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25절까지 요한복음의 제 마지막 부분을 여러분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을 잘 읽어 보면 재미있게 보이는 것 중에 하나가 베드로와 요한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아마 가장 대표되는 두 사람일 텐데요.이 두 사람의 느낌이 참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 몇 번에 거쳐서 비슷한 구조를 보여 주는데 요한은 먼저 항상 뭔가 알아보는 마음을 아는 또 이런 제자이고 베드로는 먼저 반응하는 이런 제자입니다.
아 요한복음은 단순히 두 사람의이 관계를 흥미롭게 비교하는 것을 끝나지 않습니다.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 몇 가지 제가 장면을 설명드려 보면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최후의 만찬 자리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이 누굴 말하는 건지 너무 알고 싶었어요. 어,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제자에게 신호를 보내서 묻게 합니다. 예수님께 묻게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요한이죠.이 이 장면에 보면 베드로가 뭐 제자들의 좀 대표된 리더격이고 그러나 예수님께 뭔가 묻는 그 친밀함은 요한에게 더 있었던 것처럼 보여집니다. 요한복음 18장에도 보면 요한은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키며 십자가의 그 앞에까지 동행하지만 베드로는 어 대상의 집에 함께 요한과 함께 갔지만 끝내 세 번째 그 부인을 한 후에 도망치고 맙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도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아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죠. 이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향해서 뛰어갑니다. 근데이 장면은 어 되게 구체적이에요. 그래서 요한이 달리기가 더 빨랐어요. 네. 남아도 나이도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 좀 많은 편이고 요한이 적은 편으로 추정합니다. 왜 그렇게 보냐면 베드로는 이미 독립해서 자기의 가정을 이루고 있었죠. 근데 요한과 야고보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자였을 볼 때 그들의 나이가 좀 차이가 있었을 거로 보통 봅니다. 아마 그런 신체 능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한이
베드로보다 무덤에 먼저 도착합니다. 하지만 먼저 들어가진 않습니다. 베드로가 좀 더 늦게 도착했지만 바로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도착은 요한이 먼저 하고 무덤에 먼저 들어간 건 베드로다. 이런 얘기를 요한복음은 다루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 21장도 이런 내용이 이어져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두 번 정도 제자들을 만나신 후에 그다음에 이제 어 부활하신 모습 세 번째 제들과 나타났을때 모습인데 저 멀리 해변에 예수님이서 계시는데 처음에는
제들이 그가 예수님인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누가 제일 먼저 알아봅니까?네 네. 요한이 알아봐요. 그 요한이 주님이시다. 이렇게 반응합니다. 근데 그때 행동은 누가 더 빨라요? 베드로가 더 빨라요. 그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가 배에서 물로 뛰어들어요. 헤엄쳐서 예수님께 가려고. 한번 그 말씀 한번읽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거옷을 주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라.
여러분 좀 이게 특이하죠? 예. 뭐가 특이합니까? 네. 옷을 네. 또 보통 우리는 벗고 뛰어들어야 되는데 입고 뛰어들잖아요. 그러니까 아이 상황이 베드로가 이렇게 좀 거두옷을 벗고 조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가 예수님이다라고 하니까 옆에 있는 겉옷을 입고 뛰어든 거예요. 그거는 어 베드로의 성향이죠.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만큼은 매우 정중한 모습을 갖췄던 것이 베드로가 아니었을까 이런 것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베드로에게 약간 보스를 모시 이런 마음이 좀 있었던
거죠. 배를 타고 가도 되지만 그것도 기다리지 못할만큼 예수님께 빨리 가고 싶은 그런 베드로의 어떤 마음들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 베드로는 헤엄쳐서 가고 나머지 애들은 배타고 이렇게 옵니다. 사실상이 요한은 여러 제앙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었던 인물로 나오잖아요. 그는 예수님과 가깝고 끝까지 가깝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 마음도 가장 알아채고 예수님이 멀리 계실 때도 가장 먼저 알아봅니다. 근데 우리가 다 요한복음 봤지만 베드로는 좀 다른
성향이었죠.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 위해서 뭐든지 할 것 같은 마음이에요. 그 요한복음에서도 13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오거든요. 한번 13장 말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다 주의 수 내가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데 하도 너희가 지금 내가 가는 것이 따라갈 수 없다고 하니까 주님 무슨 얘기니까 제가 주님을 위해서 언제든 어디까지든 가겠습니다. 목숨도 버리겠습니다. 이게 베드로였단 말이에요. 그리고 진짜 예수님을 잡으러 사람들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이라도 빼서 휘둘러 보기라도 하고 위험한 거 뻔히 아니지만 위험으로 쓰고 대제앙치까지 따라갑니다. 두 번의 추궁까지는 버텨냈지만 세 번째 추궁에는 도저히 못 버티고 도망쳐버렸습니다. 그 일은 아마 베드로에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만한 점이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아직 이게 잘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내뱉은 말이 뻔히 있는데 그 말을 못 지키는 자기 자신이 지금 너무 미운 상태인 거예요. 그리고 우리 알다시피 이미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제들과 두 번이나 함께 목격했습니다. 첫 번째 그 도마가 없을 때 도마가 있을 때 같이 목격했어요. 하지만 베드로 안에는 개인적으로는 아직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은 거예요. 