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새 삶의 ABC

2026-07-19 · 사도행전 1장 4~8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지난주까지 다뤘던 「신앙기초」 시리즈는 “복음은 무엇인가?”에 관한 여정이었습니다. 복음을 소개하는 설교를 통해 신앙의 토대를 차근차근 다졌습니다.

이제 “그 복음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시리즈는 「새로운삶」입니다. [새로운삶]의 토대가 [신앙기초]이므로, 잠시 그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연결’임을 배웠습니다. 원래 우리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생명으로 연결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로 하나님을 떠났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단절, 심판,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의 긴 시간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간이었고,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죄의 권세가 무너졌음을 보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조건 없는 사랑인지를 배웠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함께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부활을 묵상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한 분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옛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고, 이제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바다가 바뀌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가능해졌고, 또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복음서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다룬 증인들의 고백입니다. 복음서 저자 중 한 사람인 ‘누가’는 마치 [신앙기초]와 [새로운삶] 시리즈처럼 2편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누가복음이 첫 번째 책이라면, 두 번째 책은 ‘사도행전’입니다.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르셨고, ‘다 이루셨다(테텔레스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삶을 주셨습니다.

신앙기초의 첫 번째 설교가 <신앙의 ABC>였습니다. 회심의 고백이 신앙의 시작이라는 내용이었죠. 회심은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 새로운 삶을 여러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구원의 삶, 거듭난 삶, 영생의 삶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양육교재에서는 풍성한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죄와 죽음에 속했던 깨어진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질문이 생기죠. 부활까지 하셨는데도, 예수님은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기다리며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가운데 하셔야 할 모든 것은 다 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완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구원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우리가 그 새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한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구원에 무엇인가를 보태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모든 것을 우리 안에 실제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성령 하나님’을 이해하고 동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셨다면, 성령은 그 새로운 삶을 우리 안에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한 승리를 이루셨다면, 성령은 그 승리의 삶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면, 성령은 우리를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려면 가장 먼저 성령님을 만나야 합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복음의 마지막에서 성령에 대해 약속하시는 장면으로 끝났다면, 사도행전은 이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다음화 앞에서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저도 이 말씀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사실 같은 이 말씀을 보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에게는 전혀 다른 이해를 갖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읽을 때 한가지 ‘병’이 있거든요. 우리는 성경을 일단 무조건 자기중심적으로 읽습니다. 죄인의 본성이죠.

말씀을 보시면,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권능’을 받습니다. 영어로 하면 뭘까요? ‘POWER’입니다. 쉽죠? 그런데 우리의 자기중심적 성경읽기는 이 말씀을 보자마자, ‘파워’를 내 필요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자면 동일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맞아요, 아니에요?

성령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단, 내가 성령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야, 네가 이렇게 살아보지 않을래? 네가 만약 나를 따르는 자로 세상 가운데 이렇게 살고자 하면, 내가 너를 도울게. 걱정 마.” 이 이야기거든요.

“아브라함아, 내가 원하는 길을 가보지 않을래? 내가 너를 지킬 거야. 내가 너의 편이 될게. 너는 복의 시작이 될 거야.”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셨던 별명,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이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봐도 내 필요와 내 마음의 방향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내가 예배 잘 드리고 그러면, 하나님이 능력 준다고 했고, 권능을 준다고 했으니까 내 삶을 더 좋게 만들어주시겠지.” 이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예배드리며 그런 꿈을 꾸고,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억울해합니다. “말씀에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따집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봉사를 좀 하면, 하나님도 내 삶을 도와줘야 하는 거래를 맺은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볼 때, 선생님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죠. “어디에 답이 있다? 지문에 답이 있다.” 성경은 대체로 내가 아는 단어나, 듣고 싶은 단어가 나왔다고 흥분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잘 읽어보면 됩니다. 다시 사도행전 1:8을 봅시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권능’(POWER)은 무엇을 하는 능력입니까? 말씀 후반부에 있죠.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내가 ‘슈퍼파워울트라짱’이 되는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들어주시는 도우미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도 쭉 읽어보세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모든 것을 하게 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끔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조금 고급지게 말하면, 새 창조에 걸맞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이것을 구하면 내 힘이 부족하여도 그것을 해나갈 힘도 능력도 그분에서 내게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를 합니다. 저 나름대로 한 주간 열심히 설교 준비합니다. 겉으로는 제가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이 일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저를 사랑하시어 하나님이 너무 부족한 저도 붙잡고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설교를 위해 연구하는 저를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시고, 전할 수 있는 용기도 주시고, 이 시간에도 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도 여러분의 힘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앞에 내가 서서 말씀을 온전히 받고, 내 삶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것을 의지할 때 말씀을 붙들고 살게 하는 모든 일도 성령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간절히 그분의 일하심 앞에 나를 내어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주십니다.

