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제가 마지막 설교했던게 8월 30일이었으니까네 지금 한 40일 정도가 지났기 때문에 잠깐 우리가요 이야기를 들어가기 앞서서 우리이 흐름과 아, 그전의 내용을 한번은 좀 살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올해 우리는 어, 맨 먼저 15편의 설교로 첫 번째 시리즈를 했습니다. 무슨 시리즈였지 기억하시나요? 네. 벌써 이렇게 다 까먹으셨죠? 네. 신앙 기초 시리즈였습니다. 신앙 기초 말 그대로 우리가 믿는 신앙,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지 그 토대를 하나씩
살펴봐서 15주 동안 창조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까지 즉 우리가 하이 말하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15편의 설교로 여러분과 주일마다 다뤄왔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이어서 시작한 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사실은 연결되는 복음에 대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지만 일부러 이름을 달리 한 것은 그전에는 복음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두자면 이제는 우리가 그 복음을 가지고 어떻게 삶을 살아낼 것인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이 시리즈에서는 우리가네 편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맨 뭐죠? 첫 번째 밑에 있는 하얀 글집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새로운 삶은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 무엇인가? 아,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라는 얘기였죠. 두 번째 하양시 읽겠습니다. 성령의 어, 그리고 성령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새로운 삶이면 그럼 어떻게 그 관계가 되는가? 우리가 성령의 주도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라는 얘기 있습니다. 그다음 이야기도
읽겠습니다. 성령의 뜻에 감사할 때 살아. 그럼 성령의 주권으로 인정하고 살아간다는게 뭔가 어라고 하면 그 하나님의 뜻과 발견의 진리 앞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 그렇게 할 때 그 믿음의 반응을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또한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 자라가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지막네 번째 읽겠습니다. 네. 어 그러나이 삶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그분께 반응하는 것, 우리가 그분에 향한 실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가는게 아니라 우리도 해야
될 몫이 당연히 있지만 더 근구적으로 그분이 하시는 것 그분이 하기에 또 나도 하는 것이 안에서 나아가는 동행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살펴봤습니다. 우리 에별로도 어떻게 본지 모르겠지만 어 암송 구절을 제가 이제 하나씩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두 개의 구를 암송했는데 지금 바로 시키면 시험에 드시겠죠? 네. 그래서 일단 기억을 되살리겸 한번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주절 시작 무릇 하나님 자마다 세상에 세상에 있는 승 이것이라 너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부르신 것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고하게 하시니네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사실 아 같이 암송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말씀을 갖고 있는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말씀에 외우기 하고 있으니까 오늘 말씀은 더 쉬우니까요. 에클레시아에서 오늘 모임하실 때 한 번 더 암송하시고 에클레시아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개인적으로 한번 암송하면서 오면 따라가면 더 아마 그 여정에 영적 여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
여기에이어서 그동안 새로운 세이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자라가는지 배웠다면 오늘은 조금 다른 지문을 가지면서요 다섯 번째 이야기를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이런 거죠. 어,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라고 분명히 배웠고 알겠는데 그럼 도대체이 새로운 삶 무엇이 새로워졌다는 것인지 아, 이거에 대해서 오늘 한번 살펴보려고 하는 겁니다. 왜냐면 교회에서 아무리 내가 새로운 삶에 대해 들어도 우리 여전히 같은 세상을 살고 여전히 죄 유혹과 실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그냥 정신 승리인가 거짓일까? 아니면 내가 이전보다 조금 더 친절해지고 조금 더 성실해지고 경건해지는 삶을 사는 것인가? 물론 우리가 나타난 그런 어 변화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여러분과 오늘 계속 얘기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선한 변화들은 새로운 삶의 열매로서 드러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삶의 중심이나 새로운 삶 시작된 근거는 아니란 얘기예요. 자, 회심의 회심의 가장 큰 초점은 내가 주인되어
