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하십니다, 합니다

2026-08-30 · 빌립보서 2장 12~13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새로운삶> 시리즈의 지난 3편 설교는 ‘성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전에 나누었던 <신앙기초>는 복음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시리즈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저절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우리 삶 속에서 실제가 되게 하십니다. 그 구원을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새로운삶>을 다루면서 성령에 관하여 먼저 다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지난 3편의 설교는 각기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습니다.

1편 : 새 삶의 ABC

Q. 누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

A. 새로운 삶의 동력 : 성령

2편 :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Q. 누구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가?

A. 새로운 삶의 주도권 : 성령 + 충만

3편 : 자라남의 원리

Q. 그 통치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며 자라가는가?

A. 새로운 삶의 성장 원리 : 믿음

제가 지난 설교 이후 한 주간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열기는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무엇이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들은 진리’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들은 진리가 있어야 성령께서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진리에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삶에서 말씀을 찾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힘쓰셔야 합니다.

자,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 세 편의 설교를 듣다 보면 자칫 어떤 분들은 이런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성령께 맡기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

이 이야기가 왜 애매하냐면, 틀린 이야기가 아닌데 오해가 생길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이런 것이 있지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맞는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맞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그것이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주제는 지난주에 다뤘던 ‘진리’ 다음에 따라와야 하는 두 번째 열차인 ‘믿음’과 관련이 깊습니다.

누군가에게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누군가에게 믿음은 ‘능동적’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에 대해서 배우고 이해한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 교수님이 이런 표현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신학교 교수의 최대 라이벌은 주일학교 교사이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아무리 성경을 설명해도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한마디가 훨씬 강력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는데요?” 이 한마디를 이기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냥 “더 이상 건드리지 마세요”가 되어버릴 때도 있어요.

신앙에서는 특히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것을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가끔 경험해요. 저도 나름 성경을 꽤 치열하게 오래 공부했습니다. 목사가 된 지도 꽤 되었고, 심지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도 꽤 했어요. 그런데도 가끔 못 이깁니다. 누구를요? 그분의 초등학교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을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배우고 자주 써온 표현들 가운데도 더 깊이 이해되고 교정되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해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신앙에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 가운데,

“성령께 맡기세요.”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내려놓으세요.”

이런 표현을 씁니다.

저도 쓰는 표현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성령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성령께서 무언가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걸까요? 지금 내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아직 일하지 않으셔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있으면 되는 걸까요?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내가 내려놓은 것이 내 욕심과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순종은 아니었을까요?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진리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마음으로 믿는 것일까요? 기다리는 것일까요? 맡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움직이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심보다 중요한 것이 ‘진리의 선명함’이기 때문입니다. 선명한 진리가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고, 우리를 지킵니다.

1. 믿음은 수동적인 것인가?

여기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인간의 의지나 반응과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믿음을 줄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왜 여러분에게 이 부분에서 자꾸 걸림이 생기는지 아세요? ‘믿음’이라는 단어를 어떤 때는 너무 좁게 이해하고, 어떤 때는 다른 개념까지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음을 너무 좁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새번역)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명한 세 표현이 나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새번역은 ‘믿음의 역사’를 아예 ‘믿음의 행위’라고 번역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한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수고가 전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소망한다고 하는데 전혀 인내하지 않습니다. 정말 소망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살아 있는 믿음은 ‘행위’를 동반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움직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고 심지어 대조시킵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만듭니다.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에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는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나아만 장군을 생각해 봅시다. 엘리사가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그 말씀을 믿었다고 나오죠. 그런데 요단강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 금방 압니다. 믿었으면 들어가는 거예요.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갔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닙니다. 믿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과 똑같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그리고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를 떼어놓으면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은 때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합니다. 그러나 그때의 ‘행위’는 구원의 근거로 내세우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나의 선함이나 나의 율법적 행위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믿음’과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서로 대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리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 이해를 가지고 지난주 ‘신앙의 기차’를 다시 떠올려봅시다.

‘진리’에 ‘믿음’이 붙는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믿고 행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신뢰했기 때문에 내 삶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나요?

반대로 믿음에 다른 개념이 너무 많이 뒤섞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교회 안에서 자주 혼동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은혜’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6:44a)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분명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먼저 하시는 이 모든 일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같은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읽으면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바라보시며 물으십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여러분, 이 질문을 잘 보십시오. 조금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여기까지 이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인격과 의지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것입니다. 순서는 분명합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응답을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먼저 찾아오시고, 이끄시고, 마음을 두드리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말씀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 대신 믿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앞에서 내가 믿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믿음을 너무 좁게 만들지 마십시오. 믿음에서 ‘순종’을 떼어내면 안 됩니다.

