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

2026-06-07 · 사도행전 7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오늘은 조금 다른 장소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원래부터 ‘흩어지는 예배’도 드리고 ‘소그룹별 소풍예배’도 드리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는 교회입니다. 가끔은 특별한 예배를 통해 잊었던 것을 되새기고, 그 시간을 통하여 얻고 싶은 명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반대 상황입니다. 예배당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이번 주 예배를 바라보며, 상황과 환경 때문에 예배를 축소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최선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2020년, 옥정동으로 이사온 후, 한여름에 에어컨이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더운 날에 에어컨 없이 예배해야 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예배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는 예배당에 모일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워플과 더홉이라는 공간이 있음도 감사하고, 그리고 또 예기치 않았지만 2개의 공간이 추가로 허락되어, 원래대로 4개 부서의 예배가 동시 진행됩니다. 예측 못할 상황 속에서 주어지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지난 성찬예배에 이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사명선언문에 나오는 중요한 신학적 토대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분 중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교회도 건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또한 성경의 표현에는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건물에 갇혀계시지 않는다”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지 않으니, 나는 아무 데서나 자유롭게 예배하겠다”라는 이야기로 가는 것은 곤란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지만 공동체이고,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 의미가 내 방식대로의 자유로운 예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지금 우리처럼 예배당에 모이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분명한 신앙의 방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은 열두 제자를 통해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 후에 7명의 리더가 추가로 세웁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스데반이죠. 먼저 사도행전 6장을 살펴봅시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가 흔히 이들을 '일곱 집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행전은 이들을 집사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냥 ‘그 일곱’이라고 부릅니다. 집사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21장 때문인데, 원어로 보면 거기에도 집사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자, 특별히 헬라 출신의 7명의 사역자였습니다.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받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회를 세워가고 복음을 전합니다.

(행 6:8)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행 6:9) 그 때에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몇이 들고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

회당이라는 곳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 장소입니다. 예수님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대립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스데반도 예수님을 따르는 이처럼 비슷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들은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메시지로 이길 수 없으면 무엇을 합니까? 메신저를 공격합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아주 흔한 공격의 방식이죠. 그리고 이 일에는 언제나 거짓이 등장합니다.

(행 6:11)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예수님 때와 매우 유사한 전개입니다. 이들이 사람들을 선동하며 스데반을 모함합니다. 내용이 무엇입니까?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지점이 2개인 것입니다. 하나는 ‘모세’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행 6:13)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쉴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합니다.

(행 6:14)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율법’,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라는 것이 나오죠.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무시했다, 율법을 무시했다고 스데반에 대해서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두 번째 선동은 스데반이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힌트도 이 말씀에 있습니다. ‘이 거룩한 곳’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또한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나요? ‘성전’입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것은, ‘율법과 성전’을 스데반이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고발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이들은 스데반에게 같은 프레임을 씌운 것입니다. 어쩌면, 협박이죠.

그렇게 스데반은 마치 예수님처럼 대제사장 앞에 서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행 7:1)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물었다. "이것이 사실이오?"

정말 네가 율법과 성전을 무시했냐고 묻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신성 모독죄’였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으시며 뒤엎으신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일 것을 모의하거든요.

같은 상황, 어쩌면 같은 위기에 지금 스데반이 서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어떤 결정을 합니까? 그는 이 기회를 통해 복음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전한 스데반의 설교가 사도행전 7장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훑어갑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행 7:48a)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혹시라도 다윗이 오해할까 봐 가르쳐주셨던 내용 중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너무 잘 아시죠. 하지만 그 마음과 별개로 다윗을 위하여 분명하게 가르쳐주셔야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하나님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한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경배의 마음으로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 그 마음은 받아주세요. 그러나 오해는 거부하십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왜 이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그들은 ‘모세’와 ‘율법’을 동일시했고, ‘하나님’과 ‘성전’을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율법과 성전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로 바꿔서 말하자면, 성경도 필요 없고, 예배당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공부도 필요 없고, 교회의 사역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들의 견고한 틀 속에 갇혀버린, 자신들의 기준과 생각을 우상 삼은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 성전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는 하지 않은 채, 그것에 대한 견고한 자신의 고집을 주장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것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셔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그 완고함에 대해서 스데반은 깨우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았다는 것은 ‘목에 깁스를 했다’는 표현이죠.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귀가 막혀 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진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그렇게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그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와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반복해서 거절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거절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위선. 그들은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율법이 가리키던 분을 거절했습니다. 성전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성전의 주인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율법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선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행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요즘 말로 하면,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에 크게 긁힌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그들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율법을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뜻은 거역하고 있고,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어내고 돌로 쳐 죽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설교하면서, 첫째 아들과 같이 오해하는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다가 그들로부터 거부당하여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스데반도 그들의 마음에 상처가 날 이야기를 합니다. 미움받을 이야기를 합니다.

