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사람은 가도 사명은 남는다" / 강정규 목사

2024-09-08 · 열왕기하 1~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 마리아 예배 오늘은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마리아의 마음으로 예배하는 '마리아 예배'입니다. 예배팀, 방송팀, 안내팀 등의 활동 없이 모두 예배자로만 사는 하루입니다. PPT는 없고, 유튜브는 카메라 고정으로 송출합니다.

우리는 작년 9-10월 7번의 설교로 열왕기상을 다뤘습니다. 제가 이미 열왕기상하에 대해서 ‘열왕기상’ 설교 초반부에 다뤘습니다. 다시 간략히 열왕기서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성격은 영어로 보면 더 쉽게 이해됩니다. ‘Kings’ 열왕기상이 1 Kings, 열왕기하가 2 Kings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원제도 ‘멜라킴’(왕들)입니다. 열왕기라고 해서 ‘10명의 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여러 왕들의 이야기’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열왕기상, 열왕기하는 한 권의 책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는 사무엘상하를 ‘제1,2왕국서’, 열왕기상하를 ‘제3,4왕국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까시 쭉 이어서 사사시대 이후부터 왕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왕국서로 분류해서 본 것이죠.

그럼, 이 책은 누가 썼을까요? 아시는 분 있을까요? 모를 것입니다. 탈무드 등의 유대 전승에서는 ‘예레미야’를 저자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분석하면 할수록 그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일단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가 예레미야와 다릅니다. 또한 예레미야의 활동 시기 이후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서 안에 나타나는 증거를 보면, 이 책은 BC 560-539년 사이 바벨론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엄청난 의미가 되는 포로귀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포로귀환 전에 이 책이 완성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물리적으로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저자 모름입니다.

열왕기서는 기본적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온 이유를 해석하고 이해해가며 자신들의 역사를 그 신학적 이해 안에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었는가?’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실패를 분석해야만 실패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실패감 속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실패를 반복해서도 안 됩니다. 실패를 분석하고 실패를 공부하여 극복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열왕기상을 통해서 우리를 닮은 사람들과 우리를 닮은 공동체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못남이 또한 내 안에 있는 모습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발견됨이 잠시 나를 부끄럽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하는 연결되는 사실상 한 권의 책인데, 우리는 열왕기상은 작년 이맘 때, 열왕기하는 이번에 다룹니다. 그럼, 열왕기상의 내용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기억해야 연결해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죠.

작년 열왕기상 마지막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엘리야와 아합의 대결. 그 유명한 갈멜산 전투가 나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단독으로 싸워서 승리합니다.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완벽한 승리죠. 이 전쟁으로 아합은 완전히 기가 죽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합보다 더 강했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입니다. 그는 기죽지 않고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하죠. 이에 엘리야는 두려움과 허탈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머나먼 곳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한참을 도망친 곳의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번아웃이 되고, 깊은 우울감에 빠진 것입니다.

그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보입니다. 첫째, 엄청난 승리에도 악이 꺾이지 않고 대항하고 있다는 절망감 혹은 허탈감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안 돼.’ ‘이 사람은 어차피 안 돼.’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절망감이죠. 둘째, 또 다른 이유는 이 세상에 자기의 편이 없다는 외로움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고독함이 엘리야를 일어설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엘리야를 어떻게 다루실까요? 하나님은 우선 엘리야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세요. 여러분, 우리도 일단 지치면 위로가 필요합니다. 어떤 좋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상태여야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선 엘리야를 위로해주세요.

그 후에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의 관점과 그의 가치관을 바꿔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엘리야가 ‘자기의 시선’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종종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사건에 몰입해서 그것에 몰두하는 것이죠. 그것이 정답이 아닙니다.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뿐이죠. 또한 엘리야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그 신상에 입 맞추지 않은 신앙의 동역자가 7,000명이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한마디로 엘리야가 자신의 한계 안에서 판단하고 넘어져 있는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열왕기상의 마지막은 엘리야가 아니라 아합의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엘리야와 가장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왕은 아합이죠. 그는 악한 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돕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서 그의 심판을 예언했을 때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이 그 회개를 받아주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점점 하나님을 떠난 쪽으로 가버립니다. 그것이 그의 결론이 됩니다. 우리도 우리 신앙의 자리가 한 번에 결정되지 않아요. 누구는 점점 하나님 편으로 가고, 누구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열왕기서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국제 정세를 조금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남북왕국은 꽤 친했습니다. 그들의 적은 아람(시리아)이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동맹을 맺고, 아람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참고로 여호사밧은 남유다의 칭찬받는 8명의 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묻자고 제안하죠. 자기 마음대로 전쟁하려는 아합과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자 아합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자기 원하는 말을 해주는 선지자)를 모아서 듣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아합이 하는 일이 맞다고 해주죠.

