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성찬예배 주간에는 ‘공동체’에 관한 설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3월부터 7월까지는 우리교회의 ‘사명선언문’을 바탕으로 설교를 구성했습니다. 3가지의 키워드인데, ‘사귐’ - ‘말씀’ -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도 순서대로 <사귐의 신학>, <오직 말씀>,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3편의 설교<잃어버린 나라를 돌려드립니다 |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 |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드러내라>를 다뤘습니다.
오늘은 매일성경 오늘의 묵상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공동체에 관한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에 누군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홀씨예배에서나 우리교회에서나 결국 모든 설교에서 ‘진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진리를 알고 싶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를 말하기에 앞서, 각 시대별로 ‘진리’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들어보셨죠? 이 시대의 특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 지도 꽤 되었습니다. ‘프리’가 붙으면 ‘이전’을 의미하고 ‘포스트’가 붙으면 ‘이후’를 의미하지요. 그러니까 모더니즘이 가운데 있고, 그 앞으로 프리모더니즘, 그 뒤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어로는 ‘전근대 – 근대 – 탈근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각 시대를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프리모더니즘 시대는 ‘권위’가 중시되었습니다. 특히 서구 사회는 종교가 기본적인 전제가 되었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는 권위에 의해 설명되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핵심 키워드는 ‘권위’였습니다.
그 이후 시대인 모더니즘 시대는 ‘인간의 이성’이 중시된 시대였습니다. 계몽주의라고도 하죠. 인간은 과학과 논리로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종교도 합리적으로 검증하고 증명하려는 욕구가 활발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는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핵심 키워드는 ‘합리성’이었습니다. 모더니즘 시대에 인류는 엄청난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인류가 이성적으로 토론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함께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만으로도 세계를 설명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낙관이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모더니즘이 꿈꿨던 ‘이성을 통한 유토피아’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무너집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성과 과학의 발전만으로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낙관을 결정적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성과 과학의 발전이 반드시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 경쟁, 우월감 등은 이성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이성이 제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안의 죄성과 탐욕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넘어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개인의 감정과 느낌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원주의, 상대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무엇을 말해도 그것은 너의 진리일 뿐, 너의 진리와 나의 진리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각자가 보기에 진짜인 것이 힘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핵심 키워드는 ‘진정성’입니다.
정리하면 시대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전근대에는 권위에 의해서, 근대에는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서, 오늘날에는 개인의 경험과 진정성에 의해 진리를 받아들이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다’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이냐’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 안에 있었던 기독교의 관점에 비추어보면, [프리모던 시대]에는 시대의 권위가 ‘성경’이 진리라고 하면 그냥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왕이 말하는 것이 법이었지요. 신이 말하는 것이 계시였습니다. 그냥 권위에 대해 순응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인가?”를 질문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모던 시대]에는 ‘성경’이 이해될 때 진리로 여겼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졌습니다. 그 덕분에 신학이 발전하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의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생각 아래 가두려는 한계도 생겨났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성경’이 개인에게 경험되고 삶으로 열매가 드러나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앎보다 삶이 중요하다”라는 이야기가 기독교에서 중요해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진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마다 유행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들으시면서 느끼시겠지만, 오늘 우리 안에도 이 3가지 특성이 다 조금씩 있습니다. 여전히 성경에 대해서 묻지 않고 그 권위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이성을 거쳐야만 진리로 믿는 사람이 있고, 경험이 동반되어야만 진리로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의 주된 관점이 영향을 끼치면, 반대작용도 함께 일어납니다. 종교적 권위가 우선이었던 시대에는 그것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있었고, 그것이 권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이성이 우선이었던 시대에도 그것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있었고, 그것이 인간이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판단, 개인의 감정이 우선 된 시대를 살아간 지도 꽤 되었습니다. 이것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있지요. 놀랍게도 다시 사람들은 절대적 존재, 초월적이고 영적인 세계에 관한 관심이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최근 서점에 가면 ‘불안과 두려움’을 다루는 책이 참 많습니다. 