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첫 번째 설교를 통해서 열왕기서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죠. 혹시 여러분 그중에서 열왕기서가 어느 시대에 쓰였다라고 했는지 기억하고 계신가요? 네. 네. 이럴 줄 알고 제가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왕기서는 포로기에 쓰인 책입니다. 포로기의 정확한 어느 시점에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데이터들을 종합해 볼 때 학자들은이 열왕기서가 포로기에 쓰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죠. 그렇다면이 책에 쓰였을 그 포로기를 살아가고 있던 그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이 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지 우리가 대체 왜 심판받아야 하는지 왜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를 파악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겠죠. 그래서 열왕기서의 저자는 열왕기를 통해서 포로기를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크게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왜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는가? 둘째, 북 이스라엘은
왜 멸망했는가? 셋째, 남유다는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 결국 열왕기가 던지고 있는 질문은 한마디로 왜 우리는 망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대체 우리는 왜 실패했는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이 질문에 답을 찾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열왕기서의 기록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바로 알아야만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몇 차례 11개한 설교를 통해서도 알아보겠지만 이들이 망하게
된 이유는 사실 여러 가지가 아니었어요. 단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바로 그들의 죄 때문이었죠.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무시했고 언약 백성이었지만 언약을 버린 것이 그들이 망하고 실패하게 된 단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언약도 또 나라의 멸망을 포함한 그들의 삶 전체도 전부 깨뜨렸다라고 볼 수 있죠. 이것을 오늘 우리의 말로 표현해 본다면 죄로 인한 깨어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요.이 열왕기는 단순히 한 나라의 역사서 정도, 어느 한 왕조를 기록한 어떤 역사책 정도로 치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이 책이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삶은 왜 이토록 힘들고 고통과 고난이 그치질 않는가? 왜 우리는 깨어졌는가? 또 교회를 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왜 여전히 나는 사는 것이 이토록 고단한가? 왜 우리는 모두가 원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원하지만 그것이 마치 닿을 듯 닿지 않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오아시스와 같이 보이는가 하는 그런 질문들입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에도 깨어짐으로 인한 다양한 고통들이 등장하고 있어요. 함께 성경을 읽겠습니다. 시작. 도왔다. 자들을 리고 사는 곳이었다. 다시 그때 그다 북 이스라엘의 흉년이 들었습니다. 엘리사가 살고 있던 길가이라고 하는 지역도 북 이스라엘에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그 지역에도 흉년이 들었겠죠. 여러분 흉년이 뭐죠? 땅이 매마르고 그래서 농사가 잘 안 되고 그래서 먹을 것이 부족한 해를 우린 흉년이라고 부릅니다.
흉흉할 흉에 해년 말 그대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흉흉한 시대다. 고단한 시대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면 흉년이든이 길갈이라고 하는 땅에요. 엘리사도 살고 있었고 그가 가르치는 수많은 예언자 수련생들도 살고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도 흉년이든 그 땅에 살고 있었어요. 이들이 하나님을 무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언약을 버리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그 흉한 때에도 하나님께 신실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도 똑같이 매마음의 흉년과 굶주림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들의 삶에도 흉흉한 시간이 지나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삶에도 흉흉한 깨어짐의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꼭 그것이 여러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삶에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힘들고 버겁고 슬프고스러운 그런 일들이 찾아올 수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해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을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그 땅에 있었던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사람들, 하나님을 신실하게 떠났던 사람들 모두 흉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신실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흉년의 때에도 굶줄이지 않았다고 성경이 이야기하죠. 성경을이어서 함께 읽을 텐데요. 총 두 페이지입니다.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을다가 을서에 가서 무엇이 무엇인지도 잘 모는 죄로 없다. 그들이 각자 불을 떠다 먹여고 밭을 받아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그 속에 사람을 죽게 하는 복이 들어 있다고 그래서 그들이 그지 못하고
있는데 엘리사가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하여 그 밀가루를 속에 부인에 이제는 뭐 되니 하나님에게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이 라이 자 왔다 그런데 먼저 보는 땅이 하나의 가득한 고식을 하나님의 자에게 가지고 운한 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보게하라고 하였더니 그의시는 사람들 앞에 어떻게 하였다 그러 말하였다 사람들에게 어서 먹게 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도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명이나 있는 사람들 앞에 오니 주님의 말씀자 배불라. 아멘. 엘리사에게는
그가 책임지고 가르쳐야 할 많은 예언자 수련생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엘리사가 한 종을 시켜서이 수련생들이 먹을 수 있는 국을 좀 끓이라고 시키죠. 그래서이 종이 어 재료를 찾으러 떠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던 것 좀 흉년이라서 마땅한 식재료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식재료를 찾아 헤매다가이 엘리사의 종이 독이든 재료인지 모르고 들포도 덩굴로 국을 한 가득 끓립니다. 그러니 아무리 솥에 국이 가득해도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말하죠.이
이 국에 독이 들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때 엘리사가 국에 밀가루를 뿌려서 독성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이제 먹어도 돼. 여러분,이 국은 애초의 시작부터가 먹을 수 없는 것이었어요. 먹을 수 있던 것이 변한 것이 아니라 애초의 시작 전부터 그릇된 것.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죠. 재료 자체의 독성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애초 처음부터 그릇되었던 그 먹을 수 없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독이
