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말, 안내 | 0:00
소개 |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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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하나님은 정말 공정하신가?"
1) 전쟁이나 억압, 목숨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겉으로 우상숭배를 하거나 신앙을 부인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회개했던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 4:40
2) 조선시대의 많은 민중처럼 기독교를 접할 기회조차 없이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단지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었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면 과연 공정한가요? | 13:28
3) 개신교 입장에서 천주교, 그리스 정교회, 유대교, 이슬람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들도 ‘하나님’을 믿는데 지옥에 가나요? | 17:54
4)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완전히 공정하게 판단하신다면, 굳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선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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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착한 비기독교인과 나쁜 기독교인"
5) 주변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도 정말 바르고 선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열심히 다니면서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고요. 이럴 때 도덕적인 비기독교인과 비도덕적인 기독교인 가운데 누가 더 옳은 건가요? | 26:15
6) 그 사람의 행동이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건가요? |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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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미워하는 마음도 죄인가?"
7) 특정한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인가요? | 33:46
8)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신념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상처를 주는 사람을 보면 정말 미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 38:42
9)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먼저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괜찮은지, 반대로 겉으로는 잘해주면서 속으로는 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미운 사람에게 오히려 잘해주어 곤란하게 만들려는 마음) | 45:12
10) 목사님도 지금까지 목회하시면서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거나 미운 사람이 생길 때가 있습니까? | 4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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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마음이 편하면 하나님의 뜻인가?"
11)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기도하면 흔히 “기도해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지, 제가 원래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서 편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결정해도 될까요? | 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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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멘트 _ 재정관련 질문들 안내 | 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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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주식과 투자는 불로소득인가?"
12) 기독교인이 주식을 하는 것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불로소득’이기 때문에 멀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정당하게 번 돈으로 주식에 투자하고 수익을 얻는 것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은행 적금 이자와는 무엇이 다른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투자가 어느 순간부터 건강한 투자가 아니라 탐욕이나 투기가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 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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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 "어디까지 누리는 것이 괜찮은가?"
13)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는 가능한 많이 나누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행이나 맛있는 음식, 좋은 차나 집, 취미 같은 것을 누리는 것은 어디까지 괜찮을까요? 어디까지가 감사한 누림이고 어디서부터가 사치인지 궁금합니다. | 1:06:27
14) 재정을 절제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의 자랑거리가 되거나, 정죄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조심해야 할까요? | 1:13:55
15) 헌금을 할 때 꼭 유기명으로 해야 할까요? 왜 헌금 봉투에 이름을 적는지 단순히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 1:21:45
16) 목사님은 실제로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절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 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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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 1:33:29
<질문있어요 _ 내용 정리>
신앙의 질문 앞에서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이번 깊은예배에서는 성도님들이 보내주신 질문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하는 <질문있어요!> 시간을 가졌다.
질문들은 단순한 성경 지식보다 실제 신앙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질문에 하나의 간단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고 앞으로 비슷한 문제를 만났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분별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했다.
1. 하나님은 정말 공정하신가?
첫 질문에는 여러 문제가 함께 담겨 있었다.
박해 속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부인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유대교와 이슬람, 천주교와 정교회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생각할 때 두 개의 기둥을 함께 붙들 필요가 있다.
첫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역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이 선행과 종교적 열심을 통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둘째, 그 구원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완전히 의롭고 선하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어떤 시대와 환경에서 살았는지, 무엇을 알 수 있었는지, 어떤 기회를 받았는지, 그 앞에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우리보다 완전하게 아신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서 기억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공정하거나 더 자비로울 수는 없다.
박해와 배교
성경은 죽음이 두려우면 적당히 신앙을 부인해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실패했다고 해서 은혜의 문까지 닫혔다고 말할 수도 없다.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다시 찾아오셔서 회복시키셨다.
우리는 순교자의 믿음을 지향하지만, 실패한 사람에게도 다시 복음을 전한다.
우리의 연약함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크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성경은 역사 속 특정 개인의 최종적인 구원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로마서 1장은 창조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로마서 2장은 사람에게 주어진 양심을 말한다.
고넬료 역시 베드로에게 복음을 듣기 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고 구제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미 그의 삶에 일하고 계셨지만, 동시에 베드로를 보내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너무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말하는 곳까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신뢰한다.
그렇다면 왜 전도하는가?
전도와 선교는 단순히 누가 천국과 지옥에 갈지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회복을 경험했다면 사랑하는 사람도 그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전도와 선교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2. 착한 비기독교인과 나쁜 기독교인, 누가 더 옳은가?
비기독교인이 정직했고 기독교인이 거짓말했다면, 그 일에서는 비기독교인이 옳다.
“그래도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내가 더 낫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교만이다.
그러나 행동의 옳고 그름과 구원의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
구원은 도덕 점수의 상대평가가 아니다.
동시에 “나는 예수 믿었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한 뒤,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선행은 구원의 뿌리는 아니지만 구원의 열매다.
사과가 열려서 사과나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과나무라면 결국 사과가 맺힌다.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이 와서 변화되어 가는 공동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현재 몇 점인가보다 방향이다.
나는 죄를 변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회개하고 있는가?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선한 삶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지만, 참된 구원은 반드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3. 미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상처를 받으면 분노와 미움이 올라올 수 있다.
에베소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감정이 올라오는 것 자체와 그 감정에 지배되어 죄를 짓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불행을 즐기고, 계속 복수를 상상하고, 상대의 존엄까지 부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미움은 내 영혼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를 볼 때 따뜻한 감정을 즉시 만들어내라는 명령만은 아니다.
상대가 악을 선택했다고 나까지 악의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는 순종도 사랑이다.
