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2026-06-21 · 에스겔 16장 6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성도 여러분, 참 반갑습니다. 우리가 올해 진행하고 있는 이 ‘신앙기초 시리즈’는 여러분들이 하나하나 잘 소화하며 따라오실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최근에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몇몇 분들이 처음 메시지부터 차근차근 다시 찾아 듣고 계신다는 고백을 해 주셔서 목회자로서 큰 보람과 감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룬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큰 이야기를 조목조목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이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지난번까지의 12편의 설교를 둘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1-6편까지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회심, 구원, 죄, 심판 등을 다루며 인간이 원래 주어졌던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어떻게 길을 잃어버렸는지, 그 죄의 본질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적 단절’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7-12편까지는 하나님의 일하심, 즉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그 오랜 기다림, 하나님의 때, 성육신,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과 십자가까지가 다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의 단절을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지금 어떻게 누리면 되는가를 다루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시간에부터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십자가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 영어로는 뭐라고 했습니까? 바로 ‘리뎀션(Redemption)’입니다. 이것을 ‘탈환(奪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적진에 있는 우리를 침투하셔서 데려오신 거대한 영적 탈환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은 그 십자가에 담긴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1.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에 보면, 3강에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뭐가 있어야 행복할 것 같아?” 물으면 답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부분 비슷한 카테고리 안에서 답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흔히 ‘4P’라고 정리했습니다.

Pleasure (즐거움): 재미와 도파민입니다.

Prestige (명예): 관계나 인정입니다.

Power (힘): 성취와 성공입니다.

Property (재산): 물질입니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4P 정도가 있으면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풍삶초’는 그것을 반대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이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4P는 실제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도 하는데, 과연 “이것이 있으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그 행복이 완성되는가?”라는 질문은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4P의 대장격인 ‘돈’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얼만큼 있으면 이제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생각하시는 그 액수만큼 있으면 진짜 행복할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사실 이런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돈이 있는 순서대로 우리가 진짜 행복할까요? 다 떠나서, 우리 교회에서도 돈이 있는 순서대로 행복해 보이세요? 제가 봤을 때는 진짜 안 그래요.

돈이 편리함을 주고 유익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돈으로 이룬 것에 대해서 그 진정성을 의심하곤 합니다. 돈으로 관계를 만들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큼 불안한 것이 없죠. 내가 돈이 많은 것을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면, 그것만큼 믿지 못할 사랑이 없습니다. 우린 그 한계를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단순하게 ‘필요’로 느껴야 할 것들을 ‘우상화’합니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그것 좀 부족하면 불행한 것처럼 우상화해서 우리를 그것을 위한 삶으로 끌고 갑니다. 저는 이것이 대중문화 뒤에서 일하고 있는 사탄의 계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성찰하게 도와주는 내용이 3과의 핵심이죠.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며, 우리에게 근원적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요소로 제시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때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대부분 쉽게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히트했던 곡이 있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교회 안이든 밖이든 다 너무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자꾸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그 말 자체가 주는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가 그렇게 있는 그대로 사랑스럽게 여겨지기를 바라고,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기를 원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게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사랑이 ‘깨어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대부분 경험하는 것은 조건부 사랑입니다. 깨어진 사랑 앞에서, 우리는 사랑의 이유를 찾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쁘니까, 착하니까, 공부를 잘하니까, 능력이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니까. 사람들은 사랑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 깨어진 세상의 틀을 갖고 교회에 와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자꾸 내가 사랑받을 만한 이유부터 찾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면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신앙생활을 좀 못하는 것 같으면 사랑받지 못할 존재,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야기해도 나에게서 사랑의 이유부터 찾는 사람들은 반문합니다. “하나님도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아닌가요?”

제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선입견의 틀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습니다.

“사랑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겠는가?”

2. 우리는 사랑을 오해한다.

우리는 나의 틀 안에서, 내가 경험하는 깨어진 사랑의 틀 안에서 성경이 말하는 사랑도 그렇게 바라보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아무리 앞에서 얘기해도, “내 안에 뭔가 좋은 점을 보셨겠지”, “내가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으니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조금 더 뭔가를 잘하고 있으면 “쟤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겠지” 생각하고, 내가 조금 못하고 있으면 “저 사람보다 나를 좀 안 사랑하시겠지”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건적인 사랑을 늘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있는 사랑 가운데 그나마 제일 괜찮은 사랑이 여전히 부모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말합니다. 하지만 부모인 저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조건 없이 아이들을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씩 망가지고 오염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뭔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깨어진 세상에서 망가지고 깨어진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 때문에도 사람이 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짜 온전한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랑 앞에서 어찌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고 어찌 사람이 치유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죠.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없을 때 사랑하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죠. 우리가 회개를 해서도 아니고, 변화가 되고 있어서도 아니고, 가치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냥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에 조건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할 때 몇몇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오해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하시는 분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십니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탕자 이야기로 보면 쉽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배신하고 떠나고 원수같이 그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짜 사랑한다면 아들이 지금 망가져 있는 그 삶에 계속 머물게 두지 않습니다. 아들이 돼지우리 속에 살아가는 삶에 그냥 두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다시 아들답게 살도록 회복시키는 것까지가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걸로 시작하지만 그냥 거기 방치해 두는 게 하나님의 사랑은 아닐 것입니다. 나를 진짜 내가 누릴 수 있는 사랑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까지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럼 내가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제가 조금 더 성경적 언어로 정리해 본다면 성경이 말하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조건이 없는 사람을 먼저 사랑하신다.”

