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은 24장까지 있는데, 지난 월요일까지 누가복음 17장 앞부분을 묵상하고 잠시 시편을 묵상하고 있죠. 다시 3월 13일부터 남은 누가복음 뒷부분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까지 누가복음을 설교하고, 잠깐 시편을 보았다가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지난 두 달간 누가복음을 묵상했고, 오늘은 누가복음 8번째 강해입니다. 누가가 어떤 인물인지 그 사이에 잊지는 않으셨죠? 누가는 바울의 선교팀에 함께 했던 사람이고, 의사로 알려져 있으며, 신약 성경의 저자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초기 선교시대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2권의 성경을 기록했는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가복음’이라는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누가에 의한 복음서’, ‘누가가 전하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복음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사렛 회당에서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임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회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바로 사역의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해서 보여주는데, 특별히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회복시키는 메시아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복음을 추상적인 영역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영역으로 가져와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혹자는 누가복음을 일컬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가난은 물질적 의미 뿐 아니라, 모든 결핍과 아픔 등을 의미함을 여러 번 나눴습니다. 즉,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들, ‘프토코스’(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의존한 상태)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어도 나는 살 수 있다고 자기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의 구조적 특징으로 중심부를 형성하는 ‘여행 단락’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행 전까지는 제자 훈련 1단계였습니다. 함께 살아가며 삶으로 느끼고 배우는 단계였죠. 그러나 여행 시작 후 제자 훈련 2단계가 됩니다. 보다 선명하게 제자도를 가르칩니다. ‘제자도’란 제자의 길을 의미하잖아요.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가르침이 부담스러워졌어요. 그러면서 무리와 제자가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당연해요. 예수님의 팬클럽은 예수님의 사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종려나무 부대로는 안 됩니다.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주님의 길을 확실히 선택하는 것입니다. 반반 걸쳐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세상과 동일한 가치와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고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후의 교회 시대에도 동일한 가르침입니다.
(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제자는 한 번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 무리처럼 주님께 나아왔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끝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것이죠. 변화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러 오셨어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잖아요.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육적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만 구하는 아니라, 영원한 생수를 마시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왜 주어졌습니까? 율법교사는 나는 아무런 변화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왜냐면,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자기 생각에는 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해.” 그것을 머리로도 알고 있고, 자기 방식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믿었죠. 그러나 주님은 그가 아직 참된 이웃 사랑을 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행길 가운데 제자가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합니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너희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제자는 변화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지난주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가르침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깨우치고 그들에게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주신 말씀들입니다. 특별히 두 아들의 비유를 보면, 두가지 변화의 모습이 나와요. 둘째 아들(세리와 창녀와 명백한 죄인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돌이킴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라는 것이에요. 첫째 아들에게도 변화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죄인의 길에서 의인의 길로 돌이킨 이후에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17장까지 묵상하였지만, 18장에 넘어가면 바리새인의 문제를 다시 언급해요. 제가 지난주에도 다뤘던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눅 18:11-12)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이야기를 잘 생각해보면 바리새인은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의하지도 않고 정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간음하지도 않았고 성적으로 깨끗했습니다. 일주일에 2번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신앙인이라고 믿었어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3가지를 잘하면 좋은 신앙인이라고 말한다고 하죠. 1) 주일성수, 2) 십일조, 3) 금주/금연. 중요한 문제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지키면서도 하나님 기쁨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으로 다 알 수 없어요. 바리새인의 삶은 좋아 보입니다. 맞아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없죠. 이웃 사랑이 없어요. 이웃 사랑은 단순히 이웃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와 같은 편에 서 있다고 느끼는 자들만을 바라봤어요. 자기 구원을 소중하게 여겨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기와 같은 사람들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명하시는 이웃 사랑은 없었어요. 왜냐면 그에게 이웃은 자기 같은 사람이니까요. 자기와 결이 맞는 사람이니까요. 자신의 바로 옆에서 기도하는 세리는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잃은 자입니다.
그때, 옆에 있는 세리는 뭐라고 기도했는지 아세요?