들었던 그 음식에서 독을 빼내 주세요. 그리고 말씀하시죠. 이제 먹어도 돼. 또 하루는 바알살리사라는 지역에서 무명의 한 사람이 보리빵 스무덩이와 자루 가득 핵곡식을 담아서 엘리사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양도 100여 명이나 되는 그 수련생들이 다 먹기엔 양이 너무 부족한 거예요. 그러자 시종이 엘리사에게 말하죠. 선생님 양이 너무 적습니다. 아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것 갖고 다 먹입니까?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앉을 수도 없는데 대체 이것을
누구 코에 붙이라고 누구 앞에 내놓겠습니까? 그 종의 말을들은 엘리사가 이렇게 대답하죠. 아니야. 하나님이 먹고도 남을 거라고 하셨어. 부족하지 않을 거래. 그러니까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빵과 곡식을 가져다 줘.이 말을들은 엘리사의 시종이 그대로 순종하죠. 그리고 성경은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 모두가 굶주이는 흉년의 때에도 자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분이세요.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바꾸시고요. 턱없이 부족한 것을 어느 한 사람도 소외에 대해 배고프지 않도록 하나님의 방법으로 풍성히 채우셨습니다. 여러분, 흉년을 하나님께서 막아 주실 수도 있죠. 그러나 혹시 여러분의 삶에 흉년을 허락하신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먹기실 테니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매말라가고 굶주려 죽어가는 그 흉년의 때를 지났지만 결코 그들의 삶에 흉년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도이 흉년의 때가 있다라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이 시대가이 성경에 기록된 엘리사의 시대처럼 정말 먹을 것이 없고 찾아봐도 식재료가 없고 그래서 허덕이고 고민하는 그런 시대는 아닐 수 있어요. 그걸 고민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고민하는 흉년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삶에 찾아던 흉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 매말나가는 마음의 흉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영혼의 흉년이 드는 것이요. 먹고 마실 것은
점점 차고 넘쳐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많아죠. 너무 많아서 병이 많은 시대라고요. 그런 많이 먹어서 고민 그런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정작 사랑과 자비, 긍휼, 베픔, 나눔 같은 것들은 점점 매말라가죠. 우리의 삶이 조금 더 풍족해지고 내 삶에 여유가 생기고 내가 좀 더 영력해지면 내 마음도 넉넉해질 줄 알았는데 그럼 내가 조금 더 베푸고 좀 더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아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과거가
훨씬 더 적고 사람 냄새나고 그래도 살만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 같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상관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허기저하고 더 굶주려해요. 끝없는 상실과 박탈감, 공허함과 외로움, 우울함과 좌절과 무력함 속에서 사람들이 굶주여 죽어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영혼의 허기를 배불리 먹일 길이 없어요. 시종이 아무리 재료를 찾으러 다녀도 먹을 수 없는 것밖에 없었던 그 시대처럼이 영혼의 허기를 배불리 먹일 그 무언가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결핍을 채울 방법이 없는 흉년의 땅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인 것 같아 보여요, 여러분. 그래서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 지금의 사람들도 여전히 저는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인생이 팍팍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 고단합니다라고 하소연하고요. 저마다의 흉한 시간들을 마지 못해 죽지 못해 어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매마음과 결핍으로 망가진 흉년의 땅에서 똑같이 살면서도 굶줄이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돼요.
흉년이 그들의 삶까지 매마르게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군가는 엘리사의 종처럼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몰라요. 주님, 그런데 저희가 가진 것이 너무 부족한데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여전히 우리는 나약하고 힘이 없고 부족한 것 투성인데요. 대체 이런 삶을 누구에게 내보이겠습니까? 이런 삶을 대체 내가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 저도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도 엘리사에게 말씀하시듯 동일하게 말씀하시죠. 내가 너희의 결핍을 풍성히
채울 거야. 너희에게 흉년이 들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너희에겐 내가 있자니. 세상에는 너희의 허기를 채울 것들이 없지. 독이 가득한 것뿐이지. 너에게 해로운 것뿐이지. 유익한 것 같아 보이지만 정작 까보면 먹을 수 없는 것들 뿐이지. 그러나 너희에겐 내가 있잖아. 나에겐 너희를 먹일 것이 있어. 그래서 너희는 충만할 거야. 너희는 배불리 먹고도 남을 거야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계시기에 흉년의 때를 지나지만 배부르고 결핍의 시대 속에 있지만
충만한 것이 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삶이라고 믿습니다.이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는 아 근데 이건 그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했던 거 아닙니까? 그들이 약했기 때문에 겪었던 고통 아닐까요? 만약 엘리사와 그 수련생들이 정말 부유하고 힘이 있었다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그 방법이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스스로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잘 보면요. 깨어짐의 고통은 부족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보지 않고 우리의 눈을 그냥 우리 하루 중에 일상만 돌아봐도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린 알 수 있어요. 남부럴 것 없이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고통은 따르기 마련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인물이 열왕기 5장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인데요.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한 사람은 왕고 만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불을 지켜 시리아의 구원을 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는 강한 자인데 그 나라의 왔다. 시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아람이라고 하는 나라를 지칭합니다. 제가 파란색 동그라미로 이렇게 표시를 했는데요. 초록색 북 이스라엘이고 그 위쪽에 위치한 것이 아람 즉 시리아죠. 나만 장군는 아람 또는 시리아라고 하는이 나라의 군사령관으로 굉장히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왕의 총회를 받는 엄청난 인맥을 소해 어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다스리는 왕정 그 시대에 왕이 나를 총회한다. 왕이 나를 아낀다. 그것보다 더 든든한 백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또 성경은 그를
큰 인물 그리고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요.이 두 표현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보면 나만 장군는 영향력과 명성 있는 사람이었으며 존경과 총해를 받는 사람이었음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나아는 뭐 하나 빠질게 없는더 레벨더 클래스 뭐 이런 거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삶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어요. 성경이 이야기하죠. 그는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고 말았다. 바로 나병이라고 하는이 피부병이 그에게 닥친 고난이었습니다.