살아는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이 중신됨, 하나님이 주인된 하나님이 왕이신 삶으로 나의 삶의 축이 바뀐 거예요. 새로운 삶 이전에 회심이 있는 거고 회심한 삶이 새로운 삶이니까요. 자, 그러면 그로 인한 변화는 따라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자칫 사탄이 파놓은 함정에 한 번 더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제가이 얘기를 드리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에서도 그렇고 변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할 것은 변화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을 놓칠 수도 있어요. 나에게 나타난 회심한 이후에 나에게 나타난 어떤 변화들 굉장히 중요해요.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근데 내가이 변화를 전부라고 여기면 또 다른 오해에 빠질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변화할 때 만약에 잘되면 나에게 자랑할 것이 생기고 안 되면 낙심하게 됩니다. 사실이 두 경우가 경우에 모두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뭐냐면 우리 자신인 거예요. 회심이 자꾸 나를 버서 내가 변했나 안 변했나 이렇게 우리의 시선을 두고 있는 거예요. 이게 분별할
때도 필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러나이 시선이 우리에게 때로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느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보다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고 나의 새로운 삶 여호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어, 사랑을 하면 그에 걸만한 행동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예. 근데 요걸 분리해서 어떤 행동만 보면서 행동 기준으로만 사랑의 여부를 따지면 그러나 그것은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과 유사한 행동이
있다고 다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 또한 놀랍게도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변화하기도 해요. 때로는 자기 중심성이 더 강해서 더 변화하기도 합니다. 변화는 중요하지만 변화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고린도후서 5장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다루고 있어요.이 말씀은 우리가 받은 복음과 그에 따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 것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선언이 등장하는데 17절이죠.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 있으면 새로운 네. 여러분 너무 잘 아는 말씀이잖아요.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노력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이야기가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인지 앞에서부터 고린도서 말씀을 한 절씩 오늘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부터 21절까지 볼 텐데 14절 말씀부터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주의 사람이 그를
위하여 시간에 보면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셨으니 모든 사람이 됩니다. 네. 오늘 우리가 정말 한 절씩 시간 한 잔씩 볼 거니까 이거 읽을 때 말씀을 잘 이해하면서 따라오시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분이 책은 고린도 후서예요. 고린도 후서의 배경을 여러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편지에 쓰고 있는 지금 바울의 마음은 모든 바울의 편지 가운데서 가장 마음이 무너져 있는 상태예요. 마음이 굉장히 아픈 상태에서이 편지를 섰습니다. 왜냐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자신이 저 수탄 고난 가운데서 그 땅에 가서 고린도교회 복음을 고린도라는 도시에 복음을 전하게 있었고 그래서 세워진 교회요.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복음을 열심히 전했고 회심을 도았고 목양도 했습니다. 그리고나 바울이 다른 지역의 선교를 위해서 이곳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 어떤 일이 하냐면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오해하고 비난하는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모든 기독교 공동체, 복음 공동체는 늘 사탄의 이러한 공격이
있죠. 그로 인해서 그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해서 바울이 진짜 목회자 맞아? 바울이 진짜 맞아. 이런 의심까지 하게 되었고 그가의 그가 했던 말과 행동에 문제를 삼기도 했습니다. 바울 보면 뭐 말도 별로 못 하는 거 같고 뭔가 문맥도 안 맞는 거 같고 이런 얘기가 실제 나와요. 무엇보다이 문제에 가장 심각한 건 뭐냐면 그가 전했던 바울이 나눴던 복음의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일들이이 안에 생겨난 거예요. 성경에는 이런 거를 다른
복음이라 그러잖아요. 복음과 다른 복음은 엄청 큰 차이가 아니라 사실 요렇게 가야 되는데 조금 이렇게 하면 아까 함정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때로는 아시겠지만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공격하기 위해서 메신저를 공격하는 형태가 많이 있죠.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기면 그가 전한 진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니까 바울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아픔 마음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인간적인 자기가 어쨌든 이들과 관계했는데
거기에 대한 인간적 아픔도 있지만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아디지 못하고 이제는 흔들리고 있는 그 복음에 대한 그 마음도 있는 겁니다. 근데이 상황에서 바울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이 어떻게이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그것이이 첫 줄이에요. 한번 읽어 봅시다. 시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에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사실이 부분에서 잠식이 멈추게 됐어요.
