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마 16:13-19, 엡 4:4-15 / 강정규 목사 (2021.12.12) - 1부

2021-12-12 · 마태복음 16:13-19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성경의 첫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셨고,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우리를 ‘걸작품’이라고 기뻐하셨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주님이 주시기를 원하셨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과 누리고 싶은 사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방해하는 죄의 유혹이 찾아오죠. 죄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죠. 통치는 왕권이라고도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왕으로, 아버지로, 우리는 그의 자녀로 백성으로 창조되었다면,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도록 유혹합니다. 스스로 왕이 되라고 부추깁니다. 그것이 더 좋다고 속삭인 것이죠.

저는 이 비유를 좋아합니다. 나무에 가지가 있습니다. 나무에 가지가 붙어있으면 나무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열매도 맺히죠. 하나님은 나무요, 우리는 가지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우리에게 열매도 맺히는 것이죠. 풍성한 행복.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왜 나무를 의지하고 살아. 너는 가지로 살기에 아까워.” 죄의 유혹 앞에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짓죠. 선악과 사건은 가지가 나무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간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너는 나를 떠나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고, 사탄은 더 좋은 ‘행복’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사탄의 속삭임과 달리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잠깐은 살아있지만,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므로 이제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죠. 그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결핍이 가지에게 찾아옵니다. 궁극적인 생명의 근원이 사라졌으니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맞이합니다.

이 가지를 어찌할까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져 버린 사람들을 어찌할까요?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이들을 다시 되찾고자 결정하십니다. 다시 나무와 가지 비유로 보자면, 떨어져 나간 가지를 다시 나무에 봉합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을 접붙임이라고 하죠. 가지를 다시 나무에 접붙임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사명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대가를 해결해 주심으로 모든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의 처음 모습처럼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죠. 길은 하나님이 열어주신 것이고, 그 길로 나아오면 다시 살 수 있다고 외치는 역할을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통치권을 갖고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 전까지의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소망을 잃어버린 깨어진 세상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땅에 새로운 소망의 길이 열렸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와, 그것을 거부하는 세상 나라가 공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다가 이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왔든지 안 왔든지 그냥 무관하게 삶을 살거나, 그분을 왕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나라에 속하여 살아가는 삶, 이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길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주님은 그 나라를 전파하시고 보여주시며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일은 바로 그 나라를 보여주고 그 나라를 전하시며 그 나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여시며,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공동체적 삶을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파하고 초청하는 일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어요. 그들과 함께 사시며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들이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이 나라를 세상에 계속 이어가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제자를 통해 또 다른 제자를 낳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양육하시다가, 어느 날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마 16: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당시 로마 시대는 어떤 세상이었는지 아십니까? 황제숭배가 대세였습니다. “황제에게 복종하면 그가 지배하는 강력한 힘 안에 평안할 거야.” 그것이 무엇입니까?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로마가 팍스 로마나를 만들기 위해 시행했던 형벌이 십자가형이죠. 십자가형의 가장 잔인함은 ‘수치심’입니다. 발가벗겨서 높은 나무에 매달아서 며칠을 서서히 죽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을 주는 것이죠. “로마에 대항하면 저렇게 죽겠구나.” 세상의 평화가 주는 역설입니다.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구조. 끊임없는 경쟁과 끊임없는 비교. 수직적이고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세상. 그 끝판왕이 로마입니다.

지금은 그런 황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은 다를까요? 다른 차원의 위협과 논리가 이 시대를 지배합니다. 황제를 따를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대세를 따르는 문제 말입니다. 어디가나 부동산 이야기, 주식 이야기, 비트 코인 이야기, 자녀 교육 이야기.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쳐야 한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남들 다 이렇게 사는데 나만 다르게 살면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닌가?” 이 시대가 주는 위협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와 로마 시대 그리스도인의 고민이 다르지 않습니다. 대세를 따를 것인가, 다른 삶을 추구할 것인가. 그럼 어떻게 다를 것인가? 그 길에 내 삶을 걸어도 될까?