나는 주님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야.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오셨다는 사실이 너무 놀랐고 기쁘지만 그러니까 막 갑자기 뛰어들어서 헤엄칠 정도로 그런 마음도 베드로 안에 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모습 보면 베드로란 평상시에 베드로가 뭐 이렇게 했다. 이런 내용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 얘기가 없거든요. 이상할 정도로 베드로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그 예전처럼 뭔가 나대기에는 나서기에는 지금 뭔가 실패감이 가득한게 베드로의 마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믿고 나니 부인했던 자신의 모습, 그 실패감이 더 크게 떠오르는 상황이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의 방황 가운데 두 번이나 예수님 배웠지만 원래 자기가 하던 일인 고기 잡으러 나가 있는 상황입니다. 사람이 뭔가 이렇게 큰 실패를 만나고 나면
어떤 그냥 익숙한 어떤 삶의 자리에 돌아가고 싶고 그냥 그렇게 머무르고 싶고 이런 것처럼 지금 베드로는 아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되지? 아 따라 진짜 다시 따라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 나는 너무 실패했잖아. 이런 마음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상황처럼 21장은 그려지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이 세 번째 방법은 바로 그런 베드로 위에 오신 거예요. 두 번째 방은 누구 위에 오셨어요? 도마이 오셨죠? 세 번째 방법은 누가
보더라도 베드로 때문에 오셨어요. 마치 처음 고기를 잡던 그 베드로를 부르셨던 그 모습처럼 오십니다. 그때도 밤새 수고했는데 고기를 못 잡았던 어 이런 모습이 지금 이어지잖아요.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많은 고기를 잡죠. 똑같은 그 상황이 21장에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처럼 자신들에게 옆으로 금을 던져라고 했던 그분이 예수님의 것을 요한이 알아보자 베드로는 그냥 예수님 향해서 그 마음에 있는 그 마음대로 뛰어든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달려가기까지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정장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베드로가 뭘 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갔으나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예수님은 그들과 식사를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시고 베드로에게 모르시죠. 21장 15절이 바로 그 상황입니다. 한번이어서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아침 먹은니까 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내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죠. 질문하시고 대답을 들으시고 말씀하시죠.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서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양떼를 먹여라. 내 양떼를 먹여라 나는 다시 사명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두 번째 비슷한 질문 넣으시고 그때는 내 양떼를 치라라고 답해 주십니다. 세 번째 물으신 다음에는 다시 한번 내 양떼를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사용된 예수님의 질문이 아가페 신적인 사랑이죠. 혹은 필레오 인간적인 사랑 이것이 섞여 있음을 두고 각각 질문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으나 요한복음 내에서이 단어는 자유롭게
혼용되기 때문에 요즘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이 질문의 어떤 다른 어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답을 하실 때 먹이라는 것은 목양에서 돌봄의 차원이고 치라라는 것은 목양에서 훈련의 차원입니다. 주님이 하셨던 그 목회 사역, 목양 사역을 베드로로 하여금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베드로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묻기 위해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질문하시는 겁니다. 애초에 주님께서
오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세 번에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의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베드로 안에 있는 죄송함, 민망함, 성구함, 어색함을 아시는 주님의 따스한 사랑과 회복의 회복을 위한 몸짓입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를 푸르신 후에 베드로가 겪게 될 운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젊었을 때는 네가 스스로 결정하여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었을 때는 남들이 너를 묶어서 내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것은
날 베드로가 맞이할 십자가 처형을 암시합니다. 베드로는 이후에 정말 예수님을 따라 살다가 예수님이 경험한 십자가까지 자신의 삶으로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내로 황제 시대에 로마에서 십자가 영을 당해 죽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은 주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을 자격이 없다 말하며 거꾸로 못 바뀌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결국이 실패를 극복하고 주님의 끝까지 따라갔던 그때는 정말 피하지 않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갔던 한 사람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이 미래에 대해 말씀하신 후 다시 한번 그를 사명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그게 21장 19절인데요.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가시라.이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하시. 네. 