HE FIRST LOVED US.

이 선언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가장 쉬운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받을 만한 이유도, 조건도 없는 우리를 향해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깨어진 그 모습 가운데 방치하게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할 때도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할 때도 있는 거지,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깨어진 사랑은 나의 기준에 상대를 맞추려 합니다. 나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따라오지 않는 것에 화를 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향해서 우리를 억지로 몰아붙이는 방식, 이것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템포에 맞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때로는 기다려 주시고 때로는 인내하시며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 주십니다. 성령도 그래서 보내주셨고,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그러한 삶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야, 너희가 나한테 맞춰”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내어 주셨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3. 사랑의 이유는 하나님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뭔가 보셨겠죠. 그래도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의외의 답을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사랑의 이유를 찾지 않았다는 걸 말하면서, 하나님 자신 안에서 이유를 찾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의 이유를 우리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해서 사랑하고 잘못하면 사랑 안 하고 이러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 안에서 우리가 사랑받아야만 할 이유를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를 자꾸 묻지만, 성경은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에게서 그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은 하나님께서 노력하시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하나님이 억지로 끌어내시는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면서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여러분 깨닫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다른 곳에서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나님에게서만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힘이 있는 거거든요.

왜 그분이 굳이 우리 가운데 오셨는가, 성육신하셨는가,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왜 그렇게 희생하셨는가? 성경이 말하는 답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있다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근거를 우리에게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사랑이 변하는 이유는 사랑의 이유가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얘가 사랑할 만한가 아닌가’ 보다가 아닌 것 같으면 안 해버리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충분히 괜찮아진 뒤부터 자랑 삼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그분의 사랑은 기준과 조건이 없기 때문에 그분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거예요.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오늘 본문인 에스겔 16장에 나타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계속 외면하고 마음 아프게 하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징계하십니다.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정신 번쩍 들게 다른 이방 나라에게 내어주셔서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죠. 그 포로 된 땅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이라는 선지자를 부르셔서 그 뜻을 이해시켜 주시는 장면입니다.

(겔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하나님은 이 16장에서 어떤 그림 언어를 통해 관계를 보여주시는데, 이스라엘을 한 아이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탯줄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태어났을 때 물로 씻겨 주지도 않고, 강보에 싸이지도 못한 채 들판에 버려졌습니다. 이 얘기는 누구도 이 아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누구도 품어주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피투성이 상태로 발짓하고 있습니다.

한번 이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이 아이를 보고 “와, 귀엽다”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아이를 보고 “야, 소망이 있다, 가능성이 있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예요. 이 아이를 원하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기 곁을 지나가며 말씀하십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라고 말만 하시는 게 아니라, 지나가신 이후의 여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회복을 위해 모든 걸 하십니다. 이 아이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위해서 모든 걸 하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이에요.

아시다시피 이 이야기의 아이는 깨어진 세상 가운데 지금 포로 백성 되어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동시에, 이 깨어진 세상에서 바라는 어떤 기준에 답하기 힘들고, 그 안에서 뭔가 없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나는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발버둥 치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사랑하신 이유는 세상의 기준을 채웠기 때문이 아니에요. 아름답다거나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 기준으로 이 아이를 버렸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거두셔서 돌보시고, 나중에 이 아이가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것이 에스겔에 나오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으로 이끄셨다는 이야기죠.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 모습이 어떻습니까? 초라해 보입니까? 여전히 나는 세상에 있으면 자꾸 가치가 없는 것 같고, 나를 사랑할 사람 없는 것 같아 피투성이 되어서 발짓하는 것 같은 인생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그런 우리를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어떠함을 보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반드시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안에 연결되어서 공급받기 시작하면, 누구나 회복되고 누구나 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 아이를,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존귀한 존재로 바꿔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4.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정이었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서 역사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실 우리가 볼 때마다 뭘 기억해야 하냐면, “내가 어떠한가”에 대한 이야기이기 전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우리 가운데 날마다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까지 하셨어, 이 사실을 날마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뭔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보시면서 “야, 너 잘 키우면 나에게 도움 되겠다” 하실 만한 존재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유를 찾지 않았어요. 그저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그 성품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인간 중심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사건이에요. 그럼 이제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왜 죽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여기로 종결될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꿉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누리기 시작할 때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거든요. 이 패러다임이 완전히 무너진 세상에서 살면서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있었거든요.

