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가 주일 설교는 지난 3월에 했었는데요. 어, 그때 들음과 행함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잘 행하고 또 믿음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잘 듣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씀드렸었죠. 어,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비록 부족한 제가 설교를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또 주님 앞에서 듣는다라는 그런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실 수 있으시죠? 네. 어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기적이다 또는 이타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듣곤
합니다. 뭐 어떤 선택에 대해서 결정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고요. 또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어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이기적인 것은 무엇이고 이타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어, 제가 국어 사전의 정의를 한번 가져와 봤는데요. 먼저 이기적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것 이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이타적이다라는 것은 나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더 꾀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시 한번 질문드려 볼게요. 여러분은
이기적인 것이 좋으신가요? 이타적인 것이 좋으신가요? 그렇죠. 누군가 나에게 아, 너는 참 이기적이야. 이러면 좀 기분이 안 좋죠. 이타적이라고 하는게 좋 좋잖아요. 어, 저도 이기적인 것보다는 이타적인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이처럼 사람들은 이타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이타적인 사람을 좋아하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또 예수를 믿는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더욱더 나는 이타적이어야 해. 나는 이렇게 뭔가 남의 유익을 더 구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두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아무도 자기의 요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이 성경에 참 많은데요. 이런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그리스도인은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돼. 그게 그리스도인이야라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양보도 하고 배려합니다. 다시 말해 볼까요?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양보한다는 거예요. 아, 이거 너 먹어. 이거 가져. 너 해. 나 괜찮아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그 상대를 위해서
내가 대신 손해를 보거나 또는 상대의 편의를 위해서 기꺼에 내가 조금 더 불편해지기로 마음을 먹기도 하죠. 여러분 우린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희생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어서 또는 사랑하기 위해서 희생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성경도 우리에게 이런 희생하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내가 가질 수 있는 무언가를 양보할 거예요. 저는 이것도 희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질 수 있지만 기꺼이 양보하는
거죠. 그러다가 신앙이 조금 더 잘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내가 이미 갖고 있던 거, 이거는 원래 내 거였던 것을 나눠 주는 베풀어 주는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의 사랑이 계속 성숙해 가고 또한 우리의 희생 희생이 점점 무르 결국에는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 형제를 위해서 목숨까지내어 줄 수 있는 수준에 이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냥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거, 좀 양보 많이 하는 사람이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형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내어 줄 수 있는 그런 희생의 사랑의 경제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죠.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이타적인 것, 사랑하는 것은 결국 희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아까 국어 사전을 살펴봤다고 말씀드렸는데 거기에 실제로 이타적인 것이라는 단어의 유의가요. 희생적인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 또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섬기는 것은 희생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희생을 합니다. 그 크기가 비록 지금 당장 뭐 성경이 말하는 것처 목숨을 내어주고 내 가진 것을 다내어 주고 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아마 여러분은 저마다 남을 위해서 또 여러분과 함께하는이 공동체를 위해서 조금 더 희생하려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계실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한번 드려보고 싶어요. 우리의 그런 희생은 정말 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걸까요? 우리는 정말 다 사랑해서 희생하는 걸까요? 저는 제가 저를 돌아봐도 그렇고 또 종종
몇몇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희생하는 이유가 사랑하기 때문만은 아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이타적으로 희생을 합니다.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하고 희생할 때도 있다는 것이죠. 사랑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해서 사랑받고 싶어 할 때가 우리에겐 있습니다. 어, 예를 들면 여러분 이런 경험 한 번쯤 다 있으실 거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다 보면
