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예배 : 마르다 없이 마리아처럼 온전히 예배하는 날
신앙 기초 8번째 설교입니다. 이 시리즈는 깨어짐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나, 세상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모습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 성경은 참 놀랍게도, 우리에게 “지금의 상태가 원래의 모습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특히 최근 문화 코드 안에 이런 진단은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드라마는 제목이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기도 합니다. 불안과 싸우고 있는 이야기이죠.
이게 꼭 남의 이야기입니까? 때로는 우리도 공감하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들어 부쩍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우리의 세상과 삶에 있는 불완전함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들이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매우 실제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소 2000년 이상 전에 기록된 성경의 주된 주제도 같습니다. “너희는 원래 누릴 수 있었던 삶을 잃어버렸어. 어떤 부분에서 불완전함이 생겼어.”라고 진단을 해줘요. 지난주 봤던 로마서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피조물이 허무와 공허에 신음하고 있는 상태이죠.
사실 역사에서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시대, 낙관적으로 보는 시대, 다양한 관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원인까지 말해줍니다.
심리학이나, 다른 문화 콘텐츠에서도 ‘현상’에 대해서는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근원적인 이유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대담하게 선언합니다. “그 원인이 이것이다.”
성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이 ‘죄’입니다. 죄에 대해서 이미 앞선 설교를 통해서 충분히 이야기했지요. 간단히 말하면, 죄는 하나님에 대한 무시, 관계적 약속에 대한 배신, 창조 질서에 대한 이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에는 결핍과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를 펴자마자, 단 세 장 안에서 이 모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해바라기에게서 해를 빼앗아 가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은 스스로가 태양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인간은 태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반복되는 오류입니다. 우리는 태양과의 관계를 '거꾸로' 오해했습니다. 태양을 그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보는 우리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우주의 질서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가 사라진다면, 우리 세상에는 엄청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태양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태양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하나님을 필요조건 정도로 여깁니다.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어 보이면, 그것으로 대체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터진 웅덩이에 불과할 뿐,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손을 내미시며 ‘구원’하기를 결정하셨습니다.
우리의 악함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직접 해결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내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 구약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죄를 깨닫는 시간입니다. 인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이 시간은 하나님이 행하실 구원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마침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습니다.
‘희생 제사의 효력’을 이해해야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고, ‘왕과 제사장의 직분’을 이해해야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할 수 있고, ‘만나의 원리’를 이해해야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 본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때가 찼다’라는 표현을 새번역성경은 ‘기한이 찼을 때’라고 번역합니다.
성경 원어로 보자면 ‘플레로마’입니다. 이것은 ‘가득 차다’, ‘충만해지다’, ‘완전히 준비되다’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을 만큼 준비된 상태입니다.
구약 4000년의 반복된 실패, 이스라엘의 흥망성쇠, 그리고 인간의 한계 가득한 삶.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면서 외치셨던 첫 번째 선포도 같은 메시지입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우리는 창세기 3:15을 봤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구원자(메시아)가 뱀으로 표현되는 악에 대하여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뱀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수는 있겠으나,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선언입니다.
메시아를 통한 구원은 다른 방법으로 고민하다가 갑자기 생각해 낸 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마침표였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그릇으로 이스라엘 부릅니다. 구원자에 대한 복음, 그것을 담아서 세상에 전할 도구.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담아낼 그릇입니다.
이 그릇의 시작은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 = 세상, 너 =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복 =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고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의 통로이죠.
구약에서 그들은 몇 번이나 오해합니다. 때로는 인간 왕이 메시아가 되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뛰어난 왕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모든 역사서입니다.
왕정 시대에 활동한 이사야 선지자는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그가 진정한 왕으로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는 고난받는 종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이 말씀의 내용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는 메시아는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메시아는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습니다.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거부당합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함부로 해석합니다. “저 사람은 자기의 벌을 받는 거야. 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거야.” 사람들이 그를 죄인으로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예언이 구약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성경이 참 진리라고 여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기록 시기는 학자마다 다르게 볼 수는 있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어떻게 오실지 아무도 모르던 시기에 기록이 끝났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리라는 것도 그것이 상징인지 실제인지, 어떤 방법일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신약의 사람들이 그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예언을 남긴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는 왕정 사회입니다. 왕이 모든 권한을 갖고 군림하던 시기였습니다.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해서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면서 왕과 같은 길을 가지 않을 때, 사람들이 당황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사람들에게 왕에 대한 이미지가 다 비슷했다고요.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그렇게 행동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이미 다 말씀해 주셨어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에는 ‘없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군림이 아니라 죽기까지 섬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죠.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 안에서 구약의 모든 메시지가 바라본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 그 의미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삶으로 보여주셨던 모습으로 인해, 도리어 구약의 수수께끼들이 풀린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메시아로 오시는 이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당하고, 채찍에 맞는 이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와 나음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정작 우리는 여전히 다 그릇 행하며 자기 길로만 가고자 하는 죄악을 반복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담당시키셨다'라는 표현은 능동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쩌다 일어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밀하고도 고집스러운 의지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나눈 지난 설교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삶, 우리도 그 링반데룽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반복된 공허, 반복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그 링반데룽의 역사를 관통하시며, 자신의 구원 프로젝트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향해 하나님은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후반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그릇으로 택한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나라가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했고, 남유다는 머나먼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때가 있으시죠.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흔들리는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십니다. 놀랍게도 나라가 사라지고 주권이 없는 포로의 상태로 머나먼 바벨론에 끌려간 그 절망 속에도 일하십니다. 그 역사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끝이라고 봤는데, 역사 위에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그 일은 ‘다시 시작’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그릇의 시작점인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을 받았던 곳이 ‘갈대아 우르’였죠. 바로 바벨론의 중심지입니다. 마치 창세기 초반부 인류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다시 인류의 계보를 시작하셨던 것처럼, 구약의 모든 역사를 실패로 귀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시작점으로 삼은 사건입니다.
