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잃어버린 나라를 돌려 드립니다

2026-05-03 · 골로새서 1장 13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성찬예배를 드리는 날은 공동체에 대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두 번의 성찬예배를 통해서는 우리 교회 교회론의 기초이자 신학의 방향이 함축되어 있는 ‘사명 선언문’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오늘 사명 선언문의 세 번째 부분을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사명 선언문의 마지막 부분,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경험하고 드러낸다.” 그러므로 오늘 다룰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교회는 개척 9년 차의 교회입니다. 개척을 해서 5년을 버티는 교회가 많지 않고, 또 그중에 자립하는 교회는 5%도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찾아오는 목회자분들도 제법 많고, 개척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나누게 되곤 합니다.

그러면서 저 스스로도 내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개척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크게 3가지 마음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교회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진짜로 우직하게 믿는 신앙을 갖고 자라왔고, 성경신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성경 속에서 말하는 그 교회가 현실에서는 잘 경험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하는 그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내 삶을 드리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텐데, 제가 교회에서 하는 일이 저에게 그만한 의미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 제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의 그 교회가 진짜 이 시대에도 가능할까? 이것을 제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려면 맨땅에서 시작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개척의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는 가나안 성도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본래 한국에서 목회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청년 시절 제 눈에는 한국에는 교회가 너무 많고, 저는 복음이 필요한 곳에 가서 제 삶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서 가나안 성도가 되는 현상이 제가 있는 사역지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교회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을까? 제가 보기에 전통적인 교회에 어려움을 갖고 이탈한 사람들이 그 교회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넘쳐나는 한국이 저에게 선교지로 다가온 것이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신학을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던 2010년 전후로 저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당시까지 성경을 보는 가장 보편적인 관점은 ‘구속사’였습니다. 즉, 성경의 주제가 ‘구원 이야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은 구원자인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야기, 신약은 구원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달걀의 노른자는 맞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는 여전히 핵심이죠.

그런데 그 관점으로만 보면, ‘왜 구원하시는지’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 나는 성경의 요구를 다 이룬 것인데,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없습니다. 기존에 한국에서 성경을 보는 방법론이 구속사였기에, 그 관점에서 성경을 조금 이해하고 있었던 풋내기 신학대학원생인 저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 질문에 답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신학의 지평이 넓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기반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해석할 렌즈를 얻은 것이죠. 단순히 성경의 관점이라고 여겼던 ‘하나님 나라’가 이후 이어진 Th.M 공부 과정을 통해 더욱 세상과 삶과 교회를 이해하는 렌즈로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신학에서 신앙으로, 이론에서 삶으로, 나에서 공동체로 확장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했던 학교를 누군가 일컫기를 성경 66권을 공부하러 들어가서, 교회론을 배워서 나온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연히 제 설교와 신앙의 방향은 전보다 더 선명해졌습니다. 다만 제가 머물고 있는 교회 안에서는 당시에는 다소 낯선 이야기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신학적 토론의 장이나 학술적인 모임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얘기가 되고 있지만, 지역의 교회에서는 너무 낯선 과도기가 2010년대였습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싶지만, 사역하는 교회의 성향에 따라서 그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맛본 진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고,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 개척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제가 2016년에 9년간의 부교역자 사역을 마치고, 개척을 결심하게 되었던 동기들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봤던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전해 보고 싶었고, 가나안 성도들이 올 수 있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그릇이 되고 싶었고, 제 가슴을 뛰게 했던 진리의 복음을 마음껏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몇 사람이 되든지, 적어도 하나님이 제게 만나게 하시는 영혼들과 이 3가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첫 번째 주보를 만들면서, 거기에 이 비전들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사귐의교회 비전>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사귐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사는 교회

가나안 성도에게 희망이 되는 교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교회

희년정신으로 순종된 공의를 행하는 교회

이것이 지금의 형태로 단순화된 것입니다. 사귐-말씀-하나님 나라. 왜냐하면 이 3가지만 말해도 사실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아시겠지만, 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 혹은 특강을 이미 세 번이나 아주 밀도 있게 진행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첫해에 18주 시리즈 설교로 다뤘습니다. 그때 함께하고 있던 경수 형제님이 이것을 책으로 내달라고 했었는데, 아직도 못했습니다. 조만간 할 예정입니다.

개척 3년 차였던 2019년에도 7주간 2시간씩 특강을 했습니다. 그리고 2022~2023년에 걸쳐서 21회 시리즈로 설교를 했지요.

즉, 하나님 나라를 깊이 다루고자 하면 반년은 설교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안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내용과, 이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눠보고자 합니다. 자연스럽게 다음 설교는 ‘드러낸다’는 부분을 다루게 되겠죠?