이런 경우들이 종종 생깁니다.이 사람과 나의 관계가 틀어질 거 같아요.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거절하지 못하고 맞춰 주는 거죠. 또는 그 사람이 나한테 실망할 거 같아요. 그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보다 더 과하게 우리는 무언가 헌신하려고 하고 희생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로 참을 때도 있고 상대에게 무조건 맞춰 주려고 애을 때도 있고 때로는 아 나는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것을 참고 나의 힘듦을 뒤로 밀어가면서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신과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기꺼이내어 주면서까지 헌신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선한 사람이야. 나는 이기적이지 않아. 난 이탄이야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희생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런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끝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고 싶은 간절함. 내가 이렇게 희생하면 저 사람이 나를 계속 좋아하겠지. 내가이 정도 섬기면,이 정도 내가
무언가 내놓으면 저 사람도 나를 인정하겠지. 여러분,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겉으로 봤을 때 매우 이타적이에요. 굉장히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죠. 그래서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인 것처럼 비춰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사람들은 분명 지치고 억울해지고 공허해지고 더 나아가 외로워지기 쉽습니다. 분명 사랑하는 거 같아 보여요. 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점점 외로워지고 군중 속에
있지만 더 외로워지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거죠. 처음에는 아, 내가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내가 이렇게 해줄게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를 위해서 헌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경우 섭섭해 합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경우 서운해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희생을 통해서 나도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이 다 있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그런데 그런 사랑은요. 사실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갉아먹는 자기 소모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결국은 자신이 다 소진되어서 지치게 될 거라는 거예요. 자신을 하얗게 불태워 버렸으니 남는 것은 소진 번나웃밖에는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마주하게 될까요? 우리는 왜이 사랑과 희생이란 딜레맛 속에서 항상 방황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사랑받고 싶으시죠? 덜 받고 싶으신가요? 사랑받고 싶으시죠? 네.
우린 다 사랑받고 싶어요. 외면당하고 버림받고 미움받고 싶은 사람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남녀노 살 것 없이 사랑은 다 좋아합니다. 어, 제가 요즘 자주 보는 프로그램이 이호선 상담소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거기 굉장히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이 나옵니다. 상담을 받으려고요. 그리고 정말 다양한 영역에서의 어려움과 고민들을 와서 막 토로해요. 그런데 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있으면 젊은 사람부터 나이가 아주 많은 노년의 부부까지 각자 표현한 언어는 다르고
아 전 이게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그 영역은 다르지만 결국 다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어요. 나의 배우자가 나를 한 번 더 봐 주면 좋겠어요. 내 부모가 내 자녀가 나를 좀 돌봤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 동물들은 사실 잘 먹기만 해도 살죠, 여러분. 근데 사람은 잘 먹는다고 잘 사나요? 아니요. 사람은 내 배가 지금 고프지 않아도 사랑이 고프면 크지 않아요. 사람은 내가 지금 잘 크는 거 같은데
누군가 그에게 사랑을 주고 애정을 주고 돌봄을 쏟지 않으면 그는 어쩌면 결핍과 공허 가운데 머물러 있기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고 또 사랑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사랑이 참 필요한데 또 사랑받고 싶은데 문제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더 쉽게 말하면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낼, 사랑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이 말은 곧 이런 말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받은 사랑이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만약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랑의 생산자는 되기 어렵지만 사랑의 전달자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 여러분 그래서 성경은 아직 사랑이 채워지지 않은 아직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아요. 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아닌가요?네 맞죠. 기독교는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그런데 사랑받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먼저 가서 네가 먼저 사랑받아야 돼. 너 먼저 사랑 채워야 돼라고 가르쳐요.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채우려고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모두 다 사랑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을 받으래요. 사랑을 받으려고 아무리 헤매는데 나에게 그것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을 생산해서 나에게 전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을 채우고 싶어도 채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에게는
사랑받을 방법이 없어. 대신 하나님께 있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요한일서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 유일한 길이
