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신앙은 기도로 자랍니다

2026-07-09 (올린 날짜) · 시편 6편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어 시편에 대한 메시지는 우리 메일 성경 묵상을 하다 보면 아주 종종 이렇게 나누게 돼서 그래도 저희가 지난 한 7년 동안 메일 성경으로 주의 설교할 때도 한 열번 11 번 넘게 다루긴 했는데 쭉 이렇게 시리즈로 다룬 적이 없다 보니까 뜨문뜨문 다르게 돼서 가끔씩 만나게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이번 주에는 어 묵상문 6, 7, 8편 중에 뭘 다룰까 하다가 그 중에 시편 6편을 저 여러분과 나눠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요 시편은 몇 개의 시가 있죠? 네,

150개의 시가 있습니다. 아, 시편의 특징이 뭐냐고 본다면 기도 모음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이 시 하나하나가 기도라는 거죠. 한 개인의 기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이 기도를 따라서 하고 있는 그런 어쩌면 모범이 되는 기도문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는 기도를 배운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저희 교회 거기 책장에도 꽂혀했지만 어 사김의 기도의 그런 어떤 전집이라서 어 전집이라고 이렇게 해서 또 아 유명한 어떤 신앙의 대가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보고 따라서 기도하는 그런 훈련들도 거기 소개되어 있기도 합니다. 근데 그중에서도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모델은 시편의 기도를 따라하는 거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기도도 개인적인 측면도 있지만 공동체적인 측면도 있잖아요. 대표 기도 같은 것은 나를 위한게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대표해서 아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영성가들이 기도를 배우려면 시편에 많이 읽어 봐라. 그리 시편에 있는 그 기도를 따라해 봐라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이 시편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보면 정말이 사람의 소교처럼 신앙생활에서도 강점이 다릅니다. 어, 근데 종종 지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라고 보여진 것 중에 하나가 기도를 길게 하지 못하는 경향이 제가 봤을 때 많습니다. 왜냐면 기도 또한 논리적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무의미하게 내가 뭔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거나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나누는 것에 약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기도 했습니다. 근데 제가 이제 신앙생활 쭉 헤오면서 또 이렇게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을 목양하고 목해오면서 느끼는 것은 합리성만으로는 내 신앙이 나의 삶에 채득화되지는 않는다라는 점이었어요. 만약 내가 배우고 이해되는 것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것이 삶으로 잘 안 내려간다. 내 삶을 잘 안 나타난다.라고 라고 할 때에는 당연히 먼저 내가 잘 진리를 붙잡고 있나를 점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 내가 잘 진리를 붙들고 있는데 불명한데도 내 삶으로

잘 나타난다면 다른 것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머무는 시간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 하나님께 머무는 시간에 기도라고 부르는 건데 그 기도란 주님 앞에 머물러서 주님과 마음을 주고받는 그런 시간입니다. 다른 것에 방해받지 않고 그저 하나님 앞에 머물러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그 안에서 때로는 뭐 통성으로든 때로는 조용한 기도로든 하나님과 함께 하는게 내 삶에 내 배움이 세득해야 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점점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시편의

기도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학적이에요. 어 시가 그렇듯 그 안에 깊이는 내공이 있습니다. 또 문학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드러나는 것만 보면 때로는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인간적입니다. 특별히 요즘에 시편 읽어 보시면 굉장히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예. 시편 기자들 보면 우리 굉장히 아주 종교적일 거로 생각하지만 아 가끔은 표현들이 거칠잖아요. 저 원수의 허리를 꺾어 주십시오. 막 이런 표현을 막 하지 않습니까? 네. 일상적인 감사이고 탄식인데 그 안에 또한

시인의 신학적 깊이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멋있어요. 어 시편을 공부하다 보면 시편에는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네. 한번 넘겨 주실까요? 네. 네.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시원시 역사 더 많은 것이이 안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 시편의 장르를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시편을 배우게 되면 가장 먼저 하는게이 시의 장르는 뭘까를 구분하는 연습부터 합니다. 여러분이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시가 뭘까요? 찬양시, 탄식.이 이 중에 하나가 학자되거나