여러분, 교회에서 이렇게 우리가 한해 사역을 가잖아요. 그럼 요쯤 한 10월 11월쯤 되면 사역하다가 지치는 사람들이 이제 생겨나요. 여러분사 끝나고 이제 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지치는 것이 우리의 뭐 사용 리듬상 혹은 나의 어떤 개인적인 상황상 발생할 수 있고 아까 관계적으로 어려우게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힘은 어디서 올까 무엇으로이 집을 넘어설 수 있을까 사실 저도 그런 고민을 요즘에 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사실 제가 이제 10월 한 지금 두 주 동안 정말 단 하루도 모시다 보니까 저도 막 이게 인간적으로 어제 지치더라고요. 아 내가이 상황에서 어 어떻게 이걸 할까 막 이런 고민 가운데 있을 때이 말씀이 탁 다가왔어요. 오늘 본문을 대답하고 있거든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그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지친을 있었겠지만 그 붙들고 그들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대 초점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대 초점이 사람의 인정이 아니었어요. 사역의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그대 초점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어요. 그리스랑이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교회를 하다가 한계에 부딪히고 고갈되었던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마 아실 거예요.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 인풋이 건강하게 유지되면 우리가 내가 할 수 없는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때로는 많은 사역을 해도 괜찮습니다. 근데 내가 얼마나 많은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라 나에게 들어오는이 통로 나에게 들어오는 인풋이 흔들리면 우리가 사역이라는 아웃풋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 조절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이거를 내가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의 문제예요. 바울이 사람들의 시선 인정 결과에 집중했다면 그는 고린도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을 거예요. 배신감에 그는 정말 몸을 어 이렇게 몸소리를 떨었을 겁니다. 그는 고갈됐을 거예요. 그런데 그는 자신의 오해하고 자신에게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서요. 한도 다가서서 복음으로 그들을 양육하고자 하는 것이 고린도 후손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이 사랑은 그가 느끼는 단순히 감정이 아니었어요. 그가 붙들고 있는 그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지라는 분명한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에 대한 확신이 그를 붙들어 주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채우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다음 고백이 이거죠.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바울은이 한 사람이 죽었는데
모든 사람이 죽은 셈이다로 말합니다. 즉 그분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이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대표성이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랑은 그냥 한 사람의 정치적인 혹은 어떤 권력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죽음 안에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죽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 앞에 바울이서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사랑으로 오늘도이 편지 쓸 수 있고 사역할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나아가고 있어요. 그다음 9절이어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을 위하여 주신 것을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시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신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렇게 구원 사역을 하셨던 이유와 목적을 설명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모든 일의 목적은 뭐냐면 우리의 삶의 방향, 삶의 목적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이 뭐냐면 여기 나오는 거죠.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던 우리의 삶을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더 고귀한 사명을
위해서, 부르심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바꾸어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아, 새로운 삶은 우리 삶에 뭐 선한 행동이 몇 가지 나오기 시작한 것. 이것에 대한 초점이 아닙니다. 내가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뀐 거예요. 중심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뀌지 않으면 설령 나에게서 아무리 칭찬받을 만한 좋은 행동이 나와도
그것만으로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그 새로운 삶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내가 나의 회심을 점검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회심한 삶을 살고 있나? 그들을 잘 이렇게 권면하고 돌보기 위해서 먼저 물할 것은 이것입니다. 내 삶의 중심이 이렇게 바뀌었는가? 지금 그래서 내 삶의 목적과 방향 자체가 이전엔 나에게 있었다면 시선을 바꿔서 이제는 하나님 그리스도 이것을 위한 삶으로 내가 변화되었느? 이전에 내가 삶의 주인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했어요.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지가 중요했어요. 무엇이 나를 만족하게 하는지가 내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사람을 사기 때도이 사람과 내가 지금 시간을 보내는 유익한가 아닌가? 이게 회심하기 이전에 내 삶의 모습이 모두가 그랬어요. 회심한 이유 뭡니까? 지금 하나님이이 사람과 나가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하는가? 지금이 사람이 좀 나에게 불편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금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이 사람에게 하고 싶은게 있다면 다가서는 거죠. 지금 바울의