로마시대. 가장 꼭대기에 있는 황제. 사람들은 그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를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큐리오스. 그를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유앙겔리온. 지금의 시대는 어쩌면 돈이 신이고, 주님이고, 복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황제의 세력은 세상 모든 것을 뒤덮는 듯합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가장 높은 하나님의 영역에서 세상으로.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구간. 로마 시대의 심장부도 아니라, 로마 제국의 변두리, 로마의 지배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메시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완전하게 다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 황제를 예배하는 그곳,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묻습니다. 1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믿느냐? 옆에는 황제를 예배하는 예배 처소들이 있었어요. “황제냐, 나냐?” 이제는 제자들이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 큐리오스. 로마의 황제에게 붙이던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즉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 아니라, 나는 당신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세상을 우리에게 주실 메시아라고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매우 실제적이고, 매우 위험한 급진적 발언입니다. 이거 녹음에서 로마에 고발하면 십자가형이죠.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그 고백을 지금 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가장 진실한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주님은 베드로의 그 고백을 기뻐하시며 바로 그러한 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고백이기 때문이죠. 이 말씀은 성경에서 교회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이 부분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그럼 교회는 어떤 믿음의 고백으로 세워지는 것입니까?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고,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며, 그 삶의 방식으로 살아내어 여기에 참된 행복과 삶의 의미와 변함없는 사랑이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이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 그 반석 위에 주님은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게 천국 열쇠를 줍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바로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닫는 청지기와 같다는 것이죠.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통로입니다.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며, 그 나라로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이 갖게 된 그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전하며, 그 나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여 전하게 하는 그 사명을 맡기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교회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존재의 의미가 큰 하나님의 꿈이 담긴 모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경을 통해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모임이나, 내 마음을 힐링해주는 기관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꿈꿔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고, 순교자의 피가 흐른 곳에는 반드시 주님의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이 사용하고 싶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하는 놀라운 주님의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세우실 것입니다. 어떻게 세우시느냐?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세우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다른 자격은 없어요. 열두 제자를 보십시오. 다른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데리고 이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세상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사랑하는 일에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주님은 ‘교회’로서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악으로 깨어진 이 세상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허무하다. 고통이다.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세상을 보십시오. 그 공허함과 허무함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것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안 됩니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의 설정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는 기독교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작 그 안에 있는 오징어 게임의 주최자들은 아무리 많은 것을 누려도 공허하여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 말종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은 끊임없이 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잠깐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가는 그런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오죽하면 솔로몬은 많은 것을 다 누려봤으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도서의 주제를 잊으면 안 됩니다. 단순한 ‘헛됨’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헛됨’입니다.

이러한 깨어진 세상. 소망을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주님의 구원 계획. 그리스도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세우신 교회. 그 교회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만물이 허무에 굴복한 상황에서 그것을 충만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원래 허무하게 지으시지 않았어요. 원래 충만함을 누리도록 지으셨습니다. 보시기 좋았더라. 그러나 잃어버렸어요.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고, 교회는 바로 그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첫 번째 대상이자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충만케 하시는’이라는 표현은 ‘현재형’을 쓰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지금도 교회를 통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를 먼저 충만케 하시고,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주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훈련하고 성장시키고 준비시키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를 통해 허무한 세상에 소망을 불어넣는 일을 조금씩 조금씩 하고 계시다고 믿어요. 소망을 잃어버린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키고, 자라게 하시고, 지역사회와 이웃을 돌보는 그 모든 일이 그런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믿어요. 저는 그 충만함의 역사를 함께 경험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실 오늘 제가 ‘사역에 관한 설교’를 주제로 다루겠다고 했어요. 원래는 설교를 이렇게 전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교회 안의 어떤 사역을 해나가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큰 그림을 여러분과 나눠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또 어떤 사역을 하는 것은 단순히 이 교회 하나를 유지하려고 해나가는 일이 아님을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는 사귐의교회가 그저 사귐의교회라는 한 단체를 유지해나가는 것에 목적을 둔 그런 교회가 아니길 바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위해 베푸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저는 교회를 그렇게 바라봅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아버지는 목회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마흔이 되던 때까지 사업을 하셨어요. 덕분에 저희 가정은 신도시의 중대형 아파트를 분양받아놓고 거기에 들어갈 지극히 세상적인 기쁨에 도취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아버지가 응답했습니다. 저희 가정의 인생이 바뀐 날이죠. 결국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를 시작하셨고 아버지도 몇 년간 자비량으로 목회를 하셨어요. 제가 어디서 개척의 방식을 배웠겠어요. 아버지 모습 따라가는 것이죠.

