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교회 성도님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이곳에서 신앙을 다시 배우는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교회가 대단하다기보다 그분께 신앙의 중요한 시간이 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그분의 겸손이고, 또한 저에게는 기대가 되는 부분입니다. 저에게도 있었던 중요한 변화의 과정들이 또 누군가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이죠.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 교회를 안 다니던 사람이 다니게 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 중요한 계기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의 신앙에는 필요합니다. 저도 태어나면서부터 십자가를 물고 태어났다는 모태신앙의 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복음도 듣기 시작하고 교회 공동체에도 소속되어 살아갔으나, 그것이 진짜 어떤 힘이 있는지를 깨닫기까지는 과정들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과 무관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되었던 것은 너무 중요했죠.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 있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진짜 다 아는 것인가? 예수님과 관계가 있다고 진짜 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어쩌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까지도 ‘외인’으로 취급받기도 했던 것이 ‘신앙적 앎’이고 ‘신앙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갖는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에 다녀도 전혀 변하지 않거나, 교회에 다녀도 전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변화라는 것이 희귀한 것이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제게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복음은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약속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진짜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회심’에 대한 바울서신의 표현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에게도 경험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저 또한 복음으로 변화되었고, 복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고백하고 증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바꾸어갑니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에서는 마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통계를 보면,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하는 사람은 18~20%가 나옵니다. 여전히 이 땅에 자신을 성도라고 여기는 1,000만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1,000만 명이 예수님 때문에 삶이 변해가고 있는가? 로마의 변두리였던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에 3,000명, 5,000명이 회개한 것으로도 그 난리가 났는데... 왜 지금 우리는 이렇게 약하고 악할까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물리적 관계와 영적 관계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구약 내내 있었던 이 현상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비유를 통해서 한번 이 이야기를 다뤄봅시다.
(눅 15: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눅 15: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눅 15: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죠.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이른 유산 상속을 요구하더니, 자기 몫을 챙긴 후에는 아버지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진 세상에서 호되게 당한 후,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보려고 하는 모델은 이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아예 교회에서 튕겨 나가 세상에 제대로 빠져 살아가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도 갑갑하고 원하지 않던 아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분들은 둘째 아들과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신앙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이야기를 보면, 이 둘째 아들은 깨어진 세상에 나아가 부딪히며, 그 악함의 끝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눅 15: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이 망나니 같은 아들은 직접 부딪혀서 깨달아야만 하는 친구였고, 다행히도 그는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흔히 완전히 세상에 빠졌다가 크게 깨지고 회개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향해, ‘돌아온 탕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도 큰 은혜입니다. 다행히 이 친구는 돌아왔지만, 실제로는 못 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게, 탕자 이야기라고 불리는 이 비유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바로 그의 형입니다. 아마도 오늘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저의 이야기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한번 그의 형, 첫째 아들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눅 15:25)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첫째 아들은 한 번도 아버지를 떠난 일이 없습니다. 동생이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나는 저런 놈은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버지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떠난 뒤로 늘 마음 아파하던 아버지가, 웬일인지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너무 의아해서 종에게 묻습니다. 종이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눅 15:27)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눅 15: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여러분은 첫째 아들의 화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누구에 대한 화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생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달래러 찾아온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어 따집니다.
(눅 15: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눅 15: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첫째 아들이 가진 2가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제점 (1)
그가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 곁에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표현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원어로 보자면 ‘종처럼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그가 섬겨야 하는 대상,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곁에 있는 것은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라기보다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서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있을 때 찾아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반응이 내가 기대하는 것이 아닐 때 오는 부정적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좋아서 있는 사람은, 그 곁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는 교회에 있는 것 자체를 좋아합니다. 이 안에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소그룹을 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있는 이유가 ‘해야하기 때문에’ 즉, 의무입니다.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공로와 보상의 마음’이 따라붙습니다. 첫째 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를 위하는 것 같지만,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자기 의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동생보다 내가 낫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태도에 화가 납니다. “나한테 더 잘해줘야지.”