탈권위, 탈공동체 시대를 추구하면서 개인주의가 강화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할수록 ‘불확실성’도 함께 커집니다. 거기에 개인주의가 강화되니, 내가 스스로 나의 한계를 깨고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모두가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세상을 바꾸는 꿈은 애초에 없고, 그저 내 마음 내 몸, 나의 두려움만이라도 통제하고 극복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반대로 누군가 정답을 정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권위에 의존하고자 하는 경향이 사회적으로 다시 커집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보입니까? 세상은 계속 돌고 돕니다. 시대의 흐름, 유행, 풍조는 늘 쳇바퀴를 돌 듯이 작용과 반작용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늘 진리를 찾고, 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늘 진리를 거부하고, 답을 거부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의 책이라고 말하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중 구약성경은 매우 긴 시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요. 그 안에는 수많은 세대와 제국이 흥망성쇠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현상이 드러나기도 하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우리가 요즘 묵상하고 있는 ‘이사야서’도 어떻게 보자면, 스펙트럼이 참 넓습니다.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바라보고 계신 분이 아니라, 온 열방을 향한 관심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이는 당시 지역과 민족마다 주관하는 신이 각기 다르다고 여겼던 세상의 관점과 비교하자면 매우 독특합니다. 이사야서의 하나님은 한 민족의 신이 아니라,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매일성경 묵상본문이 조금 낯설고 어려웠을 수 있는데, 무려 13~23장까지 이방 나라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모압, 아람(다마스쿠스), 구스(에티오피아), 애굽(이집트), 두로 등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가 나열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앞서 설명했던 권위와 이성과 자기중심성의 그림자가 모두 등장합니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신과 통치자의 절대적 ‘권위’를 과시하며 우상을 숭배하고 스스로 우상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군사력, 경제적 계산, 외교적 동맹과 합리적 판단을 신봉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진리보다 ‘자신들의 유익과 느낌, 욕망’을 위하여 늘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언서가 보여 주는 핵심은 그렇게 돌고 도는 세상의 흐름 위에 계신 분,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존재가 있다는 점입니다. 예언 자체가 바로 존재의 자리가 다르신 하나님의 메시지, 하나님의 세상 해석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날카롭게 정리하여 설명합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유대인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증거로 표적을 요구했고, 헬라인은 자신들이 납득할 만한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리끼고 미련하게 여긴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의 기준이 하나님의 진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이 땅에서 돌고 돌며 답을 찾는 우리의 시선과 늘 달랐습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이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달라졌지만, 한 가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시대를 판단한다고 선포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이사야서의 열방에 대한 예언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이사야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의 시선에서 보면, 바벨론이 강했고, 앗수르가 두려웠으며, 애굽과 구스는 의지할 만한 동맹국으로 보였습니다. 세계 정세를 보면서 어느 나라와 손을 잡고, 얼마나 많은 군사력을 확보하며, 얼마나 튼튼한 성벽을 세우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라들의 흥망성쇠는 그들의 권력과 지혜와 계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에 관한 예언 부분에서 반복해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방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시다가,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인 이사야 22장에 이르면 하나님의 시선이 뜻밖의 장소로 향합니다.
(사 22:1a) 이것은 '환상 골짜기'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심판 예언은 이제 바벨론도 아니고, 애굽도 아니며, 두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신 곳은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던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의 교만과 우상숭배만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기 백성이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동일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마치 이방의 잘못된 모습을 언급하시다가, 그렇다면 내 백성이라고 말하는 너희는 어떠한가? 이런 방식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 22:2) 폭동으로 가득 찬 성읍, 시끄러움과 소동으로 가득 찬 도성아, 이번 전쟁에 죽은 사람들은 칼을 맞아 죽은 것도 아니고,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다.
(사 22:3) 너희 지도자들은 다 도망 치기에 바빴고, 활도 한 번 쏘아 보지 못하고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너희들도, 아직 적군이 멀리 있는데도, 지레 겁을 먹고 도망 가다가 붙잡혀서 포로가 되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에 리더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리더의 모습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부르신 자리에 대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어땠습니까? 지도자들조차 싸우지 못하고 도망했습니다. 책임을 맡은 사람들마저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공동체는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전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8절 이하는 그들이 위기의 상황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 22:8) 유다의 방어선이 뚫렸다. 그 때에, 너희는 '수풀 궁'에 있는 무기를 꺼내어 오고,
(사 22:9) '다윗 성'에 뚫린 곳이 많은 것을 보았고, '아랫못'에는 물을 저장하였다.