“예배는 중환자실에 누워있지 않는 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가 고관절 수술을 하셨는데, 그 말씀을 지키려고 병원에서 외출해서 교회 오셨다가 넘어지셔서 큰 수술도 받으셨어요. 세상으로 보면 무식한 일이죠. 그렇게 교회 한번 잘 세워보겠다고 애쓰고 애쓰시다가 결국 은퇴도 못 하고 갑작스럽게 주님 곁으로 가셨어요. 마지막까지 아픈 몸 이끌고 설교하시고, 마지막 설교하시고 채 한 달도 안 되어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평생 살아간 것을 봤습니다. 경제적 논리로 보면 저희 가정의 선택은 손해일지도 몰라요. 건강을 중시하는 풍토로 봐도 미련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교회를 잘 세워보겠다는 마음으로 평생 사신 것을 저는 봤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주님의 꿈이 담긴 ‘교회’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어야죠.

저는 교회가 하나의 사업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교회를 그저 종교모임,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치유소 정도라고 생각했으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결코 지금까지의 삶도 살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 그런가요?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자기 시간 써가며, 교회에서 사명 붙잡고 애쓰는 분들이 계세요. 우리 청년들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보겠다고, 남들이 하지도 않는 수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 금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 ‘헌신’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은 쓰다 남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은 귀한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기 때문에, 에너지가 남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헌신한다고 돈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그런데 그래서 우리의 헌신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순결하고 고귀하게 주님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간 사귐의교회는 나름의 임상실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5년 전 제가 일하면서 자비량으로 개척을 하고, 건물도 없이 시작한다고 했을 때... 과연 저렇게 교회가 세워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시작을 조금은 걱정스럽게 바라봤습니다. 첫 예배 때 제 친구 목사는 와서 저를 축하해준 것이 아니라 위로해주고 갔어요. 그 친구도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과정도 많았습니다. 건물 없는 교회에서 건물을 얻고자 했을 때도 몇 번 좌절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 블로그에 가보면 ‘하나님에게 삐졌어요’라는 제목의 글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교회를 먼저 포기하는 일은 하지 않을테니... 하나님이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주십시오.”

그렇게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임상실험이라고 했죠. “주님의 교회가 이 시대에도 정말 세워지는구나. 다 어렵다고 하는데, 그래도 주님이 교회를 여전히 이 시대를 위해서 사용하고 계시는구나.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주님이 어떻게든지 이끌어 가시겠구나.” 제가 지난 5년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진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제 삶을 걸었습니다.

올해 정말 감사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도 성장했지만, 무엇보다 이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구조적으로, 조직적으로, 외형적으로 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안에 있는 목사로부터 모든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외형은 커졌는데, 속은 다 문드러졌다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가 자란 것이겠습니까?

올해 저는 성도 여러분을 보면서 확신했습니다. 자랐구나. 우리 청년들도 자랐고, 장년들도 자랐고, 저도 자랐습니다. 저는 5년 전의 저보다 지금의 제 모습이 더 좋습니다. 우리 형님, 누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조금은 저도 늙고 쇠약해졌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제 내면이 더 건강해졌기 때문에, 앞으로의 5년 후를 기대합니다.

요즘에 교회를 볼 때면 저는 이제 늘 이것을 묵상합니다. “왜 우리를 교회로 세워주셨을까? 그것에 담긴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지금까지는 생존을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생존케 하신 이유에 부합하는 교회로 나아가고 싶어서 늘 고민합니다.