(눅 18: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고 “자비를 주십시오.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것이 세리의 기도였어요.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8:14a)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물론 이것은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각각의 상황과 위치가 다른 것이죠. 둘째 아들에게 우선 잘못된 삶을 깨닫고 돌아오는 것이 필요했던 것처럼, 세리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우선 필요해요. 그러나 첫째 아들과 바리새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와 가까이 서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첫째 아들의 이야기에 더 찔림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 바리새인, 그리고 어쩌면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이 비유를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닮아 있는가 그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바리새인은 자신의 상대적 의로움을 주장하며 다른 이를 정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오히려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여러분. 이건 굉장히 중요해요. 구원은 참된 회개와 결단으로 가능하죠. 돌이킴. 우리가 그토록 외쳤던 역대기의 치트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악한 길에서 살아가는 자는 그것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세리의 기도가 가진 진정성이 바로 이것이죠. 이 절체절명의 돌이킴이 우리의 신앙에 필요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돌이킴으로 내 삶의 주인이 바뀌고 정말 주권이 바뀌었다면, 그 변화의 진정성이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정말 이들에게 하나님 마음이, 그 뜻이 가장 중요한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보다 내 생각과 내 기분과 내 가치가 더 중요하다면 정말 그것이 믿는 것인가.
바뀌었다고 하면 뭐합니까? 이게 명찰을 바꾸고 호적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우리 신앙이 무엇인지 증언하는 것입니다. 드러나요.
과거 성경을 구원사의 관점에서 읽는 경향이 컸습니다. 성경의 핵심이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죠.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는 것이 목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이것만을 말하겠어요. “돌이키셔야 합니다. 회개해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평생을 이것만 반복하는 신앙도 있어요. 회개하고 다시 무너지고 회개하고 다시 무너지고.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들도 있죠. 이들은 젖을 먹는 것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을 구원사 그 이상입니다. 나의 구원 그 이상이에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보다 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들이 통로가 되어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교회에게 맡기셨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릴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마음을 깨달으면 우리의 돌이킴과 거듭남은 우리 ‘신앙의 끝’이 아닌 ‘시작’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경은 개인의 구원만을 말하는 책이 아니에요. 온 세상의 구원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여주시죠.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너를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신 이유가 있으셨어요. 이스라엘의 구원이 끝이 아니라,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셔서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돌아오도록 하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어요. 그것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어요.
신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죠. 12명이 같이 살아갔지만, 제자 집단은 그보다 컸죠. 12명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는 사건에도 제자가 120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어요. 목격했으니까 끝인가? 아니죠.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그들에게 그 사명을 주셨잖아요.
여러분, 만약 단순히 죄인이 회개하는 것. 그것만이 목표였으면 간단해요.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하늘에서 소리를 내어 “회개하라, 나는 예수다, 내가 오늘 재림할 것이다.” 이렇게 외치면 다 회개해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행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모든 민족에게 전할 도구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세우고 양육할 사람들을 이 땅에서 부르셨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사도행전의 가장 마지막 구절은 바로 그런 초대교회 공동체를 통해 돌아온 사도 바울이 그 사명을 이어받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로마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저는 여러분 신앙의 최종 목표가 ‘나의 구원’에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든 구원에 이르는 것. 그것은 시작입니다. 그것이 내 삶의 최종 목표가 되는 사람은 평생을 죄인에서 의인되는 문턱을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최선일 수 있어요. 그러나 교회의 목표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는 모두 사랑의 빚이 있잖아요.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것에는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게 복음을 전하고, 나를 사랑으로 양육해주었기 때문이에요. 그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이 있습니다. 내가 그 빚을 그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나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의 원리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구원으로 초청하고, 또 나보다 연약한 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섬기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나 한 사람 구원받는 것이 신앙이 목표였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라고도 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주님 또한 제자들을 굳이 3년 동안 데리고 다니시며 훈련시키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즉,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목표는 수적 부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그를 위해 이 안에 있는 자들이 신앙을 잃어서도 안 되고, 밖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 신앙에서 실족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복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추구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 따라 살겠다고 매주 고백하잖아요. 주님이 어떻게 제자를 세웠습니까? 사랑으로 세우셨어요. 섬겨주셨어요. 그럼 우리도 그것이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기에 독생자를 주신 것이에요. 주님도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방법입니다. 사람을 얻는 방법입니다. 사랑에 실패하면 교회는 끝입니다. 여러분, 제가 아무리 여러분을 말씀으로 잘 가르쳐도,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공동체면 우린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여러분에게 이 일을 맡기셨어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인가요? 사랑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아요. 말씀대로 이렇게 행하시면 됩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지극히 작은 사람을 사랑하라. 형제 중에 먼저 그렇게 하라.” 주님은 가르치십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예수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이 고백, 예수님의 향한 고백이 진짜임을 알아요. 그런데요. 여러분. 하나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워요. 하나님은 사랑받기 합당한 분이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드러난다고 말씀하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대부분 잘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옆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작은 자’는 하찮은 사람입니다. 왜냐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웃 사랑을 잘해요. 선택적으로. 내가 좋은 사람, 내가 필요한 사람, 내게 도움이 될 사람에게 잘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방식을 역행하는 것이죠. 피라미드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를 허무는 것입니다. 작은 자는 세상의 견고한 피라미드에서 아래에 놓인 자입니다. 그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왜요? 그에게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니까요.
