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시겠지만, 저희가 7-8월 두 달에 걸쳐서 이사야 전반부를 보았습니다. 이사야의 전반부의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웃-요-아-히’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분열왕국 시대에 대하여 다루는 이 기회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 시대를 잘 정리하면 선지서를 이해하는 배경을 만들어가는 것이거든요.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뚝심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 가길 바랍니다.
(대하 26: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의 시대에 이사야가 등장하지만, 사실상 웃시야가 죽던 그 해에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기에 이사야서의 배경은 대부분 아하스-히스기야 시대였습니다. 요담은 역대하에서도 단 9절로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희도 유다의 11대왕인 요담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1대왕 요담
11번째 왕인 요담에 25세에 왕이 됩니다. 이때가 아버지 웃시야가 나병으로 인해서 통치를 못할 때에요. 아버지는 격리된 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게 10년이나 가게 될 줄은 몰랐겠죠.
어쨌든 요담은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았어요.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좋았던 모습을 본받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았고, 또 아버지의 실패로부터 배워서 성전을 모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무섭게 타락해 갔다고 기록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데요.
(왕하 15: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왕하 15: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그는 자신은 옳은 길을 가지만, 다른 사람들도 함께 옳은 길을 가도록 적극적으로 개혁하고 이끌어가는 것에 부족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왕권을 주신 것은 그 공동체를 올바르게 이끌 책임감을 주신 것이지요. 자기만 잘한다고 칭찬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개혁 의지가 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면, 왕으로서의 통치는 평안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웃시야가 했던 것처럼 여러 성채와 망대를 짓고 성벽을 세웁니다. 암몬과의 전쟁에도 승리합니다.
그가 16년간을 통치했다고 하니 41세가 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16년 중에 10년은 공동통치이고 6년만 단독 통치를 했으므로 성경에서 언급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번외로 다음 왕인 아하스의 년도까지 자세히 분석해보면, 요담의 통치 16년 뒤에 4년 정도는 아들과 공동통치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20년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왜 죽었는지, 그의 삶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어요.
그런데 주목할 한 가지 언급은 있습니다. 그의 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표현인데요. 메시지 성경의 표현을 빌려서 27장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담의 능력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단호하고 한결같은 삶에서 나왔다.”
저는 제 삶의 평가가 이러했으면 좋겠어요. 순종하려는 단호함과 한결같음. 결단이 있고 또 지속력이 있는 이러한 요담의 모습은 우리에게 짧지만 교훈을 주는 모습입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로 행하였고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묻히게 됩니다.
12대왕 아하스
요담의 아들로서 20세에 비교적 빨리 왕위에 오릅니다. 아버지가 빨리 죽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아버지의 통치 횟수와 같이 16년을 통치한 것으로 나오는데, 4년 정도는 공동통치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빼고 16년입니다. 아버지와 동일하죠. 그런데 아버지보다 기록이 3배가 넘습니다. 왜냐면 통치 16년간 내내 나쁜 짓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요담은 설명할 것이 없었어요. 짧게 묘사하고 그가 잘한 것 하나 강렬하게 적으면 끝납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너무 잘못한 일이 많아서 귀환 백성들과 우리들에게 반면교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대하 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아버지 요담을 닮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은 ‘부전자전’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선한 왕에게서 악한 왕이 나오기도 하고 악한 왕에서 선한 왕이 나오기도 합니다. 요담이 선했다면 아하스는 악하고 다시 히스기야는 선했다가 므낫세는 최악의 왕으로 꼽힙니다.
이것은 어떤 분들에게는 경고가 되고, 어떤 분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상숭배를 했어도 나는 좋은 신앙인이 될 수도 있어요. 걱정 마세요. 반대로 여러분이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여러분 자녀가 그 신앙을 꼭 물려받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후견인 역할을 해야겠죠. 그러나 반드시 신앙은 자기 안에 변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신앙이 없었어요. 그냥 그의 좌우명은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간다” 였습니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을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길을 따라갑니다. 다시 바알 신앙을 따를뿐더러, 신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섭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이죠. 이사야서를 보면 여호와께 예배도 드리는 혼합종교 형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그냥 이것저것 다 믿는 것입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예루살렘 서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하스는 자기 아들들을 불살라 제사를 드립니다. 인신제사죠. 이게 무슨 일인가? 당시 이방인들의 흉악한 관습을 따라한 것입니다.
