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나누는 자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것이 [새로운삶] 시리즈입니다. 기존의 [신앙기초] 시리즈는 썸네일이 나무의 뿌리가 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단단하게 서기 위해서, 더욱 풍성한 생명력을 누리기 위해서, 토대를 다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리즈는 이제 토양 위로 식물이 자라나는 장면입니다. 단단한 복음의 토대 위에서 이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실 것을 기대하십니까? 아멘.
지난 설교 내용의 핵심은 누구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성령’입니다. 특별히 성령께서 하시는 세 가지 사역에 대해서 다뤘는데요.
첫째, 성령께서 회심으로 이끄신다.
둘째, 성령께서 회심과 함께 내주하신다.
셋째, 성령께서 회심한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
사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성령’에 관해서 참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아직 선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제가 어린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능력’으로 이해했습니다. 특히 부흥회 같은 곳에서는 “불”이라는 이미지를 성령님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령의 성령의 불길 성령 불이야.” 흔히 “불로 불로”라고 하는, 성령에 대한 뜨거운 사모함이 한국교회의 중요한 흐름이었습니다.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을 이해하는 방식은 조금 더 성경적으로 선명하게 다듬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이 ‘능력’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성령은 ‘인격’입니다. 인격은 사귐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인격으로 이해하는 것과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잘 생각해 보면 ‘주도권’이 서로 다릅니다.
왕이 내게 오는 것과 내게 왕의 능력이 생기는 것은 다릅니다. 능력으로 이해하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나에게 있습니다. 나를 업그레이드 해주는 능력이 성령이 됩니다.
여러분. 슈퍼마리오 게임 아시죠? 마리오가 이렇게 가다가 아이템을 먹으면 능력이 생깁니다. 꽃을 먹으면 불을 막 쏜단 말이죠. 저에게 성령을 바라보는 마음이 딱 그랬습니다. 능력이 추가되고, 은사가 생기고, 이전보다 강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어떤 능력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시는 영이신 하나님입니다.
나를 레벨업 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저도 굉장히 늦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해가 정말 모든 것을 바꿔줬어요.
내가 성령님을 인격적 존재로 인식하고 나서부터, 제가 약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능력으로 생각하면 나는 성령님이 있는데도 왜 이렇게 약하지? 저의 한계와 무력함을 볼 때마다 더욱 작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격이면 내가 약해도, 아니 어쩌면 내가 약한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죠. 내가 약한 만큼 그분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내가 성령을 내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하나님의 뜻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이 말해주는 것이 이렇습니다. 말씀을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행 2:1)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행 2:2)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몇 가지 질문을 해볼게요. 우선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한다고 나와 있을까요, 아닐까요?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지, 언제 온다고는 성경에 예고된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그 때에 갑자기”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을 찾아갔는지는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 1:14)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행 1:15)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베드로가 그 신도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였다.
사도들과 120명쯤 되는 신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이들에게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 질문해 봅시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일하신다면, 성령께서는 길 가는 사람에게도 주도적으로 막 임할까요?
아닌 것 같지요. 120명이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다가 갑자기 그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의지나 소망과 상관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무엇 하고 있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여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pc방에서 게임하다가 성령이 임하시거나, 드라마 보다가 성령이 임하시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는 ‘신내림’처럼 그냥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고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하는 곳에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하나만 더 질문해 봅시다. 그러면, 120명이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께서 기도로 성령이 오시게 한 것일까요?
우리가 가끔 “오소서 성령님”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안 느껴지면 더 강하게 “오소서~ 성령님!!!” 이렇게 외칩니다. 더 세게 소나무 뿌리라도 뽑듯이 기도하면 오시고, 아니면 안 오실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기도로 성령을 끌어내린 것은 아닙니다.
진심보다 중요한 것이 뭐다? ‘진리’입니다. 진리의 성령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리의 말씀대로 오시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약속하셨어요. 120명의 성도들은 그 약속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절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주도권이 내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진실한 마음을 아시는 그분께 있는 것입니다. 내 기도로 성령의 오심을 통제하거나 빠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성령보다 위라는 것이지요. 내가 성령보다 밑입니다. 이것이 주도권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 예배하면 복을 받습니까? 네, 저는 예배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하러 올 때 뭐 맡긴 거 찾으러 온 것은 아니지요. 내가 예배했으니 복 내놓으세요. 이럴 수 없습니다. 예배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의 방법이고, 우리가 그 방법에 순종하여 예배할 때, 이 예배 안에서 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나고 나와 교제하고 나와 동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미 성도라면 성령님은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시죠. 그러므로 “오소서 성령님”이라는 말은 이미 약속대로 내 안에 계시고, 예배하는 자리에 이미 계신 성령 하나님께 “더욱 제가 당신을 원합니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표현이죠. 그분을 끌어당기거나 하는 주문은 아닙니다.
