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오늘 구원이 임했다 / 인터뷰 설교

2025-03-30 · 누가복음 1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오늘은 우리 사귐의교회에 정말 의미 있고 기쁜 날입니다. 바로 세례를 베푸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하려 합니다. 바로 우리의 전통에 따라, 세례를 결단한 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며 함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말씀이 통과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희가 만나볼 두 분의 세례자들은, 성경의 메시지가 자기 삶을 어떻게 관통하고 변화시켰는지 직접 이야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3장까지 7편의 설교로 다뤘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누가복음 14장과 15장의 이야기는 제가 최근 ‘청년 예배’를 통해 다룬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의 잔치 비유는 <덮어놓고 믿지 마라>라는 제목으로, 15장의 탕자 이야기는 <누가 탕자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혹시 누가복음의 전체적인 흐름을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우리 교회 유튜브 채널의 해당 설교 영상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여행길에서의 에피소드와 가르침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오는데,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제자도의 구체적인 삶, 즉 재물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누가복음 17장은 용서와 믿음,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섬기는 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받은 사건이나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도 이 장에 포함되어 있지요.

누가복음 18장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고,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자에게 주어지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죠. 어린 아이도 가능하지만, 부자 관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실패의 아이러니도 여기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오늘의 설교와도 이어집니다. 율법을 잘 지키며 신실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부자 관원이 실패했을 때, 주변에서 깜짝 놀라거든요.

저 사람도 실패한다면,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의 설교와 연결됩니다. 누가복음은 그 대답에 앞서 의미심장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맹인이 치유를 받는 사건입니다.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제자훈련을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리며 이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시지만, 마치 제자들의 상태가 영적으로 맹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여행 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한 후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들어도 그것을 깨닫고 그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제자들의 상태를 보여준 후, 맹인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으로 눈을 뜨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던 이가 오히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는 반면, 제자들은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고 따르면서도 그분의 사명과 가시는 길을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부각합니다. 육적인 맹인은 영적으로 보고 있었고, 제자들은 보고 있으나 영적 맹인과 같다는 것이죠.

이처럼 저는 우리도 영적으로 ‘맹인과 같았던 시절’이 모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이처럼 많고, 성경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나, 주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했던 시간들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두 분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텐데요. 한번 그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부활’이라는 단어는 저에게 거부감이 매우 큰 단어들이었습니다. 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그냥 종교적 단어였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이 아닙니다. 저에게 신앙은 멀고도 낯선 것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았습니다. 당장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고, 세상의 기준에 따라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회사에 다니며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아들을 셋이나 낳았어요. 열심히 저를 위해 살았습니다. 대형 스포츠 센터도 인수하면서 대표라는 명함도 생기고, 그렇게 소망하던 우리집도 생겼어요. 그러다가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번아웃이 왔어요. 10년 동안 운영한 대형 센터를 정리하게 되었고 옥정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작지만 알찬 헬스 PT와 필라테스샵을 오픈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화위복이 되어 다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보는 저는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사실 제 내면은 늘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일도 잘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무언가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고, 저의 허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과 술에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뭔가 이루고 사는 것 같으면서도 공허하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육아와 일, 사람들과의 관계 등에서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더 깊은 마음의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주변에 가족이 있어도 막상 마음을 기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시어머님의 생전 소원이 자식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었어요. 남편도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아이들을 교회에서 교육하며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를 나가고자 마음을 먹어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저도 단순한 호기심 혹은 종교가 주는 위로를 얻고 싶은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게 된 곳이 사귐의교회였습니다.

저는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였으나, 심적으로는 평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6남매의 중간으로 자란 저는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이 몸에 밴 삶을 살았습니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한 모습으로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길 바랐으나, 그 또한 제 마음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 삶의 가장 큰 이유는 아이였죠. 아이를 바라보며 인생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뭐든 알아서 잘하며 크던 아이가 중3이 되던 시기부터 마음의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며 꿈꿨던 아이는 갑자기 모든 것에서 손을 놔버렸습니다. 그저 자신의 방 안으로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며 저는 좌절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엄마가 되었어요.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엄마이기 때문에 겉으로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없었고 인내해야 했습니다. 한없는 기다림으로 아이가 달라지기를 바라야만 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저의 내면은 지쳐갔어요. 그런 저를 대면하여 바라보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댁과의 불화가 깊어졌습니다. 더 힘들었죠. 저는 남편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단정짓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지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어요. 그때 저를 지탱해 주었던 것은 오로지 술이었어요.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움이 반복될 뿐일까?”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탓하고, 주변을 원망하며 힘든 마음을 술로 잠시 잊어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나쁜 선택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하루하루 죽이는 헛된 생각 속에 살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어두웠던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의 힘듦이었습니다.