하나님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죠.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또한 동시에 그 하나님 그분 자체가 곧 사랑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성경이 말하는 누일한 사랑의 생산자 사랑의 원천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이어서 요한 사다가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사랑받지 않은 사람에게요. 너 가서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뭐라도 하나 내나 봐라고 말하는 건 폭력적인 거죠.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 어떡할까요? 그런 사람에게는 너도 가서 이제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채웠고 누군가에게 줄 것이 생겼기 때문이죠. 어, 여러분이 만약에 물한 방울이 없는 그런 아주 상막한 사막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은 나도 없고 너도 없어요. 그 누구에게도 물이 없습니다. 어디선가서 물을 구해 와야 해요. 모두가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마실 물이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그 사막에서 유일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나요? 어떻게든 그걸 찾아서 찾아가서 물을 마시겠죠. 그리고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내가 물을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고 내 물동이를 채운 사람 그때부터 무엇을 할 수 있냐면 다른 누군가가 나 목이 말라. 나한테 물을 좀 줘라고 말할 때 그제서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요.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또 동시에 사랑하며 살고 싶어해요. 나도 사랑은 사람, 이타적인 사람,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왕이면 나밖에 모르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보다 저 사람 베풀 줄 알아. 저 사람은 사랑이 많아라고 듣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만약 오늘 여기 계신 예배자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이 있으시다면 여러분에게는 오아시스가 필요해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오아시스에 가서 물을 퍼오듯이 하나님께 가서 사랑을
퍼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채워진 후에야 비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결국 성경은 사랑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죠. 인간은 사랑을 생산할 수 없지만 대신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 때문에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지 반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사랑이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주님께 가면
어떤 사랑을 과연 채워올 수 있을까요? 우리 로마서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네. 여러분이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아무 쓸모가 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내어 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사랑이죠. 그런데 어 러시아 철학자 아일랜드라고 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사람들 많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또 어떤 그 삶에 살아간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을 대접하되 결국 우리에게 똑같이 대접해 줄 만한 사람에게 그리하라는 것이다.이 아일랜드라고 하는 철학자가 지켜봤을 때 세상의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이런 모습이라는 거예요. 남을 대접하되 남을 사랑할 수 있지. 남을 대접할 수 있지. 그런데 너에게 똑같이 그렇게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 너에게
똑같이 그렇게 대접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거야. 여러분, 세상의 사랑은 이처럼 많은 경우에 계산적입니다. 내가 받을 수 있는만큼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저 사람에게 아무리 줘봤자 나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그 사람이 계속 주는 것은 바부 같은 짓이야. 그럼 미련한 바보가 어디어라고 말하는 것이죠. 결국 사랑의 모습이 기인 테이크가 되는 그런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읽었던 로마서의 말씀에 있는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가요?
내가 쓸모 있을 때만 사랑하는게 아니죠. 내가 설령 아무게 쓸모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내가 무언가를 줄 수 있을 때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때도 나와 함께 해 주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랑 아닌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꺼이 희생했다라고 말합니다.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었던 모습일 뿐이었죠. 어, 제가 앞에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선 반드시 사랑을
어, 받아 와야 한다., 채워 와야 한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어떤 사랑을 채웠느냐에 따라서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 달라진다는 말이기도 해요. 여러분, 기브앤테이크, 주고받는 사랑을 채운 사람 어떻게 될까요? 그 자신도 기앤 테이크의 사랑을 하겠죠. 내가 이만큼 줄테니까 너도 이만큼 줘. 여러분, 그런데 서로 부족했어요. 서로 부족해서 내가 너한테 이만큼 줄테니까 너도 이만큼 줘 하면 그냥 일대일 주고 받는 거예요. 그러면 또 채워진
사람 없이 계속 부족한 사람들 뿐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계산하고 희생하면서도 저 사람이 나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줬는데 저 사람 나 안 주면 어떡하지라는 그 전정긍한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한 거 같은데 외롭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채운 사람은 그 자신도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어 물론 우리는 다 연약한 인간인데 어떻게 일도 계산하지 않고 그럼 무한한 사랑을 하겠어요? 문등문등 내 머릿속에는 계산기가 스쳐 지나간 순간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진 사람은 그 계산기를 없는게 아니라 그게 사라지는게 아니라 그 계산기를 끌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계산이 되는데 그것을 끄고 아낌없이 주려고 노력하는 그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죠. 내가 아무 쓸모가 없을 때, 내가 주님께 드릴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그때도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살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경험한 사람, 알게 된 사람, 배운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희생적인 사랑이죠. 그리고 또한 우리가 기대하는 이타적인 삶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면이 시점에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또 하나 어 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야 되는 거 알겠어요? 근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어떻게 채우실 건가요?