그에게 아버지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애초에 자기 마음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버지와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을까요? 이 본문은 그것을 질문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는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떠난 적 없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특별히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의 세계’로 한정 짓고 있는 사람은, 지금 교회에서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한 시간’, 혹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하지 않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하지 않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옷의 단추를 잘못 채운 상태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과정입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 나라를 더욱 깊이 누립니다. 더욱 온전하게 누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원래 아들은 기쁨을 누리는 자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못 누리고 있습니다.
신앙은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고 좋으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신앙은 누리는 것이 확실하니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 같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이미 누리고 있는 상태인데, 나중에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무엇이 필요합니까?
신학은 반드시 신앙에 영향을 미칩니다. 바른 신학에서 건강한 신앙생활이 나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집 안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을 누리는 복음의 실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보상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조금 다른 표현으로 그는 복음과 회심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첫째 아들이 먼저 복음이 주는 변화와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맛봤다면, 동생의 변화와 돌이킴을 보면서 “드디어 내 동생도 복음을 만났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회심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동생이 영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율법과 공로주의적 신앙에 빠져 있으니, 여전히 “왜 쟤는 벌 안 받나?”라는 것에만 꽂혀 있습니다.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기뻐함과 용납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보다 때때로 더 냉담한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입니다. 참된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더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고 편협해지기 쉽습니다. 복음 없이 종교성만 남아 있으면, 사람은 점점 사랑보다 판단에 익숙해집니다. 복음 없이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점 (2)
첫째 아들 안에 있는 관계적 깨어짐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살림을 삼켜버린 이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여기서 형은 돌아온 탕자를 향해 ‘내 동생’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동생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로 볼 때, 그는 어떤 경로로 동생의 방탕한 생활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완전히 다르죠. 그는 아버지와도 단절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첫째 아들의 마음은 가장 멀리 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 안에 있는 기쁨에 대해서 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 곁에 있는 순종적인 아들로 보였고, 어쩌면 자신도 지금까지 그런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이 순간 드러납니다. 그는 그냥 동생과 같은 모습이 싫었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이유로 아버지 곁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첫째 아들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 동행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이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는 마음의 상태였던 것이죠. 아버지와 단절된 마음, 이것이 가장 비극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착한 사람, 선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을 ‘커넥트’라고 표현했던 것 기억하시죠. 지금, 이 순간 가장 연결이 필요한 것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첫째 아들과 같이 헛발질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을 성서신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전체가 ‘잃어버린 것’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가르침이 나왔을까요? 15장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나옵니다.
(눅 15: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눅 15: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눅 15: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백성이었죠. 구약 마지막 부분에 북이스라엘은 망하고 남유다는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귀환하는데, 이 시기부터는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을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중 종교적으로 모범이 되고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이 죄인을 품는 것을 비난하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첫 번째 이야기는 양 100마리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끝납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죠. 그들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비유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당연히 자기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99명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100마리 중의 1마리. 고작 1%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있나?” 이랬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두 번째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어떤 여자가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집니다. 배경 설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열 개의 드라크마는 당시 풍습에서 혼례에 사용된 예물을 의미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심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그것을 찾기 위해 아주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찾음에 대한 기쁨을 벗과 이웃과 함께 나눕니다.
100분의 1에서 10분의 1로 강도가 조금 더 세졌습니다. 여전히 유대 종교인들은 1/10을 얻고 기뻐하는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 잃어버린 동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10의 죄인들에게 유난을 떤다며 팔짱을 끼고 지켜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비유가 탕자의 비유인 것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것은 두 아들 중 하나. 2분의 1입니다. 이야기 전반부에서 둘째가 집을 나갔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가 망하게 된 이야기를 들으며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둘째 아들과 연결되니까요. “꼴 좋다”라고 여겼겠죠.