도가 그것이 아닙니까? 우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불렀던 것은 이것을 말하는 거예요. 중심이 바뀌고 그래서 다른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그분과 함께 그분을 위해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하고 있어요. 이것이 무조건 그러니까 교회에서 일을 더 많이 하시고 뭐 종교적인 일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시고 이런 말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제가 어 고등학교 뭐 청소년
때 청년 때 되게 지금도 동의하고 있는 좋은 표현이 이거였어요. 한번 따라볼까요? 은혜받은 사람들이 은혜받은 사람들이 다 다 신학교로 오면 안 됩니다. 신학교로 오면 안 됩니다. 네.이 이야기였어요. 저는 은혜받은 사람이 다 신학교면 안 된다고 하지 않게요. 그 부르심이 있는 사람 가야겠죠. 그러나 세상을 진짜 하나님께서 바꾸어 가시면서 원하시는 것은 참된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세상 안에서 각자 영역 안에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하고 모두 거룩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교회도 타락할 수 있고 반대로 교회 바뀌라 그래서 항상 속생이 아니라 그곳도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곳이 될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거기 살아가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구를 위해 어떠한 중심으로 살아가느냐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낸 자리, 여러분이 머무는 자리는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역지고 사명이고 선교지. 우리 매일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고 직장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을 하나님은 부르셔서 여러분의 중심을 새롭게 해서 그 안에 이제는 전과 다른 마음으로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전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 삶이었지만 이제는 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뜻에 맞추어 나를 맞추어 살아갑니다. 이러한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짜이 변화는 그분에게서 오는 능력이라고 성경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이 변화는 단순히 내가 아, 좋은 삶 살아봐야지, 더 멋진 살아봐야지 나의 결심과 의지로 만들어야는
변화와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의지를 발휘해서 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척할 수 있지만 그게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면 우리는 반드시 끝납니다. 그렇게 우리 못 살아요. 올해. 진짜 그분에게서 오는이 새로운 근거를 가지고 근원을 가지고 살아가야지 우리의 한계에 넘어지 않아요. 우리가 지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뜻도 아닙니다. 연약한 관계 한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으로 갑직히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한계 속에서 정말 우리 안에 엔진이 생긴 거예요. 우리 다시 일으켜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휘어잡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내 안에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분 그분과의 관계에서 연합이 시작되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공급받으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에요. 이걸 말하고 있는 것이죠.이어서 16절 한번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우리는 심의 자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로을 따라네 여러분 여기 매우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뭘까요?네 저는 먼저 이걸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입니다. 뭐라고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왜냐면 지금 말씀 보면 14, 15절에서 근거를 말해 줬어요. 방향을 말해줬어요.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서 그 삶의 새로운 동력, 심장을 얻게 된 사람이라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참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그 은혜를 누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16절이 얘기하고 있어요.
아까 이제 선하게 사는 것 다 나올 수 있는 열매. 근데 여기서 본문이 가장 중요하게 말하는 것이 뭐냐면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얘기가 육신의 뭐예요? 잣대예요. 이전에 이전에는 내가 주인을 살아가 하면은 내가 육신의 잣대로 모든 것을 보았어요. 여러분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우리 다 그랬어요. 육신때 내 마음대로 봤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내 삶에 들어와서 그분과 연합한 사람이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이 얘기예요. 이게 윤리적으로 이제 아, 긍정적으로 보자. 좋은 시선을 바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복음으로 인해 사람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실제로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지금 육신의 잣대로 자기들의 기준으로 세상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바울의 겉모습 바울 겉모습 그게 뭐 사도야 뭐 이러고 있고 말 아까 말 얘기 말도 별로 못 하고 그거 사도지 못하다고 평가해요. 왜냐면 그 모습이