부활의 증인, 예수님의 제자 120명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도하며 기다릴 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십니다.
(행 2: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행 2: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앞서도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 여기서는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 이런 표현이 나오죠. 이것은 은유입니다. 보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에 너무 사실적으로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 사건을 더욱 풍성하게 표현해 주는 표현법들이니까요. 중요하신 사실을 보시면 됩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이들이 성령으로 충만케 됩니다. 성령님에 대해서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표현이 ‘성령충만’입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내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이 그분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제가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를 구분할 때는 그것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식을 봅니다. 하루 종일 그것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주식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제가 술에 대해서도 말했죠. 내가 술을 의지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기뻐도 술, 슬퍼도 술, 누군가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술, 모든 것을 술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술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충만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들 뭔가로 ‘충만’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죠.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충만하십니까?”
연애할 때는 연인으로 충만하죠. 그 사람이 보고 싶다고 하면 자다가도 뛰쳐나가고, 뭘 먹고 싶다고 하면 먼 길을 가서 그것을 사다줍니다. 그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결혼하고 나면, 갑자기 그 충만하던 대상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또 한동안은 자녀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아시죠. 가끔 다른 것에 미쳐있는 사람은 갓난아기도 내팽개치고 도박하고 게임하고 있습니다. 충만은 나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충만은 무엇이냐? 내 생각과 내 마음, 내 시간과 내 열정,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충만입니다. 내게 1등입니다. 사경회 때 표현으로 하면, 그분의 영광을 보면 그것을 위해 뭔가를 포기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충만입니다.
다윗은 그의 마음과 관심이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 같은 사울이 자신 앞에 무방비로 있어도 복수를 하지 않고 참아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울을 죽이면 자신은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불안에 떨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그의 일생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왜 싸웁니까? 자신이 영웅이 되고 싶어서 그랬나요? 아닙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로 충만한 것입니까? 하나님으로 충만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엄청난 사람이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다윗이’ 특출난 인물이라서 이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뛰어나서’라고 본다면, 우리는 가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처럼 못 살 것 같으세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윗의 하나님과 제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다윗만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속상할 뿐이지, 하나님이 작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강함은 성령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보세요. 그가 어느날 ‘정욕’에 충만하니까, 무너집니다. 사람을 죽이기까지 타락합니다.
우리와 다윗이 사는 세상이 다릅니까? 우리도 억울하면 갚아주고 싶고, 왕과 같은 힘이 생기면 마음대로 쓰고 싶지요. 반면 골리앗처럼 내 신앙을 방해하는 것을 볼 때 맞서 싸우기보다 타협하고 싶을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그렇게 나아가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 여러분도 이 시대에 다윗처럼 살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으셔야 해요. 이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읽은 2장 4절을 다시 보세요. 이 말씀은 놀랍게도 보는 사람의 관점마다 초점이 다르게 보이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는 성령이 임한 후 발생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봅니다. 그렇게 읽으면, 성령강림의 결과로 뭐가 보입니까? ‘방언’이 눈에 들어옵니다. ‘방언’이라고 하는 ‘현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 성령을 받으면 방언이 나타나는구나.”
그런데 성령이 ‘인격’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뭐가 보이십니까? ‘성령이 시키는 대로’가 보이시죠. 그렇다면 성령강림 사건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나를 주도하시는 사건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내게 지시를 하나요? 능력은 인격이 아니잖아요. 능력은 우리에게 지시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내게 성령님이 오셔서, 내 안에 거하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통치하시고,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내가 그것에 맞추어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시키는 대로”
성경에서 ‘성령충만’과 가장 대비하여 사용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재미있게도 ‘술 취함’입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오순절 때도 성령강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성령충만을 술 취함과 대칭시킬까? 이 또한 주도성 때문입니다. 술이 들어가면 알코올이 나를 주도합니다. 내가 알코올의 영향력 아래에 놓입니다.