성경은 베드로의이 죽음 순교 예고를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베드로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라라고 말씀하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참 멋있는데 요한복음은 정말 재밌게이 중요한 나를 따르라라는이 명령 초청 뒤에 베드로가 던진 질문 하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 이건데요. 바로 요한에 대해서 던진 질문입니다. 21절 말씀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베드로와 그네 지금 상황 이해하시죠? 베드로가 아 나는 이제 순교할 운명이구나라고 베드로가 이해한 거예요. 아 나는 이제 순교할 운명으로 나는 그렇게 되겠구나라고 한 다음에 갑자기 그러고 나니까 요한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거예요. 주님 그럼 얘는요이 상황에 지금 그럼 요한은요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질문에 당김 그의 복잡한이 마음을 단호히 정리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장 22절인데요.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까지 따라하시다. 네. 이게 요한복음의 모든 에피소드의 끝이고 이제 뒤에 마무리 구절이 이어집니다. 즉 예수님께서이 사건을 마지막에 요한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사명은 각자의 몫시라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의 것을 대신할 수 없고 그 사명의 갑어치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이나 혹은 그 외에 다른 제자의 운명도 모두 예수님의 섭리와 계획 관해서 펼쳐질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주님의 몫입니다. 훗날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것은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였습니다. 근데 그때는 또 야고보는 순교하지만 같은 위기에서 베드로는 감옥에서 구출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죽음의 위에 살아나면 더 은혜를 받은 것이고 구출되면 더 사랑을 받은 것이고 순교한 자는 하나님이 안 도와주신 것이고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구는 순교했는가? 누구는 순교를 막아주셨는가? 이걸로 하나님의 사랑을 측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건져내심으로
함께 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이 끝까지 그의 믿음을 붙들어 주심으로 함께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출은 편해가 아니라 남겨진 사명이 있기 때문이며 순교는 버려짐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사명의 완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누굴 덜 사랑하셔서 놓아 버리시거나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의이 마지막 지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통차를 남겨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스데반, 야고보처럼 일찍 순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멈며 고난 속에서도 계속해서 증언해야 하는 요한과 같은 부르심도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훌륭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에 신실했느냐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길이 있었고 요한의 길이 있습니다. 야고보의 길이 있었고 바울의 길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너는 나를 따르라. 넌 날 따르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들을 정리하면서
우리가이 말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오늘이 말씀에서 우리 몇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혹시 누구와 비교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우리가 주님의 길에 간다고 하면서도 올라오는이 비교의 마음들로서 우리가 벗어나야겠죠. 나는 혹시 어떤 실패 때문에 여전히 움추어들어 있지 않은가? 주님은 실패를 극복하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다가와서 오늘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내 실패를 묵상하면 난 그거밖에 보이지 않지만 오늘 나에게 오셔서 그 실패를 뛰어넘어
다시 한번 하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붙든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부르심보다 다른 사람의 길을 더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부르심, 내가 이거 어떻게 감당할까 보다 자꾸 나의 눈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고 어 쟤는 어떻게 불렀어? 나는 이런데 이런 것에 빠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명에 대해 놓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지금 누구에게가 있냐면 요한에게가 있어요. 주님은 뭐라고 하는 베드로야
요한에게 가는 너는 나에게 와야 돼. 널 부른 나에게 너의 시선이 와 있어야 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선도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가는 것을 단호하게 끊어내십시오. 우리의 시선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말씀에 우리 묵상의 모든 여정을 마치면서 오늘이 마지막 부분에서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마음으로 나를 따르라는 주님께 응답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요한의 길도 아니고 베드로의 길도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여러분의 길, 나에게 주어진 길을 내가 어떻게 따를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이 말씀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에 신실하게 응답하며 한없씩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