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드러내라

2026-07-05 · 베드로전서 2장 9, 16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매월 성찬예배 주간에는 ‘공동체’에 관한 설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2월에는 <새 창조의 모판, 에클레시아>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3월부터는 우리교회의 ‘사명선언문’을 하나씩 설교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선언문에는 크게 3가지의 키워드가 있지요. ‘사귐’ - ‘말씀’ -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도 순서대로 <사귐의 신학>이라는 설교와 <오직 말씀>이라는 설교를 다뤘습니다. 그리고 5월부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돌려드립니다>라는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 개념’을 다룬 설교였습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 안에서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으로 이해했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 통치’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사후에 대한 초점도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 나에게 임한 통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실제적 삶’이 무엇인지를 다룬 설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성전을 중요시 여기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수호하고 싶은 신앙적 틀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성전을 앞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준이 중요했기에, 그것을 흔드는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도 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스데반은 모두 자신들을 죽이는 그들을 향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립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입니까? 성전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도 정작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기분이 태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사는 것임을 다뤘습니다.

이렇듯 지난 두 편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과, ‘실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사명선언문의 고백처럼, 그 나라를 ‘경험하고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월요일이죠. 1박 2일로 인천에서 한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교단 목사님들을 위해 진행하는 <하나님 나라> 세미나였습니다. 강사로 오신 분은 ‘상하이한인연합교회’라는 3,000명 이상 모이는 대표적인 한인교회 목회를 하셨던 ‘엄기영 목사님’이었습니다. 상하이에 부임하자마자 무려 20년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꾸준히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분이 나중에 사랑의교회 청년부 수련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의했던 것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내가 선 곳, 거룩한 땅]이라는 책입니다. 아마 읽어보시면 제가 가르치는 것과 굉장히 비슷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하나님 나라’를 책을 통해 공부하셨는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로 꼽는 분이 ‘양용의 교수’였습니다. 아시겠지만 저의 은사님이죠. 그래서인지, 저와 결이 너무 같아서 마치 동문 선배님을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1박 2일간 하나님 나라를 나누고 왔습니다.

이분이 강의 중 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현재 은퇴 후 한국에서 사역하며 이동할 때나 쉴 때나 늘 방송 설교를 듣는데, 방송 설교의 95%는 ‘위로 설교’라는 것입니다. 물론 위로도 필요하죠. 이분이 제기하는 질문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위로를 잘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인가? 자신이 느끼기에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하는 설교가 별로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삶이 너무 지쳤기에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다리가 부러졌는데, 수술은 하지 않고 아프지 않게 진통제만 주고 있다면 그것이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위로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과 진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죠. 그리고 결국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답을 얻어야 합니다.

사귐의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단순무식합니다. 우리가 지난 7년 동안 매일성경의 묵상 흐름에 맞춰 그대로 주일설교를 했던 것은 성경 66권 어디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가 연구해서 잘 전하면, 거기에 답이 있다고 믿는 것이죠.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그냥 단순무식하게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하는 설교자이고 싶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성경의 핵심주제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의 핵심 주제

(행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의 시간 동안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성경에 보면 500명의 제자를 만나셨다고 합니다. 왜 만나셨을까요? 남은 사람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복음에 속한 삶을 경험하며, 그것을 전하는 사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딱 40일의 시간만 이 땅에서 주어져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시간을 허투루 쓸 수가 없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40일간 하셨던 이야기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중심사상,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13권을 쓴 사람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가장 체계적으로 잘 설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사역 가운데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참 대단하잖아요. 하루도 그렇게 밤늦게까지 강론하는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3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날이 새기까지 말씀을 나눕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유두고 사건을 통해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저는 가장 강력한 위로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진짜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 삶에서 드러난 사건이죠.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 받은 유두고가 위로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는 표현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에 작동해서 날 치유합니다. 날 변화시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주는 힘을 받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먼저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우릴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함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에 자신을 삶을 드렸던 바울. 사도행전은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 주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행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가르치던 것,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까지 전하였던 것,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는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통치’이고, 우리의 통치자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나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클루지오’라는 기법이 많이 쓰입니다. 어떤 이야기의 가장 앞과 가장 뒤에 같은 단어 혹은 같은 개념을 넣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 그 안쪽에 있는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법입니다.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사도행전 제일 앞은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 그리고 사도행전 제일 마지막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사역입니다. 앞뒤가 모두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이야기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사도행전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 로마까지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 그중의 핵심이 ‘팔복’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구절과 마지막 구절도 이렇습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결국 팔복은 ‘천국’이 누구의 것인지를 보여주는 인클루지오입니다. 그 안에 있는 여러 내용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이 모든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깨달을 때, 위로를 얻습니다. 내가 의를 위하여 박해받을 때, 이런 관점을 놓치면 그냥 나는 고난 받는 불쌍한 삶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깨달을 때 내 삶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를 위하여 박해받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존재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은 ‘헌신’이 아니라 ‘상식’이 됩니다.