있다는 과체가 그들이 육신의 자태를 갖고 있으니까 그들이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바울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어요? 이런 사람이었어요. 그 바울 이런 사람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이런 사람이 있어. 봐 보세요. 바울이 자신의 기준이 강했어요. 자신의 기준 봤을 때 예수님이 구원자였어요? 아니었어요? 구원자가 아니었어요. 자신의 기준 할 때는. 그래서 판단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 구원자 아니야.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다 이단이야. 박해했어요. 근데 그가 그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 안에서 새로워진 후에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그리스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세상을 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의 기준이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야기예요. 우리는 여전히 교회, 사역, 다른 사람들 육신의 잔대로 평가할 때가 있어요. 내 마음과 기준대로 판단합니다. 정제합니다. 우리 안에는 아주 오랫동안 회심하기 이전부터 그렇게 살았던 습관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근데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 이제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게 되는데 계속 그렇게 살 거야.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지난 한 가족 캠프에서 여러분 마지막 설교 때 제가 뭐에 대한 얘기를 했죠? 말. 말의 변화에 대해다면 오늘 본문은 뭘 다루는 거냐면 우리의 시선의 변화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는 잣대,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를 새롭게 했다는
겁니다. 했다. 이러한 잣대가 근데 여러분 중요한 건 뭐냐면 왜 이것이 중요한 복음이냐면 복음은 우리를 충만케 하고 더 좋은 삶을 살게 만드는 거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주신 그 삶을 살기 위해서 이게 왜 중요하냐면이 잣대의 문제가 우리가 세상과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보다 더 많이 나타나는 어떤 것이 뭐냐면 누굴 볼 때요? 자기 자신을 볼 때예요. 우리가이 잣대로 자기 자신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실 다른
사람 평가하기 이전에 계속 그 잣대로 누굴 평가하냐면 자기를 보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을 잘못된 기준 안에서 함부로 높이고 함부로 짓밟아요.이 이 기준 자체가 잘못돼 있는 건데 그걸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의 시성과 하나님의 새로운 잣대가 아니라 자기의 잣대, 육신의 잣대를 가지고 내가 평가하면서 세상의 거짓된 기준에 나를 내어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거죠.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잣대를 새롭게 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성취와 혹은 실패로 끊임없이 자기와 싸우고 있는 그 모습에서 벗어나서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지 이제 그 놀라운 사실이 17절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네. 여러분,이 말씀이 여기에이어서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지금 편지
쓰는게 누구예요? 대상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에요. 여러분, 지금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갈 존재들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당신들이 새로운 피주물처럼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복음은 이미 당신들의 새로운 피조물을 불렀는데 왜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든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면 사실이 표현에 보면 중요한 전제가 함께 있기 때문이에요. 뭐죠? 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에요. 그러면 이게 굉장히이 한 줄이 그냥 미묘해요. 누구든지라는 건 뭐예요? 복음의 보편성이에요. 개방성이에요. 누구든지이 복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근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것은 복음의 절대적 기준이에요. 하나님은 깨워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누구든지이 복음 앞으로 초청하십니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들을 초청하고 계세요. 그러나
새로운 피으로 살아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를 새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존재가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신앙 기초 시리즈를 할 때 하나님의 창조에 관해 달았죠. 첫 번째 창조. 그 창조된 세상, 창조 안에 사던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깨워지고 망가졌어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됐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됐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죠.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에 살아가는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편지를 보내는이 시점에서 바라보자면 이미 그리스도의 새 창조 사역은 시작된 일이죠. 막연이 앞으로 일어나 어떤 일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새 창조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 바울도 그것을 경험한 자이자 이제는 고백하는 증언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성도들에게이 복음을 다시
선명하게 붙들도록 권면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이걸 붙들고 사는 타가 이렇게 떨어져 나갔어요. 다시 붙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가 권면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에게 전하여진 그 복음은 여러분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아까 시선의 변화 오늘의 초점은 시선이잖아요. 우린 자꾸 우리 자신을 본다니까요.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혹 얼마나 못 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근데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보라. 여기 뭘 보라는 거예요? 우리를 보라는게 아니잖아요. 우리 자신의 모습 보면 만족하고 낭망하고 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신 그분의 그 구원, 그분의 새로운 창조 그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여러분들에게 더 이상 영향지 않을 수 있게 이미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세거 되었습니다. 근데 왜 여전히 그 잣대로 그 모습으로 그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대상은 당연히 아니겠죠. 근데 이런 얘기예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만약에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신장에 기능을이어서 막 생명의 그런 위협이 있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시다. 근데 누군가 제게 건강한 신장을 이식해 주었어요.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억하지 모르지만이이 예화의 모티브는 우리 작년에 사경 오셨던 신용 목사님이 실제 이화예요. 아무 관계 없지만 그 목사님이 건강한 신장을 누군가 줬어요.이 환자 입장을
