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주일마다 진행하고 있는 설교의 큰 주제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에 관련된 설교를 6편 전했습니다.
1) ‘신앙의 abc’(회심) + ‘Connect’(연결) = 신앙의 주권
신앙은 주인이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모르게 됩니다. 내 삶을 주께서 다스릴 수 있도록 내 주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 하나님과 소통하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하시며 우리에게 주기 원하셨던 삶을 맛볼 수 있습니다.
2) ‘하잘알’(구원) + ‘당신의 기독교는 너무 작다’(세계관) =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단지 죽어서 천국 가는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삶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어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적 틀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가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기보다 작은 위로를 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은 작지 않습니다.
3) ‘죄의 재해석’(상태) + ‘심판의 재해석’(결과) = 단절의 실상
우리가 창조의 원형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단절 속에서 우리 삶에 나타나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공허함, 비교, 인정 욕구, 관계의 피로 등.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많은 고통은 ‘심판의 현재적 모습’입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신한 우리에게 그 심판의 결과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처벌인 동시에 사랑입니다. 잘못된 선택이 가져다주는 비극을 알아야 옳은 선택을 해나갈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이제 그다음 이야기를 나눠볼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있었는데,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함께 책임질 동역자였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창 2:5)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피조세계 전체가 사람이 그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창조되었으나 작동은 대기상태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피조세계를 돌보고 섬길 때,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창조는 기본적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어가시는 과정입니다. 창조는 엄밀히 말하면 혼돈과 공허 가운데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은 ‘무질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들어오면 ‘질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질서 안에 아담을 두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의 죄는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하고 이탈한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 사건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악의 기준을 벗어나서 자신들의 기준대로 살아가려 했던 인간의 쿠데타입니다.
땅을 돌볼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였던 아담과 하와의 반역은 모든 피조세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창 3:17b)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창 3: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원래 주신 세상과 사람의 고귀한 내면을 혼란케 했습니다. 우선 사람은 죄에 속한 후, 하나님을 피하고 서로를 탓합니다.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어렵고,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상처를 주는 모든 것도 죄의 결과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땅으로 표현되는 피조세계 전체도 죄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 결과 창조 질서 안에서 없었던 무질서함이 나타납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 푸성귀 등은 그것을 표현합니다. 인간의 다스림과 돌봄 가운데 질서 있게 유지되었던 피조세계가 인간의 돌봄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다른 의미로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다스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구원과 회복이 일어난 사람에게 ‘다스림의 권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렇듯 성경이 죄로 인한 깨어짐의 결과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음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런데 피조세계는 이것이 망가진 것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회복을 기다립니다. 현재의 깨어지고 망가진 상황 가운데서도, 신음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롬 8: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 8: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롬 8: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롬 8:22)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이 회복의 주체가 되어,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을 기대합니다. 지금은 세상 전체가 깨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아무리 애써도 완전해지지 않는 삶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원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아프지만, 이 아픔이 끝나고 올 것을 기대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는 아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회복, 다시 세워질 질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그리고 하나님도 이 무너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신음 속에서 하나의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이 ‘최초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복음의 선포 이후 바로 메시아를 주시지 않습니다. 이후로 수천 년 동안을 준비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왜일까요?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저는 이 시간을 ‘그림자의 시간’이라고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복음을 주실 때부터, 약 4000년 후 로마의 지배 아래 예수님을 보내려고 하셨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닫고 배워야 할 시간을 주고자 하셨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이 죄의 문제에 대하여 ‘긴급한 처방’보다는 ‘완전한 해결’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와 ‘용서’와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실체를 이해하는 그림자였습니다. 실체와 비슷하지만, 실체는 아닙니다. 모르면 아예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그것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경험해야 그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시고, 그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맛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누려봐야 사랑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알고, 더 큰 사랑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을 통해 구원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게 하시면서 완전한 구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은 죄를 지은 직후의 행동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창 3:21)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원래 이들이 입고 있던 옷은 무화과 잎으로 대충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곧 말라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죽옷으로 바꾸어 입히십니다. 아시다시피 가죽옷에는 ‘짐승의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약시대에 죄를 해결하는 방식이 됩니다.
동물의 희생제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봐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제사는 노동과 희생이 필요한 중한 업무였습니다. 이는 죄에 대한 엄중한 가르침입니다. 죄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벌레 이야기는 기독교의 위선을 꼬집고 있습니다. 특별히 죄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회개의 자유만 노래하는 기독교의 값싼 회개에 대해서 꼬집는 것이 중심 주제입니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회개는 늘 책임이 있고, 대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는 구약의 제사를 지내며 살아갔던 사람들에게는 피부에 닿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죄 없는 생명이 나 대신 죽어야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신 것, 그 책임을 감당하며 죄로부터 해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 현장은 짐승의 피가 튀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도 사실은 잘 모릅니다. 구약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우리는 죄를 계속 짓고, 제사의 효력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
구약에 나타나는 중요한 구원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 구원 사건이 우리를 죄로부터 온전하게 벗어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대표되는 사건이죠. 방주라는 개념은 지금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구원의 상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교회가 방주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에서 구별된 구원의 장소이지만, 방주에서 나가자마자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즉시 죄를 짓고 무너지고 맙니다. 아이러니죠.