2. 하나님의 통치가 주는 변화

지난 2편의 하나님 나라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 개념’과 ‘실제적 모습’을 이해하는 설교였습니다. 두 편의 설교를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실천은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지난주 참여했던 하나님 나라 세미나에서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요약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며,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왜 우리교회가 이름을 ‘사귐의교회’라고 지었는지, 왜 우리가 사명선언문을 이렇게 고백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종종 느끼는 것은 성경을 교과서로 삼는 사람들은 다 같은 꿈을 꿉니다. 교파도 상관없고, 배경도 상관없습니다. 세미나의 강사 목사님은 ‘총신’이라고 부르는 장로교 합동에서만 신학을 공부하신 분입니다. 그래도 이해하는 신앙이 같지요. 이분이 사역하셨던 상하이한인연합교회는 ‘초교파’라서 모든 부교역자가 다 교파가 달랐다고 합니다. 뭐 어떻습니까? 교파가 다르다고 진리가 다릅니까? 우리의 복음은 하나인데요.

제가 ‘성경신학’을 공부했던 학교도 초교파입니다. 제 동기로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침례교, 성결교가 다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가끔 내가 어떤 것에 부딪힐 때 교파 뒤로 숨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 출신이라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는 그것을 초월합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분명하게 얻을 수 있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천국)를 죽어서 가는 어떤 물리적 장소로만 이해하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모든 삶과 시간은 ‘세상’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로부터 그 통치안에 있는 나의 모든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비록 아직 이 세상에 속하였으나, 이 또한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기에, 지금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고자 합니다.

반면 사후에 들어갈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은, 현재 삶의 목표가 “천국에 무사히 탈락하지 않고 들어가는 것”에 집중되기 쉽습니다. 결승선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율법적 기준이 자꾸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일성수”나 “십일조”, 혹은 “금주/금연”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적 기준이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 앞에 살아가는 것에서는 도리어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주일성수. 7일 가운데 1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7일 가운데 1일만 잘 드리면, 나머지 6일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1/7을 하면 내 의무를 다한 것입니까?

십일조. 10분의 1의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만 잘하면, 나머지 9/10는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입니까? 1/10을 하는 것이 내 의무를 다한 것입니까?

금주와 금연. 술/담배 안 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이 됩니까? 오히려 내 마음과 생각에서는 술에 취한 것보다 더 다른 것에 취해있고,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통치라면, 그 통치는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일성수는 내 삶의 7일 전체를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그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주일의 예배와 말씀을 6일 내내 붙들고 살아가는 것까지가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 우리교회는 청지기 헌금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내가 물질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는 고백입니다. 10/10 전부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그렇게 물질의 사용과 관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고백으로 1/10을 드리는 것입니다. 1/10을 했으니, 9/10는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청지기 헌금을 드린 것이 아니라, ‘세금’을 낸 것입니다. 우리의 통치는 헌금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따르는 것입니다.

술/담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율법적으로 이것을 해도 되냐, 안 되냐고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왜 하는가?”입니다. 이것이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더 자유롭게 하는가, 더 사랑하게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복음을 위해 사는 데 유익하면 하십시오. 저는 그렇다고 느끼지 않아서 안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기독교인이라서 양심이 이미 술 마시지 않는 것에 맞춰져 있기에, 불편하고 괴로워서 못 마시는 양심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기쁨과 슬픔과 고독을 술로 풀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머물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짜 신앙은 하나님께 일부를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는 신앙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에서 그분의 뜻을 묻고, 그 앞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회사 안에 신우회를 만들고, 수입의 몇 퍼센트를 헌금하면 내가 해야 할 것을 다 한 것인가? 이것도 대단하죠. 어지간한 사람은 여기까지도 못하죠.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은 이렇게 어느 정도를 하는 것에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의 가치관 자체가 변혁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쫓는 것입니다.