보냐면 그것 때문에 내가 이제 살게 된 거예요. 이제 제게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길이 열린 거예요. 그렇다고 수술 다음날부터 제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고 몸을 잘 돌보야 됩니다. 근데 그렇다고 더 이상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내게 어떤 일이 시작되었는지를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아 아직은 내가요 적응해 가는 시간도 있고 아직 이것이 온전하게 자리 잡는 시간도 있고 아 여전히 내가 회복돼야 될 영역이 있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바라보면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냥 우리에게 그 새로운 생명이 이식됐어요. 그러나 우리 연약함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도 계속됩니다. 병균과의 싸움도 계속돼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미 그 일을 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믿고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서 근거가 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우리의 시선을 날마다 우리에게 두려고 해요. 내 지금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가려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붙잡아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내가 믿음으로 붙들고 그 사실 안에서 그 사실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봐야 됩니다. 새로운 삶은 여기서 시작되는 거예요. 이것이 18절입니다.이어서 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은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시고 우리에게네
그래서 저는이 말씀의 첫 문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이 모든 것은 누구에 났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이거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이 얘기요. 여러분 손을 여러분에게 두지 말고이 일이 누구로부터 일어난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났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을 듣고서도 이것을 다시 우리가 뭔가 이루어나야 할 숙제로 만들 때가 우리는 있어요. 그럼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낫습니다. 복음으로 인한 새로운 변화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맞아요.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근거도 그 동력도 우리는 아니에요. 다시 한번요. 복음으로 대한 변화가 누구에게 나타나요? 우리가 각 사람에게 나타날 거예요. 근데 그것이 일어나는 근거도 그것이 계속 이루어내는 동력도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요. 사탄은 자꾸 우리에게 압을 찾게 합니다. 그러니까 잘돼도 문제, 안 돼도 문제인 거예요. 잘되면 교만으로 우리 뭐라고? 실패하면 죄책감에 빠뜨립니다. 사실이 모습은 똑같은 오류예요. 둘 다 중심을
우리에 놓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늘 기억해야 됩니다. 새로운 삶은 내가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일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나타난이 변화의 관계, 중요한 모습을 여기서 화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우리 개개인의 달라지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 모두 사람에게 새로운 삶이 있는 것입니다라는 얘기예요. 내가 스스로 달라지는게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가 변했기 때문에 내 삶이 새로워지게 된 것입니다.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죄로 인해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었습니다.이 화인은 단순히 뭐 서로 기분이 상한 사람들이 오해를 풀고 사회 좋게 이런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죄로 인해 완전하게 단절되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기 중적으로 점점 더 살아가던 나에게 나타난 삶이 그 깨운 삶이 인간에게 닥친 가장 비참한 비극이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죠. 여러분 우리의 시선을 보면 그냥 우리의 시선을 보자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는 거 죽음에 허덕이고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 얼마나 돈이 많든 그들에게 얼마나 세상의 지위가 있든 죽어가고 있어요. 무엇을 할지 몰라서 헤매고 있어요.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에게 있는 가장 비참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다른 곳으로 우리의 공허와 허기와
비어 있는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거죠. 근데 우리가 이제 다른 길이 열렸다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과 화해해가 주어졌으니까. 더 이상 다른 헛된 것으로 우리의 공허를 채우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생명이 그런 하나님과 연결된 거예요. 제가 복음에 대한 설명할 때마다 그래서이 표현을 잘 쓰는데 성경에도 나온 표현이에요. 바로 우리가 떨어져 나간 나무 떨어져 나간 가지 고갈되어 말라가던 가지에서