어, 대부분 사람들이 나병하면 문둥병을 많이 떠올리시는데요. 성경에서의 나병은 그 문둥병만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병은 모든 악성 피부병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악성 피부병 그 범주 안에 문둥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학자들은 나만장군이 어 알았던이 나병이 문둥병은 아니었을 거라고 추측해요. 왜냐하면 문둥병은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잖아요. 그런데 그 신체가 떨어져 나가는 병을 가진 사람이 한 나라의 군사령관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는 좀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는 거죠.
그리고 만약 나만 장군이 문둔병 환자였다면 그는 왕과 함께 왕의 죄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열왕계를 쭉 읽다 보면 어 그가 왕의 제에 참여했다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학자들은 아 나한 장군이 문둥병이 아닌 다른 어떤 악성 피부병을 겪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죠. 여러분, 나아만 장군은 그 당시에 모두가 갈망하는 북 영화를 다 가지고 있었고 또 시리아라고 하는 그 엄청난 제국을 구원했던 사람이었어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러나 그런
그도 자기의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나라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강한 용사의 능력이 그에게 있었는지 몰라도 정작 자기 삶은 나병이라고 하는 그 질병의 고통 속에서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이 그의 주소였어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인간의 한계죠.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전부 다 좌지 유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문제와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어요. 물론 가진 것이 많고 내 자리가 높으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내가 좌지 조정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 더 많아질 뿐이지 그러나 정작 그것이 우리의 한계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그 한계 앞에 부딪친 나아만 장군에게 한 가지 희망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만 장군의 아내에게 그 아내를 시중는 한 이스라엘 소녀가 있었는데요. 그 소녀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칠 수가
있을 거예요.이 이 말에 나아만 장군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나아만 장군이 그 소녀의 말에 곧바로 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마리아에 좀 가겠다라고 말하죠. 그리고 그걸 허락해 달라고 말해요. 그러자 시리아의 왕이 그 요청을 허락해 줘요. 왕에게 나아만 장군은이 나라를 전쟁으로부터 구해낸 그런 공이 있는 충신이잖아요. 그러니 그의 청을 흔쾌히 들어 준 것이죠. 그뿐 아니라 기록된 대로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주 아끼는 그런 장군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에게
아 이스라엘 왕에게 시리아 왕이 직접 편집 가서 써서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은 아 우리 나아만 장군 좀 잘 부탁드립니다. 피고병 고칠 수 있다는데 좀 고쳐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내용이었어요. 함께 성경을 읽겠습니다. 시작. 이스라엘왕은 눈지를 입고 낙담하여 자기의 옷을 지으며 주를 불러오고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자기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를 붙어 달라고 하니 될까? 이것은 분명 공연이를 잡아 사기를 찾는 것이니 자기라 하시오.
이스라엘 왕이 나타나의 사람에게 자가 듣고의 사람을 보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옷을 지으셨습니까? 그 사람에게 보내주십시오. 이스라엘이 있음을 그게 알려주겠다.이 당시에 북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왕의 아들이었던 요란 왕이었습니다. 어 시리아의 왕으로부터 온 편지를 요람 왕이 읽고 낙담하고 자기 옷을 찢으면 이렇게 말해요.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병을 고치겠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는 거야? 게다가 시리아는 북 이스라엘과 적국 관계였거든요.
