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So what

2026-05-27 · 창세기 47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우리는 최근에 창세기를 묵상해 오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쉽게 정리하자면 2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1~11장까지는 고대의 역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정리해 주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50장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가 부족사회였기에 ‘족장시대’라고 부릅니다. 창세기는 4대에 걸친 족장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과 형제들이죠. 이렇게 4대에 걸친 인물들의 이야기가 창세기 12~50장을 수놓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먼저 그 일에 함께할 언약 백성,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될 나라를 만들어가십니다. 그 시작점이 되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라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함께했던 아브라함의 가문이라면, 이 창세기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 느낄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번성하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창세기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닥친 기근으로 인해 그곳에 살 수 없어서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옵니다. 이게 창세기의 끝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의 끝이 왜 이래?” 이런 생각이 들기에 충분합니다.

사실 창세기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면, 언약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4대 족장의 모습에 대해서도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은 불리하면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아들을 얻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삭’은 자식을 편애했고, 그로 인하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죠.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는 속임수로 시작하였다가 속임을 당하여 삶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의 아들들’은 동생을 인신매매하고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살아갑니다. 메시아의 계보를 시작하게 되는 ‘유다’는 며느리였던 다말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의 중요한 인물들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폭로합니다.

저는 신자는 신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큰 편입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에게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다움이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해요.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의 존재 자체에는 수많은 약점과 연약함이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약함을 핑계 삼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불완전함이 가득한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교회처럼 1:1 양육이나 공동체 사역 등을 통해서 삶의 접촉면이 넓고 깊어지다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상 연약함의 측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는 상태라면, 주일에 2시간 정도 좋은 모습만 보이며 좋은 이미지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깊이 교제하다 보면, 그 껍데기와 가면 아래 숨겨져 있는 ‘모난 모습들’이 있습니다.

한때는 교회에 “왜 이렇게 깨어진 사람이 많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교회는 의인의 모임이 아니라, 깨어진 죄인들이 모여 비로소 회복을 시작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모습은 성경의 조망 앞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연약함까지 성경이 들추어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의 그 약점들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사실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도 그렇게 들여다보면, 인생에서 내가 감추고 싶을 만큼 부족한 모습들도 만만치 않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듯 잘 감추고 있는 사람은 멀리서만 보면 있을지 몰라도, 사실 삶을 맞대고 살아보면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깊게 만나다 보면, 사람에 대한 헛된 기대는 점점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라는 말씀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 풀리죠. 열매는 바로 깨어진 내 삶을 회복하여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그 일하심이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 즉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옆 사람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보면 실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옆 사람의 이전 모습을 알고, 지금 그 사람 안에 변화를 일으키셔서 조금씩 열매를 만들어내고 계신 하나님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당신 안에 예수님이 계시군요.”

그러다가도 가끔 그 사람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 모습을 보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아, 지금 예수님과 연결이 잠시 끊어졌구나.” 와이파이 신호가 안 잡히는 것처럼 이해하시면 됩니다. 성령 충만이란 주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고 주님이 하시는 일이 나를 통해 온전히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람이 본질상 얼마나 깨어진 존재인지, 그러나 주님이 그런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 가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성경적 세계관으로 나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람에 대한 바르고 참된 기대와 소망이 생깁니다.

선한 사람을 만나면 그 영향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하게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때로는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던 사람이 어떤 일로 역변하면 나도 역변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는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다. 마르지 않는 샘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야, 우리가 지속적으로 정변합니다.

성경을 잘 보면,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일부러 성경은 각 사람의 연약함, 교만함, 찌질함, 흔들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람의 존재성’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성경을 읽으면 “이런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고?”라는 물음표도 나올 때가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성경이 그것을 보여주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약합니다. 그리고 모두 악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것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온전하게 하나님과 연합한 삶을 살아가면, 그 사람의 연약함을 능히 넘어서서 한계 없이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기대이며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내가 무시하며 봤던 사람들에게서 내 힘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멋진 모습도 보게 됩니다. 맞습니다. 내 힘으로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평생 노력해도 내 힘으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내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입니다. 주일설교와 같이 요셉과 마리아가 각자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고 믿음으로 나아가고 맡기는 모습이 있을 때, 그들의 가정 속으로 그리스도가 찾아와 살아가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면, 내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그것을 살 수 있는 선택과 결단의 능력입니다.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고자 하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영성’이 있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영성입니까? ‘종교적 언어, 영적인 제스처, 포스가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 깊은 영성은 시대와 세상과 자신과 주변 사람을 진리에 비추어 볼 수 있는 눈을 갖추고, 그 진리에 연결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비참함과 기대할 것 없는 사람의 죄성을 깨닫는 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회심 전에는 나와 그들의 밖에서, 회심 후에는 나와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께 꼭 붙어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처음에는 사람과 사건을 이해하게 됩니다. 거기부터 당연히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공부하다 보면, 성경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과 사건을, 그들 뒤에서 때로는 숨어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읽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통해 내 삶을 읽어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요셉’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요셉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 안에 계신 하나님은 기대할 만합니다.