불륜하지만 대략 1에서 많으면 1을 차지한다고 보는 시가 있습니다. 그거는 탄식 씨예요. 네. 역시 우리의 아 우리 리액션 대왕님께서는 오늘도네 생존에 계십니다. 네. 어 사실 우리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여러분 기도할 때 무슨 기도를 내가 제일 많이 하나? 기도가 각자고 하는 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찾을 때 어떤 기도를 제 많이 하나 생각해 보면 감사하고 찬양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죠. 근데 때로는 우리가 감사를 선택하고 고백하고 찾는 것이라면 일상 중에 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향해서 내뱉는 것은 때론 탄식일 확률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 원망, 불평, 탄원 이런 것들을 우리가 쏟아놓게 되는 거죠. 그래서 탄식씨가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시도 탄식 씨입니다. 또한 시편을 이해할 때 우리가 장르 다음으로 한번 생각해 볼 것은이 씨의 배경을 여러분이 생각해 보는 것에 있습니다. 시인이 지금 어떤 상황에서이 실을 썼을까? 이걸 생각하면 실을 더 깊이 공감하고이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기 더 쉽기 때문입니다. 뭐 예를 들어 여러분

어 고려말에 뭐 이방언과 정몽주가 주고받았던 시가 있죠. 뭐죠? 네. 하여가 야, 이런도 어떠 저런도 어떠하리. 그냥 나랑 잘 살아보자라고 이렇게 꼬셨더니 정몽주가 단신과 예, 나는 님한 나의 마음 변할 수 없다. 우리가 그 역사를 보면 아, 그 주고받음이 어떤 마음인지가 더 느껴지는 거죠. 이렇듯 시가 그 안에 있는 배경을 할 때 더 깊이 읽힙니다. 시편도 마찬가지예요. 오늘시는 6편은 다윗이 씨입니다. 먼저 우리가 한번 그럼이 씨 전체를 한번 읽어 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제와 자매가 한번 나눠서 읽어 보면 좋겠는데요. 우리 형제들이 파란색으로 돼 있는 어 구절을 그리고 자매님들이 하얀색 구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맨 먼저 표재는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노란색 시작.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떨오니 나를 보시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에까지니까 여호와여 나의 영을 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울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눈물로 내 상을 내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척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너희는 다 나를 하라.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드리셨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모든 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신이 떨어 불러가리로다. 아멘. 네.이 이시는 다윗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어떤 신은 어 표제가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거기 작자가 나와 있지 않은 경우도 어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도들이 회개할 때 어 즐겨 고백하던 일곱 편의 씨가 있는데 시편 6편이 그중에 첫 번째 씨입니다. 사실 지난주부터 묵상했던 시편 3편부터 7편까지가 모두 탄식입니다. 6편은 그 탄식시 모음 가운데 가장 중심에 또한 있고요. 오늘 묵상 본문인 8편부터는 찬양시 8편은 찬양시로 아 바뀌게 되었습니다.이 6편을 분석해 보면 3등분에서이

시를 볼 수가 있죠. 1대 3절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이고 또한 4절부터 7절은 자기의 고통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이고 8절 10절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확신을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탄식 씨가 가지고 있는 기본 틀이 이와 같습니다.이 시혜의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가 유추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다윗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여러 흔적들이 있는데 뭐 대표적으로 아 사울에게 쫓을 때 지은 시가 아닐까? 혹은 밧세바 사건 이후에 뭔가

하나님 앞에서 책망받을 때 지은 시가 아닐까? 압살롬이 반역했던 시기에 지은 시가 아닐까? 혹은 그 외에 들어가지 않지만 다윗이 중병에 걸렸을 때나 원수들의 공격을 받던시기 등이 거론됩니다. 근데이 중에 하나를 딱 꽂집을 수 없는 이유는 어떤 시들은 표재에 아예 이렇게 박혀 있어요.이시는 압살롬에게 피할 때 있던 시다. 혹은 다윗이 나단에게 책망받은 후에 지은시다. 이렇게 명시돼 있으면 정확하게 거기에 해당하는 시지만 6편은 그런 정보가 있지 않아요. 다윗이 지시지만