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에게 사랑은 전달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 왔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 사랑을 전달받을 수 있는 그 연결고리 통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면 우리는 사랑을 받을 수 있죠. 우리 요한복음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여러분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하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의 고백으로 오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요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가르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야. 나는 통로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여러분, 여기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고 또 그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세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내가 아버지께 받은 사랑으로
나도 너희를 사랑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예수님도 하나님께 받으신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먼저 연결 통로가 되어 주셔서 그 사랑을 받으시고 그 사랑을 또다시 우리에게 흘려 보내 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결국 그 연결고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먼저 와서 다가와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사랑받기도 또한 사랑하기도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오아시스가 있다는 걸 들었어요.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죠. 그 오아시스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가서 그 물을 마실 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정말 가서 목을 추일 수 있는 그 오아시스가 어디인지 그리고 어떻게 거기로 갈 수 있는지를 알려 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먼저 그 물을 마신 상태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끊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해 주지 않았다면 그 통로를 다시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그분이 오셔서 기꺼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그 사랑의 통로가 먼저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마 평생 채워지지 않는 그 텅빈 공허한 마음과 씨름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은이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신 일이었어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과 너희의 관계가 회복될 그 날이 가까이 왔다. 여러분,이 관계가 해결되어야 단절되었던 그 통로가 다시 연결되어야 우리가 사랑의 근원과 다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 우리가 우리의이 소중한 한 번뿐의이
삶의 기회를 그저 그런 공허함과 싸우다가 다 허의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또 흘려보내 주셨죠. 로마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꺼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통로 또 그 사랑의 통로 그 연결고리를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의 근원 그 하나님과 다시 연결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거죠. 우리의 근원과 다시 연결된다면
사랑은 저절로 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이 통로가 완성되고 회복된 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우리는 우리의 통로가 되어 주시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 주는 그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받을 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이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 혹 누군가는 근데 꼭 그게 하나님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꼭 하나님에게만 사랑받아야
하나? 꼭 하나님이어야만 사랑이 채워지나?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가족일 수도 있고 연인이거나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그 사랑도 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삶의 전부를 붙들어 주는 근원 자체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린 연약하고 한계가 많고 또 상황에 따라 흔들리기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이유로 서로 헤어질 수도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에게 지치지 않고 무한하며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필요하다라는 성경의 말씀을 여러분께 알려 드리고 있는 거예요. 감정이나 어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런 반석 같은 그런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이 근원적으로 우리를 붙들 수 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 제가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데 제가 그거를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 여러분, 제가 저의 가족들을 너무 사랑합니다. 제가 저의 친구들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사랑하다가 지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내 가족인데 나랑 20년을 함께한 친구인데 사랑하다가 지치더라고요. 그리고 나는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는 사랑하고 싶어요. 그런데 내가 너무 힘들 때, 내가 또는 몸과 마음이 너무 아플 때, 나에게
에너지가 없을 때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저를 너무나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제가 이런 저를 보니까 이런 생각이 또 들더라고요. 아, 나도 이런데 모든 사람이 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지치지 않는 사랑? 마음이 힘들 몸이 아프든 그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고 나를 끝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을까? 어, 저는 아직 부모가 아니지만 별성제님 유준히 사랑하시죠? 네. 하지만 지치시죠? 지치지 않으신가 봐요. 아직.