놀랍게도 완전히 실패한 그 절망이 유다 백성을 돌이키게 했고, 다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말씀을 붙들기 시작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정리하며 회개하고 돌이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명령처럼, 포로였던 유다 백성을 바벨론 땅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돌아온 귀환 백성에게 구약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를 통해서 약속하십니다. 그 마지막 약속을 우리가 한번 읽어봅시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구원의 날인 동시에 심판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메시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의 믿음이 구원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실체 앞에 우리는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 돌이킨다는 것은 죄로 인해 단절된 마음을 연결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죠. 그러나 이때도 돌이키지 않으면, 이제는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싸인을 주십니다. 그것도 이미 구약에 모두 예고해 두셨습니다. 바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입니다. 이미 우리 성도님들은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세례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모습과 사명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에 이것이 그대로 언급됩니다.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그러니 신약은 이 말씀을 받아서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드디어 그때가 오고 있음을 깨닫게 하며, 여자의 후손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말라기의 예언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구약의 커튼을 닫습니다. 400년의 침묵기.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간을 기다리십니다. 그림자의 시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침묵의 시간 동안 복음이 전해질 최적의 환경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400년의 침묵기 동안, 세계가 헬라어로 통일되었습니다. 덕분에 복음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전파될 토대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로마를 통해서 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졌습니다. 이 길은 훗날 복음이 땅끝까지 퍼져나가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정치적 격변과 고통 속에서 유대인들은 “진정한 구원자”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 기대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은 말합니다. “때가 차매....”
이제 컵에 물이 한 방울만 더 떨어지면 넘칠 것 같은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모든 수단(율법, 왕, 제사)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철저한 무력함’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준비의 충만’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구약 4,000년의 실패와 400년의 침묵이 만나 비로소 ‘플레로마(때가 차매)’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가장 밝은 새벽별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해석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희로애락이 교차합니다. 여기 모여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엇갈린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복잡한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자주 잃어버립니다. 상황만 보이고, 그 상황 속에 그냥 잠겨 버리는 것이죠.
며칠 전 저는 장례 추모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명백한 한계, 그리고 그 뒤에 진짜 남겨지는 것들을 대면할 때, 삶을 조금 더 크고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더군요. 저의 좁아졌던 시선을 다시 바꾸어 주었습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오늘 우리가 나눈 말씀은 원거리에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정도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굽어보게 합니다. 그렇게 시야를 넓혀보니, 그 기나긴 세월과 뒤죽박죽된 사건들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업에서 ‘신뢰’란 ‘예측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하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해오셨던 일과, 지금 하고 계신 일, 그리고 앞으로 하실 일을 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시고, 하나님의 때를 향해 실패 없이 걸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실패와 처절한 무력함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계신 사람 대부분에게 이 구원 프로젝트의 마침표인 예수님은 이미 찬송과 예배의 대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은혜에 초대받아 그분을 나의 왕, 나의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장대한 우주적 드라마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사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정말 이 구원에 감격하고 계십니까? 혹시 이 복음이 내 삶에 필요한 작은 옵션 정도로 전락해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입술은 예수를 말하지만, 정작 내 마음과 정성은 다른 곳을 향해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모든 것을 누려도,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그 주님께 다시 여러분의 마음이 정렬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행하시는 놀라운 일이며, 오늘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시간(플레로마)’일 것입니다.
아직 주님을 알아가는 단계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게 일하고 계셔서,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경험할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혹시 내 마음의 때가 찼음에도 계속 미루고만 있었다면, 오늘 용기 내어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보십시오.
우리 모두, 시간의 주관자이신 그분을 신뢰합시다. 우리의 깨어진 삶을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프로젝트 안으로 초청해 주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께, 오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