그러니까 요람이 생각한 거야. 이건 분명히 시리아 왕이 나에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줘서 나를 쳐들어오려고 이것을 빌미삼아 쳐들어오려고 하는 걸 거야. 그러니까 신하들 너희들은 가서 아마 자세히 알아봐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여러분, 그런데이 요라망의 이야기가 나름 이해는 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명세이 그래도 그가 이스라엘의 왕인데 그의 말과 태도에는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다는 거예요. 하물며 야,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 가서 엘리사 좀 불러와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발만 동동 구른 채 나는 해결책이 없는데 나 돌 어쩌라고라고 화를 내고 있어요. 나아만 장군는 먼 이방 땅에서도 해결책이 있다는 소녀의 말 한마디에 적국이었던 북 이스라엘까지 찾아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에요. 나만 장군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게 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서 읽을 성경에 보면 적어도 나만 장군는 자신의 병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료될 것이란 건 알고 있었어요. 그가 이렇게 말하거든요.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적어도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 신 여호와 누군지 잘 몰라. 관심 없어. 그런데 그 신이 내 병을 고칠지도 모른대. 그러니까 나 사마리아에 가야겠어. 그것을 생각하며 왔다는 거예요. 그러나 정작 그 땅에 살고 있는 심지어 그 땅을 다스리고 있다는 왕은 그 해결책을 알지 못하고 낙담합니다. 하나님을 떠올리지도 못해요.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이방인도 알고 있는 하나님을 그는 알지 못했어요. 그렇게 왕이 낙담하고 있다는 소식을들은 엘리사가 왕에게 나음한
장군을 저에게 보내십시오라고 말하죠. 이런 왕에게 없는 병고치는 능력이 엘리사에겐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왕이 모르는 어떤 그 나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별한 어떤 그 묘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저에게 보내십시오라고 말했을까요? 엘리사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한 것은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이게 요라만과 엘리사의 차이죠. 같은 땅을 딛고 서했고 같은 문제 앞에 있지만 누군가는 하나님을 곁에 두고도 보지 못해서 나 너는이
문제를 어쩌라고요? 원망하고 누군간 당당히 그 문제 앞에 섭니다. 저에게 보내십시오. 하나님이 계십니다. 엘리사의 말대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당당하게 말했던 당당하게 자신에게 엘 나아만 장군을 보내십시오라고 말했던 엘리사가 정장 나아만 장군이 찾아오니까 굉장히 시크하게 반응해요. 나만 장군이 집까지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아요. 그리고는 사환을 시켜서 이렇게 전달합니다. 어 나만 났대. 그럼 요단강 가서 일곱 씻으라고 해. 이렇게 말
한마디 해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이 말을들은 나아만 장군이 굉장히 기분이 상했겠죠. 그리고 화를 내곤 떠나가 버립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를 서기를 렸다. 정를 맞이하고 주의 하나님의을 삼기에 십자야. 니 자는 물보다 좋지 않다는 가에 거기에서 신을 내다 우리라의 시기지 않나 하고 다서 나를 심히 하여다 앞에서 우리가 나아만 장군의 스펙을 봤던 것처럼 나아만 장군 온갖 부기 영화를 다 누리고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대접받고 대우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여러분, 한 나라의 구강이 나한 장군을 위해서 적국의 왕에게 직접 부탁하는 편지를 쓴다. 그 시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그가 그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았는지가 대충 예상이 되죠. 또 그러한 태도는요. 그의 대사에서도 대놓고 드러나고 있어요.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또 게다가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야, 나는 우리나라에는 강이 없어서 요단강에서
씻으라는 거야. 난 이렇게 더 좋은 것들이 있는데. 근데 고장 나를 불러놓고 이걸 요구한다고. 엘리사가 그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행동해요. 평소에 평소에 그를 대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와 방식으로 그를 대합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어떤 무시당하는 것, 모욕감 때문에 분을 참지 못하고 떠나가요. 그렇게 씩씩거리며 떠나가는 그를 막아서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그에게 사마리아의 예언자를 만나 보십시오라고 말했던 그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가 장군에게
말합니다. 장군님 그저 요단강에 몸만 씻으면 깨끗하게 될 수도 있다는데 아 그걸 못 하고이 먼길까지 와서 그냥 가십니까? 이왕 악스 우리 속란샘 치고 한번 해 봅시다. 시리아로 돌아가는 나한 장군을 막아서 소녀의 용기가 대단하죠. 그런데 그 소녀의 말을들은 나아 장군의 반응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시킨 대로 가고 가서 고쳤다. 그러자 그의 갈이 어린이 자로 돌아와 나왔다. 나아만 장군에 비하면 하찬타고 여겨지는
그 소녀의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피부병이 정말 씻은 듯이 나왔어요. 그가 비록 처음부터 순종함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끝끝내 밝길를 돌이켜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 대로 순종했을 때 그는 그의 한길를 뛰어넘어 문제를 해결받죠. 여러분, 우리가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삶의 해결책이 포지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위치에 있든 무엇을 가졌든 그래서 무엇을 누리고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영향력도 있고 명성과 존경과 총회를 다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포지션에 나한 장군조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그런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아주 약고 여린 그 포지션의 소년은 누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있는지 무엇을 해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어요. 또 피라미드의 꼭대기 그 정점에 앉아 있다라고 할 수 있는 높은 포지션의 요람왕도 해결책을 몰라 두려워 떨었습니다. 나 어떻해 이제
서두올 건가 봐 어떡하냐고. 그런데 왕에 비하면 한참 낮은 포지션의 엘리사는 당당히 그 문제를 마주하죠. 우리 삶의 진짜 해결책은 포지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는 우리의 한계, 우리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그 실존의 문제들은 오히려 우리의 포지션을 벗어야만 해결되는 경우가 훨씬 많을지도 모릅니다. 나만 장군이 자신의 옷을 벗고 요단강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죠. 그가 자신의 포지션을 단 한 겹도
벗지 않고 감히 날 이렇게 대우해. 내가 이런 사람인데 나 이런 거 가졌는데 나 이런 조건 있는데 나를 이렇게 대우한다고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들로 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화를 낼 때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자신의 포지션을 벗고 그 강으로 들어가 순종할 때 그는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게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그가 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메시지 성경이 이렇게 번역하죠. 나는 이제야 이스라엘 하나님 외에는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만장이 그 자리까지 가기까지 그 피라미드까지 그 피라미드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계와 계단을 올랐겠어요. 그걸 얼마나 많은 과정을 겪어 왔겠어요. 그것을 다 밟고 일어서 올라서 본 그가 이야기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피라미드 그 단계 그 어디에도 하나님 외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내가 이제야 알았다.