세상에 속한 사랑의 특징은 [Value → Love]예요. 가치 있는 것이 사랑받는다는 그 얘기 속에 우리는 늘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가치 없다고 느끼면 나를 사랑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내가 가치 있어야 나를 사랑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해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랑받기 위해서 애씁니다. 나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포장하고, 때로는 뜯어고치고 경쟁합니다. 가치 있는 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진짜 이 사랑을 경험하면 우리 안에 이거에 대한 완전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사랑은 [Love → Value]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진짜 우리의 삶의 존재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 줍니다. 십자가는 깨어지고 망가지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우리를 살려서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새롭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짜 이해하고 십자가를 통과한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부분에서 패러다임 시프트를 일으킵니다. 가치의 전복이 일어나요. 다른 시선을 갖고 내 삶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를 죄의 권세, 비진리 가운데서 탈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게 하신 사건이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거듭난 존재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죽고(여기서 죽은 나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나예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분의 가치와 진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새 창조된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고백을 하는 겁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십자가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고 만나게 해서 연결했으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이전 것은 지나갔어요. 내가 가치 있게 살아야지 사랑받는다고 했던 그런 나의 불안함과 무가치함 같은 것들은 지나갔다는 거예요. 보라 새것이 되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는 새 창조죠.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 창조되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던 우리가 죄로 인해서 망가졌는데, 십자가가 이것을 다시 그리스도와 만나게 해서 회복시켰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탈환해서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분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그 전과 다른 정체성을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 새 창조가 일어났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내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말뿐인가요?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 제가 두 가지만 오늘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현실적인 언어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적어도 저는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새 창조의 첫 번째 모습은 ‘내면의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으면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내 삶을 보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가치 없다고 얘기하는 게 세상이니까요. 우리는 평생 세상에서 가치 증명을 위해 시달립니다. 나를 포장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고, 내 쓸모없음이 느껴지니까요. 그래서 피곤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이게 열심히 일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거기서 정해진 기준대로 나를 온전하게 해석해 버립니다. 가정에서도 내 쓸모를 증명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늘 불안이 있고 불행이 있어요.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남편은 자꾸 세상의 기준에 따라 자기의 가치를 이렇게 해석해요. “나는 돈 버는 기계야. 나는 돈 버는 기기로서 역할을 잘 못하면 가치가 없어. 내가 우리 가정에서 인정받으려면 이거라도 잘해야 돼.”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요. 그리고 아내들은 보통 자녀를 어디 내놓을 만하게 키워내야 내 가치가 있는 것처럼 애를 씁니다. 또한 거기서 자라는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부모님께 칭찬받고 사랑받을 만한 모습을 갖추려고 기를 씁니다. 부모님의 가치가 만약 잘못되어 있으면 그 잘못된 기준으로 아이는 사랑받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깨어진 세상의 기준대로 살고 있으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픕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내가 연결되면, 내 안에서 다른 고백들이 시작됩니다.

“내가 혹시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아도, 내가 이번 일에 대단한 성과를 내지 못해도, 내가 남들보다 혹시 돈이 적어도,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고 지금도 내 모습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질 때 우리가 비로소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을 떨쳐낼 수 있어요. 나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해석합니다. 비로소 세상이 나에게 주고 있는 그런 어떤 기준들과 거짓 안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어요. 그리스도인은 사랑받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상이 우리에게 결코 줄 수 없는 당당함과 평안이 나오는 거예요.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허덕이던 사람이 이미 주어진 사랑 안에서 평안히 거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저는 새 창조의 결과이자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서 탈환되어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온 사람은 ‘실패해도 괜찮은 나라’에 입성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두 번째 모습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연합한 존재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을 대하셨던 방식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나에게 새 창조가 일어나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할수록 나에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 방식이 나에게도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우리도 똑같잖아요. 우리도 세상에서 말하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봅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유익을 줄까?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나?” 보면 다가가고, 아니면 은근히 피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 사람이 나하고 결이 맞나? 나하고 맞나?” 하면 가고, 아니면 은근히 피해요. 그래서 우리가 애클 같은 것을 하지 않으면, 교회에 다 같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다 자기에게 맞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지냅니다. 내가 안 맞는 사람하고는 한마디도 안 할 수도 있어요. 반대로 애클이 어려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래 놓고 거기서 같이 살아가려고 하니까 처음 겪는 어려움을 겪는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나에게 들어오면, 내가 내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기 시작해요. 늘 나를 힘들게 하는 배우자가 있어요. 배우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사랑하겠다는 것은 깨어진 사랑이에요. 바뀌면 사랑하는 거는 누구나 다 해요. 예수님도 말씀하시잖아요. “너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슨 사랑이냐? 그거는 세상도 다 하는 깨어진 사랑이다.”