다만 오직 한 사람, 미가야라는 선지자만이 하나님의 참 선지자였는데, 그는 아합이 이 전쟁에 나가면 죽게 되리라 예언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미 자신이 결정한 것을 바꿀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망하는 패턴이죠. 그러나 아합도 나름 하나님 안에서 삐걱대고 살면서 짬밥이 늘었어요. 미가야의 예언에서 불안함을 느껴서인지 변장을 한 후 전쟁에 나갑니다. 아합이 왕의 복장이 아니라 일반 병사로 변장했기에, 전쟁에는 여호사밧 왕만이 왕의 복장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필 이 전투에서 적군 아람의 전략은 오직 아합 왕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복장을 한 여호사밧을 보자 아합인지 알고 달려듭니다. 병사들에게 둘러싼 그 위기의 순간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에 병사들이 그가 아합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돌아섭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전쟁을 하면서도, 꼼수를 부리며 위험을 벗어나고자 한 아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상 22:34) 그런데 군인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긴 것이 이스라엘 왕에게 명중하였다. 화살이 갑옷 가슴막이 이음새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이다. 왕은 자기의 병거를 모는 부하에게 말하였다. “병거를 돌려서, 이 싸움터에서 빠져 나가자. 내가 부상을 입었다.”

(왕상 22:35) 그러나 특히 그 날은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왕은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시리아 군대를 막다가 저녁 때가 되어 죽었는데, 그의 병거 안에는 왕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이 일에 대하여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가 없는 화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그 화살이 갑옷의 이음새를 뚫고 들어와 아합을 쓰러뜨립니다. 꼼수로 유다 왕 여호사밧만 왕의 복장을 한 미끼 삼아 전쟁에 나가지만, 그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빨리 전쟁터를 나와 치료했다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억지로 막은 것도 아니었으나, 치열한 전쟁 탓에 그는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리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8번째 왕이 됩니다.

(왕상 22: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 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는 두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왕상 22:52)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리게 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은 길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은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왕상 22:53) 그는 바알을 섬기고, 그것에 절을 하여서, 그의 아버지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

이것이 아하시야에 대한 열왕기상의 평가이자 요약입니다. 이것이 열왕기상의 가장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리고 열왕기하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북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을 기준 삼아서 평가를 받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우상의 길이었고, 하나님을 떠난 길입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는 것은 망하는 길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장 아이러니는 무엇이냐면,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고 평가받는 시대가, 사실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가장 전성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아합의 아버지가 ‘오므리’여서 그 후손들을 ‘오므리 왕조’라고 부르는데, 이때가 북이스라엘이 권세와 풍요를 다 누리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바알 숭배가 공식화됩니다. 아합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지었고, 이세벨이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를 후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시대를 위하여 두 명의 특별한 선지자를 보내주신 것이죠. 그가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서도 이 시기에는 왕조보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을 중심으로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합이 죽은 후, 그동안 북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며 살았던 모압이 배신을 합니다. 오므리 왕조 때는 모압을 정복하여 조공을 받을 정도로 힘이 강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나 아합이 죽자, 북이스라엘은 약화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사마리아 궁 2층에서 떨어져 병이 들게 됩니다. 생사가 걱정된 아하시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고자 합니다. 즉, 위기 때도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엘리야가 아하시야 왕의 사절단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죠.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왕의 안중에 하나님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먼저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절단을 통해서 엘리야의 예언을 들은 아하시야는 도리어 자신이 가진 왕의 권위로 엘리야를 체포해 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키고 계신 엘리야를 잡을 힘이 그에게 없습니다.