죽어가던 가지에서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그 근원에 다시 젖붙침되었다는 거. 나무에서 떨어 가지처럼 바짝바짝 매말러 가던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한계 안에서 허덕이던 우리가 다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된 거예요. 이게 화해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예요.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연결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기 때문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이 화해의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초점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더 설명해 나가는데요.이어서 말씀을 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하시고 말씀을 맡겨 주시서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가를 따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오해하면 안 되죠.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그 잘못 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덮어 주신 것이 아니에요. 왜냐?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고 우리와 하나님 관계를 깨뜨리는 문제였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하신 뭐냐면이 죄 덮어 중에 아니라이 죄의 문제를 우리에게 해결하라고 한게 아니에요. 우린 파산했는데 우리 보고 그거 갚프고 우리가 다 해결하고 오라고 한게 아니라 그분이 먼저 화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에게 돌아가 저격을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죠.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이제 우리라면 우리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라고 하는 얘기가 이어집니다. 20절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를 하여 하나님과 하시. 네. 바울은 그리고 바울은 자신과 동차들 그리스도의 뭐라고 말합니까? 4절. 4절단 아시죠? 4절이라고 소개합니다. 4절이 뭐냐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보내 문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먼저 그 은혜로 부르심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당신들에게이 하나님 뜻을 전하라고 하신 겁니다. 이런 얘기죠. 그게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 여러분,
지금 말씀을 잘 들으신 분들은이 표현에서 잠깐 의함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 앞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다고 말했어요. 여기 뭐라 말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말합니다. 이해되시죠? 저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이것이 복음의 중요한 원리예요. 사실 지난네 번째 설교하고 같아요. 그가 하시고 우리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에 여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복음에 믿음으로 응답한다는 사실은 서로 충돌하지 않아요. 같이
있는 거예요. 성경분 늘 같이 있어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그분의 일이에요. 놀라운 구원 사역입니다. 우리가 믿고 결단했기 때문에 보시면서 그 일을 주신게 아니에요. 그가 하셨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새로운 생명을 누리려면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인격적인 응답 내 편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늘 말하는 것이 은혜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먼저 베풀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인 응답이에요. 그걸 통해서이 화해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로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이 편지를 보낸 대성은 아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입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죠. 그들에게이 화해복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장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대히 받지 말라고도 권면합니다. 왜냐면 내가 복음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잣대,
여전히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 우리 아까 그지 이렇게 주었지만 이렇게 멀어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이 말씀은 아직 회심하지 않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이 복음이 줬으니 믿으라라고 하는 초청이면서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는 거기서 떨어져나가지 말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요청이기도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초청하시면서 동시에 요청하십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아까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셨어요. 은혜죠.
이제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통해 바울을 통해 전해진이 화해의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거예요. 하나님과 화해한 개개인, 하나님과 화해해서 자녀가 된 성도 그런 사람이라면 그 초청에 응답한 사람이라면 이제 그 복음을 누리는 자로 세상 가운데 말과 삶으로 그화한 자다운 삶의 모습, 새로운 삶의 모습을 살아가도록 흐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실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죄가를 따지 않고 우리와 하여하셨는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바울이 말하는 21절이에요.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께서 신에게서 네. 바울은 계속요 얘기했다가 또 우리한테 이런 권면했다가 아니야. 너 다시 이거 중심 놓치면 안 막 계속이 얘기를 제가 하고 있거든요.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를 대신에 죄를 씌우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당연히 아시겠지만 여기서
죄를 모르시는 분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이게 우리의 근거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됐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될 죄를 그분이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신 것은 아니에요. 모른 척 눈 감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화해가 일어나게 되었고이 모든 길이 새로운 삶이 가능해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밑에 보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라고이 단락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 의로움을 갖춰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넓으신 사랑과 큰 은혜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다녔던 죄 가운데 있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신 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이루신 구원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제 하나님과 화해하여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이라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속한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을 배우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
