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는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나, 교회에 등록하지 않았으나 함께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모두 모이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주일예배는 <매일성경>을 본문으로 설교하며, 현재까지 성경 중 65권을 다뤘습니다. 이번 달이면 66권을 모두 설교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12월이 되면 꼭 한번은 ‘교회’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교회의 비전, 교회론, 사역에 관한 설교를 이 시기에 하는 것은 크게 2가지 이유였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봐야 내가 내 삶의 방향을 다시금 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의 ‘북극성’과 같은 메시지가 이 설교들입니다.
둘째는 이 시기가 사역헌신을 앞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 시기에 사람들과 상의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것을 우선시하라고 부탁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자칫 실수할까 봐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실수란, 나는 사역할 때가 아닌데,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서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사람에 의해서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반대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안에서의 염려와 주고받는 이야기들에 빠져서 하나님의 콜링을 놓칠 수도 있다는 우려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청년들과 설교를 하면서 다뤘던 주제가 ‘확신’과 ‘겸손’이었습니다. 준비되고 훈련되며 경험이 쌓이면 단단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기복도 줄고, 흔들리지 않고,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오죠. 그런데 신앙은 이것만으로 가면 넘어집니다. 우리 안에 필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능력은 나보다 크신 하나님과의 연결 속에서 나의 작음을 알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시시각각 반응할 수 있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특별히 말씀의 시간은 이 설교 전까지 내가 가졌던 나름의 생각과 결단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해체하고 그분이 조립해 가시는 일 하심에 나를 맡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이 없으면 우리의 예배가 실패로 귀결되기 쉽습니다. 모든 것은 평가의 요소이고, 나는 몸은 와 있어도 마음의 귀는 닫혀 있으니까요.
오늘 만약 그런 상태로 이 설교까지 혹시나 이어져 온 분이 있다면, 그대로 이 시간이 흘러가도록 두시지 마십시오. 주님이 나의 참된 주인이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며,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신 분임을 믿으며, 그분께 집중하고 그분 앞에 겸손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제 삶에 있었던 두 번의 중요한 전환점들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일찍부터 교회 안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저에게 기독교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화’ 같고, ‘동화’ 같았습니다. 언젠가 내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게 되면 천국에 간다는 것이 가장 핵심이었죠. 지금 내 삶을 믿음으로 잘 지나가면, 그 대가로 신은 나에게 내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없었던 최고의 세계를 주리라는 것이 제가 이해한 신앙의 핵심요소였습니다.
죽음 너머의 그 세계는 여러 한계와 아픔이 있는 이 땅의 현실과 다를 것이라는 분명한 기대는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은 철저하게 ‘상상의 영역’이었기에… 저는 신화나 동화와 같이 어렴풋한 하나님의 세계를 상상하며, 그를 위해 세상과 다른 결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저의 걸음을 독려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그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신을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 죽을 때 믿음의 고백을 가진 상태로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보니 일찍 신앙생활을 한 저는 전혀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일찍부터 신앙을 갖고, 그것도 아주 특출난 열심과 환경에서 초등학교부터 반강제적으로나마 성경을 2독씩 했던 저에게, 천국까지 통과해야 할 시간이 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불리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꿈은 언제나 969세까지 살았다고 하는 므두셀라가 아니라,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비교적 일찍 365세에 하나님께 갔던 에녹의 모습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세계에 가는 것이었고, 인생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실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저에게 단 한 번도 공부를 잘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고, 신앙에 관해서는 늘 진심이었기 때문에, 저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 삶의 가장 큰 성공을 천국에 입성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순교자는 천국에서도 가장 큰 상을 받는다는 한 설교는, 저의 목표를 ‘오지 선교사’로 바꿔놓기도 했고,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저는 신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란 배경 자체가 부흥회적 영성을 가진 교회였기에, 저는 성경공부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이 저의 목마름이 되기보다는 ‘지성’에 대한 무관심이 되었기에, 신학교를 갔음에도 신학에 대한 공부보다는 ‘무지성의 순수함과 열정’으로 캠퍼스를 휘젓고 다니며 많은 사역을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복음과 신앙에 관한 이해는 막연했으나,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늘 자라왔던 저는 하나님과 연결되기보다는 그 울타리 안에서 그냥 머무는 종교인의 일부였습니다. 