네. 우리는 사랑하다가 지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말하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 오늘 저는 어, 여러분께 이렇게 사랑을 받은 그런 지치지 않는 사랑, 근원의 사랑을 받은 또한 그렇게 사랑의 통로가 된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사실이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어요. 바나바의 의미는
위로의 아들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어,이 별명만 봐도 대충 우리가 바나바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또 그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또 격려하며 세워 주는 그런 아마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보면 실제로도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바나바가 이렇게 사랑이 많은 또한 누군가를 위로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위도 위로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발 이렇게 설명하는데요.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그는 사랑의 통로이신 예수님과 잘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채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요. 사랑입니다. 그가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누리고 있었고 또 더 나아가 자신이 받은 사랑을
똑같이 흘려보내는 통로였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또 무엇이 충만했죠?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뭔가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그리고 하고 계신 일,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내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말해요. 바나바가 믿음이 충만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서 또이 세상을 사랑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지금도 어떤 노력을 하시 계시는지 앞으로도 어떻게 하실지를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렇듯 그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졌을 때 그도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위로의 아들 바나바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이렇게 사랑을 채운 바나바는 어떤 사랑을 하며 살아갔을까요? 그는 먼저 기꺼이 믿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믿어 주셨던 것처럼 주님이 자신을 기대해 주셨던 것처럼 자신을 세워 주셨던 것처럼 그도 누군가를 믿어주고 기대해 주고 넘어지지만 다시 격려하고
일으켜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우리 사도행전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자유로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고 어 여러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울이 누굴까요? 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바울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죠? 네. 원래는 기독교인들 박해하고 잡아다 죽이는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시의 기독교인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사람들은 어 바울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타나면 피해야 되거든요. 그가 얼마나 잔혹하고 무서운 사람인지를 정말 뭐 뾰속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바울이 갑자기 회심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도 이제 예수 믿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사람들이이 말을 잘 믿었을까요? 믿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반응이죠. 여러분, 바울은 매우 빠르게 회심한다고 하는 그 급진적 회심에 대표자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성도를 박해하러 가던 길의 회심에서 마저 가던 길을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아직 바울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바울을 지켜볼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불가 얼마 전까지 우리 죽이려고 쫓아오던 그 사람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나도 예수 믿어라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죠. 혹시 바울이 회심한 척하고 우리 어울리다가 우리 다 잡아가는 거 아니야? 어쩌면 이런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또 그들 중에는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바울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또는 죽임을 당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바울이 진짜 회심했다더라도 나는
그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어.라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예요. 또는 누군가는 바울이 왜심을 한다고, 바울 같은 사람이 변한다고 아니 나는 믿지 못하겠는데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사울의 편, 그 바울의 편을 들어 주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어 대신 공동체에게 바로 회심했고 그가 다메색에서 복음을 전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바나바가 바울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때 그를 믿어 주었어요. 어쩌면 바나바에게도 여러 고민이 있었죠. 아 진짜 바울이 속인 거면 어떡하지? 괜히 믿어줬다가 나중에 내가 다 책임져야 되는 거 아니야? 괜히 편들어 줬다가 괜히 공동체가 나도 미워하는 거 아니야? 여러분, 저는 바나바에게도 이런 걱정 또는 이런 계산기가 두드려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랑받은 바나바는 그것을 끌 용기를 내죠. 바나바는 바울을 믿어 줍니다. 바울에게 기회를 줍니다. 바나바 자신에게도 충분히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기꺼이 그 일에 앞장섭니다. 바나바의 이런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더 빨리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었고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사랑의 통로가 되었을 때 그는 동시에 바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통로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나바는 자신을 먼저 믿어 주셨던 그 주님의 사랑을 기억했을 거예요. 용서할 수 없었던 나를 먼저 용서했던 그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매번 넘어지고 기대할 것이 없고 매번 실수하는 날을 끊임없이 믿어 주고 기대해 주시고 다시 할 수 있어. 일어나 봐라고 격려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도 바울을 믿어주고 용서하고 기대하는 사람이 되게 한 것이죠. 어, 두 번째로 바나바는 기꺼이내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물질과 에너지 또한 시간을내어 줄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1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바나바는 자기가 가지고 했던 밭 그 땅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또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물질을 기꺼이내어 놓았죠. 또 바나바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사람이었어요. 안디옥이라고