지난주 설교의 이미지를 기억하시죠. 죽음의 바다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퍼스트 펭귄과 같이 예수님께서 먼저 바다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그 바다로 우리도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 바다로 뛰어들 때, 예수님이 바꾸신 생명의 바다에 속한 삶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저는 이 모든 과정도 성령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 그러면 질문입니다. 성령님은 어느 시점에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일까요?

① 바다에 뛰어들기 전부터 언제나

② 예수님을 믿고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

③ 바다에 뛰어든 후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회심 이전의 사람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상태는 아닙니다. 성경이 신자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자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시점을 본다면, 2번이죠. 그러나 1번의 경우에도 성령께서는 아직 내주하시지는 않지만,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도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모든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고백은 성령의 놀라운 사역입니다.

(고전 12:3b)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억지로 우리 안에 뭔가를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의 일하심이 없다면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깨닫고 받아들이고 결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고 회개하여 믿게 되는 일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일에 또 다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령을 따라 설교할 때, 이 설교를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죠. 저도 모르게 제가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기에 우리가 회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는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롬 8:9b)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은 ‘누구든지’라고 말합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은 회심한 자들의 삶에 내주하시며,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능력을 주시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이 성령의 일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회심으로 이끄신다.

성령께서 회심과 함께 내주하신다.

성령께서 회심한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

우리교회도 회심을 강조합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분이 저에게 오셔서, “목사님이 회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회심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회심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꼭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심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소개해 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함께 말씀을 읽자고 할 수 있고,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권면할 수 있고, 동행해 줄 수 있습니다.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우리의 동행과 우리의 말이 더 직관적이고 잘 보입니다.

우릴 통해서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성령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예수를 주님으로 보게 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 복음을 깨닫고 회심하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일하시는 현장을 보는 것입니다. 그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사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감격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반드시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클레시아든지, 교회의 어떤 만남이든지,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회심하지 않은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회심하는 일이며, 회심한 이후 성령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맛볼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나 사역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부탁하고 맡기신 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이 말하는 땅끝까지 증인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교제하며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사귐을 누릴 때, 그 사귐 자체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지기를 바라며 함께 걷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우리는 성령의 도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회심한 자에게만 함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통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한 복음의 도구로 나를 부르신 것은 아닐까? 내가 누군가의 옆에 있다는 것,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그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니까요.

회심과 성령님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신앙기초] 시리즈의 시작은 ‘회심’이었고, [새로운삶] 시리즈의 시작은 ‘성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에 계신 분 가운데 “나는 왜 회심을 못하지?”라는 고민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회심이 특별한 체험이라고 생각하면 어렵습니다. 눈물을 쏟고, 온몸이 뜨거워지고, 인생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회심의 본질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온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분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 더 이상 내가 주인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통치 아래에서 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이미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회심을 못하지?”라고 자기 안만 계속 들여다보기보다, 지금 여러분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회심은 내가 내 안에서 어떤 특별한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회심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제 힘으로 저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제 삶의 주인으로 살아왔음을 인정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습니다. 저를 받아 주시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이 고백이면 충분합니다.

또한 이곳에 계신 회심의 소중한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때로는 느끼지 않아도 그것이 약속이고 사실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세상의 영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있는 사람들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삶의 변화가 이미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이전처럼 자기 뜻만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죄를 불편하게 여기게 하시며,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은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삶조차 우리의 힘으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회심은 성령께서 하시지만, 그 이후의 삶은 내가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성도의 삶은 내 의지와 노력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회심으로 이끄신 분도 성령님이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며, 우리를 회심한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도움을 조금 받아 내가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제 욕망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선택하게 해 주십시오.” “오늘 제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성령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대신 인생을 살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소원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순종할 힘을 주시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려 할 때 도우시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며, 복음을 말해야 할 때 담대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장 8절이 말하는 성령의 권능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미 시작되었다는 약속을 믿고, 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게 하는 능력으로 살아갑시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셨고, 성령님은 그 완성된 구원을 우리 안에 실제가 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회심으로 이끄십니다.

성령께서 회심과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회심한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새로운 삶은 우리의 결심과 노력으로 시작되는 삶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시작하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며, 성령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함 되신다는 경험은 모든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성령꼐서 이끄시는 삶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더욱 믿고 싶고, 그분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부르심 앞에 마음을 여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만 바라보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의지와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완성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제 믿음으로 기도를 드립시다.

“성령님, 오늘도 제 안에서 일해 주십시오. 제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제 욕망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선택하게 해 주십시오. 제 말과 삶을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새로운 삶은 내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의지하며,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