믿음을 너무 넓게 만들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찾아오시고 이끄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은 것도 주의 은혜입니다.” 맞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그러나 그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지 선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먼저 찾아오시고 이끌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인격적인 믿음의 반응을 없애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지난주 설교에 연결시켜 볼까요? 진리를 머리로 “맞습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왜 나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진리에 믿음이 붙었다는 것은 단순히 “맞다고 생각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신뢰했기 때문에 나아만처럼,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순종하여 내 삶이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 가운데 누가 일하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말씀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때로는 부족한 용기를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삶으로 살아가며 그 가운데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늘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인격과 의지를 없애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령께 맡긴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그러면 결단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결단합니다.

성령께서 순종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움직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배제하면 무너집니다. 그런데 나를 배제해도 무너집니다.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성령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일하심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참여합니다. 이것이 성령께 맡긴 삶입니다.

성령께 맡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처음 질문에 답해봅시다.

Q. 믿음은 수동적인 것인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격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입니다.

이제 여기까지만 듣고 설교가 끝나면 또 반대쪽으로 확 기울어지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목사님. 결국 제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네요?”

그래서 후반부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Q. 신앙생활은 결국 나의 노력인가?

(빌 2: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 2:13)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선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하면 같은 본문을 보아도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잘 따라왔다면 이 말씀도 조금 다르게 보여야 합니다.

이 말씀 안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함께 보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말합니다. 누가 합니까? 내가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일하십니다.

이것이 대조입니까, 조화입니까? 조화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 조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둘을 분리시켜서 싸웁니다.

믿음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므로 내가 힘써 순종합니다.

내가 순종하는 것은 분명히 나의 순종입니다.

그러나 내가 순종하고 싶도록 마음을 움직이시고, 실제로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니까 나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하니까 결국 모든 것이 내 노력에 달렸다.”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양쪽 절벽을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거야.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 끝에는 핑계에 갇힌 불순종이 있습니다.

반대로, “결국 내가 해야 해. 내가 해내야 해.” 그 끝에는 하나님을 배제한 교만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어느 한쪽 절벽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이 원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사람은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상당히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도 잘 지켰고, 재산도 많았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와 대화하시다가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한 가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아주 곤란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과 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나를 선택할 수 있겠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떨어뜨리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를 사랑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새로운 삶이 있으니까요.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그는 계속 신앙의 착각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그가 그동안 자신해왔던 신앙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막 10: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막 10: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떠나갔습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본문은 재산을 많이 가진 것이 얼마나 강력한 우상숭배의 위험이 될 수 있는지도 경고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돈이 많다는 사실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재물이 그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려놓고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는 주님보다 재물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이 사람에게 재물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주도권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해도 삶의 주도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듯, ‘회심과 회심한 사람의 삶’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회심했다면, 내 물질과 시간과 에너지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실제 삶의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삶으로 살아내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이 부자 관원에게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순종입니다. 순종은 분명히 그에게 요구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막 10:26)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막 10: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여러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그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이 둘을 함께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회심한 자답게 살아가는 것, 여러분의 능력만으로 됩니까? 여러분의 성품만으로 됩니까? 내 힘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는데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성품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건 나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새로운 삶은 우리 힘만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면 방법이 없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도우시고, 힘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삶은 우리의 힘만으로 만들어내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합니다.

성령이 일하시고 내가 따라가면 놀라운 삶이 나옵니다. 그분의 이끄심이 은혜이고 나의 순종이 믿음입니다. 그 둘이 만나면 새로운 삶이 나옵니다. 작품이 나와요.

“나는 왜 변하지 않을까?”

“내 옆의 사람은 왜 변하지 않을까?”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이 다 하실 거야”라고 말하며 내가 해야 할 순종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반대로 혹시 나는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쳐 넘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기에 내가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게 하시기에 내가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할 힘을 주시기에 내가 용서합니다.

하나님이 순종할 힘을 주시기에 내가 순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동시에 내가 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내가 순종할 때, 이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새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이해할 때, 우리 안에 전에 없던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전보다 더 사람을 용납하게 됩니다.

전에는 순종하지 못하던 일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한 거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교만해지고 자랑하게 됩니다.

말씀을 순종한 결과로 내 삶에 열매가 맺힌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 잊어버리는 순간 다시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시작하셨구나. 내가 그 은혜 안에 나를 내어드리고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셨구나.” 이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가능성의 시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배제한 채 “내가 했다”고 생각하면 내가 뭔가를 해낼수록 오히려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교만하여 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하실 거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할래.”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신앙에 머무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참 신비롭고 조화롭습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순종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내가 힘써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주님, 지금 제 안에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제가 순종하겠습니다.”하며 나를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부족한 사람을 붙들고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오늘 한 문장을 남겨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나도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 맡기겠습니다.” 좋습니다.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내려놓겠습니다.” 맞습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진 의미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께 맡긴다는 것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아멘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두드리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순종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제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해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실 것을 믿고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 이미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자꾸 어떤 사람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부자 관원에게 예수님께서 그 불편한 말씀을 왜 하셨습니까? 사랑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돌이켜야 한다.”

“그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그것을 끊어내야 한다.”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과 물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면 하겠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찾아오셨고, 말씀하셨고, 깨닫게 하셨고,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십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면 이제 우리의 몫은 무엇입니까?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합니다. 이것이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