아까 15절 기억하시죠? 회심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새로운 삶의 가장 중요한 모습이 있다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아멘. 이것이 새로운 삶의 방향, 가장 중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있었던 17절, 21절 기억하시겠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21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의가 되었다라는이 선언이 우리가이 삶을 살아게 되는 근거이자 동력임을 늘 기억하십시오. 방향만 갖고 방향만 알고 근거와
동력이 있으면 우리는 또 우리의 의로 살아내려고 하고 그럼 또 실패하고 잘되도 문제 안 되도 문제에 빠지고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이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화해한 모든 백성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회복과 치유와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방향임을
이것이 우리 근거와 독력임을 우리가 기억하며 나아갈 때 여러분의 내일이 달라지고 여러분 성에서 하나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새로운 사람 단순히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어떤 그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내일이 되면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지 사역지 그곳으로 갑니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여전히 부족한 모습을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아니 어쩌면 오늘이 예배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또 실수하고 가족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해서 실망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또 여러 생각 하겠죠. 나는 왜 아직도 이모양일까? 도대체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순간 오늘 말씀의 제목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무엇입니까? 보라입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우리 자신의 훌륭함입니까? 나약함입니까? 신앙의 성취입니까? 실패입니까? 아니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그래, 아직 연약함이 있지. 근데 너는 새로운 신장을 이식 받았어. 넌 더 이상 예전처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어. 이걸 붙잡아. 여러분 자신의 실패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일을 보십시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그 새로운 삶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새로운 살아갈 새롭게 살아간 사람은 시선이 바뀐 거예요. 더 이상 이전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랑 여러분, 우리 위해서 늘 지금도 도우시고 존재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시고 그분이 행하시 바라보시고 그분이 주신 말씀을 바라보시고 동의 성령님을 바라보시고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그 새로운 생명으로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보라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이 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같이 예배팀 나와서 함께이 찬양 부를 때 같이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붙들고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다시 태어났다.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그 근거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다. 우리 그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고백하면서 함께 나아가으면 좋겠습니다.
주 안에서 [노래] 내 영혼 다시 [노래] 태어나 이전 [노래] 것을 지나고 새롭게 [노래] 됐네. 죄로 믿음 죄로 [노래] 믿음 내 모습 예수와 예수와 [노래] 함께 죽고 아멘 부활 생명 [노래] 부활 생명 내 안에 [노래] 새로운 삶이 열렸네. 너희가 [노래] 나를 택한 [노래]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노래] 택하여 세웠나니. [노래] 오직 내 안에 오직 [노래] 내 속에 그리스도가 [노래] 사네. 오직 내 삶에 오직 [노래] 내 마음에 그가 주인되셨네.
[노래] 아멘.이 우리 복음 앞에서 여러분들 같이 간복한 자리에 일어나서 우리 같이 이것이 믿음으로 고백하고 나에게로 선포하며 함께 나가서 못했습니다. 주 안에서 내 영혼 주 안에서 내 [노래] 영혼 아멘 태어나 다시 [노래] 태어나 우리의 이전 것은 지나고 이것을 [노래] 지나고 [노래] 새롭게 되 새롭게 네. 나의 모습은 죽었습니다. [노래] 내 모습 예수와 예수와 함께 아멘. 이곳이 우리 교수의 복음입니다. [노래] 부활 생명 부활 생명 [노래] 내 안에 새로운
삶이 열렸네. [노래] 아멘. 너희가 나를 너희가 [노래] 나를 택한 [노래]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노래] 세웠나니 오직 내 안에 [노래] 오직 내 속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가 사네 오직 내 [노래] 삶에 오직 내 마음에 내가 [노래] 주인되 아멘 생명 내 생명 [노래] 그 안에 그의 생명내어 나의 삶이 나의 삶이이 [노래] 정과 [노래] 같은 아멘 내 생명 내 생명 그의 생명 그의 생명네 [노래] 내 안에 나의 삶이이 전과 같길 수 없네.
오직 내 [노래] 안에 오직 내 속에 아멘 그리스도가 사네 그리스도가 [노래] 사네 오직 내 삶에 오직 내 삶에 오직 내 마음에 우리 한 번만 더 웃합시다. 아멘. 오직 내 안에 오직 내 안에 오직 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하고 있음을 믿도록 고백합니다. 승가사 오직 내 삶에 오직 내 삶에 오직 우리의 은혜의 말씀을 그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하며 우리 그리스도를 부르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