여러분 사람들은 더 좋은 포지션, 더 강력한 포지션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있어 안전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 자리에만 앉으면 내 삶의 문제들 결핍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이 더 있어야 돼. 좋은 학교 졸업장을 가져야 돼. 대학원을 가야 돼. 이런 스펙, 저런 자격증 등등등 있어야 돼. 그리고 하나님 되신 그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도 멀지 않아서 그가서 있는 그 삶의 단계 한계에 부딪히면 알게 돼요. 삶의 본질적인
문제, 인간의 한계 앞에서는 그 어떤 포지션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여기 계신 여러분도 혹시 여러분의 포지션을 의지하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그래서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 더 강력한 것을 추구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물론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 조금 더 많아진 건 맞다니깐요. 하지만 여러분이 진짜 해결받고 싶어하는 그 문제들 해결할 수 없어요. 열왕기가 우리에게 오늘 알려 주는 것은 그 많은 포지션을 벗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우리 삶의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한계들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어렵죠. 내가 그동안 노력해서 쌓아올린 포지션을 벗는다는 것이 결코 절대 쉽지 않아요. 마치 헐벗은 것처럼 두렵습니다. 나는 단지 한 개 포기하는 거 같은데 그 하나 포기하기가 마치 내가 입고 있는 그 중무장 그 모든 갑옷들을 벗어 던지는 것처럼 두려울 때가 있어요. 내가 그동안 여기까지 오기 했던 노력들 나의 피땀 눈물들 무시당한 것 같아 화도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왔다가도 아 이걸 다 버려야 된다고 이거는 다 의지하면 안 된다고 그것이 도무지 인정이 안 돼서 나만 장처럼 나는 못 해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솟끝이기도 하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내가 이걸 얻기 위해서 뭐까지 했는데 이걸 어떻게 버려? 나 그렇게는 못 해.라고 라고 하는 마음들이 사실 우리에게 모두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늘 말하는 것처럼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삶의 진정한 해결책은 포지션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리고 고백하죠. 나는 이제야 이스라엘 하나님 외 세상 어디에도 그 어떤 포지션 외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이 고백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왜이 세상 어디에도 진짜 의지할 것이 없구나. 하나님밖엔 없구나.이 한계를 뛰어넘을 길이 나에겐 없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고백이죠. 나아만 장군을 괴롭히던 고통과 문제, 결핍과 깨어짐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어, 제가 최근에 한 2주 전쯤에 목양팀 수련회를 다녀왔는데요. 어, 리더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빨리 결핍을 느끼고 빨리 외로워하고 빨리 공허야 하는 것이 참 축복인 거 같아요. 아멘. 빨리 느낄수록 하나님을 빨리 찾으니까요. 여러분, 우리 삶에 있는 깨어짐과 결핍들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공허함과 외로움과 박탈감과 상실감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에 정말 여러분이
나이 정도면 괜찮은데 나쁘지 않은 삶인데 만족스러운데라고 느낀다면 여러분 하나님 찾을까요? 우리는 우리 삶이 넉넉해지면 하나님 더 잘 찾을 것 같은데 내 삶에 이런 것들 있고 이런 거 고민 안 해도 되면 내가 좀 더 예배에 집중하고 내가 좀 더 하나님을 찾고 내가 좀 더 열심히 낼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우리에게 뭔가 깨어짐이 있을 때, 결핍이 있을 때, 아, 나 힘들어서 하나님 찾는 거 못 하겠는데라고 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더 절실하게
주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빠져버린 공백의 빈자리를 절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더 가까이 나가기 때문이죠. 그래서 때로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삶의 고통과 문제들을 허락하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근데이 나음만의 이야기 속에서 깨어짐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나음만 장군 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또 누가 있었을까요? 저는이 이야기 속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숨겨진 1등 공신과 같은 인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어린 소녀죠.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신자가 군대를 이스라엘 땅에 저러왔을 때 그곳에서 어린 소녀 아들 자원이 있었다. 그 소녀는 나만의 안에 시을 들고 있었다.이 어린 소녀가 처음부터 나아만 장군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은 아니었어요. 아까 말했듯이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은 적국 관계였는데요. 그들이 전쟁을 하는 그 과정에서이 소녀가 시리아로 잡혀왔습니다. 그러니까 포로라는 거죠.이 이 전쟁 또한 북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의 고통을 어린 소녀가 먼 타국
땅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어요.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지만 나만 장군는 피라미드 체계를 아주 잘 알고 잘 누리고 이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포로로 잡혀와서 자기 집에 시중이나들은 그 어린 소녀의 말 한마디에는 너무 어린 너무 순한 양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혹시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여러분, 소녀의 말을 듣고요. 시리아에서 적국인 북 이스라엘까지 가는 것을 조금도 망설리지 않아요. 게다가 잔뜩 화가 나서 나 못 해. 다시 돌아갈래라고 할 때에도 그 소녀의
말을 듣고 그가 화를 참고 다시 돌이켜 요단강으로 갑니다. 나아만 장군이 앞에서 보여졌던 피라미드 상류층의 태도와이 어린 소녀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어울리지 않죠. 일관성이 없어요. 마치이 소녀만 그에게 예외 사항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아만 장군은 피라미드의 가장 낮은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는이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경청했을까요? 예전에 제가 들었던 어느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그 이유를 나아만 장군이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병을 고치고자 하는 그 절실함도 이유였겠죠. 그런데 저는 만약 그의 절실함과 간절함만이 그냥 이유였다면 그가 엘리사의 무심한 태도에도 아 그리고 내가 이렇게나 간절하니까 내가 한번 당해 주지 내가 한번 무릎 꿇지라는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실한만으로 그 먼기를 왔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가 보여준 태도를 보면 단지 절실한만이 이유였다고 설명하긴 좀 부족해요. 왜냐면 그가 엘리사 앞에서 여전히 꿋꿋하거든요. 여전히 자신이