그 시간도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씩 흐르고, 아이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말없이 아이의 꿈을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제자리를 조금씩 찾아갔고, 원하는 방향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었어요. 저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겨났고, 그러면서 비로소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의 친정 식구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저에게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저는 애써 신앙인들의 이기적인 모습과 불합리한 모습을 찾아내어 보려 했기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교회를 한번 가보려는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주일마다 여기저기 교회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귐의교회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두 분이 어떤 고민의 시간을 보냈고, 또 교회로 오게 되었는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복음은 늘 이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이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를 계속 배워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제가 이 시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제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사귐을 갖고, 복음 안에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그 사람의 현재를 보지만, 사실 마주하는 시간 안에서 그 사람의 과거도 함께 보게 됩니다. 어떤 부분은 그 과거를 통해서 이해해 줘야 하고, 어떤 부분은 끌어안고 품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은 사실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한 사람의 일생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부서기지 쉬운, 부서지기도 한 그 깨어진 마음을 우리는 마주하여 함께 채워가는 것이죠.

예수님은 여행길에 여리고라는 도시를 방문하십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꼭 만나주셔야 하는 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 참여하는 대상을 ‘가난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나라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차원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 빈곤, 사회적 소외, 심리적/정신적 결핍, 영적 결핍 등을 모두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싫어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상’이라는 점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깨어짐의 현상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짐의 현상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냐고 물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깨어짐의 현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또 깨어짐이 서로를 망가뜨리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깨어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깨어짐 안에서 아파하는 우리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말하죠. 바로 삭개오가 그 깨어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이 필요한 인생 가운데 놓여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눅 19: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눅 19: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눅 19: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삭개오의 문제는 ‘경제적 빈곤’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공허함은 ‘사회적 소외’ 혹은 ‘심리적/정신적 결핍’ 그리고 ‘영적 결핍’ 등이 동반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돈’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돈을 많이 벌고 그로 인해 넉넉한 삶을 살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아갔지만, 정작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는 못함을 깨닫고, 그 공허와 허무를 이겨낼 답을 찾기 위해 ‘예수’라는 인물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이죠.

예수님은 여리고를 향해 가셨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향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깨어진 세상에서 방황하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섰죠.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눅 19: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눅 19: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제가 말하는 깨어짐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김혜라 자매님, 유진희 자매님. 이 두 분의 이전 모습은 제가 모르겠으나, 뭘 얼마나 그렇게 망가진 삶을 살았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깨어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경으로 보면 니고데모도 깨어진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삭개오의 마음 안에 있는 어떤 변화의 열망을 주께서 보셨고, 주님은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삭개오만 보셨습니다.

저는 두 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한번 그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남편과 함께 교회를 나오기는 했지만, 예배가 처음에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많이 졸기도 했습니다. 당시 두 살 이었던 막내가 예배당에 들어오려 하지 않아서, 저는 예배를 보고 남편은 막내를 유모차에 태우고 호수공원을 계속 돌았습니다. 저희가 상상했던 교회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황에 무슨 교회야. 애가 셋인데...” 막내가 좀 더 큰 다음에 와야 하나, 생각도 했었습니다. 일요일이면 일찍 일어나 준비하면서도 가족끼리 싸우면서 나오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교회 예배당에 앉아있으면 뭔가 모를 안정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귀에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교회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자매님들의 도움이 참 컸습니다. 평일에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자고 연락이 왔고, 점차 밖에서 만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만나서 전도하려나 보다 생각해서 어느 정도 벽을 치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매님들은 그냥 저라는 사람을 알기 원하고 궁금해하는 모습이었어요.

