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40대가 되었습니다. 2022년이라는 시간이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 이렇게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생각하고 정의 내리는 것에 영향을 참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시간은 그냥 쭉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쪼개어 1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1월이 되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죠. 마치 12개짜리 초코파이 상자를 새롭게 받아서 뜯는 것처럼 우리는 1월이 되면, 불과 며칠 전까지 12월에 속한 날들을 깔끔하게 과거로 내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참 감사한 일이죠.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1월이 되면 새롭게 더 좋은 신앙이 되고자 마음을 먹습니다. 혹시 오늘 그런 마음으로 활기차게 2022년 첫 예배를 시작하신 분이 있다면 격하게 환영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믿음으로 2022년이 여러분에게 기억이 남은 그런 한 해가 되도록 소망하며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골로새서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묵상본문은 2022년이 되면서 어제부터 요한복음으로 넘어갔지만, 우리가 지난주까지 골로새서 묵상을 했기 때문에 오늘 설교는 골로새서입니다. 주일 설교로는 지난주에 빌레몬서를 다뤘고, 오늘이 골로새서를 다루는 한 주간이죠. 그런데 골로새서는 가볍게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큰 책입니다.
이 보석과 같은 말씀들을 한주에 살짝 다루는 것이 너무나 제게 아쉬움이 커서, 1장의 말씀은 지난 금요일 송구영신 예배를 통해서 다뤘습니다. 그때 설교 제목이 <어두움에서 빛으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제목은 <빛을 들고 세상으로>입니다. 합치면, 우리 교회 2022년 표어가 됩니다.
제가 골로새서를 읽고 표어를 만들었냐? 그렇지 않아요. 원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그런 뭔가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문구가 착 안 붙는 것입니다. 창작의 고통. 그러다가 성탄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말씀을 봤죠.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쌍둥이 서신이라고도 해요. 둘 다 옥중서신이기도 하죠. 이 말씀 자체를 표어로 써도 좋은데, 조금 더 심플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온 것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빛을 들고 세상으로”입니다.
그런데 이 제목을 어떻게 골로새서 말씀의 제목으로 사용하게 되었느냐면, 골로새교회와 저는 사귐의교회가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우리교회를 보면 뭐라고 말해주고 싶을까? “오, 사귐의교회 교인들이여.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해줄 것 같아요.
(골 1:4)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해서 여러분이 품고 있는 사랑을 전해 들었습니다.
(골 1:10)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골 1:11)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저는 마치 골로새교회에게 바울이 쓴 이 편지의 내용이 저에게, 그리고 우리교회에 바울 사도가 권하는 메시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믿음으로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왔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미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도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막다른 길과 어두운 소굴에서 구출하셔서, 그분이 몹시 아끼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아들의 나라. 우리를 하나님이 몹시 아끼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내 삶의 통치자로 그분을 모셔 들이는 순간 우리의 시민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제가 송구영신예배 때 이런 이야기를 나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B.C와 A.D가 생겼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구분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삶에도 동일하게 그 기준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던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전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후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존재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답게 행하라.
그럼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 빛들이 모여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곳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죠. 작은 촛불 하나가 불을 밝혀도 그 주변의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그런데 그 촛불들이 여기 이렇게 모여 있습니다. 그럼 이곳은 어두움이 있을 틈이 없는 곳, 즉 죄악의 통치가 힘을 잃어버리는 곳, 하나님의 통치가 강력하게 드러나는 곳, 하나님의 나라이죠. 교회는 그 나라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기독교에 여러 부정적인 지표가 많이 발표되었지요. 예를 들어, 이런 지표입니다. 종교에 대한 호감도. 1위가 어디일까요? 천주교 51%, 불교 50%. 거의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개신교는 작년에는 28%, 올해는 32%. 조금 올랐지만, 너무 큰 격차로 3위이고, 우리는 원불교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데이터가 눈에 들어왔어요. 매주 예배 등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참여율을 각 종교별로 조사했습니다. 개신교라고 본인을 정의한 사람 중에 매주 예배를 드린다고 한 인원은 51%였습니다. 천주교는 얼마일까요? 25%입니다. 절반이 조금 안 됩니다. 불교는 어떨 것 같으세요? 2%입니다.