저는 특별히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건강하고 좋은교회의 중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려요.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이 난리의 상황 속에서 진짜 교회가 되는 것. 그래서 이곳에 보내시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회복시키고 길러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좋은 나무에 접붙은 가지는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동일하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이 교회로 주님이 회복하고 자라가야 할 사람들을 보내신다면, 저는 우리 교회가 그들을 감싸 안고 함께 자라갈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비전을 꿈꾸며 자라게 해야 합니다. 나무로 보자면 열매 맺는 생명력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자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 주어졌고,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아이 / 영적 청년 / 영적 부모’라고 쉽게 이 영적 성장의 단계를 설명해 드리곤 합니다.

영적 아이는 이제 막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불신자에서 초신자로, 혹은 잃어버린 자에서 다시 찾은 자로서 새롭게 시작된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영적 아이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노년일지라도 영적 아이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해주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탄생이 있었으면 그 후에는 반드시 자라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히 5:12)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청소년이 되어야 하는 때가 되었는데 자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부모의 큰 아픔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의 성장을 위해 도우시는 분이기에 자라지 못하고 있다면 성령이 근심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영적 아이에서 영적 청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 아이는 누군가 돌보지 못하면 죽는 상태입니다. 영적 아이는 혼자서 신앙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반드시 도움이 필요해요. 그러나 여기서 조금 자라면 이제는 영적 청년이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며, 꿈도 꿉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들도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조금 더 자라야 합니다. 이 상태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청년은 자신의 신앙만 돌보는 상태라면, 영적 부모는 누군가의 신앙에 도움을 주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하며, 영적 아이들을 품을 수 있는 주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꿈은 모든 신자가 영적 부모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를 부르신 궁극적 이유는 바로 이들을 통해서 또 다른 제자가 길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한다는 것은 이 교회에 영적 부모들이 생겨나서 이 일을 해나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나갈 권세는 이미 주님이 주셨어요.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며, 주님이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만 잘하면 됩니다.

이것을 잔에 비유하면, 영적 아이는 이제 나에게 영적인 잔, 주님이 거하실 공간이 있음을 깨닫고 물을 조금 따르는 단계입니다. 청년은 자신의 잔은 이제 채울 수 있는 정도입니다. 영적 부모의 단계는 내 잔이 넘치고 주변으로까지 그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성령충만한 삶이죠. 우리는 각자가 이런 성령이 충만한 자가 되어, 교회를 충만케 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충만케 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꿈이 여러분의 구원에 있지 않기를 원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나 한사람 구원받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하면 우리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이 제자 12명 구원시키고자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다른 영혼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을 돌아봐도 그래요. 우리도 누군가의 헌신으로 복음을 알게 되었잖아요. 누군가 우리를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 성장을 위한 반석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삶도 그 은혜와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주의적 신앙을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인구 성장률이 1 이하로 내려가면 그 민족은 소망이 없는 것이죠. 저는 어쩌면 사탄은 지금의 신자들에게 그렇게 속삭이며 서서히 기독교를 무너뜨릴지도 몰라요. “네 신앙이나 잘 지켜.”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는 끝까지 가도 내 신앙만 가지고 씨름하다 끝나는 것입니다. 10년, 20년 믿으면 여러분이 자신을 보면서 만족하시겠어요? ‘나부터 좋은 신앙인 되고 봐야지...’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나도 부족하고 너도 부족하지만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좋은 엄마/아빠가 되면 아이를 낳을 거야.” 저는 여러분, 지금도 제가 좋은 아빠라고 확신하지 못해요. 내가 좋은 아빠라고 확신한 후 아이를 낳으려고 했으면, 아마 저는 평생 못 낳을 것입니다. 자꾸 나의 연약함 뒤로 숨도록 하는 것은 사탄의 속삭임일지도 모릅니다. 나만 바라보는 개인주의적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공동체를 말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공동체의 소중함을 보게 됩니다.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한 소망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그 소망은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겠죠.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11절부터 나오죠.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으로 삼으셨어요. 다양한 사역자들입니다. 이것은 꼭 신학을 한 목회자를 의미하지 않아요. 종교개혁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만인 제사장. 정확히 말하면 전신자 제사장입니다. 모든 신자가 이 일을 할 수 있어요. 함께 사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역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성도를 온전하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고, 그 자람과 함께 나타나는 모습은 봉사의 일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즉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온전하게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세워가기 위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가 다’라는 표현은 ‘예외 없이’라는 의미이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으로 자라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제 삶을 헌신합니다. 저는 이거 하다가 죽을 거예요. 여러분 중에도 저와 이거 하다 죽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래요. 그런 우리의 비전은 이것이죠.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나를 사랑하기에, 또 내 옆 사람과 우리 교회를 사랑하기에, 이 일을 해나가는 것이고... 이 여정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에게까지 자라가는 것.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 안에,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일이 나타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은 이제 제가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하실 것입니다.