몇 번 식사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제가 그동안 편견을 가졌던 이기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저 다정한 옆집 언니 같은 따뜻함을 그들에게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열렸죠. 그쯤 저는 팸에 소속이 되었고,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지켜주고, 서로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더 복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말씀의 내용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내용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궁금해졌어요. 지금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은지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이 궁금증을 풀려면 성경을 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약의 파노라마, 구약의 파노라마 등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성경이 너무 재미있어졌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면 설렘도 생기곤 했습니다. 전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는 말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힘들었던 제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었고,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짐을 대신 지고 가신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 삶을 맡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주 든든하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사랑하는 내 편이 생겼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일 예배에 와서 늘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말씀을 듣고 가는 것이 전부였어요. 그래도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가슴 따뜻함이 있었어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로 다 표현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면서 제 마음에 평안이 조금씩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죠. 하루하루 믿음 생활을 더해가면서, 제 마음에 채워지는 충만함과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주일이 기다려지고, 혼자만의 비밀스런 만남이 약속되어 있는 듯, 토요일 오후가 되면 가슴이 뛰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저를 괜찮다고 위로해주었고, 믿음을 키워주셨습니다. 교회에 오는 즐거움이 더욱 커진 것은 ‘팸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였습니다. 첫 번째 팸 리더인 성희 자매님과 팸가족분들의 따뜻함으로 인해, 제 마음은 해제되었고, 제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하는 저를 보며 스스로도 놀라웠습니다. 교회가 처음인 제게 팸분들은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성희팸과 지금 저를 사랑으로 채워주는 정희팸 가족분들께 사랑하는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저를 '교회'라는 공간으로 불러주셨고, 공동체를 알게 해 주셨고, 그들과 함께함이 너무도 큰 기쁨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을요.

조금씩 변화되는 저를 보며,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귐이 어렵게 여겨졌던 제가 점점 많은 이들과 눈 인사를 하고, 손을 맞잡으며 안부를 묻고, 함께 일하며 힘듦보다 즐겁고, 기쁨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일하심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웃음을 잃어버린 제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귐의 가족을 만나게 해 주심은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두 분이 처음 교회에 왔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어느새 그것도 3~4년 전 일이라고 하니 참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천천히 주님을 알아가고 복음을 깨달아오셨던 그 여정이 참 소중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볼게요. 삭개오의 집은 꽤 좋았겠죠? 그런데 그 집에는 아마 사람들과 따스한 사귐이 있었던 적은 없었을 것 같아요. 예수님처럼 “그 집에서 내가 좀 자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겠죠. 오직 사람들의 시선은 그저 삭개오를 향한 미움과 원망뿐이었을 테니까요.

우리는 복음을 인격적이라고 말해요. 복음은 나를 덮치지 않아요. 나에게 찾아와 내 마음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또 내가 그 마음 앞에 반응할 때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죠.

삭개오는 ‘돈’밖에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했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에게는 그것이 정말 좋기 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진짜 좋은 삶을 깨닫지 못했기에 깨어진 삶에서 ‘돈이라도’ 우선순위에 붙들고 살았던 것이겠죠.

여러분 저도 돈 좋아해요. 그러니까 제가 돈을 누구에게 주면 그 안에 제 마음도 담긴 것이죠. 저는 돈 버는 것도 좋아했고, 열심히 벌려고 애썼어요. 잘 쓰면 너무 좋은 것이 돈이니까요. 저는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제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면서 그 하나님께 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저는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 안에 살고자 늘 결단할 뿐이죠. 돈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 돈을 사용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습이라고 했죠. 돈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던 것이 삭개오였는데, 그는 이제 그의 우선순위를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삶이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이 되었으니까요.

(눅 19: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여기서 삭개오가 다짐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는 행위들입니다. 우선 그는 자신이 세상 모든 것과 바꾸었던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겠다고 다짐합니다. 결단이죠.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강제 징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누가복음 초반부에 세례 요한이 자신을 찾아온 세리들에게 요구했던 삶의 모습이죠. “정해준 것보다 더 받지 말라.” 이것은 세리로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다짐일 것입니다. 삭개오는 가장 어려운 길을 걸어가고자 결단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삶에서 가장 추구하는 것이 바뀝니다. 제가 앞서 율법에 신실하고 모든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라고 여겼던 부자 청년은 사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는 자였음이 드러났다고 했어요.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반대죠. 삭개오는 사람들이 절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삭개오만큼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삭개오가 예수님을 위해 모든 삶의 태도를 바꿉니다.

저는 우리의 눈은 여러모로 틀렸다는 점을 여기서 느낍니다. 저도 제법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우리의 눈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사실 삭개오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깨어져 있었고, 그래서 더 다른 삶을 갈망하고 있었고, 훅 그의 인생에 들어온 예수님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열매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진짜 만난 사람에게는 변화가 나타나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사랑을 누리면, 그분을 따라서 살아가고 싶어집니다.