가진 것이 이렇게 많이 있다고 내세우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과연 그가 경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가 경청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절실함과 더불어 소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소녀가 먼 이방 땅에서 나아만 장군의 집에서 보였던 그 보잘 것 없어 보였던 일상의 삶으로 차곡차곡 하루하루 쌓아올린 그 신뢰감이 나한 장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죠. 성경의 원어를 보면요. 여기서 시중들다라는 표현이 누구누구의 앞에 있었다라는
표현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이 소녀가 자신의 주인을 섬긴 의미와 동시에 그가 주인으로부터 호위를 받고 있었다는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이 호위는 앞에서 나아만 장군이 왕에게 받고 있었던 호위와 같은 표현이에요. 여러분이 소녀가 주인에게 받고 있었던 그 호위와 신뢰감이 어느 정도였냐면 한 나라의 제국을 전쟁으로부터 구원한 장군이 받는 호위와 같은 종의 호위였다는 거예요. 일게 시중인 어린 소녀인데 말이에요. 여러분이 소녀가 얼마나 성실이 최선을
다해 그를 섬겼으면 마치 왕이 나만 장군을 대하듯 그렇게 아끼듯 그 주인이이 소녀를 아꼈냐는 것이죠. 여러분이 소녀의 삶에도 깨어짐의 고통이 있었다니까요. 전쟁을 겪었어요. 그 어린아이가 그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하루 아침에 종사리를 해야 돼요. 뭔 이방 땅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 주인을 섬겨야 해요. 그러나 소녀는 그 깨어짐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녀가 말하잖아요. 주인이 우리 사마리아 땅에 있는 그 예언자를 만난다면 그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다면이 문제 걷든히 해결할 텐데 그녀의 삶에 하나님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녀에게 주어진 삶을 하루하루의 일상을 성실 최선을 다해 살아갔겠죠. 소녀가 우상이 득실거리는 그 땅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소녀가 그 깨어짐에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난 아무것도 잘못한게 없는데 내가 왜 전쟁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데 왜 내 삶에 이런 문제를 만나야 하는데 그렇게 원망하고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살아냈을 때 나아만 장군이 그녀를 신뢰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이 소녀의 모습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모습이라고 믿어요. 여러분, 우리 삶이라고 왜 깨어짐이 없겠어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고통과 고난이 있죠. 문제들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에게도 고통과 고난이 있어요. 그런데 적어도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주저한저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절망하고 불평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그래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삶의 몫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고 원하고 계세요. 이러한 삶 어느 찬양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요. 여러분 잘 아는 찬양이실 텐데요. 고난 속에도 우린 다른 [노래] 길을 걷네. 나의 하나님 이제는 우리가 [노래] 세상 품으며 기도 시작할 때라 우리는 천하리 [노래]
세상 향하여 그 이름 주 예수 이렇게 따라불러 주지 않으실 줄 몰랐습니다. 섭섭하네요. 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커스의 고난 속에서도 우린 다른 길을 건네라는 잘 아신 찬양일 텐데 아무도 안 불러 주셔서 조금 서운했습니다. 네.이 이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가 삶의 깨어짐과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세상과 다른 길을 걸을 때 우리가 전하는 말에 비로서 힘이 실릴 수 있어요. 나한 장군에게 그 어린 소녀의 말에 힘이 있었던 것처럼요. 여러분 사실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지만 그것이고 우리의 삶에 그렇게 대단치 않습니다. 대단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도 그렇게 대단해지고 영광스러지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오히려 우리의 삶이 더 무생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삶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지 않나요?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복음을 전하는 삶은 어떤 빛나는 자리, 영광스러운 자리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연말에 연예인들이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또 아니면 어떤 특별한 사역, 내가 목회를 하거나 선교사를 하거나 예배팀을 하거나 목양팀 하거나 어떤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은 어떤 자리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삶에서도 얼마든지 빛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빛날 수 있어요. 어쩌면 오히려 스포트라이트가 없는 고난과 고통의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은 더 밝게 빛나는 분이십니다. 같은 고난 속에서도 다르게 살아갈
때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지 고만고만 도토의 기적이지라고 느끼는데 그 안에서 뭔가 다르게 살아갈 때 세상이 우리의 말에 경청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고 싶고 하나님을 나타내고 싶으시죠? 다 그런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여러분.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먼저 그들과 다른이 어린 소녀와 같은 삶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과 여러분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그 힘이 실리려면 여러분의 말에 힘이 실리려면 여러분의 삶에 먼저 힘이 있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문제의 해결은 포지션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이 말은 회복 또한 그분께 있다는 거예요. 소녀의 삶에 잘난 포지션은 없었지만 회복시키시고 문제의 본질부터 해결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세상의 복에 보잘 것 없고 그저 힘없는 어린 소녀 그 삶을 통해서 다른 이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것이죠. 그런데이 어린 소녀와 대조되는 인물이