기준을 바꿔서 반대로 물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도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비율을 물었습니다. 불교는 71%, 천주교 56%, 개신교 26%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51%가 매주 예배를 드리고, 최소 74%의 사람들이 월 1회 이상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반면 천주교는 25%가 매주 예배하고 44%가 월 1회 이상 예배를 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불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꼭 예배를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여러분 1년에 한 번 종교활동을 하러 가는 사람과 매주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의 삶이 같을까요? 우리와 매우 유사한 천주교만 하더라도 절반 이상이 한 달에 한 번도 예배를 하지 않으면서 나는 ‘믿는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과 연결된 결정적인 질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종교가 내 삶에 주는 영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개신교인은 83%가 삶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습니다. 천주교는 62%가 삶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고, 불교는 45%가 그렇다고 답을 했습니다.
종교를 갖고 있지만, 종교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종교는 과연 무엇일까요? 좋은 책 한 권을 읽더라도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있을 터인데...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도 안 망하고, 성당도 안 망할 것입니다. 망한다면 교회들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짜 사람이 변화되는 신앙은 이곳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골 1:6)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해진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전해졌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서 참되게 깨달은 그날로부터, 여러분 가운데서와 같이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참되게 깨달은 그 날로부터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도 내 삶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변해가고 있다는 고백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저희 교회에 속한 어떤 분의 이야기 가운데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언제부터 하나님을 알았어?”
“엄마는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 다녔어.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신 건 작년에 알았어.”
“어쩐지... 예전엔 아무것도 안 했잖아.”
복음이 우리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혹시 그런 고백이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기억이 분명하게 있거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혹시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분 가운데, 나는 아무런 변화가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어려우신 분이 있습니까? 저는 ‘괜찮다’라고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아직 복음이 선명하게 새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제가 여러분을 잘 돕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여러분 안에 그 복음이 선명해지면, 누구나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저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느릴지라도, 조금은 더 마음을 열고, 주님을 향한 이 여정을 함께 가보자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내 능력으로 깨달아서 아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에 따라 누군가는 하나님을 만나고, 누군가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만날 수도 알 수도 없는 분입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는 우리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께 응답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고, 나와 교제하시고, 그 안에서 내가 그분에 대한 신뢰함과 믿음으로 내 삶을 그분께 의지하게 되면... 우리 안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골로새서는 먼저 그런 경험을 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 사람들에게 그 비밀에 대해서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참 특이하죠. 그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그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기는커녕, 완전히 오해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대적하고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납니까?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가 지식으로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를 찾아와서 굴복시키셨어요. 그가 너무나 많은 기회 가운데서도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초월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눈이 멀었죠. 그랬다가 다른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치유가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삶의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의 삶의 초점이 완전하게 변했다는 것이죠.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보니, 전에 내가 유익하게 여기던 것들은 다 무익할뿐더러 내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해’가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이제는 여기게 되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는 원래 뭔가를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이었어요.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율법에 비추어도 흠이 없을 만한 선한 삶을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 유대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교도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니는데 열정적으로 헌신합니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경쟁하듯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복음을 깨닫게 되자 완전히 변했습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제 그의 삶은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합니다. 경쟁하던 그의 삶에 진정한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주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도 가장 기쁜 일임을 알고 그 일에 헌신합니다.
여러분, 원래 좋으면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다니면서 좋으면 주변에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좋으면 전합니다. “이 좋은 거, 나만 알고 있을 거야.” 이런 마음으로 전하지 않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해지면, 내 삶이 변하고, 주변 사람들도 나와 같아지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특징입니다.
바울의 삶도 그랬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죠.
(골 1:23b)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지금 바울은 어떤 상황이냐면, 로마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고, 이 땅에 그의 나라가 임했다고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말하는 주님은 누구였어요? 황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가 아니라 황제라고 말하는 시대였습니다. 복음(좋은 소식)은 황제에 대하여만 쓸 수 있는 단어였어요. 로마가 지배하는 그 나라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다는 것은 반역입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발언이죠.