하는 지역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 회심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해요. 바나바는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꺼이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그는 물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로 공동체를 위해서 또 남을 위해서 주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죠. 자신이 받은 사랑을 자신만 채우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를 채우는 일에 사용하기 시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 여러분, 그런데 이러한 바나바
희생과 헌신은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인정받고 싶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게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땅을 팔아 교회에 헌금했다라는 이야기 바로 뒤에 누가 등장하냐면 아나니아와 삽삐라고 하는 부부가 등장해요. 그런데 그들도 똑같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전부 다 드렸다라고 그들이 말했는데 사실은 조금 남겨 놨었어요. 아이 정도는 내가 남겨 놔야지.이 정도 내가 써야지라고 남겨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네 네.이
일 때문에 그들이 심판당에 죽습니다. 저는 그들이 재산 중에서 조금을 남겼기 때문에 심판을 당했다. 난 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마치 전부를 드린 것처럼 나는 주님 앞에 이런 희생건신을 한 것처럼 공동체에 보이고 싶었다는게 문제였죠. 결국 그들의 행동만 보면 헌금한 바나바나 헌금한 아나니아와 사비라나 똑같아 보였습니다. 똑같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와 달리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좀 더 좋은 성도라고 여겨지고 싶은 그 마음 때문에 헌신한 거였어요. 하나님은이 부부의 사건을 통해서 이러한 헌신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며 잘못된 것이라고 공동체에게 단호하게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또 바나바는 돈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쓸 때도 자신이 인정받는 것에는 그렇게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아까 바나바가 믿어주고 세워졌던 그 바울이 나중에는 영향력이 훨씬 더 커져요. 만약 바나바의 헌신과 사역이 내가 인정받고 싶은 그런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면 바나바는 점점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커져 가는 바울을 경계했을 것입니다. 그를 미워하고 질투했겠죠. 아, 내가 제 옛날에 편들어줘조가 저렇게 된 건데 여러분 이런 마음 생겼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어디에도 바나바의 그런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그 구절에 보면 바나바가 안에 갈 때 한 사람을 데리고 갔어요. 그렇죠? 그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바울입니다. 바나바가 직접 바울을 찾아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같이 갑니다. 어쩌면 어이 모습은 어 바나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아 나 혼자는 어려울 거 같은데 내가 그 공동체를 다 돌보기엔 좀 부족할 거 같은데 바울 우리 같이 가자. 우리 같이 해보자라고 그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와 함께 동역하기 시작한 거죠. 바나바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고 또다 또 다른 조력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바나바 희생은 내가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았기 때문에 기꺼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거였어요. 그리고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사랑, 우리가 섬기는 희생과 헌신도 이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순서가 뒤바인 그런 사랑과 순서가 뒤바뀌어 버린 헌신은 결국에는 나를 갉아먹는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어 그러니 여러분 바나바처럼 사랑을 먼저 채우십시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먼저 되십시오. 어,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 여러분, 오늘의 설교의 제목이
통로인데요. 바나바에게도이 통로가 되어준 많은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사랑의 통로가 되어준 첫 번째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지다. 여러분 가지는 나무에만 붙어 있으면 사는 거예요. 나무에만 붙어 있으면 그 나무가 빨아올리는 모든 양분과 사랑을 공급받는 거예요. 바나바는 포도나무이신 나를 살게 할 나를 사랑으로 채울 그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삶을 통해서도 자신도 기꺼이 통로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시기 위해서 부단이 애쓰셨어요. 어, 우리가 풍성한 삶 그 양육에 보면 하나님과의 그 사랑관계를 잘 맺고 연결되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따로 구분된 배타적인 시간을 가지 가져야 한다라고 배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배타적인 시간을 갖는 본이 되어 주세요. 사역이 아무리 바쁘고 사람들이 자기를 아무리 이렇게 사랑하고