곧바로이어서 열왕기아 6장에 두 명이 등장합니다. 어 열왕기 6장의 상황을 좀 설명드리자면요. 시리아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어요. 사람들이 그 성 안에 갇힌 지이 오래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떨어져 갔을까요? 그렇죠. 먹을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배고픔에 허덕했던 백성들이 급기에 무슨 일까지 저지르냐면 야, 오늘은 우리 자식 잡아먹고 내일은 너네 아들 잡아먹자. 여러분,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나의 백성이 불순종했을 때 그들이 전쟁
속에서 그들의 자녀를 잡아먹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이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로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우리는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일이 일어났을 때 왕이 보여야 하는 태도 그 백성이 보여야 한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기 전에 돌아섰어야죠. 주님 앞에 돌이켰어야죠.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이 사태가 모두 다 하나님 때문이야. 이거 엘리사 때문이야라고
탓타하며 요라왕은 원망하고 책임을 정가합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엘리사가 얼룩 있는 왕이 엘리사에게 와서 말하였다. 불리가 나는이 모든 제앙을 보시오 이런 제앙이 주님께로부터 왔는데 내가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다려. 왕이 사태가 심각해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죠. 야 우리가 당하고 있는 꼴을 좀 봐. 이게 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주님한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주님을 기다릴
수 있겠어?이 재앙이 주님께로부터 왔는데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재앙이 왔는데 왕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탓해요. 내가 고생하는 이유, 내가 힘든 거 주님이 이렇게 만드신 거 아니야? 여러분, 이방 땅에서도 그 고단한 삶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으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책임졌던 그 소녀와 달리 이스라엘 가장 정점에서 그 누구보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야 했던 왕은 오히려 하나님을 탓하고 엘리사를 탓하며 자신에겐 책임이었다고 정가해 버립니다. 여러분,
분명 요라왕에게도 기회가 있었어요. 그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갈 기회가 그에게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가 그 기회를 잡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결국 열왕기아 9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후라고 하는 사람의 손에 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라망을 심판하신 거지 맞아요. 그러나 그 심판을 선택하고 계속 심판의 길로 나아간 것은 요람 자신입니다. 회복이 길이 있었음에도 끝내 그 길로 돌아서지 않았던 것도 그 자신이었습니다. 요라왕이 엘리사를 찾아가
하나님을 탓타고 엘리사를 탓타 때 엘리사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왕이시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이맘 때쯤에 사마리아 성문 어기에서 고온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계에 사고 보리 두 수아를 한 세계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여러분 굶주여서네 자식 내 자식 잡아먹자 하고 있는 그 사마리아 성에 내일이 되면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먹이시겠다는 거예요. 그 성의 회복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자 그 말을 왕 옆에서
듣고 있던 시종무관이 이렇게 이야기하죠.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시는 하나님 자에게 주님께서 하에 있는 상을 신다고 할지라도 어찌할 수 있겠느냐 하고 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 당신은 분명히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쳐볼 것이고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이 것이며 성에서 백성에게는 것이라. 지종무관이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거든요. 아무리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여시는
분이라고 해도 그게 말이 그렇지 실제로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루 아침에 자기 자식 잡아먹고 있는이 성에서 먹을 것이 다시 사고팔 수 있다고요? 회복할 수 있다고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라고 하는 태도로 그가 나아가죠. 하나님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그런 태도에 엘리사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래. 그런데 너는 보게 될 거야. 하나님께서이 성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너의 두 눈으로 볼 거야. 그렇지만 그 회복이네 것이 되진 않겠지. 그리고 엘리사의 말대로 그는 하나님의
회복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조금도 누리지 못한 채 백성들에게 밟혀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시종 무관과 같은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어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그게 그저 글과 말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요. 아, 성경 이렇게 말하는 거 다 이해하죠? 설교 참 좋은 내용인가 알겠어요. 그런데 성경과 나의 삶은 다르잖아요. 하나님이 이렇게 해결하실 수 있다고 회복하실 수 있다고 다 이해하고 다 좋은 말인 거 알겠어요? 그런데 정작 내 삶의