창세기 46~47장이 최근 묵상 본문인데, 전체적인 창세기의 이야기 흐름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길게 보여줍니다. 족보 이야기도 나오고, 애굽에 정착하는 이야기도 길게 하고, 식량 정책을 펼치는 이야기도 보여줍니다. 성경학자들도 이전에는 이 본문에서 요셉의 뛰어난 점들을 캐내어 그를 신앙의 모델로 제시하기에 바빴습니다. 요셉에게 너무 집중한 것이죠. 그러나 최근의 연구되는 자료에는 조금 다른 견해들도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요셉 때문에 가장 성공한 것은 당시 최강대국이 되었던 애굽과 바로입니다. 이번 주 본문만 하더라도 요셉이 펼친 정책으로 인해서 결국은 바로에게 모든 땅이 귀속되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소작농이 되어 살아가는 계층의 피라미드가 강력해진 것입니다.

요셉이라는 한 인물에게 있었던 우여곡절이 많은 삶은 분명히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속해 있습니다. 창세기는 우리가 그것을 보도록 안내하기 위해 힘씁니다.

(창 45:7)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애굽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동시에 야곱의 가족을 지키신 것입니다. 만약 애굽조차도 기근에 대비하지 못했다면 주변 나라와 야곱의 가족도 7년의 기근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이야기는 요셉 개인의 구원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정책은 기근의 시대를 이겨내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당대의 기준에 비해서 저렴한 세금 정책을 시행하는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애굽은 제국이 되었고 바로의 권력은 더 강해졌습니다.

훗날 출애굽기에 이르면 바로의 강력한 왕권 밑으로 계층이 철저한 구분 된 피라미드 시스템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과 부르짖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고통에서 건져 내시죠. 성경은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어쩌면 창세기는 이미 그런 긴장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새번역은 그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창 47:21) 요셉은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 /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과 불가타에는 '요셉이 백성을 강제노동에 징용하였다'

일부 고대 사본들은 이 부분을 강제노동의 뉘앙스로 읽기도 합니다. 애굽의 강제노동 체제가 훗날 출애굽 이야기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는 점은 충분히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훗날 벌어진 모든 일이 요셉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가진 한계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정치인으로서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나름 선을 행하려고도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사람의 선행이 나쁜 일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악행이 하나님이 하시는 선한 일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요셉 자체가 그런 삶이죠. 형들의 악행이 아이러니하게도 형들이 훗날 만난 기근을 해결하는 씨앗이 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깊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이 “하나님께서 나를 앞서 보내신 것이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자신의 삶과 세상을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상처’가 ‘상처’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해결하고 뛰어넘을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대할 것 없는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자리 잡으실 때,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분께 삶을 내어드릴 때 비로소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만약 변화가 우리 힘의 크기에 달려 있다면 저는 사람의 변화를 기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는 이유는 우리의 어떠함보다 크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의 한계는 크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한히 기대합니다. ‘아직’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지, 하나님께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전인격적으로 내어드리게 된다면, 저는 하나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나올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게 참 아이러니해요. 목회하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면, 변하지 않는 것 같은, 또 돌아가 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복음의 힘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야 하는데... 놀랍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모두 기대합니다.

창세기가 보여주는 핵심도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도 조금 더 잘났고 조금 더 못났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숱한 실패와 흔들림과 죄와 연약함을 지나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끝까지 제대로 읽고 나면 결국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사람은 기대할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대할 분입니다. 그것이 창세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흔들립니다. 우리의 인생은 보잘것없습니다. 나의 존재는 미약합니다. So what? 그래서요?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그들이 흔들릴 때 보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 안에 초청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며, 그 가운데 속한 그들의 삶도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흔들릴 수 있을 정도로 보잘것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돌보신다는 것이 우리가 이 시간 기대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서 선포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내 삶을 내어드릴수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돌보십니다. 나의 계획이 없다고 연약하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나의 삶에서 가장 안전한 계획은 하나님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