바울은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고, 진정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다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것이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기뻐합니다.
감옥에서 괴로움을 당하면서 기뻐해요. 이러면 이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바울이 미쳤던지, 아니면 바울이 진리이고 세상이 미쳤던지.
예수님이 진리이고 세상이 그를 못 알아보는 바보이던지, 아니면 세상의 기준을 못 따라가는 예수님이 이상한 존재이던지. 복음은 그래서 타협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뒤따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음이 중요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눅 23:1) 그들 온 무리가 일어나서,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눅 23:2) 그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9:12) 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하고 외쳤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라 부르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로마의 황제숭배에 대한 반역행위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감당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뜻에 함께하는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교회의 사명과 비전에 대해서 요즘에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으니, 우리가 그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한 삶이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이야기를 요즘에 자주 하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세워지고 살아남는 것이 힘든 시대임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오신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그래서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어느시대에나 하나님의 꿈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이며,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다신론이 대세였습니다. 로마제국 안에는 워낙 여러 나라가 속해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문화와 종교가 다 뒤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황제숭배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종교를 누리는 것은 당시대의 유행이며 가치였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듯 그것을 그냥 문화로 받아들이는 그런 것 말입니다. 광신도와 같이 믿기보다 교양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정반대의 공격에도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적 가르침입니다. 골로새 도시 안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과거 안티오코스 3세가 메소포타미아와 바벨론에서 2,000명의 유대인들을 골로새 지방으로 이주시켰다는 요세푸스의 역사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골로새서보다 100년 앞선 기록에 따르면, 골로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성전세로 20파운드의 금을 수송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전세의 기준에 따라 계산을 해보면, 적어도 11,000명의 유대인 성인 남자가 골로새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절기 준수와 율법 준수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는 이런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골 2:11) 그분 안에서 여러분도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골 2:17) 이런 것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자꾸 혼선을 주는 두가지 장애물이 당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되, 너무 그것만을 주장하지 말라는 혼합종교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여러 신 가운데 하나처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삶을 바꾸는 그런 거대한 꿈을 꿀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의 다른 종교들에서 추구하는 종교생활의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율법중심적인 삶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영향입니다. 이것은 이미 빛이 되었다고 말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내면이 바뀐 것입니다. 존재가 바뀐 것입니다. 외적인 어떤 고행이나 덕성을 쌓음을 통해 내 존재를 바꾸려는 노력은 꾸며낸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종교 중에도 여러 가지 고행을 훈련하기도 합니다. 글쎄요.
(골 2:23)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묵상하다보면, 왕자와 거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왕자와 거지가 서로 옷을 바꿔 입을 수는 있지요. 그러나 외면을 바꿨다고 그 존재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거지는 왕자의 행세를 하면서도 불안하죠. 왜냐하면 존재가 바뀌어서 왕자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존재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Born Again.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일컬어 ‘천국의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말을 ‘시민’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비행기를 타면 어느 나라 소속인지를 묻습니다. CITIZEN을 확인하는 것이죠. 제가 중국에 있어도 제 시민권이 한국에 있으면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을 살아도 이 땅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삶을 나그네라고 비유하고,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공중(SKY)’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골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골 3: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골 3: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어두움에 거하던 옛적의 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이제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이 땅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제가 양육을 1:1로 하면서 참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들었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익숙해진 어떤 개념들이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다행이죠. 지금이라도 그것을 설명해주고 정리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중에 ‘자기사랑’과 ‘자기부인’에 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어디서는 ‘자기사랑’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즉, 이웃사랑을 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데, 내가 사랑해야 할 나가 어떤 나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다고 할 때, 그것은 죄 가운데 살던 나를 의미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전에, 내가 주인되어 살던 삶. 사사기의 표현에 따른다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삶’이 있어요. 이것이 어두움에 속한 삶입니다. 우리는 이 삶을 부인해야 합니다. 부인한다는 것은 그 삶이 더이상 나를 주장하지 않도록 끊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죄와 벗하여 살아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자신에게 속한 죄인 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잘 가”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때 가장 잘 쓰는 방법은 ‘정죄’입니다.