그래도 오랜 교회 생활 속에 갖추게된 폭넓은 잡지식으로 일종의 아는 척을 하며 괜찮은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때 수많은 사역을 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제 주변에서도 그런 저를 신앙이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너무나 크고 신실하셔서 그런 저의 시간 속에서도 저에게 다양한 경험들을 허락해 주셨는데, 지금 돌아보면 20대 초반에 제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경험하였던 것들이, 나중에 제 신앙의 중심이 잡힌 뒤에는 모두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위대한 지휘자입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저를 늘 인도하고 계셨음을 지금은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진정한 회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저도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런 저를 부수시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셨던 방식은 마치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를 완전하게 ‘무력하게’ 하시는 경험이었습니다. 높은 데서 떨어지면 더 아프다고, 당시 저는 신학교 안에서 너무 인정받아서 여러 곳에서 리더를 하고 있었고, 회심 전 바울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여기저기서 저를 뽐내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바울은 눈이 어두워지고 다른 사람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저 또한 마치 내가 하면 뭐든지 다 될 것 같은 자만함 속에 있다가,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의 초라함을 보게 된 시간을 마주했습니다. 영육 간의 수치를 겪게 되는 일이 저의 2004년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참 힘들고 고통의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 속에서 저는 제 신앙의 민낯을 보게 되었습니다. 빈수레와 같이 요란했던 나의 신앙. 그 비어있는 중심을 철저히 보게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배움과 무기를 터득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에 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해와 경험이었습니다. 성령님 앞에 엎드리게 되는 시간 속에서 인격적인 그분을 경험하게 되고 충만하게 회복되는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삶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두려움의 시간을 거쳐, 나는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이 하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모습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마치 미꾸라지 몰 듯이 저를 코너로 모시더니, 더 이상 핑계 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저의 항복을 받아내셨습니다. 저는 정말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의 회심이 되었습니다.
회심 후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였습니다. 내가 하지 못함에 대한 인정과, 그 나약함을 하나님의 공간으로 내어드리는 훈련,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일하심에 진짜 나를 맡겨보는 순종. 저도 처음에는 저의 계획과 한계를 벗어난 작은 도전 앞에서도 너무 불안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시작해서 제가 다 이끌어가고 제가 다 결론을 봐야 했던 사람이었기에… 불안함 속에도 하나님을 믿고 나아간다는 것이 너무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에서 배워간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경험들입니다. 내 눈과 하나님의 눈은 다르다는 경험이었습니다. 내게는 일이 잘 안되는 듯 보여도, 때로는 그것이 더 유익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배워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회심 이후로도 완벽하지 않고, 숱한 실수들도 경험하고, 또 혼나고 돌아오기도 했지만, 적어도 2004년부터 저는 비로소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어 가는 연습을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제 신앙의 관점도 자연스럽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이었고, 나의 목표를 이루어 가기 위한 과정으로 신앙생활도 했었죠.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에녹’ 같이 짧고 굵게 이 삶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세계로 가고 싶었다면.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이 ‘므두셀라’라면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다윗’ 같이 주인공이 되고 리더가 되어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요나단’처럼 다윗이 세워져 가도록 돕는 역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내 에너지를 쓰기 싫은 모임이나 관계지만, 만약 하나님이 이 자리에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고, 나를 부르고 계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순종해야지.” 이런 마음도 조금씩 훈련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 회심 이후, 군대를 다녀오고 여러 특별한 훈련을 통해 회심 이후 초기 시간을 잘 다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늦깎이 복학생이 되어 학교로 돌아온 저는, 이전에 멀리했던 신학공부에 매진하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 커졌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캠퍼스 생활과 달리, 혼자서 필요한 수업을 찾아서 듣고,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공부하는 그런 삶을 실제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 늦게서야 신학공부를 제대로 시작했기에, 3학년이지만, 공부를 잘하는 2학년 후배들에게 찾아가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그렇게 신학공부에 완전히 저를 쏟고 싶었죠.
그때 제가 가진 결심은 이제부터는 학교에서는 신학 공부만 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군대가기 전 거의 4년을 다른 사역들에 나를 완전히 썼기 때문에 미련도 없었죠. 그런데 복학 했을 때, 제가 활동했던 그 선교단체는 많이 약화되었고, 이제는 섬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별히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인 지휘자를 할 사람이 도저히 없는 거입니다.