잘못을 행하는 사람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까?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계속 피해를 입고 있다면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분별이 아니라 복수와 최종 심판의 자리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고 책임지며 회개와 회복으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 사람의 악 때문에 저까지 악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 사람이 망하는 것이 제 기쁨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파멸이 아니라 악의 종식과 사람의 회복이어야 한다.
또 마음이 아직 따라오지 않더라도 옳은 행동을 먼저 해야 할 때가 있다.
욕하고 싶지만 욕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지만 복수하지 않고,
따뜻한 감정이 없더라도 옳은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때로는 행동의 순종이 감정을 데리고 간다.
4. 마음이 편하면 하나님의 뜻인가?
교회에서는 종종 “기도해보고 마음이 편한 쪽을 선택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뜻을 찾는 절대적인 공식으로 삼을 수는 없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다시스로 가면서도 배 밑에서 잠들 수 있었다.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며 십자가를 향하시면서 겟세마네에서 심히 괴로워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하다 = 하나님의 뜻'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몇 가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첫째, 말씀.
성경이 분명히 죄라고 말하는 일을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나라의 방향.
이 선택이 사랑과 진실, 정의와 섬김의 방향인가?
아니면 자기과시와 욕망과 탐욕의 방향인가?
셋째, 지혜와 공동체.
신앙은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에 따른 현실적인 책임과 결과를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특히 나를 사랑하지만 내 욕심에 무조건 동의해주지는 않을 사람에게 조언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평안.
말씀과 기도, 지혜와 공동체를 통해 충분히 살핀 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했다.
평안은 첫 번째 기준이라기보다, 걸어가면서 확인하는 마침표와 같은 참고자료다.
5. 그리스도인은 주식을 해도 되는가?
주식 자체를 죄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 경제에서는 직접 노동해서 임금을 받는 것만이 경제활동은 아니다.
자본을 은행이나 기업에 제공하고 그 경제활동의 결과를 함께 나누는 방식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직접 노동해서 얻지 않은 수익은 모두 부도덕한 불로소득이다.”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투자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몇 가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가 투자하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고 있는가?
가정의 기본적인 책임이 무너지지 않을 범위의 돈인가?
빚까지 내면서 욕망을 확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가의 등락이 내 기분과 예배와 가정과 일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빨리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나를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더 중요한 질문은
“주식을 해도 되는가?”만이 아니다.
“이것이 나에게 유익한가?”
“이것이 덕을 세우는가?”
까지 물어야 한다.
6.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 누려도 되는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사치의 금액 기준을 만들기는 어렵다.
소득도 다르고,
자녀와 부모 부양의 상황도 다르고,
건강과 주거환경, 직업도 다르다.
그래서
“차는 얼마까지.”
“여행은 몇 번까지.”
라고 일률적으로 정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금액보다 가치와 원리와 방향이다.
그러나 기준 없이 살라는 의미도 아니다.
돈은 인간의 욕망을 강하게 자극하는 영역이기에 미리 안전선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어디까지 투자할 것인가?
어떤 빚은 지지 않을 것인가?
큰 소비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저축과 나눔은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부부라면 이런 원칙을 함께 세울 필요가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누릴 수도 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여행하고,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림과 나눔이 함께 가고 있는가이다.
7. 내 재정에는 철저하고, 다른 사람의 재정에는 관대하게
재정을 배우면서 오히려 율법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내가 절제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자동차, 집, 여행, 소비를 보면서 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기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전체 형편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기억할 원칙이 있다.
나에게는 철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라.
중형차를 살 수 있는 사람이 신앙적인 결단으로 경차를 선택했다면 좋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나는 이 정도로 절제하는 사람이야.”
라는 신앙적 자랑이 되고,
좋은 차를 타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차는 작아졌는데 자아는 더 커질 수도 있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그래서 덜 쓴 돈으로 무엇을 했는가?”
청지기 정신은 단순히 덜 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8. 헌금에 왜 이름을 쓰는가?
헌금할 때 반드시 이름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으로 드릴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모르셔서 봉투에 적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가 유기명 헌금을 사용하는 데에는 재정의 투명성이나 기부금 처리 같은 제도적 이유가 있고, 목양적인 이유도 있다.
재정은 신앙과 전혀 무관한 사적인 영역이 아니다.
예수님도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다른 사람을 섬기고 가르치는 책임을 맡는 사람이라면 물질에 대한 주권도 하나님 앞에서 훈련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다.
많이 드리는 사람이 더 좋은 신자라는 뜻도 아니다.
헌금 기록이 신앙의 성적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 재정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실제 삶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이다.
9.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가난인가, 부유함인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지나면서 한 가지를 배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형편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내 삶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만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고,
또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가난해지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풍족한 때에는
“왜 하나님이 이것을 내게 맡기셨는가?”
를 묻고,
부족한 때에는 돈 때문에 믿음과 인격까지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가난도 부유함도 아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돈이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분별하는 힘’
이번에 나눈 질문들은 서로 많이 달랐다.
구원, 선한 삶, 미움, 하나님의 뜻, 주식, 소비, 헌금.
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자꾸 간단한 공식을 원한다.
“이 사람은 천국, 저 사람은 지옥.”
“화가 났으니 죄.”
“마음이 편하니 하나님의 뜻.”
“주식을 하면 세속적.”
“적게 쓰면 믿음이 좋다.”
그러나 실제 신앙생활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모든 상황의 정답을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성경과 복음 안에서 분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선택은 하나님 나라의 방향에 맞는가?
나는 지금 무엇에 지배받고 있는가?
그리고 이 자리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갈 것인가?
그 질문을 계속 던지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훈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