제 마음은 다 나눴고, 마지막으로 사역의 원칙 3가지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여러분이 올 한해보다 내년에 조금 더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우리가 사랑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없었던 사랑의 감정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내가 하나님 안에서 자랄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내어놓고 물으십시오. 한계를 내가 정하면, 나는 늘 그만큼 밖에 경험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제가 이번에 사역지원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어쩌면 ‘교회봉사’는 영적 아이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배워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사역은 영적 청년과 영적 부모의 단계를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 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나에게는 아직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과 신앙의 회복과 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일반사역’을 하셔도 됩니다. 핵심 사역은 에너지가 더 많이 들어가는 일들입니다. 특별히 ‘핵심사역’은 모두 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들입니다. 영적 통로로써 사용되길 바라는 분들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세 단계로 나눈 것은 모두가 각자의 상황과 영적 단계에 따라서 한가지씩의 일은 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평등(균일)의 원리보다는 공평(공정)의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평등은 같은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남들과 똑같은 헌신. 손해보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적어도 한글 성경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단어가 ‘평등’입니다. ‘공평’은 20번이나 나오죠. 가장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그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으로도 이러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을 터인데, 부자는 손을 펴서 물질을 나눠서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헌금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유럽 교회가 좀 더 상황이 좋으니 헌금을 모아서 어려운 교회를 위해 써주십시오. 그것을 명하는 것은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헌금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것으로 저희 쓸 마음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에요.

이 공평의 원리는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은 영적인 성숙함에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남들과 같은 헌신만 하겠다는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 가장 목숨을 먼저 걸고 끝까지 걸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새가족은 아니에요. 새신자들은 교회 와서 대접받고 누려야 합니다.

특별히 저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청년들에 대한 사역의 기대치가 높아서 청년들이 넘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청년들이 사역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반대해왔습니다. 반대로 장년들이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단단한 청년들이 많으면 좋지요. 그들은 에너지도 있으니까. 그러나 대부분 청년들은 어느 정도 성장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잘 살피며 때를 기다려줘야 해요. 사역은 은혜를 깨달은 자가 죽을 때까지 그 은혜 지키며 사역하다 죽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분들과 더 많은 일을 함께 합니다. 고맙죠. 그러나 미안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저나 그분이나 하나님 안에서 각각 칭찬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을 저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야 하고 그런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교회의 영적 수준이 올라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안 되죠.

개척 초창기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자라야 하므로 최대한 교회 사역을 줄이려고 했었습니다. 청소도 성도님들을 거의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가족이 토요일마다 청소를 하고 성도님들은 우선 영적으로 더 자라가도록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공평의 원리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사역지원서를 제 목회의 성적표와 같이 여깁니다. 자발적 헌신으로 그 자리가 채워질 때, 그것이 우리의 수준이 올라간 것이겠죠.