늘 나를 힘들게 하는 배우자가, 그 사랑을 내가 경험하고 나면 어떻게 보입니까? 사랑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피투성이의 아이’로 보이는 거예요. “그런 나도 주님이 사랑하셨으니 나도 이 사람 사랑해야지”가 되는 거예요. 말 안 듣는 자녀가 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작품으로 계속 재해석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점점 여러분은 계산적인 사람이 될 거예요. 하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그냥 말이 아니라, 사랑이신 그분의 그 성품과 속성이 내 안에 채워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전보다 다른 이를 볼 때 조금 더 계산하지 않고, 조금 더 나를 먼저 희생하기도 하고, 이유 없이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진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종교적인 언어를 다 빼고 말하면, 저는 깨어진 사랑은 진짜 사랑으로만 회복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셔서, 우리 또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모인 게 교회 공동체고, 여기서 우리가 함께 사랑을 충전해서 흩어진 자리에서 먼저 사랑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세상에서 먼저 사랑을 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내 안에 사랑의 근원이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내어준 만큼 돌려받지 못하면 나는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다 알아요, 경험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못 합니다. 나를 지키려고 계산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사랑의 근원을 진짜 누릴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바로 그렇지 않은 사랑을 뿌릴 수 있는, 세상을 회복하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하늘의 그 사랑이 우리를 바꾸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교회 생활을 진짜 열심히 하고 있고 오래 하고 있는데, 교회 생활을 할수록 나는 표독해지고,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는 분노가 늘어가며, 신앙생활을 할수록 예민해지고 마음은 좁아지며 자기중심적으로 되는 것 같다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고 있으니 이제 벌을 받게 되는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잘 연결되어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사랑이 없고 내가 원하는 선함이 나오지 않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빼고 보면 당연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는 본성상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우린 본성상 표독하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변해가는 근거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어쩌면 보조 배터리처럼 딱 붙어 계실 때, 내게 없는 선한 것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놓친 다음에 나의 행위를 더 열심히 해서 사랑하려고 하면, 더 계산적이 되기 때문에 더 지칩니다. 더 실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 같다 느껴질 때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점검해야 합니다. 연결을 점검하고 거기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믿는 게 아니에요. 내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가면 내가 하지 못하는 사랑이 나와요. 그분을 잃어버리면 어제까지 되던 나의 사랑도 안 됩니다.

나에게 변화가 없다면, 내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면, 둘 중 하나의 확률이 매우 높아요. 그것은 내가 아직 복음이신 예수님을 진짜 만나지 못했거나(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진짜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아니면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주도권을 놓지 않아서 복음이 내 안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진단하여 “아, 내가 지금 뭔가 문제가 있구나” 깨닫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정답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지금 나의 어떠한 부족함과 모습을 보고 절망하지 말고, 나를 향해 이미 모든 것을 행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신 그 하나님을 찾고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진리 위에서 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오늘도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은 여러분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여러분을 향해 지금도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주목하십시오. 그것이 십자가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평생 불안해야 합니다. 오늘 잘하면 사랑받고 내일 못하면 버림받을 거라는 이 마음 안에 우리가 갇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신앙이 불안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이유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어떠함, 흔들림, 우리의 어떤 상황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속해 살다 보니까 세상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내가 연약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도 연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사랑의 이유를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나는 변할 수 있고 나는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분이 태도가 될 때가 여전히 종종 있지만, 하나님은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신실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미 먼저 주어졌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보았듯이,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도 우리가 우리에게 집중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증명된 나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에만 집중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 또한 자칫 증명 욕구의 연장선에 설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은 포기가 없습니다. 오늘 그 사랑이 우리를 새롭게 했고, 그래서 닮아가도록 계속 일하실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설교를 통해서 아직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진짜 마주할 수 있고 내가 이제 그 사랑 앞에 나도 마음을 열 수 있는 결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지만, 놀랍게도 그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그 사랑이 나에게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에게 바로 일하시기 위해서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오늘 그렇게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미 나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고, 나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진짜 고백하는 분들이 이 가운데 더 많이 있으시겠죠.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사랑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깨어진 세상의 렌즈를 다시 쓰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에 늘 연결되어 하나님의 삶의 방식과 존재 방식, 그분의 사랑의 방식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 주변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살아서 주님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