결국 엘리야가 직접 아하시야 앞에 나타나서 대면합니다. 엘리야가 이미 선포한 예언대로, 아하시야는 침상을 내려오지 못한 채 죽게 됩니다.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동생 여호람(요람)이 북이스라엘의 9번째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것이 열왕기하 1장의 내용입니다.

열왕기하 2장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바통 터치에 관한 기록입니다.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의 꺼져가는 신앙의 불씨를 살려낸 사람이라면, 엘리사는 이 신앙을 확신시킨 사람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구약에서 이들에 앞서 먼저 지도자로서 좋은 승계를 보여준 ‘모세’와 ‘여호수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치 엘리야의 모습은 모세와 유사하게 그려집니다. 모세가 출애굽 하여 가나안으로 이끌어가는 사명을 받고 그 일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그 일을 완성한 것은 여호수아죠. 그와 같이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하나님이 엘리야가 낙심하고 있을 때 하셨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즉, 이때까지 엘리야는 홀로 고군분투하며 싸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후 그의 사역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제는 사람을 세우는 사역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남겨진 사람’에 대한 약속 바로 다음 구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왕상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왕상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왕상 19: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드는 제자가 됩니다. ‘수종 들었다’는 표현 자체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떠오르게 하죠. 엘리야는 이후 벧엘에도, 여리고에도, 길갈에도 제자들을 세워 양육합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렇게 엘리야에 의해서 길러집니다.

(왕하 2: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니,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길갈을 떠났다.

엘리야는 이제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흩어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그때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갈로, 벧엘로, 여리고로 함께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리고에서 엘리야가 말합니다.

(왕하 2: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요단 강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왕하 2:7)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서 쉰 명이 요단 강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강 가에 서니, 따르던 제자들도 멀찍이 멈추어 섰다.

열왕기서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대화에는 하나의 같은 패턴이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늘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엘리사는 꼭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처음 제자가 될 때도 엘리야는 ‘돌아가라’고 했고, 열왕기하 2장에서도 세 번이나 ‘너는 여기에 남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처음부터 이때까지도 계속 스승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내친다기보다는, 그의 헌신을 점검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약간의 영적인 밀당이죠.

기독교 교육학자로 유명한 하워드 헨드릭스는 그의 책에서 절대로 ‘사역을 구걸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와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요단 강 앞에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함께 섰습니다.

(왕하 2:8) 그 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 강을 건너갔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설명할 재주가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으니 기적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은 이 기록을 통해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던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모세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이 시대에 엘리야에게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데려가기 전에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구약에 보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처럼, 그들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를 엘리사가 하죠.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간혹 이 말씀을 오해해서 엘리사가 감히 스승보다 2배 뛰어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한 것처럼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 신명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갑절의 몫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엘리야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모든 제자 가운데 ‘장자’로 엘리야의 사명을 이어가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엘리야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왕하 2: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선택하셔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것을 보는 영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것이 곧 ‘후계자’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증거일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나님에 의해서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봅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 일하실 것임이 드러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곳에 있는 제자 가운데 엘리사만 엘리야의 승천을 온전하게 봅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으려고 헤매는 장면을 볼 때,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후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그를 향해,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외칩니다. 아버지라는 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내포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는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영적 군대와 같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나중에 엘리사가 죽게 될 때 요아스(여호아스) 왕이 엘리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

조금 눈여겨볼 것은 엘리사는 병으로 죽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데려가시던 그 방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초월적인 방식으로, 엘리사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주님께서 부르셨으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여러 엘리야의 사명을 엘리사가 이어받아 행하게 됨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엘리야 엘리사 에피소드를 보면서 ‘사람은 가도 사명은 남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감당했던 하나님의 사명이 이 시대에는 이들이 감당하고, 또 그 후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어갔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맡겨져 있는 것이죠.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요한 웨슬리’의 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어쩌면 우리는 성경에서 이 이야기의 단편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승천 이후,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사명이 이어집니다. 그가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요단강을 치자, 엘리야를 통해 강이 열렸던 것처럼 물이 갈라집니다. 마치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너갔듯 말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성경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함께했던 지역을 재방문 함으로써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 것이 공식화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두 장소에서 각기 다른 상황이 벌어집니다. 한 곳에서는 ‘생명과 축복’이, 다른 곳에서는 ‘죽음과 저주’가 나타납니다. 이는 그곳의 주민들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했는지 아닌지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광야에서 있었던 ‘마라의 쓴 물 사건’과 ‘불 뱀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엘리사가 모세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암시하는 사건들이죠.