다윗이 사용했던 어떤 어 이런 굉장히 슬프고 어려운 순간에 대한 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고 이것이 어떤 시일까는 어느 정도 상상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 삶속에서 어떤식이 하나님에 대한 탄식과 또한 의탁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읽으면서 시라고 보면서 읽으면 또 나의 삶에도 이렇게 같은 마음이 있을 때 이씨가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내용 깊이게 살펴보셨는데 3등 문대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편부터 1 3절에서

시인은 주의 진노로 징계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만나면 항상 우선적으로 물어봤던 것이 있었습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시는게 아닌가? 이거였어요. 저는 이것이 꼭 나쁜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보면 이런 흔적들이 나와 있으니까요. 제가 가끔 이렇게 몸이 너무 아프면 저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볼 때가 있습니다. 혹시 이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 주시는 메시지가 아닐까? 혹시 회개하라고 나에게 주시는 사인이

아닐까? 내가 못 알아먹고 있으니까 이런 거 아닐까?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진짜 회개할게 있으면 그걸 막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아, 물론 이것이 항상 우리의 모든 질병이 또는 만나는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러나 아, 그리고 저는 모든 질병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어, 주어지는 어떤 결과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죠. 이걸 우리가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을 것은 뭐냐면 우리가

믿는 선하신 하나님은 내가 때로는 깨어진 세상에서 마주하는 어떤 고통과 혹은 질병을 통해서라도 필요하시다면 우리를 깨우치실 수도 있고 내가 엇나가 있는 것을이 사건과 맞물려서 교정하시는 계기로 삼아 주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게 지금 무슨 얘긴지 이해되시나요? 제가 최근에 알았던 질병이 식중독이었는데 하나님이 저를 위해서 식중독을 음식이 내렸냐? 저 이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예. 그거는 얼마든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고 누군가의 관리 소홀이나

다행히 저는 그런 주인은 아닌 거 같지만 주인이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철지한 음식 팔다가 깨워진 상에서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다만 제가 믿는 건 뭐냐면 그게 하나님이 주신 어떤 것은 아닐지라도 그걸 통해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내 고난과 내 질병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절망, 내 잘못과 전혀 관련 없었더라도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분도 어 하나님인

거죠.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시인은 수척하고 뼈가 떨린다라고 고백합니다.이 수척하다 뼈가 떨린 것은 지금 단순한 피곤함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진짜 말라가고 있다는 의미 뼈와 밑에는 영혼이 떨린다고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그런 시인의 고백입니다. 즉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무너지고 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라는 고백인 거죠.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까.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탄식 문장입니다. 여러분, 근데이 문장 여호와 어느 때까지니까가 불신앙의 표현이라고 보세요. 아니면 믿음의 표현이라고 보세요. 네. 믿음이죠. 왜냐면이 일을 해결하실 분이 내가 기다리고 의지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그랬듯이 어 원인이 하나님은 아닐 수 있어요. 그러나이 일을 해결하실 분이 하나님이란 것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 가운데 의자할 뿐이 그에게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이어서 4편 4절부터

7절도이어서 보겠습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 여호와 연결이 끊어져 있다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끊어진게 아니란게 많지만 끊어진 것처럼 하나님과 뭔가 어긋나 있거나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죠. 돌아와 건져 주십시오라는 표현이 그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하지 기억하는 일이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끊어진 상태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번역은 좀 더 쉽게

풀어서 이렇게이 부분을 표현하는데 죽어서는 아무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시인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냐면 나는 살아서 하나님과 연결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시인이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습니다. 당연히 과장법이겠죠. 네. 눈물로 침상이 떠다닐 정도가 된다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그러나이 의도는 명확합니다. 실제 표현이지만 그는 밤마다 잠들지 못할