(사 22:10) 예루살렘에 있는 집의 수를 세어 보고는, 더러는 허물어다가, 뚫린 성벽을 막았다.
(사 22:11a) 또한 '옛 못'에 물을 대려고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에서 무기도 갖추고, 무너진 성벽을 확인하고, 물을 확보하고, 집을 허물어 성벽을 보강했습니다. 무기도 갖추고 있고, 나름의 보강 계획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대로 행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저도 사역을 열심히 하는 목회자였어요. 전도사 때도 그랬고, 담임목사가 되어서도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고자 힘쓰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요.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위해 뭔가를 하시는 경우가 있지요.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하기도 하고, 나중을 위해서 공부하며 자격증도 준비하고, 노후를 위해서 열심히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분들도 있지요. 이스라엘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나름의 준비를 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그들이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
(사 22:11b)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22장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위기를 위한 준비는 열심히 했고, 거기에 시선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쉽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이 성읍을 너희에게 주셨던 분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참고자료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국방은 결국 기초가 없는 성벽과 같다.”
제가 요새 목회자로서 반성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자꾸 하나님을 못 믿는 것입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제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저는 제 삶을 제가 다 대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끄실 것에 대해 확신하며 살아요. 그냥 제가 주님을 위해 살면, 주님은 나를 지키신다는 것이 저의 단순하면서도 무식한 믿음입니다. 저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제가 목회를 하면서는 몸을 사려요. 생각이 많아요. 공동체가 작을 때는 조금 덜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제가 자꾸 몸을 사려요. 교회가 작을 때는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이 교회를 하나님이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필요하면 쓰시겠고, 필요하지 않으면 흩으시겠다는 마음으로 목회를 했어요.
믿음의 선명한 만큼, 두려움의 그림자가 적었어요. 그런데 올해 제가 회개하고 있는 부분이 담임목사로서 교회를 이끌어가는 저의 믿음입니다.
제가 올해 저를 돌아보니, 제가 명예욕이 많더라고요. 크고 높아지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꾸 속아요. 그런데 저에게 ‘건강한 목회자’로 사람들 앞에 남고 싶다는 명예욕이 있어요. 남들은 다 이렇게 해도 나는 이렇게 안 한다는 건강성의 명예욕. 하나님 앞에서 참된 목회자가 되는 것과, 사람들 앞에서 건강하다고 평가받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한 끗 차이인데, 제가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올해 하나님께서 어떤 목사님을 통해서 저에게 직면하게 하신 질문이 있었어요. 교회 공간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우리 사역자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2~3년 전부터 공간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2년 반 전에는 워플을 확장했고, 올해는 더홉을 확장했죠. 그런데 이것이 임시 해결책일 뿐이죠.
그런데 제가 스스로 매여 있었던 것이 있었어요. 제가 뱉은 말이었습니다. 저희가 이 공간에 넘어올 때도 정말 뜻하지 않은 여러 하나님의 일하심, 또 그 일에 순종하는 통로들, 이런 것을 통해 이 공간에 오게 되었어요. 이것이 제 눈에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이 공간이 마지막 공간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질문하죠. “그러면 이 공간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그때 제가 하기 시작했던 말이 “우리는 교회를 분립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제가 꿈꾸는 목표입니다. 계속 기도하며 뜻을 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과 시기를 정하는 것은 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건강한 목회자’에 대한 강박이 있으니, 내심 제 안에서는 “나는 규모를 키우는 목회를 꿈꾸는 목회자가 아니야”라는 것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선을 긋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분립하겠다는 저의 방식으로 이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죠. 방향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제가 주님보다 앞서 있었던 부분임은 제가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답을 미리 정해놓는 순간, 저는 그 답안에서만 움직이죠. 너무 잘 포장해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저의 목회 계획에 ‘하나님을 뺀 계산’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심지어 제가 했던 설교의 내용에도 그런 것이 있었어요. 열두 정탐꾼 이야기를 다루면서, 열 명의 정탐꾼과 여호수아/갈렙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열 명은 하나님을 뺀 계산법으로 판단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저는 교회의 미래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까 묻지도 않고, 어떤 것도 구하고 있지 않더라고요. 하나님을 배제하고 제 생각으로 계산하니 구할 것도 없고, 믿음을 발휘할 것도 없죠.