(대하 28:3)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을 하고,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는 행위였다.
아마도 이방 민족들이 롤모델이 되었나보죠. 이방 민족들이 이런 행동을 하니까 자기도 이런 행동을 합니다. 요담은 하나님을 향해 단호한 결단이 있었는데 아하스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하스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위만 어쩌면 그렇게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이런 아하스를 그냥 보고 계실 리 없죠. 우리가 이사야 때 배웠던 배경 지식이 필요한데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이 원정에 나서자,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의 나라들은 대부분 항복하고 조공을 바쳤지만, 아람의 왕 ‘르신’을 중심으로 앗수르에 맞서는 ‘반(反) 앗수르 동맹’을 구축합니다. 북이스라엘도 여기에 동참하죠. 그리고 남유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아하스가 거절을 합니다. 그리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유다 왕을 쳐서 무너뜨리고 왕을 교체하려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때 아하스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사용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그 과정을 담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만 기록합니다.
(대하 28:5)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아하스의 죄로 말미암아 유다가 참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아들과 관리들도 죽습니다. 무려 20만 명의 사람이 북이스라엘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이곳에서도 일하시죠. ‘오뎃’이라는 예언자를 북이스라엘에 보내서 그들을 설득합니다. 남유다가 전쟁에서 진 것은 하나님의 심판인데, 주제넘게 형제의 나라를 종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꾸짖은 것이죠. 이것을 북쪽의 지도자들이 듣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남유다로 돌려보냅니다.
참 하나님이 바쁘시죠. 혼도 내시고 또 구원도 하시고.
아하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한 번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도움을 구해야 할 하나님께 오히려 대적합니다. 그리고 대적해야 할 이방 왕들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에돔의 위협 앞에서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공격을 당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앗수르에게 엄청나게 조공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우상만을 찾습니다. 앗수르가 잘 나가니까 앗수르의 제단을 그대로 카피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훼손하고 거기에 이방 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어 우상숭배를 합니다.
메시지 성경은 그의 태도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하스의 삶이 먼저 망가지더니, 결국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는 시장에 나와 있는 신이라는 신은 모조리 숭배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셨다.”
여러분,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고.. 두 마음 혹은 여러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나님도 믿고 다른 것도 믿는다고 하나님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과 동일하게 취급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만 하십시오. 전심으로. 그것이 우리가 아하스를 통해서 깨달을 이야기입니다.
아하스는 결국 왕들의 묘지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역사의 평가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오늘도 두 가지 길이 있는 것입니다. 역대기가 항상 말하는 길이죠. 다윗의 길이 있고,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다른 것을 위해 쏟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이 아니라면 나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는 항상 결단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교육하는 책이죠.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이 오늘 말씀 안에서 깨닫는 것이 있으시다면 그 교훈과 그 책망을 통해 배우십시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한 길로 행하며 선한 삶을 다짐하기를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의 길을 갔던 한 왕을 우리는 오늘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려고 힘썼던 요담. 그는 그것을 위해 단호한 결단을 내릴 줄 알았고 한결같은 지속성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일 것입니다.
반면 아하스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을 이뤄줄 하나의 옵션일 뿐이었습니다. 자기 눈에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 그것을 선택하는 그런 삶이 아하스였습니다. 하나님을 도구로 삼는 신앙,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결코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이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출신과 배경이 어떠했든지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집이 어떠했는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결국 지금 내가 나의 갈 길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과 결단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그 삶을 살아갈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여러분이 저와 함께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정하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 모습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나는 전혀 선한 사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삶이 주님께 드려지길 바랍니다. 주님 나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마음을 내게 주시고, 나로 하여금 주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함께 고백하고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