“너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특별히 내가 하나님께 속하기 전의 모습들을 들추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내 본성을 자꾸 부추깁니다. “네 멋대로 살라”라고 말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골 3:7)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골 3:8)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골 3:9a)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사탄이 주는 정죄함, 여전히 나를 죄 가운데 묶어 두려는 그 거짓된 속삭임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끊어내셔야 합니다. 내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을 고백하고 주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행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울립니다. 내 옛사람의 모습은 이제 보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 안 됩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이야.”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를 원래 그런 빛으로 지으셨어요. 잃었던 모습을 되찾은 것입니다. 원래 이렇게 지었기에 이렇게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고 자유하고 평안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어요. 그러나 결단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진리이므로 믿고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골 3:9b)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골 3: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모습은 조금 볼품없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런 나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다시 찾기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나이기에 나도 자랑스럽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로워진 나의 존재를 사랑하십시오. 새사람에 맞게 살아가고자 힘쓰는 나를 응원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또 거짓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시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울이 감옥 안에서 기뻐하고 자유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그런 눈으로 판단하고 바라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든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치유되고 회복되고 사랑이 충만해져 갑니다. 내 안의 그러한 사랑의 결핍들이 치유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내 옆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옛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사랑할 이유가 없는 그 사람이 내 옆에 있을 수도 있지요. 내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지요. 그런데 그도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나도 그의 사랑 안에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사랑은 억지로 하시지 마십시오. 율법적으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아버지의 뜻을 묵상해보십시오. 그가 내 안에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때 순종해보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바울은 로마 시대가 갖고 있었던 모든 구별과 차별과 양극화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자고 말합니다.
(골 3:11)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 3:12)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골로새서가 시종일관 말하고 있는 것은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서나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것을 먼저 경험하며, 그 삶을 살아내는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이 편지는 빌레몬서와 관련이 깊은 오네시모가 두기고라는 사람과 함께 가져가서 전달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있으며, 그의 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갈등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여러분,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함이 있지요. 제가 저를 봐도 저는 마음이 좁고, 저는 사랑하기에 부족하며, 제 안에 저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한 것이 없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제가 이러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목사라는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지 주님의 은혜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들이 드러나면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옛사람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니까요. 그러나 그때에는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더불어 나로부터 나올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함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를 뚫고 나오고자 할 때, 그 앞에 순종하여 통로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한 나를 사랑해주십시오.
그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새로워진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비결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 그분의 그 다스림을 감사로 고백하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살아서 역사하게 하는 것. 그것을 서로 나누며 권면하고 함께 그분의 일하심을 마음 다해 찬양하는 것. 그것이 교회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신비이며,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있으나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의 순종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교회를 세상에 두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나타나길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끝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골 4:5)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골 4:6)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시 흩어져 삶의 자리로 돌아가면, 거기서는 외부 사람들. 즉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향하여 지혜롭게 대하십시오. 그들과의 관계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기회로 선용하십시오.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창문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복음은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고, 나로 하여금 옛사람을 부인하고 새사람을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그 사랑은 내 옆에 있는 이웃을 보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주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그 풍성한 비밀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으로 전해지는 것. 그것이 복음의 결과입니다.
(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우리의 감정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을 위하여, 내가 주님의 사람이 되었기에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경험할 가장 큰 은혜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빛을 들고 세상으로.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율법적인 숙제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행위적 부담감이 아니길 바랍니다. 내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묵상하고, 지금도 내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경험하며, 그분의 뜻하심 속에 여러분이 동행하고, 그분의 일하심 속에서 여러분이 기뻐하며 찬양하는 그 일들이 있기를 저는 바랍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 안에 그렇게 잘 새겨질 때, 내 환경이 어떠하든, 나를 찾아온 고난이 무엇이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있으므로 기쁘고 감사하다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줄로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