사실 전에도 현실적인 몇몇 분들이 저에게 “목사님, 왜 우리는 공간에 대해 고민하면서 건축헌금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언제나 그 앞에서 하는 대답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답,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답은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이에 대하여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실까? 깊이 묻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가 교회 건축을 하시면서 굉장히 목회자로서 힘든 상황을 지나갔던 것을 곁에서 봤기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래서 두려움이 있어요. 또 저희교회에는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성도님들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개인적 두려움, 명예욕,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인간적인 마음 등이 앞서서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년까지는 제가 이 부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면 “나는 욕심 없는 건강한 목회를 꿈꾸는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올해는 하나님이 “강 목사야, 너는 날 믿지 않는구나”라는 마음을 여러 경로로 많이 주셔서 많이 혼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교회 운영위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기도조차 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기도하며 꿈을 꾸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라고 하는데, 사귐의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더 넓은 공간이 정말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겠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순종해야 할 것이고,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주님의 앞서가심을 저와 우리가 따라가는 것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이것을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답을 먼저 정하지 않고, 주님이 어떻게 이끄시는지를 함께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편한 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위험한 모험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편한가, 무엇이 안전한가를 먼저 묻기보다 주님이 어디로 이끄시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편한 것을 만나면 감사로 받고, 어려운 것을 만나면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멋지다고 말하는 길, 그럴듯한 명분이 있는 길도 아닙니다.
제가 앞서가면서 하나님께 따라오시라고 하는 목회가 아니라, 주님이 앞서가시면 우리가 따라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목회’를 가지고 예를 들어서 얘기했지만, 앞서 언급한 건강, 커리어, 노후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준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에 집중하는 만큼, 하나님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을 발휘할 영역도 다 나의 노력과 계획으로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노력과 준비가 오히려 우상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관심과 신뢰를 빼앗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건강, 정말 내가 지킬 수 있습니까? 내 커리어, 정말 내 계획대로 될까요, 아니 오히려 내 계획대로 다 되면 내 신앙은 괜찮을까요?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사 22:11b) 너희는 일이 이렇게 되도록 하신 분을 의지하지 않고, 이 일을 옛적부터 계획하신 분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사 22:12) 그 날에,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통곡하고 슬피 울라고 하셨다. 머리털을 밀고, 상복을 몸에 두르라고 하셨다.
새번역은 ‘앙망’을 ‘의지’로 번역합니다. ‘공경’을 ‘관심’으로 번역합니다.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하는 동안,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들이 힘써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동안 하나님에 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신 것은 그들이 성벽을 고치고 물을 저장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준비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눈앞의 위기는 보았지만, 그 위기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성벽의 틈은 발견했지만, 자신들의 믿음이 무너진 것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은 모았지만, 눈물로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방법은 동원했지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이스라엘 곁에 계시며 그들이 하나님을 잊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배제할 때, 그들이 하나님을 없는 듯 살아갈 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이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권위를 다른 데 두고, 자신의 이성으로 잘못 판단하며, 자신의 느낌대로 행하다가 진리이신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통곡하고 슬피 울며 회개하라고 부르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떤 삶을 남기시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진리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으로 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예루살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말씀도 있었고, 성전도 있었고, 제사도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진리를 그 하나님 앞에서 찾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교회에도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좋은 프로그램도 압니다. 좋은 시스템도 압니다. 좋은 설교도 잘 전하고 잘 듣기 위해서 힘씁니다. 좋은 예배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다른 것입니다.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느냐?” “너는 나를 믿느냐?”
교회는 단순히 하나님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맹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내 삶을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돌고 도는 이 세상의 처음과 끝을 아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소유했다고 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는 공동체가 됩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는 공동체가 됩시다. 계산보다 하나님을 먼저 묻는 공동체가 됩시다. 계획보다 하나님을 먼저 신뢰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세상이 맞다고 하는 길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을 선택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롬 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진리는 시대의 풍조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단순히 어떤 시대의 사상이나 인간이 만들어낸 정답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소유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따라가는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입니다. 권위의 시대도 지나갔고, 이성의 시대도 지나가고 있으며, 지금의 시대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입니다. 세상은 시대마다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을 바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판단 받는 공동체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시대를 바라보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공동체. 계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공동체. 진리를 소유했다고 자랑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끝까지 바라보는 공동체. 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우리 사귐의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