제가 리더를 맡고 싶기보다는, 반대로 이제는 너무 피하고 싶은 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저의 필요에 따라서 뭔가를 하거나 하기 싫은 것을 결정해 왔던 이전의 저였다면, 그냥 외면하고 저의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나는 예전에 할 만큼 다 했다.” 실제로 저는 그 선교단체 사역을 위해서 군대도 뒤로 미루고, 휴학까지도 했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때는 제가 좋아서 미쳐서 했던 것이었죠.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그 단체에 섬겨야 할 자리는 있는데, 헌신할 사람은 없는 상황에 마주한 것이죠. 저도 못할 이유를 대자면 수십 가지도 댈 수 있는 여러 상황이었지만, 내 형편보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자는 마음으로 결국 돌아가서, 그 선교단체의 마지막 음악회를 지휘하고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뒤로는 합창단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는 없어서 블랙 가스펠팀으로 전환했고, 제가 마지막 지휘자가 되었죠.
그때도 사실 저의 상황은 전도사 사역을 처음 시작했고, 대학교에 복학해서 뒤늦게 못했던 신학공부를 해야 했고, 결혼 준비도 해야 했고, 조교를 하면서 돈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사이에 배운 것이 있었죠. “하나님이 원하셔서 나를 부르셨다면, 내가 못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날 도와주실 것이다.” 제가 배운 진정한 그 믿음을 믿고 나아갔고, 저에게 그 시간은 또 하나의 간증들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과 뜻을 뛰어넘어 나아갔던 그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저는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사역적으로 많이 성장했습니다. 제 능력보다 넘치는 것들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가능한 삶을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습니다. 늦은 공부였지만, 성경과 신학을 통해 하나님과 말씀을 알아가는 것이 너무 좋았고, 교회와 학교라는 두 곳의 사역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일하며, 저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배워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전처럼 내가 천국에 실패 없이 가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 ‘선교’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제 삶에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런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신다는 마음이 내게 오면, 내 능력은 미미하고 설령 내 뜻과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할 능력과 마음도 주실 것을 믿고 하나 둘 부딪혀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꿈도 변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드리는 것. 내가 원하는 것에 신앙과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나를 드리는 것. 이제부터 저에게 이것을 내가 원하냐? 원하지 않느냐? 더욱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시느냐? 아니냐? 이것이었습니다.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가면서, 저는 성경의 비전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가졌던 죽음 이후에만 국한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틀을 벗어나, 이 땅에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의 꿈과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저에게 인생과 신앙을 대하는 판이 뒤집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전까지 저에게 하나님의 세계는 단순히 미래일 뿐이었고, 저는 그 미래의 세계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탈락하면 안 된다는 개인의 신앙이 중요했지요.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것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그곳에 가서 만나고 싶었기에, 그런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선에서는 우리가 함께 머무는 공동체,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교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철저하게 ‘배경’일 뿐이었거든요. 거기서 핀셋처럼 나를 뽑아내고 누군가를 뽑아내어 우리가 미래의 어떤 세계로 가서 더 좋은 삶을 사는 것을 꿈꿨을 뿐이었죠.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교회를 바꾸고 살려내기보다, 그냥 이곳의 나쁜 것에 물들지 말고 우리는 스스로를 잘 지켜서 ‘나는 살자’, ‘우리는 살자’는 태도로 교회도 세상도 대해왔던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아픔은 제가 이곳에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할 더 큰 이유가 될 뿐이었고, 저는 그렇게 여전히 나만 아는 이기적인 신앙생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무너져 가는 방치된 집에서 얼른 이사할 것만을 바라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30년간 붙들고 살아온 제 신앙의 근간이 어쩌면 변화되어야 하는 두 번째 도전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 제가 영적 회심을 통해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이 변화는 저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것은 어차피 알량한 작은 것이요, 성령님이 쓰신 성경의 지혜가 아무리 내가 믿어왔던 것과 달라도 그것이 옳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였기에… 저는 당시에는 어렴풋했던 <하나님 나라>를 나와 맞지 않는다고 피하기보다, 더 제대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아예 성경신학을 전공하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성경을 대하는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태도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제가 지금껏 최선으로 연구하고 배워온 성경의 진리를 사모하고 그것을 대충이 아니라 진실로 이해하고 전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저는 만약 주님이 저에게 훗날 지금의 제 생각을 바꾸시는 어떤 것을 주신다면 늘 그것을 따라갈 것입니다. 저의 일관성이란, 제가 했던 주장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 주시는 최선에 저를 맞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종교개혁 때 개신교의 특별함을 계속 고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언젠가 우리가 거부하는 당시 로마 가톨릭처럼 우리의 세계 안에 갇혀버릴 위험이 있으니, 늘 깨어서 점검하며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가자는 의미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매일 변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신앙을 꿈꿉니다.
