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에 한 번 만나는 성경 요엘서에 이어서 오늘은 신약에서 그보다 더 짧은 책인 <빌레몬서>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1장으로 이뤄졌기에 지난 화, 수 이틀 동안 묵상하고 끝나버린 책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일수록 우리가 다루지 않으면 만날 기회가 없기에 오늘은 빌레몬서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 전에 금요기도회 주제 중에 <예배 : 속건제>를 다루다가 빌레몬서를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서신의 내용은 우리에게 조금은 익숙하기에 소선지서보다는 조금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울서신이란 신약에서 바울이 기록한 책을 의미하는데, 모두 편지 형식으로 기록되었기에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신약 27권 가운데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13권이 바울서신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서신은 다시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바울이 편지를 쓴 대상이 ‘교회’인지, ‘개인’인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의 교회에 보낸 편지는 모두 지역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를 간판 걸고 이름을 붙여서 했던 시대가 아니지요. 그냥 기독교 공동체가 그 지역에 하나 정도 생겨난 상태입니다. 양주 지역에 생겨난 교회 공동체에 바울이 편지를 보냈다면 ‘양주서’라는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고, 한번이 아니라 두 번에 나눠서 보냈으면 ‘양주전서’, ‘양주후서’가 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에 보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바울 사도가 후배 목회자인 저에게 편지를 보냈다면 ‘강정규서’라는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두 번에 걸쳐 편지를 썼다면 ‘강정규전서’, ‘강정규후서’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배치를 보면 네 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다음부터 바울서신 13권이 배치되는데, 교회에 보낸 편지가 먼저 배치가 되고, 그 후에는 개인에 보낸 편지가 배치됩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까지 9권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까지 4권이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를 통해서 빌레몬서가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묵상 본문이 빌레몬서 다음에 골로새서를 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책을 이어서 보는 이유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바로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는 강력한 연결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설교도 오늘은 빌레몬서를 다루고 다음 주에는 골로새서를 다루지만, 그 연결성을 기억하며 설교를 듣는다면 훨씬 큰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성경 해석학’의 입문서로 여겨지는 책이 있는데 바로 ‘고든 D. 피 / 더글라스 스튜어트’가 기록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입니다. 제가 작년 7월에 이 책을 갖고 성경묵상법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장르가 있습니다. 복음서와 서신서는 장르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의 특징을 이해하고 접근하면 좋습니다. 빌레몬서와 같은 서신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신서는 모두 특정한 일 때문에 쓰였고, 또한 그 일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문서라는 사실과, 주후 1세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쉬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봅시다. 지금이야 카톡으로 우리는 안부를 묻지만, 서신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는 당시가 1세기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제가 1세기가 어떤 시점이라고 말씀을 드렸냐며, 삼국시대 초기입니다. 빌레몬서는 아마 60년 정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가 막 생겨서 기틀을 다지고 있을 때이고, 김수로가 가야를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이 시기에 에베소 혹은 로마에 있던 바울이 소아시아(터키)에 있는 골로새 지역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신서는 편지를 보내야 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신서를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슨 일’ 때문에 쓰게 되었을까? 이것입니다.
편지의 시작은 바울의 현재 상황을 알려줍니다.