그런데 이 비유의 진짜 클라이막스는 후반부죠. 비유는 이제 완전하게 ‘큰 아들’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1/1. 이제 비유는 바리새인들을 향합니다. 자신들이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아홉인 줄 알고, 동전 아홉인 줄 알고, 둘 중 괜찮은 아들인 줄 알았던 그들의 심장을 향해, 이 비유는 이제 도망칠 수 없이 좁혀오며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첫째 아들은 하나님을 잘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잘 섬기고 있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둘째 아들의 못난 모습과 같이 정죄하고 비난하고 있었으니까요. 자신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처럼, 세리와 죄인들은 그곳에 함께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처럼 여겼으니까요.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은 양 이야기할 때나, 동전 이야기를 할 때나,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까지도 이것을 다른 이들을 향한 교훈처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결론은 가장 심하게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것, 너희들이 바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던 이유. 그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자인 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가 오늘 어쩌면 한국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첫째 아들에게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가장 슬퍼하는 것은 저 교회 밖에 있는 잃어버린 자가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하지만,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은 첫째 아들의 잃어버림. 그 단절입니다.
구약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느끼시는 아픔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보다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스라엘입니다.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긋남에 대해서 경고하지만, 그들의 자기중심성은 좀처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늘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왜곡해서 취향껏 섭취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잃어버린 자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사람인 줄 모릅니다. 그들은 늘 제사의 자리에 있었으나, 늘 하나님의 마음과는 멀리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옛 언약의 돌판에 기록된 진리가 아니라, 새 언약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보여주기 위해, 깨우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도 복음이 필요하죠. 그런데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멀리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 구약의 이스라엘. 유대인들. 그리고 이 시대의 수많은 교회 안에 있는 첫째 아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상태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런 의미를 모르면 이 말씀들이 이해가 안 되죠. 예수님이 이방인을 차별하나?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마치 자신들이 이미 복음 안에 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들에게 더 시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는 이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에 상처를 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은 아예 깨닫지 못하는 영적 맹인의 상태에 머물러 버리니까요. 자신들은 종교 행위를 하고 있으니,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그 착각이 이들을 아예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자신을 뭐라고 이해했어요? 의인으로 이해했습니다. 첫째 아들도 자신을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상태로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둘째 아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이해했습니다. 단절된 상태. 그래서 그는 그 단절을 깨닫고 연결되기 위해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와 단절된 또 다른 아들인 첫째 아들은 그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칭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자칭 의인들의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중심은 하나님께 없는데, 자기중심성 가운데 드리는 예배의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만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시급하게 찾고 있고 부르고 계신 것은 종교는 있는데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한국의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시지만, 하나님의 더 큰 아픔과 더 큰 시급함은 교회 안에 있으나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이 부르심을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잃어버린 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오늘 안에서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신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나에게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하는 은혜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예수님이 왜 오셔야만 했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교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새 언약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게 집중했다면, 오늘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오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맞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집 밖에 서서 분노하고 있는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잔치 중간에 나아가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는 그 역시 찾고 있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까이 있었지만,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아버지를 향한 기쁨은 없었습니다. 형제를 향한 사랑도 긍휼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오늘 말씀을 들으며 “내 안에도 첫째 아들의 모습이 있구나”라는 마음이 드셨다면, 그것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은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위험한 것은 잃어버린 상태 자체보다, 자신이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더 잘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복음은 하나님을 위해 버텨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교회에 있지만 사랑보다 판단이 먼저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기쁨이 없는 분이 계신다면, 나의 어긋난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저절로 복음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그때부터 복음은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 됩니다.
나의 공허한 마음을 다른 곳에서 채우려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가야 해결됩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 주님께 의도적으로 머물러,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라는 고민보다, '지금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를 1분만 묵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조율하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잠시 우리가 이 시간에 먼저 하나님께 머무는 기도로 나아갑시다. (1분)
이제 우리가 찬양과 기도로 그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주님이 진실한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 위에 반드시 일하실 것입니다.
결단의 찬양 : 소원 (주님 내가 주의 장막을)
특송 _ 내일을 보리 (교사의 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