아마 제가 부교역자 초반부의 마음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저는 개척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개척은 그저 2016년 너무 마음이 아픈 시대적 상황 안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최선의 반응이었을 뿐입니다. 그전까지 33년간 늘 거부했던,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이 개척이었습니다.
또한 ‘풍삶초-첫-기 등의 양육’은 개척 초기에 가졌던 저의 목회관으로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경적 목회만을 꿈꿨고,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프로그램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의 한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찾지도 않았고, 한 선배 목사님이 양주까지 와서 저에게 권하여도 거절해 왔던 것이 하나복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주님이 저에게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 “나보다 하나님이 옳으시니, 그러면 내가 변하고 맞춰야지.” 그렇게 우리교회에 양육이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어디로 갈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만 확실하면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누가 내 삶의 주인인가?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늘 거기에 내 고집을 버리고 나를 드릴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다고 된다고 믿거나, 내가 할 수 없다고 안 된다는 마음만 버린다면…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싸인과, 멈추라고 하는 싸인 앞에 늘 주님께 연결된 자로서 반응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권면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여정에도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회심 전 저와 같은 마음으로 교회 안에서 머물고 있다면 마음 다해 권면하고 싶습니다.
우리 안에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나와 그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내 삶의 주인이라고 나는 인정하는가? 이 회심에 대한 물음은 여러분을 시험에 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탈락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짜로 서게 하려는 질문입니다.
이 고백 안에서 우리가 시작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고, 공동체를 지켜내지 못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신비한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 이 그림입니다. 우리는 다 다릅니다. 각자가 다 고유합니다. 내가 얼마나 유일무이한 존재인지 모르면 날 모르는 것입니다. 같은 존재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같이 무엇을 해 나간다? 누구를 중심으로 할 것입니까? 동물의 왕국처럼 서열 싸움하고 약육강식의 세상을 만들어서 가장 힘센 사람이 주도할 것입니까? 그것이 성경이 가장 경계하는 하나님 나라의 반대편 모습입니다. 교회가 그러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가장 반대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고 주님과 가까워지면 공동체가 함께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 이 부르심과 비전 앞에 먼저 헌신하고 있었던 사람들도 만나고, 나보다 늦게 그렇게 한걸음 다가온 사람도 만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주시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좁혀지고,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좁혀집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공동체가 가진 특성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고전 12: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고전 12: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전 12: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고전 12:9)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고전 12:10)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고전 12: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고전 12: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교회와 사역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성령께 속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에 왔다고 여러분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회심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속하면서 진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르지만 함께해나갈 능력을 그분께로부터 얻고, 또 배우고 훈련해 가는 것입니다. 회심을 중심에 두고 교회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사조직이나 커뮤니티, 세상의 문화와 가치가 가득한 곳으로 변질됩니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주인이 누구인가?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가? 사역은 2차적인 문제입니다.
우선 저는 영적인 상태를 4단계로 구분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역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한다면… 우선 먼저 내가 회심했는지, 아직 안 했는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마음조차도 없다면, 사역을 하시면 안 됩니다. 때가 아닙니다. 아직 성령을 따르지 못하는 마음이면 사역할수록 힘들어집니다.
성령이 아직 그 사람 안에 주도권을 갖지 못하셨는데, 그렇다면 사역하는 이유가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죠. 다른 이유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면 계속 부딪힙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은 회심하여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이 살아 있는 상태, 성령님의 주도권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섬김과 동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내가 회심하지 않았다면, 사역에 에너지를 쓰기보다, 그 회심을 위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회심을 위한 도움들을 받고, 나도 그를 위해 애쓰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그것을 도울 것입니다. 스스로도 그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셔야 합니다.