정도로 지금 많은 눈물과 어쩌면 슬픔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역은 7절까지도 이렇게 눈물로 묶어서 표현하고 있어요. 7절을 세 번역을 읽어보면 사무친 우울하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살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즉 지금 내가 어쨌든이 너무나 어렵고 나의 원수가 분명히 있고 그 모든 고통의 상황 속에서 내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이 계속 지금 눈물 가운데 지내고 있다고 하나님께 내 심정과 내 상황을 털어놓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부분 8절부터 10절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사실 상황이 바뀐 건 아니에요. 상황이 바뀌었다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병이 나왔다는 표현이나 원수가 사라졌다는 표현도 없어요. 다만 그를 전혀 다른 고백의 터전으로 가게 한 것은 하나입니다. 믿음의 확신이었어요. 바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다라는 확신입니다. 시는 지금 내가이 털어놓고 있는 나의 고통과 나의 절규를 하나님이 듣고 계시니 이게 그가 다른 지경

넘어갈 수 있는 확신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만 들으시나요? 하나님 우리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에요.이 말이 시편에 보면 우리의 울음까지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의 울음을 하나님은 들으세요. 여러분이 기도하러 와서 때로는 하나도 기도 못 해도 괜찮아요. 그냥 그 슬픔 가운데 때로는 눈물만 흘리고서도 그 울음을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오늘 탄식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물을 아시고 내 마음을 아시고 지금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이것을 털어놓는 나를 아시니 그러면 됐지. 그럼 바뀔 거야라는 마음이 시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이 시편이 가진 오늘 시편이이 기자가 가진 기한 믿음을 봅니다. 어 중요한 것은이 짧은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을 고유한 이름인 여호와를 몇 번 부르는지 아십니까? 여덟 번이나 사용합니다.이 10절 가운데 여덟 번이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지금 고통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시인이 바라보고 붙잡고 있는 거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안팎해 문제가 아니라 그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내 기도를 들으면 그것으로 되었다라는 믿음.이는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지 않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분명히 연약함을 갖고 있어요.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특징이 그거잖아요. 다윗은 왕이었는데 하나님 앞에서 한번도 왕처럼 군 적이 없어요. 어린아이 같습니다. 그는 포장지 않는 연약함과 고통을 하나님께 그대로 가지고 나아갑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탄식과 눈물 쫓조차 하나님을 향해서 흘려 보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늘 하나님께 그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놓치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환경 분명히 버겁죠. 이게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괜찮을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신앙이 뭔지 안다면 환경이 아니라이 환경과 내가 주님을 놓치는게 더 큰 위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아, 내가 주님만 놓치지 않으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고 내 기도 듣고 계시면 나는 괜찮아라는 믿음은 바로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이 고난 상황에서이 상황이 해결될 것이다라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계산을 마친 뒤에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머물렀더니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생겼고 하나님의 함께하신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서 나의 내면에 나의 삶에 체득화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신앙이 조금 더 자라야겠다라고 하거든 하나님 앞에 그냥 머물러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때로는 내가 하고 있는 말이 그렇게 논리적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냥 내 마음을 가지고 내 기쁨이든 내 슬픔이든 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머물러 본다면 그것이 여러분이 내가 가지고 꿈꾸는 나의 신앙이 하나님 안에서 더욱더 체득화되고 나의 내면화 되는 나의 삶에 드러나는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랑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자라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거 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이 아는 것만으로 잘하진 않아요. 많이 아는 거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자라갑니다. 물론 알지 않고 머무는 것만으로도 한계가 있을 거예요. 내가 아는 신앙을 가지고 그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만큼 엎드리고 그만큼 붙드는 것만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흘러 적실 줄로 믿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지막 고백하듯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물러갈 것을 그는 믿고 있습니다. 어쩌면 기도를 하면서 그의 내면의 용기와 믿음의 용기와 믿음으로서 그런 믿음의 선포로 그 안에 차오른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이 기도의 힘이기도 해요. 우리가 기도 나갈 때 두려움과 눈물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지만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말씀이 주는 하나님이

함께하며 주는 위로와 용기가 생겨나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후 이전과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결국이 기도 핵심은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이 기도의 시간 수요 묵상 기도에 이제 말씀을 듣고이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로 나아가는 시간이죠. 우리도 오늘 한번 그 마음으로 같이 나아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고 풀어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그 모든 것에 답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 믿음을 가지고 시인처럼 나아가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다윗처럼 설명되지 않는 고통과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그조차도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고 우리의 울음을 들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우리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오늘 그 주님이 함께하신 가운데 그 임 가운데 회복과

용기를 얻는 그런 귀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Ye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