먼저 여리고에서는 죽음의 물을 생명의 물로 바꿉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니, 우리가 어렵지 않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벧엘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서 충격을 받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무려 42명이나 죽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실제로 주중에 한 성도님이 저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한번 제가 설명해보겠습니다. 우선 ‘작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아이를 뜻하는 표현이 2개 있는데 ‘옐레드’는 13세 이하의 정말 어린아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그보다 조금 높은 연령대에 쓰는 표현이 ‘나아르’입니다. 이것은 ‘아이’라는 의미보다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이삼십 대의 미혼자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나아르’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청소년일수도 있지만, 청년에 해당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이 단어는 ‘미성숙함’을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20세에 왕이 되었을 때, 그는 ‘내가 아직 어린아이인데’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철없는 아이를 생각하지만, 이 단어의 의미는 미성숙한 미혼의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벧엘은 선지자 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이들에게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보다 빠르게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면 ‘아이들 중의 42명’이 죽은 것입니다. 즉, 그곳에 있던 무리는 42명 이상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엘리사가 이곳에 왔을 때, 42명이 넘는 대규모의 인원들이 엘리사를 둘러쌓고 조롱하며 말한 것입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이것이 그들의 조롱인데, 이 표현도 단순한 외모 비하가 아닙니다. 여기서 ‘올라가다’라는 것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도 이와 같습니다. 즉, 엘리사를 향해 “너도 하늘로 올라가 버리지 왜 이곳에 왔느냐?”라고 말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선지자로 사명을 감당할 엘리사에 대한 반감과 무시와 조롱입니다.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벧엘은 강력한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그들은 벧엘에 와서 늘 경고하며 외쳤을 것입니다. 벧엘 사람들은 듣고 싶지 않았겠죠. 그런데 엘리야가 사라지고 엘리사가 이곳에 또 온 것입니다. 그런 엘리사를 거부하는 것이 ‘대머리여, 올라가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어린 아이들의 외침이 아닐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엘리사의 방문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단체로 농성하듯 엘리사를 향해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를 세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죠. 엘리사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선택한 여호와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성경의 기록을 보면, 엘리사가 이곳을 떠나서 갈멜산을 거쳐서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갑니다. 엘리야의 주된 사역 장소들을 그가 뒤따랐다는 의미입니다. 즉, 엘리야의 뒤를 이어 북 왕국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사역할 엘리사의 모습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앞으로 그런 모습을 성경을 통해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엘리야도 빠졌던 감정의 소용돌이입니다.

우리는 오늘 엘리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일꾼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고, 그저 자신의 감정과 환경에 지배당하여 무너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육체의 죽음도 뛰어넘어 부름을 받은 엘리야조차도,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 감정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깊이 빠지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갇혀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절망의 눈으로 봅니다.

우리는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에서 이해하고 볼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이 소위 ‘믿음의 눈’입니다. 대표적으로 열두 정탐꾼 사건이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까? 10명은 자신들의 감정과 판단에 빠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뛰어넘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자기감정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예언자와 왕, 예언자와 백성들 사이의 긴장 관계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어쩌면 왕과 백성들에게 ‘예언자’는 불편한 존재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반겼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왕들은 예언자를 그저 자신의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반대하는 존재로 대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에게도 자신들에게 뭔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어 예언자를 보내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린 북 왕국에도 엘리야에 이어서 엘리사를 보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 때도 동일하게 반응한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뜻을 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힘과 소망이 되어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떻습니까? 말씀이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꾸 내가 편하게 했던 태도들도 돌아보게 되고, 양심에도 찔리게 되고,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면하면 우리도 여로보암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엘리사가 끝까지 엘리야를 따르고 따랐던 것처럼, 여호수아가 모세를 수종 들며 따랐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그렇게 따라간다면 저는 그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는 삶을 고백하고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안전벨트가 불편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생명 벨트라고 부릅니다. 불편하지만 생명이기에 착용합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오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이 예배 안에서 주시는 말씀이, 누군가를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권면이, 또 내 안에서 나를 날마다 이끄시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시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시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 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