성령충만도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주도합니다. 내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령충만이 내 인격과 의지가 사라져 성령께 조종당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적이기에 내게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지, 내 인격을 마비시키는 분은 아니시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자동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이끄실 때 믿음으로 화답할 수도 있고, 우리의 뜻을 고집하며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격 없는 도구처럼 강제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성령께 기꺼이 주도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내 뜻보다 옳다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삶’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하며 살아갈 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삶이, 성령께서 나를 경영하시고 이끄실 때 비로소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새로운 삶은 내가 더 열심히 살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 주도권을 드릴 때 시작됩니다.
120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성령께서 오셔서 일하실 것을 마음 열고 기다렸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열어 그분의 역사에 참여했고, 자신들의 입술을 하나님의 큰일을 위해 내어드렸습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셨고, 그들은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행했습니다. 성령께서 주도하셨고, 제자들은 믿음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펼쳐집니다.
이 120명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우리가 아시잖아요. 사도들도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두려워 도망쳤던 사람들이 성전에 나아가서 그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일하시면 우리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때 한국교회는 이 다른 삶의 근거를 ‘은사’에서 찾았습니다. ‘방언’과 같은 것을 성경은 ‘성령의 은사’라고 부릅니다. 은사도 필요하죠. 그러나 이 주도권도 성령께 있습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 맡기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한때 한국교회가 ‘방언’에 굉장히 목말라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방언을 받는 것이 성령 받은 증거처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을 드리는데, 저는 방언 기도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목회자입니다. 제가 자란 교회는 방언 기도가 자연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괜히 어린 마음에 방언 기도를 해야 조금 더 높은 차원의 신앙인이 된 것 같은 부러움이 있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저도 어릴 때 소위 ‘방언을 뚫어준다는 곳’ 좀 다녔어요. 그런 곳이 있는 거 아세요? 앞에서는 방언하는 것을 시범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통변합니다. 그러면 어린 마음에는 괜히, 쟤네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 같고, 나는 조금 열등한 것 같고 이렇단 말이죠. 어린 제 마음속에서 방언이 하나님의 사랑과 신앙의 수준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은 성경적으로 보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방언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보통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보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등에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로 드리는 기도도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이라고 나오지만, 그 기능과 상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사람들이 ‘외국어’로 말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외국어를 말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행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그들은 각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은 낯선 언어가 나타난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입술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으며,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했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도하신 오순절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지 제자들에게 놀라운 체험을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 가운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주도하시는 선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할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입니다.
방언이 새로운 삶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삶의 열매입니다. 방언은 없어도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내가 내 뜻대로 행할 순간마다, 주님의 뜻대로 바뀌어 행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작은 행동이 바뀌다가, 내 삶의 태도가 바뀌고, 내 인격과 성품이 주님을 닮은 자로 조율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놀라운 일이 이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도록 하시죠. 그러니까 성숙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은 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존경하고 누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목회를 하다 보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그 사람을 통해 제가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말투, 제 표현법, 제 설교의 키워드, 제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거울처럼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저와 동행하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걷고 있는 방향이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분의 방향으로 내가 걷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더욱 맞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도 내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거부한다면, 성령은 기다리시거든요. 그만큼 내 삶이 그분의 인도하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늦어집니다.
반면, 내가 성령을 나의 주인으로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좋아하면, 우리는 애쓰지 않아도 변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단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오래 동행하다 보면, 이전에는 애써야 했던 순종이 점점 자연스러운 삶의 방향이 됩니다.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는 것은 억지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애쓰는 만큼 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닮아가는 존재입니다.” 내가 성령님을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모하면, 그분의 뜻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낯선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었던 내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며 권면합니다.
성령충만이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믿으십니까? 방언과 같은 신비한 현상보다 더 위대한 성령의 능력은, 고집스럽고 이기적이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방향이 ‘나에게서 성령으로’ 바뀌기를 원합니다. 내 능력과 내 열심을 채우기 위해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내 안에, 그리고 나를 통해 내 앞에 나타나기를 갈망합시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도전하실 일이 있습니다.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의식하고 사십시오. 없는 듯 사시지 마시고, 있는 분으로 진리를 믿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순간순간 물으십시오. “성령님, 이 순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가 하고 싶습니다.” 하고 내 선택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바로 그 작은 순종입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 순간, 내 고집을 피우고 싶은 순간에,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서 행하고, 이미 행한 일에 대해서는 돌아보고 필요하면 사과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마음으로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는 가장 놀라운 힘입니다. 가장 큰 능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 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