잠깐 우리가 이 부분에서 멈춰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스데반은 왜 그러셨을까요?

유대인들을 미워해서요? 아닙니다. 그냥 미워하는 것이면, 무관심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면 그분의 세계에서 그냥 계시면 됩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관심이 없으면, 논쟁의 자리에서 이런 설교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전하여 주고 싶고, 바로잡아 주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이죠.

실제로 이들이 유대인들을 향해 가진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볼 수 있는 장면이 삶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눅 23:34a)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의 용서, 그리고 스데반의 용서.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은 이조차 불편했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 스데반 에피소드에 한 사람을 툭 거론합니다. 바로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젊은 사도 바울이 있었지요. 그는 몰랐겠지만, 스데반의 용서하는 기도는 사도 바울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스데반을 죽인 무리 가운데 있었으니까요.

제가 오늘 스데반 이야기로 이미 설교의 절반 정도를 나눈 이유는, 이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설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라면, 바로 이 이야기에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하시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되심’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극락과 같은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찾아온 새로운 통치이며 새로운 관계입니다.

바울이 골로새교회에게 전한 편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성도란 “이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씀대로, 세상에 있는 악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옮겨진 존재입니다. 그 통치 아래 살아가고 있을 때, 그들을 ‘성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갈 때 얻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이 세상에 속해 있다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지요. 이것 또한 구원과 같은 개념이고, 하나님 나라와 같은 개념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내 삶의 물리적 자리가 바뀐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관계적 소속이 바뀐 것입니다. 천국에 거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땅에서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Connect’(연결)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7장은 누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누가 통치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각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르게 펼쳐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기분이 나쁘다고 스데반을 죽였고,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위해 진리를 전하고 희생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합니다.

우리가 ‘기분이 태도가 된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그 이야기를 성경적으로 풀면, ‘내 감정’이 나를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이 태도가 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하여 볼 것은,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느냐가 우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입만 열면, ‘율법’, ‘성전’, ‘모세’, ‘하나님’을 들먹였습니다. 자신들이 그 진리의 수호자인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종교적 냄새가 가득했고, 그들의 명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자기 욕망’과 ‘자기 기준’에 철저하게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복음이신 예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진리를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앎은 ‘깊은 사귐’을 의미합니다. 관계 맺는 것, 연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주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과의 참된 관계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님이 사망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죽음 이후에도 그 주님과의 관계 안에 살아갈 것을 소망합니다. 그것이 현재로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종교적 언어와 종교적 배경 안에서, 자신들이 진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율법과 성전과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해석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말하면서도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를 거절했고,

성전을 사랑하면서도 성전의 주인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스데반이 지적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믿고 있다.” 이 문제 앞에 우리도 서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이 어쩌면 신앙의 연차가 쌓이면서 은근슬쩍 빠져드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말로 포장된 자기사랑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하나님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포장된 자기 나라를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에 살아가기 가장 힘든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너무 강력한 왕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왕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시대의 멋진 고백들 뒤로 숨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앎보다 삶이 중요하다.” “우리는 교회에서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도 예배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저도 좋아하고 이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말들도 자칫 하나님보다 앞선 나를 변호하는 말들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바라보면, ‘앎’이 되지 않으면 ‘진리를 담아낸 삶’이 잘 될 수 없더라고요.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서는 예배 안에서도 내 마음을 드리지 못한다면, 흩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일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더라고요.