(몬 1:1)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몬 1:2)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바울은 현재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지는 의견이 나뉩니다. ‘에베소’ 아니면 ‘로마’일 가능성이 큽니다. 수신자로는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등이 나오지만, 실제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빌레몬은 골로새에 있는 교회 공동체의 수장입니다. 그는 아마도 바울의 전도여행 중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몬 1:19b)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바울의 문법이 참 특이하죠? 말 다 해놓고, 말하지 않겠다는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빚진 것’은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이죠. 즉 바울로 인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혜를 복음의 ‘빚진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교회들은 모두 가정에서 모이는 그리 크지 않은 모임이었습니다. 아마도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임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즉,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었고, 그러하기에 교회 공동체의 장소로 자기의 집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로마시대의 여느 사람들처럼 종을 두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라는 이 종은 빌레몬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의 집을 떠나 도망칩니다. 도망친 것도 잘못인데, 그 과정에서 경제적 영역을 포함해서 빌레몬에게 잘못한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표현을 통해 우리는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몬 1:15a) 그(오네시모)가 잠시 동안 그대(빌레몬)를 떠난 것은,
(몬 1:18a) 그(오네시모)가 그대(빌레몬)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자, 문제는 로마 사회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법률은 이렇습니다. 도망한 노예가 다시 잡힐 경우, 노예에게는 심한 처벌이 내려졌고, 도망한 노예를 숨겨 준 자에게는 벌금을 부과하였습니다. 도망한 노예를 붙잡았을 때는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규정은 노예를 소유주의 재산으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는 것이죠. 노예가 재산이라는 것은 오네시모에 대한 처벌의 권한이 빌레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빌레몬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노예가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수는 없지만, 내 소유라고 여기는 노예가 몰래 도망하였고, 게다가 내 자산을 빼돌려서 도망하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학자들은 오네시모가 로마까지 온 것이라면, 그가 빌레몬에게서 훔쳐 나온 물질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에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검은 머리 짐승은 바로 사람을 속되게 부르는 말입니다. 즉 사람은 은혜를 입고도 꼭 배신하며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에게는 정을 주거나 도움을 주지 말라는 의미로 저런 속담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사람을 믿는 것이 두렵고 고민이 되는 일들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격언이 ‘진리’인 것처럼 들리는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로마시대의 노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주인들끼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한번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친 노예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마도 빌레몬의 주변에서는 다들 “속지 말라”고 단언하여 말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이 주인으로 로마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제가 로마시대는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라고 종종 말씀을 드립니다. 주인의 피라미드 계층이 있다면, 가장 밑에는 노예 계층이 있습니다. 로마제국 안에서 인구의 1/5가량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세기쯤에는 대다수 노예는 부모의 밑에서 노예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 죽을 때까지 노예. 이들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네시모는 어떤 마음으로 주인의 품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여기서 함부로 예측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빌레몬이 어떠했는지, 혹은 오네시모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추측입니다. 즉, 함부로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 도망한 이유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노예를 두고 있는 빌레몬이 마치 사랑과 자비가 없는 사람처럼 여기는 것도 1세기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우리들의 억측이 될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벌어진 실제적인 사건인데, 그것은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에게 속하여 있는 자였으나 금전적 손해를 입히며 도망하였고,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있을 때부터 바울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후에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빌레몬이라는 연관성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바울과 오네시모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듯 바울의 1차 투옥 상태였다면, 이때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힌 상태가 아니라 가택연금 상태였습니다. 즉 찾아오는 사람들은 만날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든 오네시모가 바울을 찾아오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마도 바울과 오네시모에게 ‘빌레몬’이라는 연결고리는 쉽게 꺼내기 민감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빌레몬과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면, 오네시모가 겁을 내며 더 이상 바울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오네시모 또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배워가면서 자기의 과오는 늘 언젠가 풀어야 할 숙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럼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갔을까요?
첫째. 바울은 오네시모를 정죄하기보다는 사귐을 갖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 주변에 누가 기독교인의 보편적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간단히 술 담배라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혹은 바람을 피우는 행동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우시겠습니까?
바울이 보여주는 모습은 우선 품어주는 것입니다. “술 담배 끊고 날 찾아와”, 혹은 좀 더 심각하게 예를 든 것처럼 “바람피우는 관계 정리하고 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분명히 잘못된 모습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준을 말해주고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르침으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저는 성향 자체가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일, 그분 앞에서 삶을 살아가는 일도 대충대충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제 삶도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갈망함이 크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죄에 대한 기준점도 분명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 기준대로 전부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 앞에서 저도 애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화두인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제 안의 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기독교 안의 동성애 문제를 다룰 때마다 반드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또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 문제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못 미친다고 내치겠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가끔 성도님들과 이야기할 때, 만약 저에게 어떤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물으면 정확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설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정죄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그리고 그 삶의 변화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행복도 더 크다는 것을 알기에 함께 변화해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목사님,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요”라고 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이 저희 성도님이라면 저는 진심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성도님이 어떤 사람이든지, 제가 성도님을 바라보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마음은 같아요.
가끔 우리 기독교인들, 특히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높은 기준을 갖게 되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자신을 바꾸어 살아갈 뿐 아니라,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가르쳐야죠. 그러나 정죄하며 가르치는 것은 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사랑하며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를 분은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은 누구보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했으니, 존재에 맞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나 그분이 사람을 바꾸시는 것을 보면 그 안에 핵심이 있어요.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죄가 무엇인지는 성경은 늘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삶을 원하신다고 말하세요. 그러나 정죄함 속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진짜 마음에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저 손해 보지 않으려고 참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죄를 다루는 방식은 후자입니다. 우리는 법이 있기 때문에 참아요. 내 마음으로는 화나게 하는 상대방을 때리고 싶지만, 그것이 금전적인 손해 혹은 법적 처벌을 가져올 수 있기에 참습니다. 이것은 그저 죄를 눌러두는 것입니다. 안에서는 부글부글하죠.