그러나 기다려야 하면 계속 기다릴 것입니다. 교회를 잘 운영하기 위해 여러분을 통해 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잘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보다 사역이 많으면 사역을 줄여야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른 의미의 공동체 안의 공평의 의미도 함께 기억해주십시오.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눠서 지고, 교회 안의 어떤 사역의 필요를 위해 각자의 분량대로 헌신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혹사로 이어지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초창기의 일입니다. 당시 저희교회에서 가장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사역은 ‘식사봉사’였습니다. 다른 사역은 대부분 그냥 저 혼자 하고, 교육부 사역도 아이들이 얼마 없을 때였죠.

저는 성도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식사를 하지 말자는 의견이었고, 그래도 식사를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자발적 헌신을 하되, 제가 하나의 원칙만 세웠습니다. 만약 지원자가 1~2명이면 그들이 계속 식사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봉사 최대치를 한 달에 한 번 식사봉사로 정한 것입니다. 지원자가 1명이면 한 달에 한 번만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죠. 그를 통해 헌신도에 따른 자발적 지원을 원칙으로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일이 쏠려서 과부하가 걸리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홀로 했던 찬양사역을 성도님들께 위임할 때, 6명의 인도자를 세우게 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 핵심사역에 얼마나 지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핵심 사역 중에 가장 인원이 많이 필요한 것은 아동부 사역입니다. 일단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고, 어린 친구들일수록 교사가 많이 필요하지요. 지금도 간신히 7명의 교사가 감당하고 있는데, 이분들 중에 사정상 못하게 되실 분들이 몇몇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장님은 고민이 많으시죠. 그래서 제가 부장님을 불러서 말씀드렸습니다. “몇 명의 교사가 지원하던지 그것에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동부 교사가 줄어들어 3명이 되면 7명이 하던 일을 3명에게 하라고 절대 안 시킬 겁니다.”

아동부 사역이 필요하면 해야겠죠. 저는 중요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필요는 공감하되 지원자가 없으면 저는 결단할 것입니다. 지원한 사람들에게 그 일을 다 맡기는 것이 아니라 3명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아동부 사역을 진행할 것입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저는 공과는 각 가정에서 부모님들을 통해서 진행하게 할 것입니다. 저는 헌신한 3명의 교사의 영적 상태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2년 전쯤에도 아동부 교사 지원자가 없어서 그때는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내 자녀는 교육을 받기를 원하면서 나는 정작 그 일에 동참하지 않고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요. 그래서 그때는 자녀가 있는 부모는 모두 교사로 들어오라고 해서 부모님들이 다 참여해서 아동부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각자의 상황과 믿음의 상태에 따라서 우리는 각기 다른 헌신을 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각자에 맞게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마음은 헌신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혹시 내년에는 헌신하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있는 분들도 계실 수 있겠죠. 각자의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 내어놓고, 물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는 최선으로 함께 해나간다면, 주님의 교회이니, 주님의 필요에 따라 마음을 주셔서, 주께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사역을 지원함에 있어서 Doing이 아니라 Being에 초점을 두십시오. 즉, 행함을 통해서 내 신앙을 증명하거나 내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칫 행위 구원론이나, 보상론. 또는 사역을 인정받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내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 하나님 안에서 이미 새로운 존재로 주님이 받아주셨습니다. Being useless. 때로는 쓸데없이 존재해도 여러분은 이미 가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역하는 것은 Being(변화된 존재)에 대한 감격 때문입니다. 내 존재가 변화된 것에 대한 감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내 존재의 변화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셨는데, 그 사랑을 받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연약할 수 있을지라도 내 헌신을 통해 주님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라도 그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순서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께 인정받거나 구원받으려고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셨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셨기 때문에 감사로 주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감격 안에, 나를 도우시는 성령 안에서 사역할 때... 비로소 사랑으로 사역하고, 지치지 않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우리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이 주신 마음대로 교회의 소중함을 전했고, 이제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묻고 들으십시오. 사사시대에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아서 함께 망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눈치 보지도 말고, 하나님 앞에 각자가 서십시오. 당신을 향한, 이 교회를 향한, 이 시대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앞에 서 보십시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일이 2022년에도 우리 가운데 고백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