출애굽 사건은 어떻습니까? 400년 이상 이어진 이야기의 방점이 되는 구원 사건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의 삶은 기적과 같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만나를 먹습니다.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하지만 만나를 먹은 세대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무너집니다. 그 기적을 맛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황금송아지를 숭배하고, 툭하면 배신하기 일쑤였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만나 사건을 언급하시며 가르치십니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러자 사람들은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만나와 같은, 아니 만나보다 더 소중한 그 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만나 사건을 경험하며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공급자요 주관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나보다 더 위대한 진짜 만나는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실 예수님을 이해하게 하는 그림자였습니다.
구약시대의 구원이 의미가 적다거나 부족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의 사건들에는 당장의 효력만이 아니라 더 큰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4000년의 긴 역사 안에서 인류가 어떻게 흥망성쇠 하는지 그 싸이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그 교훈이 있기에 우리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한계를 깨달으며, 왜 신약이 필요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해볼 만큼 해봤잖아. 이래도 모르겠어?” 어쩌면 구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번에 <하나님 나라의 도전>이라는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와 같이 복음에 대해서 나누는 것이지만, 조금 더 복음에 집중하여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링반데룽’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링반데룽은 등산객이 길을 잃고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도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멀리서 보면 ‘링반데룽’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구약의 시대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들을 해나가십니다. 가장 작고 약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제사장 나라’로 세워가십니다.
일정 부분 그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 구약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결국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터진 웅덩이를 파다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실패한 나라를 실패한 채로 두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와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는 것까지 구약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구약 내내 작동하고 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의 반복을 보여주는 것이 구약입니다.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류는 4,000년 동안 이 공백을 채우려 웅덩이를 팠지만 실패했습니다. 링반데룽에 빠진 등산객처럼 애썼지만, 그 공백은 오직 창조주만이 채울 수 있는 ‘무한한 구멍’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깨어진 세상, 망가진 피조세계는 구약에서 온전히 회복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의 힘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하고, 이 세계를 바꾸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시간이 구약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평가가 이것이었죠.
(렘 2:13)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구약 4000년의 역사 동안, 하나님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한계가 있음을 몸소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시스템도 영원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질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에 속한 수많은 사람 중 일부는 자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더 열심히 살고, 더 많이 성취하고, 종교적으로 더 완벽해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터진 웅덩이를 더 깊이 파는 행위였습니다. 구약의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어차피 다 안 된다고 생각하며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버렸습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샘으로 삼은 것입니다.
구약은 인간이 얼마나 반복된 실패를 따라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도 구약의 어떤 모습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구약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이 깨어짐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자기 힘으로 해보려는 모든 시도가 바닥을 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마지막쯤에는 그들은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약 4000년의 링반데룽은 단순한 헛수고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한 ‘진통’이었습니다. 피조물이 신음하며 기다려냈던 그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기계처럼 우리를 고치려 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죄의 무게를 체감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갈망하여 돌아오는 ‘인격적 사귐의 회복’을 원하셨기에 수천 년의 임상 과정을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이 구약의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 시대 안에서 묵묵히 신실하게 우직하게 서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주인공은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포기를 모르는 분입니다. 저였다면 끊임없이 배신하고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온몸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지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십니다. 때로는 넘어지게 두십니다. 그래야 그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으니까요. 그러나 기다리셨다가 다시 가서 손 내미시고 함께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주인공은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딤후 2:1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배신하고 죄 가운데 헤매고 있을 때도 늘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시간 동안 각 시대의 상황과 방식 안에서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혼돈함과 무질서의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소망의 말씀을 주시며 하나님의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방법들은, ‘진짜 구원의 실체’가 왔을 때 단번에 그분을 알아보고 붙잡게 하려는 하나님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대부분 구약의 어느 지점, 어떤 사람과 닮아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약의 기록을 통해서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죄로 인하여 깨어진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신음과 같은 세상의 신음은 지금도 가득합니다. 우리의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땅에서는 헛된 것이 나오기도 하며, 구약의 수많은 역사에 등장했던 악인들의 악함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깨어진 세상을 보고, 연약한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약이 주는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어느 시대나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지키시며, 길을 내어주셨던 하나님이 우리와도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고대합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공허와 신음이 그치고 온전히 회복되는 그날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구약 4000년의 결론은 단 하나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구원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가뭄이 든 논에 양수기로 물을 조금 대주는 것은 당장은 도움이 됩니다. 벼는 살아납니다. 하지만 가뭄 자체는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신 일이 그렇습니다. 살려는 주셨지만, 완전히 살려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그 작은 물줄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기다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4000년은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방황이 아니라 준비였습니다. 실패가 아니라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도 이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나는 안 된다.” “내 방식으로는 안 된다.” 혹시 지금도 내가 더 잘하면 될 것 같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해결될 것 같고,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것 같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그 길로는 끝까지 가도 결국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된다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고백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나는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이 고백은 무너짐이 아닙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이 고백이 진짜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그 자리에서, 내가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비로소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혹시 지금 삶의 어떤 영역에서 계속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있습니까? 관계일 수도 있고, 감정일 수도 있고, 죄의 습관일 수도 있고, 내 안의 공허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이 고백을 드리십시오. “주님, 저는 안 됩니다.” “주님, 제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십시오. 그때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