이웃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내가 원래부터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당시의 견고한 인종 갈등의 한계를 넘어 유대인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견고한 선입견을 넘어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것. 세상이 놀랄만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파는 어떻게 됩니까? 힘으로 하실 거예요? 말과 논리로 하실 거예요? 다 실패할 것입니다. 거기에 힘이 있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사람, 세상이 당연히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해도 된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다른 행동을 하는 것. 그 신비한 놀라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식을 깨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죠. 기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신 것이 기적이요.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이 기적이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상식을 벗어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행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7장에는 중요한 사랑의 실천이 강조됩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눅 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눅 17: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여러분의 인생에서 다른 이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으나 도리어 우리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 그렇죠. 저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도 저로 인해 상처를 받는 때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도 저에게 상처를 무진장 줄 겁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자니까.
우리가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요.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가피하다고 하여 합리화하고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가피하다고 하여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족시키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도 ‘작은 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린아이가 아니라, 약자 전체를 가리킵니다. 영적인 약자, 사회적 약자, 관계적 약자는 어디든 존재합니다. 교회에도 존재해요. 제자 공동체 안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작은 자가 실족하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 약자의 실족함이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의 실족을 주목하십니다. 우리도 주목해야 되요. 나는 제자니까.
공동체에는 전체를 위해 각자가 희생이 필요한 경우가 많죠. 함께 뭔가를 하다보면 모두에게 맞출 수 없으므로 그 안에 누군가의 포기와 희생이 동반되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그 희생과 포기가 연약한 자에게 강요되지 않고, 세심하지 못한 일처리로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제가 봤을 때, 한국교회가 가장 못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저와 같은 목사들이 그 주범이 되어왔습니다. 저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야 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저는 이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강한 자가 결정하면 약자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누가 약자이고 강자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죠. 그때는 다른 이를 위해 먼저 자신을 희생하고 혹은 그 연약한 자의 연약함을 함께 감당해주는 것이 믿음이 강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 닮고 주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1-2절이 우리가 누군가를 실족시키지 않을 것을 가르치셨다면, 3-4절은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주님의 제자인지 가르치십니다.
(눅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눅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누군가 나에게 잘못 했을 때 두 가지를 하라는 것이죠. 첫째는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를 내며 경고하라는 것이 아니죠. 행동을 바로잡고 돌이키도록 사랑으로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용서는 결코 ‘봐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지, 봐주시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그가 회개하면(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이야기에 반발하며 질문하는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에 나오죠? 대답은 4절과 같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태복음에 보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이것이 하루에 7번, 총 490번의 횟수를 의미하지 않음은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막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하라는데 그게 뭘까? 관계 안에서의 내용이에요.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더 신경 쓰고, 다른 누군가 내게 잘못을 범했을 때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용서에 대해서 더욱 강력하게 가르치는데, 그 중에 제가 제일 마음에 박힌 주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18장의 가르침이죠. 일곱 번씩 일흔 번의 횟수에 대한 제한 없는 용서를 말씀하신 후에,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입니다. 즉, 1달란트는 20년 연봉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빚은 1만 달란트입니다. 즉, 20만년 연봉입니다. 이 사람의 노동으로 갚을 수 없는 빚진 자. 프토코스 같은 존재이죠. 임금이 그에게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하니, 그 종이 “내게 참으소서. 다 갚겠습니다” 간절히 호소합니다. 임금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주죠.