저는 두 분이 하나님을 알기 전과 지금, 어떤 부분에서 변화를 고백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이 변화가 엄청 거창한 것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냥 솔직하게 두 분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제 존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만드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로 열등감을 느끼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있는 모습 그대로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부분에서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설령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더 좋은 길을 예비해 두셨다는 믿음이 생기니, 불안보다는 감사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변화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오직 내 성공과 만족이 가장 중요했지만, 신앙을 가진 후에는 사랑과 나눔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배려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앞서 나눴지만, 저는 불안과 두려움이 컸습니다. 일이 잘 되고 있어도 허전함과 공허함이 있었고,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도 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심을 다해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강정규 목사님, 항상 따듯한 미소로 사랑과 진심을 보여주시는 최보운 사모님, 사귐의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시고 챙겨주시는 남인해 자매님과 팸 식구들, 나만의 첫 성경책을 저에게 선물해주시고 성경에 관심을 갖게 해주신 이정화 자매님, 1 day 1 bible 하자고 제안해 주시고 항상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박안수 형제님과 사랑하는 안수팸 식구들.

그리고 제가 몇가지 사역을 할 때, 부재중인 엄마의 자리를 아빠의 사랑으로 채워주고 있는 남편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세례식을 공지하시는 목사님 말씀에 "나도 세례를 받아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팸 리더이신 정희 자매님께 말씀드렸더니 너무 기뻐하셨고, 팸 가족분들도 저보다 더 기뻐하시며 응원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울컥해 버렸습니다. “아, 이렇게 주님은 나를 불러주시는구나.”

제 삶에도 변화가 생겼어요. 저는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는 마음들이 생겨났어요. 저는 저를 보이는 것을 어려워해요. 그런데 제 마음의 힘듦을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것도 큰 변화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함께 하면서, 저의 작은 수고가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기쁨도 알게 되었습니다.

삶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작디작은 제게 손 내밀어 구원해 주셨죠. 주님이 저의 삶에 찾아와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지금까지의 시련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어렵게 돌아서 걸어온 길임을 알게 해 주셨지요.

저는 제 삶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때론 원망과 불평이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저는 다 알지 못했지만, 그냥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주님 안에서 지금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두 분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되고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럼, 이제 삭개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19: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눅 19: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경험하게 될 미래적인 어떤 부분도 분명히 남겨져 있을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도 현재적 구원의 이야기가 강조됩니다. 잃은 것을 찾는 것이 ‘구원’이거든요.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진짜 추구해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 의미 있는 삶, 그런 모든 것을 놓치게 만드는 거짓된 추구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깨어진 세상에서 ‘돈’을 추구하느라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인생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퉁 쳐질 줄 알았지만, 사실 그의 내면은 결코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와 더불어,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발견하고 결단합니다. 그 진실한 결단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선언하시죠. “오늘 구원이 너에게 일어났다.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나님의 가족이다.”

저는 확신합니다. 삭개오는 이후에 달라진 삶의 방향안에서 더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다른 것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니까요.

이제 끝으로 두 분의 고백과 결단을 들으며 마치겠습니다.

지금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제가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제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고, 저는 주님께 제 삶을 온전히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며,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합니다.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고백이며 헌신의 다짐이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하려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신앙을 더욱 깊이 키워가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랑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저의 부족한 부분을 항상 애정과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함께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동역자가 되어 주셔서 든든합니다.

저를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주님을 닮아가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다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제가 감히 다가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로 하여금 깨어진 세상에서 허덕이며 살았던 지난 시간을 회개하며, 주님의 자녀 됨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런 사랑의 주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을 맞이하시고 그 죽음을 부활로 보여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믿음의 소망을 일깨워 주신 주님을 마음 다해 사랑합니다. 저의 작은 힘도 쓰임 받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눈으로 읽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귀로 듣는 말씀을 맘에 담아, 주님 닮아가는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 저를 내어드리며 순종하며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단합니다.

주님을 저의 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기도와 예배로 날마다 나아가겠습니다.

두 분 모두 자신들의 고백을 잘 나누어주셨는데요. 우리 함께 고백할까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두 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실까?’ 이런 생각에 마음이 벅찹니다. 주님은 잃은 것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렇다면 두 분의 회심과 새로운 삶의 결단이 바로 그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삭개오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이며,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이런 은혜의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이곳에 함께하는 우리 사귐의가족 여러분. 이곳에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던 그 과정을 기억하며 오늘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감사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직 회심의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의 삶을 지금도 찾아오시며 이끄시는 주님의 그 마음을 발견하고, 여러분이 다음 세례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부디 우리 사귐의교회가 주님과 함께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