사역은 나를 누군가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것입니다. 채움이 없다면 당연히 지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아직 회심하지 않았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은, “나도 교회에서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런 부담감 다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그냥 예배에 오셔서 주님을 힘써 알아가시는 것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됩니다. 사역할 열정으로 예배 한 번 더 드리시고, 양육 한 번 더 받으십시오. 그 기초가 잘 잡혀야 나중에 한계가 없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회심의 고백이 있으시다면, 이제 하나님의 필요를 묻고 찾으십시오. 반응해 보십시오. 특별히 초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해 보십시오. 그 마음이 나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셨고, 대체로 은사대로 일해야 기쁨도 있고 열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면, 나의 상황과 나의 관심에 맞게 사역을 고민하고 찾으시고 기도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히 아직 개인의 양육 훈련을 다 받지 않은 분들이거나, 혹은 받기도 하고 언약 가족에도 헌신했지만, 아직 나는 어린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내가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것부터 고민하십시오. 그러나 내 기쁨만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부르심을 기억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힘 주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 사역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실제로 나를 내어 드리는 매우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은 매우 편하지만,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을 훈련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서 변하고, 자녀를 돌보면서 또 변하는 것은 ‘책임지는 관계’가 우리를 훈련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책임지는 관계가 되지 않는다면, 사랑을 훈련해 나갈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사역을 해보신 분은 다 느끼겠지만, ‘책임’이 참 무겁습니다. 사역은 그 과정을 통해 교회의 어떤 부분에서 책임지는 관계를 배워가고, 내가 얼마나 그것을 해 나가기에 무력한 존재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사역을 마치고 “역시 나는 사역 엄청나게 잘해. 내게 불가능은 없다.” 이런 사람 있으면 제게 좀 소개해 주십시오.
각자의 상황이 모두 다르니, 각자의 상황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를 물으며 나아가십시오. 그러나 내가 스스로의 한계를 미리 설정하고, 그 한계 안에 자신을 계속 가두면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신앙에 고갈이 없다면 매년 한 걸음씩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힘쓰셔야 합니다.
회심했지만, 여러 상황 가운데 지쳐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사역에 대해서도 무리한 욕심이나 부담을 갖지 마셔야 합니다. 다만, 내 신앙이 가만히 있는다고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멈춘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채워야 합니다. 내 신앙을 한 해 동안 어떻게 채울지를 결단하십시오. 사역이 아니라면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영적인 상태가 모호한데,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면, 최대한 지금의 자리에서라도 버티십시오. ‘증량’하지 못할 때는 ‘유지’라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채움이 잘 되고 있으며, 영적으로 성장하고 계심을 느끼시는 분들이라면, 이제는 나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집중해야 합니다.
(히 5:12)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 5:13)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히 5:14)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비하신 다음 클래스가 ‘단단한 음식물’과 같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감당하기 위한 결단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을 향한 과신이 아니라, 부르심을 향한 거룩한 응답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태를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이 시기는 교회의 인사 발령이 아닙니다. 서로 눈치를 보시거나, 경쟁하지도 마십시오. 주어질 상황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뜻을 묻고 구하십시오. 그저 내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비전 앞에서, 그의 부르심 앞에서 나를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사역을 고민하는 이유도, 자리를 정하는 이유도 단 하나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잘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임하신 하나님 나라를 ‘오늘 내 자리에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이 시간에 고민합니다. 여러분에게 ‘사역’이 그러하듯, 저에게도 ‘사역’에 대해 재헌신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선 저는 사귐의교회 담임목사 사역에 재헌신했습니다. 그런데 늘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재헌신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개척할 때만이 아니라, 개척한 이후에도 몇 번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던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도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그 상황에 던질 질문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저에게 교회 밖의 사역들에 대한 콜링도 많습니다. 어린 시절 저라면 감투와 영향력을 쫓아다녔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하나님 나라 정신이 없었다면, 저는 제 교회 목회하기에도 바빠서 다른 것은 쳐다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 시대와 이 나라, 한국의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에… 저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편해지자면 아무것도 안 해야죠.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고 싶으니까. 욕심이 아니라 부르심이라면 하나님이 힘을 주실 테니까요.
(롬 14:7)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롬 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이곳에 있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한해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잘 결정하고 잘 보내어 각자의 자리에서 회심이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나고, 성장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귐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결단의 찬양과 기도로 나아갑시다. 말씀을 붙들고, ‘주님, 저는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이번 한 해도, 내 자리도, 내 사역도, 내 쉼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각자 고백하며 함께 찬양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