저는 예배가 더 간절한 이유는 제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에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품에 거하는 시간이 없이는 저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기 너무 어렵더라고요. 깨어진 세상을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 진짜 멋진 목표이죠. 그런데 예배의 충만함이 없이는, 또 그런 나를 다시 채워줄 공동체와 동역자가 없이는 나 혼자서는 백전백패더라고요.

요즘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여기저기 붙여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자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들과 함께 정말 하나님의 뜻에 다가서고자 힘쓰고 있는가? 자녀들에게 그런 삶을 전수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 나라를 먼저 알고, 관계 맺은 자로서, 내가 먼저 하나님 때문에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언어는 그냥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님이 왕 되신 삶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주님이 왕 되신 그 삶을 살아야죠. 내가 왕 되어 가정을 통치하려는 우상숭배와 싸워야죠. 자녀를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끌고 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존재로 더욱 귀히 여기며 맡긴 자로서의 책임과 맡기신 분에 대한 충성을 다해야죠.

또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또 자신이 준비하는 어떤 일에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 일에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내가 성공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진짜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진짜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서로에게 전해지고 있는가? 모여서 오히려 세상의 기준과 가치에 따라 행하면 같이 망하는 거죠. 교회 안에서도, 내가 왕이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는 사실 쉬운 것입니다. 몇 가지 오해를 거둬내고, 깨달은 그 몇 가지를 진짜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옳다는 것을 진짜 믿고, 나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 하나님의 통치가 내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갑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면서도 내 뜻의 범위 안에 있는 동안에만 맡기는 경우가 많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도 말씀하시면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뜻을 벗어난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 때, 그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는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내 뜻과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옳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도했던 나의 삶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삶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나의 삶에 경험되리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내가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삶이 우리를 수많은 깨어짐에서 구원합니다. 죄의 영향력에서 구원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지금까지와 다른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 작은 경험들이 쌓여서 우리가 더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믿음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합니다. 내가 늘 실패했던 사랑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경험한 작은 기쁨이 더 큰 사랑을 도전하게 합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의 결과가 주어지지 않지만, 그 길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가 나를 위로하고 채웁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깨어진 세상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삶을 더 좋은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사랑의 초청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 속에서 지쳐버린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나님 나라가 왔으나, 이미 임하여 우리를 초청하고 있으나, 고집스럽게 나의 나라를 내 방식대로 살아가느라 수고하고 지친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의 멍에 안에 들어와 쉼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기에 내 삶을 맡겨도 안전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멍에가 있어서 우리를 무겁게 하지만, 선명한 주님의 멍에 안으로 들어가 동행하면, 거기에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며 권면합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예배 공간 문제로 저도 조금 번잡한 마음도 있었던 한 주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외쳤듯,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갇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가 아닙니다. 내 삶의 왕좌에 누가 앉아 있느냐,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서 있느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방해 세력은 ‘나’입니다. 나의 생각과 기준을 종교적으로 잘 포장하여 합리화 할 수 있는 우리의 신앙적 경험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깨우쳐주고자 했던 가르침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삶이 아니라, 신앙이 태도가 되는 삶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입니다.

우리가 마음은 있지만 안 되는 순간들이 있죠. 그때는 오늘 설교에서 바라본 스데반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스데반은 그 왕을 보았기에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이 위대해서, 스데반이 남 달라서’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말합니다.

그의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해서, 이제 그가 온통 주님의 생각과 뜻으로 가득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스데반은 주님의 길까지 갑니다. 주님의 온전하심을 따라갑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갈까요? 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모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의 크기를 제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왕좌에서 내려오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개념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내 인생의 핸들을 내 힘으로 움켜쥐고 있던 그 고집스러운 손을 가볍게 내려놓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통치안으로 기쁘게 걸어 들어갑시다. 그리하여 이 깨어지고 불안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풍요로움을 날마다 맛보고 누리는 사귐의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