문제 해결할 수 없을걸요. 이걸 해결할 수 있다고요? 내 상황이 이런데 하루 아침이 뒤바뀔까요? 회복될 수 있을까요?라고 라고 하는 그런 시종간의 태도가 여전히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저 종교적인 틀과 자신의 한계 안에 가둬 버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근데 그것도 그들이 선택하는 것이죠.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들도이 시종 무관과 같이 아무리 주변에서 회복과 구원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도 결코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조금도 내어들이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들도 깨어짐을 겪을 수 있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번지르한 사람들도 깨워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고통이 나 때문에 비롯된 고통이든 아니면 남 때문에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생긴 고통이든 우리 모두의 삶에는 고통이 필현적이에요. 우리는 깨어진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깨어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깨어진 그 틈새 사이로 언제나 주님의 회복의 빛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우리 자신의 삶, 우리 마음, 우리 영혼, 그 많은 것들이 깨어져 있지만 우리의 그 깨어진 틈새 사이로 하나님이 언제나 손을 내밀고 계세요. 오늘 우리가 살펴본 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모두에게 손을 내밀고 계셨어요. 하나님의 손을 잡은 사람은 자신의 깨어진 삶의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그 회복과
구원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습니다. 예언자 이방인 피라미드 상위층과 하위층 그 누구도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았어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회복과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보았잖아요. 하나님의 사람들도 흉년을 피할 수는 없었다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흉한 땅에서도 하나님의 먹이심과 돌보심을 경험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딛고서 있는 세상의 흉년, 고통, 재난 깨어지면 피할 수 없죠. 그러나이 땅에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과 충만함으로 먹이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시종이었던 그 어린 소녀처럼 내 삶이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그 틈새를 뚫고 손내밀고 계신 그 주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다른 길을 걸으며 오히려 세상을 회복시키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잖아요, 여러분.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손을 잡지 않은 사람들은 회복을 보아도 변화를 보아도 구원을 보아도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이야기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나만 장군은 어쩌면 별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억지로 꾸역꾸역 순종했을지 몰라도 그가 그렇게 나아갔을 때 그의 삶이 아이의 살처럼 깨끗해지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동시에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을 듣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요람왕과 시종무관은 그렇지 못했죠.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은 요라망의 삶에도 미쳐 회복이 닿지 못합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학자인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빈 공간이 있대요. 여러분,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그 빈 공간이 있는데 그 모양이 하나님 모양이라고 파스칼이 이야기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그 빈공간을 채울 수 없어요. 마치 퍼즐 조각처럼요. 여러분, 오늘 설교에서들은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이
있습니다. 다 깨져버린 그 틈새 사이를 빚집고 그 빈 공간을 뒤집고 내가 이거 채워 줄게. 내가 이거 메꿔줄게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신명기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러분, 우리 앞에 보기 좋은 퍼즐 조각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저도 알아요. 수많은 퍼즐 조각 중에 저도 갖고 싶은 퍼즐 아이 조각 있으면 내 삶 좀 더 나아질 것 같은데이 조각만 있으면 내 삶 좀 더 윤택해질 것 같은데 그런 조각들이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그 많은 조각 중 당신은 무슨 조각을 선택하겠는가? 여러분, 우리의 삶에 깨어진 공백을 다른 조각으로론 채울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꾸겨 넣으면 처음엔 좀 잘 채워진 거 같아 보일지 모르죠.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 다 채워지지 않은 그 구멍 사이로 우리의 한계와 삶의 문제와 고난과 고통의 바람이 또다시 불기 시작하면 그 조각도 떨어져 나갈 거예요. 그럼 우리는
또 허덕이겠죠. 여러분의 삶에 빈 공간이 있으십니까?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나를 힘들게 하는 고난과 고통이 있을 수 있고 도무지 어떻게 해야 답이 나오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있고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오는 그 누구로도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과 외로움도 있고 이만하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상실감과 좌절과 실패와 무력함이 우리에게 여전히 있습니다. 또는 삶은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은데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구멍을 여러분은 무엇으로 메꾸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고 언약을 버려서 깨져 버린 이스라엘. 그래서 하나님을 상실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열왕기아가 보여주면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야기하죠.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하죠. 당신의 빈공간, 당신의 깨어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당신은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오직 우리의 빈 공간을 하나님으로 채울 때 퍼즐이 마치 제자리를 찾아 그림을 완벽하게 완성하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온전하고 완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조각이기 때문입니다.이 이 시간 내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그 상황에 그 많은 퍼즐 조각 중에 하나님 모양에 하나님 그 유일한 조각의 퍼즐을 선택하기로 결단하신 분들 계시다면이 시간 자리에 일어나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