쫓아끌벅적해도요. 예수님은 그들과 반드시 떨어져서 사역과 잠시 떨어져서 하나님 아버지께 홀로 나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예수님도 사랑을 채우고 다시 힘을 채우는 충전의 시간을 가지셨다는 거죠. 바나바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께 엎드리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간이 없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 절대 못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그 애음 없이 믿음이 충만한 사람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바나바를 소개하는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라는 그 문장 뒤에는 그가 얼마나 주님과 연결되기 위해서 애었는지 그가 얼마나 엎드렸는지 그가 얼마나 말씀 앞에 자신을 내리쳤는지가 숨겨져 있는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에게 그 숨은 시간이 필요해요. 남들은 다 보지 못하는 나의 희생과 나의 헌신 뒤에 숨은 그 문장이 필요합니다. 그는 나와 연결되기에 애쓰는 사람이었다. 오롯이 하나님께 머물 수 있는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구분된 시간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시간, 그 묵상의
시간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어, 양육을 하면 하루 세 번 10분씩 하나님과 교재하는 텐텐이라는 훈련을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 텐데요. 어, 제가 만난 많은 따르미들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텐도 어려워요. 그 10분도 채우기 어려워요. 저도 해보면 비슷한 거 같아요. 처음에 10분도 어려워요. 그러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데 5오 하셔도 돼요. 그것도 안 되겠으면 3 3 하셔도 돼요. 난 그것도 지금 너무 어려워요. 1 1 하셔도 돼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내가 봤을 때이 고장 몇 분이 뭐가 다르겠어? 아니요. 그 고장 몇 분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해 주는 단단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 여러분 반드시이 시간을 가지십시오. 혹시이 중에서 그런 시간 갔다가 무너지신 분들 계십니까? 다시 시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믿어 주고 계십니다. 다시 일어나면 돼. 려하고 계십니다. 주님, 저는 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분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께 연결되셨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는 바나바에게 공동체가 또한 좋은 사랑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그가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서 교회에 가져오기 전에요. 그 앞에 보면 먼저 그렇게 이미 그렇게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자신의 것을 기꺼이내어 주고 주님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서로 붙들어주고 돌봐주고 사랑했던 그 공동체가 바나바에게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그 공동 안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사랑의 통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배워서
바나봐도 그런 통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기 계신 모든 예배자 여러분, 또 우리 사김의 공동체가 그런 사랑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완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랑의 통로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럼에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채우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나를 밀 나를 향해 밀려 들어오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나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를 채운 그 사랑이 또다시 나를 통해 흘러가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를 일으키고 그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그런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이 시간이 문장을 여러분의 목소리로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멘. 네.이 이 시간 예배트 올라와 주시고요. 우리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사랑을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어디서 사랑을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희생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혹시 사랑하다 지치고 고갈되진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나아오십시오. 우리는 완벽한 통도가 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필려 보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이 시간 이런 마음 다해서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다 [노래] 표현
못해도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노래]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노래]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리라. [노래] 다 담지 못해도 나 [노래] 닮아가 다시 한번 우리 여러분이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다 표현 못해도 표현 못해도 나 [노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노래] 다 알 수 없어. 나 알아가리라. [노래] 다지 못해도 나갈망하리라. [노래] 그 사랑 [노래]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노래] 사랑 얼마나 날 부욕케 [노래]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노래]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이 시간에 사랑 앞으로 [노래] 나오기 원하신 분들은 자리에 데려 함께 고백하며 나아가겠습니다.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노래] 다 표현 못해도 나 [노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노래] 나 고백하리라. 다 [노래]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답지 [노래]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 그 사랑 [노래] 얼마나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 그 사랑 얼마나 날 [노래] 부욕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노래] 놀라울지를 그 사랑 [노래]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노래]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그 [노래]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그 사랑 [노래] 얼마나 날 구역하는지 그 사랑 주님 [노래] 그 사랑이 우리를 얼마나 부욕하고 우리 얼마나 강하게 하고 우리 어디까지 채울 수 있는지 아버지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주의 사랑을 받아서 나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러 마음 가득아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