수많은 크리스천 기업이 왜 실망을 안겼습니까? 좋은 일 많이 했습니다. 구제도 많이 하고 선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진짜 하나님의 뜻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묻지 않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무너지는 부분이 많았고, 이익을 위해서 양심을 저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왕이시구나” 이것이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일터에도 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가 정말 세상에 드러납니다.

최근에 기독교보다 천주교나 불교가 조금 더 선호도가 높은 통계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그 종교들이 갔을 때 더 ‘종교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당이나 불당에 가면, 그 확연한 종교적 미장센을 통해서 그 안에 있어도 같이 거룩해지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거룩은 장소와 직분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가장 거룩한 예배당에서, 가장 거룩한 직책처럼 느껴지는 목사의 신분으로도 얼마든지 세속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불순종’하고 있다면 그곳이 가장 세속적인 곳입니다.

성속. 거룩하냐 세속적이냐. 이것은 장소나 직분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것이 거룩입니다. 순종이 거룩이고, 불순종이 세속입니다. 교회에서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일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자기 의가 커져간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겠습니까? 가장 세속적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그곳이 어떠하든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때로는 불리해도, 때로는 어려워도 순종하며 삶으로 지켜나간다면, 세상 속에서도 여러분은 가장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국 하나님이 왕이신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은 결코 이론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해봐야 경험합니다. 순종해야 경험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순종으로 내 삶에 임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드러내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을 제사장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에는 ‘축복의 특권’도 있지만 ‘특별한 사명’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사명은 무엇입니까? 가라고 하는 곳으로 순종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메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신약에서 교회가 됩니다. 열두 지파로 시작된 제사장 나라가 신약시대에는 열두 사도에 의한 교회 공동체로 계승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며 거룩히 구별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 아래 있습니다. 우리도 비록 이전까지 어두운 세상의 통치 아래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통치를 이 땅에 펼치셨기 때문에, 어둠 가운데 드러난 그 빛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빛 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특권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이제 빛으로 빛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가 어려우신 분들 있죠. 제가 자유를 드릴게요. 전도하지 마세요. 전도 안 하셔도 돼요. 전도는 여러분이 우리교회에서 훈련을 잘 받고, 내가 복음을 설명하여 줄 수 있게 되면 그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전까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게 전도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강력한 전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기죠.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어떻게 알까?

당연히 말씀을 통해 아는 것이 가장 풍성하고 가장 안전합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것,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이 나침반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것을 잘 못하겠다. 어렵다”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조금 더 쉽게 적용하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직 말씀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하나님이 붙여주신 믿음의 사람을 따라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고민하는 그 순간순간마다 “우리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우리 리더라면 어떻게 할까?”, “내 이끄미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부족함보다는 그가 애쓰는 모습을 보시고, 여러분도 최선으로 그렇게 도전해 보십시오. 그리고 공동체에서 나누며 점검을 받으십시오.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내가 완벽하게 진리를 다 이해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지 않는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를 알면 하나를 하면 됩니다. 그것이 셋을 알고 하나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느끼는 사랑, 내가 깨달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내 삶으로 화답해 보십시오. 그것이 내 삶도 날마다 구원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마무리: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자유

(벧전 2:16)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복음에는 수많은 역설이 존재하죠. 이 말씀도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자유인으로 살라’고 말하며, 동시에 ‘종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이 상반된 이야기도 말씀 안에서 진리의 가르침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없으면, 아무런 통치 아래에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갈 때,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의 평가와 흔들린 기준들이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정확하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세상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를 괴롭히는 그 무거운 멍에를 벗어버리고, 내 멍에를 지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함께 따라 해봅시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안에 사는 것은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만큼 드러날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우리가 빛이 되었는데, 어찌 우리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빛 된 존재로 빛이신 하나님께 나를 맞추어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안에 사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교회의 사명선언문은 그것을 고백하며 꿈꿉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주는 구원을, 회복을, 충만함을, 위로를, 그리고 그 영광과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깊이 경험될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이곳에서 우리를 바꿔주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 앞에서 채움을 입었다면, 이제는 흩어진 삶, 가정, 직장, 학교 등으로 나아가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 주십시오.

하루에 단 하나라도 “내가 예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패배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승리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