그런데 정말로 마음에서 어떤 죄악 된 행동을 멀리하고, 상대방을 더 이해하고 사랑해주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변의 어떤 법이 나를 눌러서 죄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같을지 몰라요. 그런데 내면이 다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봤던 사람이에요.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무난하게 살아왔어요. 비교적 착하게 살다 보니, 학창 시절에도 맨날 애들이 ‘봉사부장’ 이런 것 시키고 그랬어요. 저는 공동체의 규율을 어기는 일도 거의 없었죠. 그런데 고민은 규율을 어기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피해 보거나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이 싫었거든요.
제가 DTS라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훈련했었는데, 제주도와 해외에서 6개월의 합숙을 하게 되었죠. 그곳에는 일상생활보다 훨씬 엄격한 규율들이 존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 규율들을 어길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그중에는 그 규율들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해서 술을 마시고 온다든가? 담배를 피우다가 걸리는 그런 일들이 가장 많았죠.
규율대로라면, 몇 번의 경고 이후에는 퇴학을 당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공동체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공동체가 그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받아주면 그는 남을 수 있었어요. 한번은 그곳에서의 영적 훈련에 버거움을 느끼던 형제가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해서 공항으로 가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를 담당하던 간사님이 그 사실을 알자마자 맨발로 달려 나가 그 형제를 데려온 일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움도 있지만, 그런 사람을 끝까지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정말 저 형제들이 자기 삶을 바꿀까? 이런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담배 피우다가 걸려서, 공동체 앞에서 금연을 약속한 형제가 또 얼마 있다가 같은 문제로 다시 걸리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나?” 이것이 당시 제 마음에 있던 솔직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조금씩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소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아직 연약한 지체들을 향한 주변의 격려와 위로와 사랑이 그들이 이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너무나 큰 힘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서입니다.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혼자라면 더 어려울 그 일을 우리는 함께 돕고, 끝까지 돕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그런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당연히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기준을 가르치는 것도 필요해요. 기준이 없으면 자기 뜻대로 살아가도 죄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계속 추구하는 것은 때로는 개인의 결단으로 어려워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그 주변에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함께 그 길을 가자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신앙을 이탈하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교회 안 나온다고 여러분이 어디를 잡혀가겠습니까? 벌금을 냅니까? 잃어버리기는 쉬워요. 또 반대로 사람들이 떠나갈까 봐 죄를 용납하고 묵인하는 것도 공동체가 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가르침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정죄감을 주는 것에서 끝나버리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잘못을 알아요.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해줘야 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때를 기다렸을 거예요. 오네시모가 저지른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그를 정죄하거나, 그를 잡아서 빌레몬에게 보내려는 것이 아님을 알 때까지... 아마 바울은 먼저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대하며 사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적어도 그 상대방을 위해 사랑으로써 행하지 않고 우리가 단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진심으로 얼마나 내가 행동해보았는가? 포기보다 중요한 것은 믿어주며 격려하며 사랑으로써 권면하며 끝까지 함께 그 길을 걸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안에서나 어디에서든, 혹시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았다면, 상대방에게 스승이 되기보다는 아비가 되어주십시오.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둘째.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바울은 사귐을 가지며 오네시모를 복음 안에서 양육합니다. 바울이 부족한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또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며 양육해 가는 과정 속에서 오네시모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네시모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빌레몬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몬 1:10)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몬 1: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몬 1: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 빌레몬과 있었던 시절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바울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며, 복음을 위하여 함께 동역하고 싶은 동역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변하게 된다고 믿습니까? 저도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모든 것을 행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를 따르는 일에 실패하자,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영혼을 상대하는 목사입니다. 저는 제가 사람을 변화시킬 재주와 능력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변해가는 것도 허덕거리는데 제가 누굴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허덕거리면서도 어떻게 변하였고, 또 느릴지라도 변해가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두 가지입니다. 내 곁에도 누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며 격려하고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 힘써주었고,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내가 변해가고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선명해지고, 그 말씀이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될 때,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복음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복음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이 선명해진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 변했습니다. 물론 실패하기도 합니다. 대표주자가 베드로 아닙니까? 그런데 결국 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그는 변합니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성령께서 계속 일하시니, 결국 그는 주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까지 그도 나아가 순교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마라”고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경험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이 땅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검은 머리 짐승과 같은 인간을 바꾸어 하나님 나라 왕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하는 시간들 속에서 변화됩니다. 과거에 주인을 도망쳤던 오네시모는 이제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삶을 살고자 결단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속건제 신앙을 실천하게 하고, 끝까지 함께 걷습니다.