우선 기초적인 이야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이걸 한 번만 잘못 배우면, 신앙 전체가 틀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부터 신약까지 이어지는 개념이었습니다. 다만 구약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 개념이 녹아져 있는 것이죠. ‘원죄’, ‘삼위일체’, ‘회심’ 이런 단어들도 성경에 드러난 단어가 아니라, 녹아져 있는 개념들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는 원칙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원칙을 무시하고 성경을 해석하면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저자의 의도 파악’입니다. 성경은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들었는데요. 내 기분에는 이렇게 들리는데요.”

듣는 자마다 해석이 다르고, 감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 답을 찾자는 이야기는 내가 원하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나쁜 해석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억지로 성경을 왜곡해서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제가 신학대학교 다닐 때,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성경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려주겠다며 한 구절을 찾아서 읽게 했습니다.

(사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기에 여기에는 빠진 것이 없고, 다 짝이 맞아서 스스로 증명해 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66권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이것들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막 성경에 대한 자부심이 샘솟습니까?

저는 성경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에 완전하게 동의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성경 말씀은 절대 그 주장의 근거 구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성경의 완전함에 대한 근거 구절로 지금 듣고 계신다면, 그것은 저자의 의도보다는 독자의 의도입니다. 왜냐하면 단언컨대 저자는 그런 의도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이런 성경해석의 오류는 앞뒤 문맥을 조금만 읽어보거나, 다른 번역본만 보더라도 실수하지 않습니다.

(사 34:16, 새번역) 주님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님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 66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문맥이 아닙니다. 짐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면, 저자는 매우 황당해할 것입니다. 문제는요, 이런 일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때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성경해석의 대원칙입니다. 저자의 의도. 기록한 자의 의도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 기록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사람 중에도 종종 실수하는 오류도 있는데요. 아마 이 구절,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눅 17:20b)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지금은 조금 이 이야기가 유명해져서 예전만큼은 실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한때 이 구절을 근거로 ‘심령 천국’, 즉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여기에는 한계와 오류가 함께 존재하는데요.

우선 한계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한다고 했을 때, 갖게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주어지는 ‘평안’ 정도로 축소되는 결과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과 절망을 넘어서서 평안하게 되었으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여러 열매 중 하나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내 마음 편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지극히 우리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작동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너무 중요해요.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내가 속하여 살면, 하나님이 내 안에 행하시는 일 가운데 분명히 평안과 회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주권 아래로 가서 새로운 삶을 맛보는 것이지, 주님이 나의 평안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에 대한 축소이고, 그 생각의 틀 안에서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할 수 없는 오류는 저 말씀은 결코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구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온전히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물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새번역 성경이 조금 더 선명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눅 17:21 새번역)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여기서는 ‘안에’라는 단어를 ‘가운데(among)’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모습을 생각해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쌓고 논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2가지를 말씀하신 것이죠.

우선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국가’나 ‘정치 체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희 가운데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다. 어떤 분들은 “이게 무슨 소리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세계 안에 구축된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라는 ‘영토’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의 개념입니다.

성경에서도 영토의 개념을 갖춘 ‘나라’ 개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에레츠’, 헬라어 ‘코라’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는 영토의 의미를 갖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에 사용된 단어는 구약에서는 ‘말쿠트’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바실레이아’가 됩니다. 이것을 영어로 바꾸면 ‘Kingdom’이 됩니다.

‘king’은 왕이죠. 여기에 ‘-dom’이 붙으면 ‘상태, 지위, 권할, 영역’을 나타내는 다양한 언어가 됩니다. 이것은 ‘Country’나 ‘Nation’이라고 부르는 한국, 일본, 중국, 이런 나라 개념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왕의 지배권이 미치는 상태라는 동적 의미가 더욱 강합니다. 이것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왕의 다스림’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더 세밀하게 직역했다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 되심, 하나님의 통치’라고 표현할 때, 히브리어 ‘말쿠트’나 헬라어 ‘바실레이아’, 더 나아가 영어 ‘Kingdom’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권이 바리새인들이 둘러싼 그곳에 임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쩌면 이 표현 자체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메시아적 선언이기도 한 것이죠.

왕이 있으나, 바리새인은 그 통치를 거부하기에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다스림 안에 내가 있는가?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오류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씁쓸함도 생깁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알 수 있는 이런 말씀에도 왜 해석의 오류가 생길까? 어쩌면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은혜집착주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을 봐. 하나님 나라가 네 안에 있어.” 얼마나 강력합니까?

