살아도 될까? 고민할 때 있으시잖아요. 제자들도 똑같았어요. 근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하면서 “내가 예수님 따라도 될까”에서 “예수님을 따라도 되겠구나”로 바뀌었어요. 그러므로 그 이후의 제자들을 보면 그들은 이제 죽음을 향해 갑니다. 이전에는 예수님과 함께 가면 자기들도 십자가에 죽을까 봐 두려워서 도망쳤다고요, 저 반대쪽으로 열심히 도망가서 숨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만났어요. 그리고 그 부활의 진리를 붙잡은 사람들은 다 어떻게 하기 시작합니까?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갑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처럼 보여요, 예수님이 가셨던 것처럼. 근데 신앙의 진리 안에서 예수님이 부활을 향해 가셨던 것처럼, 이들도 참된 생명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주시고 살아내셨던 그 하나님 나라가 세상 앞에서 무력하고 패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죽음마저도 하나님 나라의 그 강력한 임재, 생명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 통치를 막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죽음마저 이기셨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자들을 일으킵니다. 다시 그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부활 경험은 제자들이 알고 있던 그 진리가 이제는 가슴에 와서 박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작년 사경회 때 강사님이 예시로 들었던 ‘퍼스트 펭귄’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펭귄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바다에는 바다표범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먼저 뛰어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펭귄이 먼저 뛰어듭니다. 그리고 그 펭귄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머지 펭귄들도 안심하고 뒤따라 뛰어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경험한 것이 그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먼저 생명의 길을 걸으셨고 열어주셨습니다. “아, 우리가 예수님 따라가면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것을 진짜 누릴 수 있겠구나”라고 그들도 결심하고 나아가게 한 것이에요. 그래서 부활에 대해서 성경은 되게 중요한 표현을 쓰고 있어요. 그것은 ‘첫 열매’라는 표현입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라는 표현은 열매가 이거 하나라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첫 열매를 시작으로, 앞으로 거두게 될 모든 수확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새 생명이 그분의 공동체에게, 그분의 공동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에요.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은 시작이에요. 그분 안에서 그분과 연합된 모든 존재가 그분이 여신, 그분이 주신 그 부활의 삶을 살아 가야 될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경회 이후에 누구하고 퍼스트 펭귄 얘기를 나누면서 비유를 얘기할 때, 그분이 저에게 이렇게 얘기했던 게 기억이 나요. “목사님, 근데 현실에서는 그 퍼스트 펭귄이 죽던데요?” 맞습니다. 그렇게 보일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 이 부활 사건이 가진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있어요. 펭귄 비유로 말하면 예수님이 죽음의 바닷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보면서 ‘끝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자신의 스승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우리가 패배했다’라고 직감하며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을 생명의 바다로 바꾸신 거예요. 죽음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가니까, 죽음이 예수님을 삼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을 삼켰습니다.
예수님이 죽음 위에 서신 거예요. 죽음보다 더 큰 생명이 그곳에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죽음이 그곳에 있더라도, 죽음이 지배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믿으십니까?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바울은 마치 그 죽음과 사망을 조롱하듯이 이렇게 외치는 거예요.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되었음을, 우리에게 사망이 미칠 영향이 없음을 알게 된 거예요.
바울이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죽음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죽음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는 다르죠.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죽음을 향해서 비웃듯 말하는 거예요.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냐. 넌 패배했다.” 예수님께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바다는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이 다스리는 바다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돼요. 왜냐하면 이 사실이 말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따라서 바다로 들어간 사람만 깨어진 세상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삶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삶’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
성경은 이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죽음이 끝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서 “야, 여기는 너무 힘든 곳이니까 나만 갈게. 나만 희생할게.” 이렇게 말해야 되잖아요. 근데 예수님 뭐라고 그러세요? “나 십자가의 길 갈 거거든. 너도 와야 돼.” 예수님은 늘 말씀하셨다고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끝없이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한단 말이에요. 예수님만 십자가를 지고 “야 너희는 그냥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이러지 않으셨어요. “너희도 나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돼.”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위협의 도구이고 트라우마였습니다. 실패의 상징이었어요. 그전까지 십자가는 세상의 통치와 힘을 상징하는 거였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게 뒤집힌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바다 앞에서 머뭇거리는 펭귄의 시선이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완전히 바꾸셨어요. 이제는 땅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고, 땅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증상 안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리로 와라, 나를 따라와야 돼. 그래야지 새로운 생명이 너희에게 시작되는 거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이 일어난 후에 완전하게 그들이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만이, 죽음의 증상이 여전히 세력을 떨치는 ‘깨어진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그들의 세계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전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들의 세계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세상으로 도망쳤던 그들의 방향을 바꿨어요.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 그 무리를 성경은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교회가 되었어요.
여러분 그럼 교회가 뭐겠습니까? 교회는 이 세상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우린 예수님이 따라가는 그 삶을 향해서 살겠어”라고 하고 결단하고, 예수님의 그 새로운 공동체 안에, 예수님의 그 새로운 창조 안에, 새로운 언약 안에 살아가기를 다짐한 자들의 모임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 보면 ‘믿음’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믿음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믿음은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다고 하신 주님의 그 말씀을,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제 그 진리 붙들고 그 진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 복음이 전해지는 이야기가 나오죠. 거기 보면 이 새로운 삶을 전하는 도구는 딱 두 가지예요. 하나는 ‘복음의 진리’, 예수님이 하신 일이죠. 이것은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게 없어요. 다른 하나는 ‘그 진리를 붙들고 삶이 바뀐 사람들, 공동체’. 퍼스트 펭귄을 따라서 나도 새로운 삶을 살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된 존재들, 그들을 보면서 주변이 바뀌어가는 거예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옛날에는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고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이 사람이 말씀을 듣고 막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요. 그러더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살겠다고 하면서, 이전과 다르게 살기 시작해요. 그러더니 그 사람 삶에 회복이 일어나요. 죽음의 증상들이 사라지고 변화가 생겨요. 그게 다른 누군가한테 용기가 되는 거라고요.