속건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더 나아가 피해를 당한 사람에 대해 사죄를 하고 책임 있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칫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금요기도회 때, 영화 ‘밀양’의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지요.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았으므로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 자유는 상대방에 대한 속건 의무를 다한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 참된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평생 빌레몬에게 행한 죄를 품고 살아가지 않도록 합니다. 그래서 빈손으로라도 주인을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오네시모가 바울과 사귐을 가지며 자신이 잘못한 과거에 대해서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새로워진 오네시모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바울은 오네시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빌레몬을 찾아가 사죄할 것을 명했습니다.
오네시모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노예가 도망치는 것만도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주인의 돈까지 훔쳐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주인을 찾아가 직접 사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래야 이 죄가 주는 정죄감이 더 이상 오네시모를 따라다니며 괴롭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레몬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네시모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온전한 과정을 거쳐야만, 회개의 책임을 지는 과정을 통하여,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말 한마디로 하는 회개는 언제든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게 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자기 잘못을 용서받는 그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진정한 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여서 돌아가기를 결심하기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바울을 보면서... 또한 복음 안에서 변화되어 결단하며 나아가는 오네시모를 보면서... 서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해 한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네시모가 훔친 금액을 자신이 변상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이미 그 돈을 갚을 능력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진심 어린 사죄를 하라고 돌려보냈고, 그 책임은 본인이 대신 지불하겠노라고 빌레몬에게 바울은 마음을 전합니다.
아마 이런 바울의 모습이 오네시모에게도 빌레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 사건 앞에서 오네시모도 빌레몬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빌레몬에게도 배신하고 떠난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일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는가? 한순간에 다 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변해가는 일이 반복되면... 지금은 그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 않아도...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내 삶이 변하였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 변화를 위해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주고 함께 하자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관계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결단하게 하는 시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변화를 응원하고, 여러분이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성숙하여 갈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그리고 끝까지 오네시모를 위한 최선을 다합니다. 동시에 빌레몬을 위해서도 정중하게 권면하며 편지하는 것입니다. 아마 영적으로 빌레몬 또한 바울을 영적인 아버지와 같이 여기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부탁합니다.
(몬 1:7)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
(몬 1:8)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몬 1:9a)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몬 1:14)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용서하는 일이, 빌레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또한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이 경험하며 그 또한 성숙해 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바울은 권면할 뿐이고 결국은 빌레몬이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마음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의 신앙에 성숙을 위해서 때로는 권면할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강권’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신앙 안에서 결단하는 마지막 그 몫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그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반응하고 결단하면, 저는 그것을 기뻐하고 응원하며 도울 뿐입니다. 또 그런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위로를 얻습니다. 말씀 앞에서 변해가는 일들이 제게는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사귐의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그런 기쁨을 정말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큰 감사이며, 목회를 해나가는 힘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하는 이 짧은 서신에서 가장 ‘충격적인’ 요청을 합니다. 그것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맞이하되, 이제는 종이 아니라 형제로 대하라는 권면입니다.
(몬 1:16)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로마시대의 주인에게 종은 어떤 의미일까요? 종을 종으로 대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형제로 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유를 포기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을 해야 하는 수고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으로 빌레몬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로마시대. 피라미드 세상입니다. 피라미드 세상에서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두와 경쟁해야 합니다. 그 세상에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있을까요? 바울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는 형제자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의 사회적 위치가 다를지도 몰라요. 세상의 가치로는 계층의 구분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입니다. 그는 최고의 유대교 학파에서 교육받은 뛰어난 학자입니다. 그도 세상으로 보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깨닫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눈으로 바라보니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일 뿐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빌레몬에게 함께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변화를 기대하다가 낙담하는 일을 자주 경험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은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삶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서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삶을 하나님께 맡겨 보십시오. 그리고 서로의 변화를 믿으며 응원해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태도이며, 우리는 그 믿음대로 하나님의 일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 있죠. 링컨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일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데 그가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그것에 역행하는 일을 어떻게 꿈꾸게 되었습니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바로 빌레몬서를 읽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이 해야 하는 사명으로 힘쓰게 된 것입니다.
한 장짜리 매우 짧은 서신. 그 서신을 통해 변한 것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변화가 우리들에게 이어지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변화를 믿습니다. 응원합니다. 여러분이 어떠하든 끝까지 응원하며 함께 걷고 싶습니다. 우리 서로를 잘 지켜주는 주님의 가족 되어,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함께 믿음의 여정을 동행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