왜 신학 교수님도 실수하는지 아십니까? 누군가 실수하여 전한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앞서 언급한 이사야 말씀은 여전히 몇몇 책들에서 성경의 정경성에 대한 근거 구절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또한 여전히 누군가는 누가복음 말씀을 본문으로 “당신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라고 설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보다 심각한 것은 ‘천국’과 관련된 것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성경이 들어오기 전부터 ‘천당’이라는 표현은 모두에게 익숙했습니다. 이는 불교나 무속신앙에서 ‘하늘 천, 집 당’자를 써서, 사후에 가는 좋은 곳(극락)을 의미하는 단어로 민중들에게 익숙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과 초기 복음 전도자들은 낯선 기독교 세계관을 조선 민중에게 가장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이미 익숙한 ‘천당’이라는 단어를 전도 문구로 사용합니다. 이는 한국에 먼저 들어온 천주교에서 먼저 예배당을 ‘천주당’으로, 내세를 ‘천당’으로 번역해 사용한 영향도 큽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천국’과 ‘천당’이 같은 개념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초기부터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사실 천국이라는 표현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대체하는 용어입니다. 천국은 그래서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인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대놓고’ 부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체어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하늘’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조선의 왕을 ‘용’에 빗대어 ‘용안’이라고 왕의 얼굴을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인들은 ‘하늘들의 나라’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으로 한국어 성경에 사용되었던 것이죠.

그 천국이 한국에서는 ‘천당’이라는 이해와 맞물려, 이것이 당시의 강력한 전도 문구로 사용되며 유행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보다 ‘천국’이 더 부각되고, ‘예수 천당’이 구원의 핵심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복음의 핵심 개념은 그것의 대체어였던 ‘천국’보다 뒤로 물러났고, ‘천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천당’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가는 좋은 곳’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하나님 나라도 사후 세계에 가는 좋은 곳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혼이 머무는 사후 세계의 물리적인 장소를 말하고자 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사용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가 속하게 될 ‘하나님 나라’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영혼만 둥둥 떠서 가는 곳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 안에도 여전히 ‘천국’을 ‘천당’ 수준에서 이해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본다면 너무나 많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축소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걸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곳’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갈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다리는 것’은 익숙하지만, ‘사는 것’은 낯선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제가 되찾아 드리고 싶었던 진리의 강력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저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천당’으로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진짜 성경을 통해서 주고 싶은 ‘그 나라’, ‘그 다스림’은 훨씬 더 풍성하고 실존적이며 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런 이해가 많은 책과 유튜브에 있고, 하다못해 AI만 돌려봐도 저와 비슷하게 설명을 하니 제가 보호받지만, 2010년대에 이런 가르침을 제가 나눌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마 이것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유행이 되지 않았더라도, 저는 지금처럼 저에게 맡기신 영혼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내세에 가는 천당으로 오해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도 그 내세에 가기 위한 수단이 될 우려가 있고, 지금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권은 전혀 누리지도, 경험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퍼즐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의 개념이 축소되거나 잃어버리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저의 현재적 삶에 대한 이유와 책임을 갖게 만드는 삶의 전환이었고, 지금도 제가 구원에 속하여 있다고 믿지만, 여전히 제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가장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지 말해주고 설명해 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말할까요?

(골 1:13)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서 고백합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의 여러 가르침, 삶의 방식, 성공의 기술, 행복의 조건, 가치관 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의 세계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잃어버리고 단절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제 우리의 주권을 들고 돌아갈 수 있는 왕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요, 나의 주인이라는 고백은 그냥 말뿐인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백이 있을 때 우리가 세상에 충성하던 삶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는 결단을 하는 것이고, 주님의 통치에 속한 새로운 정체성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분께 속한 존재들로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나중에 죽으면 천당으로 너희를 보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성도라면, 마땅히 교회라면, 그 시작이 회심에 있기 때문에, 회심한 자들은 이미 그 아들의 나라, 이미 그 아들의 통치 아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해있다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나중이 아닙니다. 이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옮겨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아직 주시지 않았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주셨는데도 못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왕이 왔는데,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지 못해서 삶이 안 바뀌고 있지는 않습니까?

선물을 택배로 보내줬는데, 그대로 풀어보지도 않고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선물을 풀어서 맛보고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그러라고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곳에 함께 있지만, 혹시 아직도 이 하나님 나라를 먼 미래의 것으로 소망만 하며, 지금 내 삶은 그냥 세상의 방식대로 나의 방식대로 살아가느라, 어느 것도 누리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분이 이곳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제가 설교하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그 하나님 나라를 돌려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복음의 놀라운 진리가 무엇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싶은 것입니다.

혹시 여전히 지금 제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의문이 있고, 반문이 있고 그런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에게도 반문이 있었고, 고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저를 성경 앞으로 더 이끌었고, 그 여정에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들을 저의 안내자로 붙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나라를 가장 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를 주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를 따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하여 주시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나라 안에 살아가는 행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언젠가 ‘갈 곳’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누가 나의 왕인가,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오늘 이 시간, 그 나라를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을 다시 붙들고 이미 열려 있는 그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