퍼스트 펭귄을 뛰어든 두 번째, 세 번째 펭귄 보면서 “나도 가볼까? 되겠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요. 교회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라고 모였지만, 하나님의 가치관에 따라 살 마음이 없고, 매번 여기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얘기하고 그걸 추구한다면 그곳이 교회겠습니까? 전 교회 아니라고 봅니다.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처음부터 변화되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적어도 진짜 교회라면, 여기 안에서 하나둘 바뀌어가는 사람을 통해서 누군가도 고민하게 되고, 또 바뀌어가고, 그래서 결국 함께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세상에도 그래서 이 삶을 전하는 것, 그것이 교회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그들의 새로운 가치관에 따른 모습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명한 자 같은 우리가 실상 유명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더욱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상황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을 우리는 이미 받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가 내 안에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이게 부활의 삶이에요. 이게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 부활이 어느 자리에서 시작했습니까? 세상의 가치에 역행하는 예수님의 발자취입니다. 우리 눈에는 “어 저기 위험한데”라고 할 수도 있죠. 근데 예수님이 계시니까 “저기로 가야겠네.” 예수님이 계신 곳 그곳이 우리가 따를 곳, 우리가 설 곳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향해 갈 때 깨어진 세상은 여전히 시선이 뒤틀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서 있는 곳과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 깨어진 논리 안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세상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압니다. 우린 세상을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세상과 다른 길을 가기로 결심한 거예요. 우리는 세상을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세상이 우리를 거짓된 진리로 끌고 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완전하지 않고 작은 걸음으로 시작됐을 뿐이지만, 우리는 이 걸음을 통해서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세상이 경험하지 못한 생명을 이미 경험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제자들의 그 과정을 겪을 거예요.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세상의 거대한 힘 앞에서 위축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어떤 패러다임을 내가 따라가지 않으면 난 도태될 것 같고, 세상이 말하는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압박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믿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겨우 그냥 나 한 몸 생존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닫힌 문을 열고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 안에서 이제 그분을 붙들고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분의 공동체가 되어서 새 언약의 새 창조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면서 불안해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그 승리를 등에 업고 생명을 향해서 걸어가는 존재입니다.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탈환하신 주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으로 왕 노릇 하며 살아가기에 충분한 능력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삶에 찾아오는 죽음의 증상들, 불안과 우울과 두려움과 그 모든 것을 뒤에서 조장하는 사탄의 거짓말에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이 부활의 능력을 깰 힘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 부활의 진리를 붙들고 살지 못하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흔들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승리하셨다는 사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진짜 우리가 이 진리를 믿는다면 이제 우리의 모습,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예배 안에서 진짜 내가 그걸 믿는다면, 이제 여러분이 예배 안에서 해야 할 결단, 주님께 드려야 될 우리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의 그 생명력을 가지고 당당하게 세상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다르게 살 수 있으니까. 부활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도 난 망하지 않겠구나”라는 확신 가운데 주님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신 그 생명의 길을 우리가 함께 걸어서, 우리도 그 진리를 보면서 우리가 회복되어 가고, 또한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정말 이루고 싶은 주님의 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시 그 생명력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그 하나님의 비전에 함께 참여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바다가 바뀌다’ 입니다. 우리에게 죽음과 같이 보였던, 그래서 피하고 싶고, 저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 그 바다에, 주님께서 먼저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바다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세상은 안 믿어줄 거예요. 세상은 여전히 "거긴 죽음이야"라 하겠지만, 우리는 이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면 어때, 거기 예수님이 계시면 거기가 참된 생명이지.”
오늘로써 우리가 15주 동안 다루었던 신앙기초 시리즈 첫 번째 파트, ‘복음의 토대’가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 기대가 있었지만, 인간의 배신으로 찾아온 비참한 죄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약속하셨고, 마침내 제2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부채를 청산하시며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탈환해 오셨고, 오늘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이것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는 것이며, 신실한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은 그 새 언약에 나도 참여하기를 소망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 이 믿음의 토대는 우리의 감정이나 환경에 따라 요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다 이루신 그 승리, 그 새로운 생명의 삶에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찬란한 삶의 여정을 함께 기대함으로 바라보면서, 다시 여러분이 이 예배 이후에 찾아올 세상의 그 풍파, 거짓과 위협 앞에서도 이 진리를 잃지 말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가진 자답게, 진리로, 때로는 남들이 거부하는 그 길로 걸어갑시다. 주님께서 그 길을 그러니까 ‘좁은 길’이라고 부르지 않았겠습니까.
“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하지만, 나는 주님이 계신 곳이 이쪽이기 때문에 이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내 삶에 찾아와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죽음의 모든 깨어짐의 증상들을 향해서 “아니야, 이것이 나를 주장할 수 없어.” 나는 주님께서 이루신 생명 가운데 이제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나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며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에 함께하시며 새로운 삶을 열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신 곳은 죽음도 생명으로 바뀝니다. 믿으십니까? 죽음의 바다 자체를 생명의 바다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고, 생명에 속한 자답게 살아주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이 우리를 보면서 깨닫게 합시다. 이 전에 십자가는 죽음으로 가는 끝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제 우리에게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그 주님과 함께 여러분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나아가는 부활의 증인, 새로운 언약의 백성 되기를 간절히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