유대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로 ‘빚’과 ‘죄’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우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주님께 용서를 구할 때 그것을 사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 용서받은 자가 나와서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100데나리온이면 100의 품삯이니 4달의 월급입니다. 적지 않은 돈입니다. 그 동료도 간구하여 이르되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말하지만, 감옥에 가두어 빚을 강제로 갚도록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임금에게 가서 전합니다.
임금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말하죠. “악한 종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는 다시 그의 빚 용서를 취소하고 다 갚도록 옥에 가둡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이야기가 우리를 얼마나 돌아보게 만듭니까? 우리가 살면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도 없다는 것입니다.
100데나리온도 큰돈입니다. 4달치 월급. 이것을 탕감해주는 것도 세상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것에 비하면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므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용서에는 상대방에 대한 진심 어린 회개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 회개를 보고도 악한 마음을 갖고 용서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인 용서는 ‘선택’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동등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쌍방과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하며 버티고 있는 것도 제자의 태도는 아닌 것이죠. 그럴 때에는 먼저 손 내밀어 용서를 구하는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믿음이 큰 자라 칭찬받는 일입니다. 먼저 손해를 봐야 해요. 왜요?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니까. 내가 제자니까. 부부 안에서도, 모든 관계에서 동일한 원리입니다. 믿음이 더 강한 자가 더 품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신앙의 년차가 아닙니다. 이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 순종하여 먼저 용서를 구하고, 혹은 용서하는 자가 믿음이 강한 자, 즉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의 사랑은 내가 주님께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와 같이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못 해, 나는 안 해”라고 마음속에서 결론지은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는 주님의 그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즉각적으로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항상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묵상해보십시오.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어요. 나는 이런 생각조차 안하는 것이 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아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나와 다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묵상하고 귀를 기울이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느껴져요. 때론 부딪혀요. 정말 하나님이 주인이고 내가 종이라면 주님이 이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자는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입니다.
스데반도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가 죽어가며 자신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그가 착한 사람이어서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스데반 안에 계신 성령께서 행하셨고 스데반이 순종하여 용서를 행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손 목사님께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주동자를 마음에 품고, 그를 위해 탄원서를 쓰고, 그를 양자로 삼아서 계속 사랑합니다. 기적 같은 이야기죠.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생각이 사람에게서 나왔을까요? 손목사님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그것을 묵상하고, 성령님 앞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려놓고 끝까지 순종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이런 사랑을 할 능력은 없습니다.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곧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거나, 쪼잔하게 용서하지 못해서, 말씀 앞에서 제 설교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목표는 이 말씀이 제 삶에 이뤄지는 것에 늘 있습니다. 지금은 더욱 많이 부끄럽지만, 조금이라도 제 삶에 이 말씀의 실천과 열매가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때론 실패해도 제 진심은 진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있기에, 조금씩 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끊임없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웃 사랑은 사실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고자 한다면 이웃 사랑을 할 만한 상황과 기회는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 않으려면 안 보여요. 하지 않으려면 하지 않아도 될 이유밖에 안 보여요.
최근에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화제가 된 기업이 있습니다. <이삭 토스트>입니다. 김하경 대표가 시작했는데, 기업명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독교인입니다. 현재 820개의 점포를 낸 프랜차이즈입니다. 왜 이곳이 화제가 된 줄 아십니까? 세상의 경영방식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프랜차이즈인데 가맹비가 없어요. 프랜차이즈가 대부분 인테리어를 하면서 이윤을 남깁니다. 여기는 인테리어도 각자 하라고 합니다. 몇 년마다 변경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아요. 원래부터 프랜차이즈를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이분이 처음 연 가게가 잘 되면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딱한 사연을 듣고 비법을 전수해주고 가게를 내는 일을 도와주다가 프랜차이즈가 돼버렸어요. 그런데 이분의 인터뷰 가운데 너무 인상 깊은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가맹점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뭄을 만난 나의 이웃’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땅에 살아있음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게 성공이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또 교회 밖의 삶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관계를 맺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파입니다. 거창한 선교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주십시오. 성령의 요구대로 행하며 살아주십시오. 그게 하나님 나라가 우릴 통해 전파되는 가장 귀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과 같은 우월의식과 교만이 찾아온다면 이 말씀으로 승리하십시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종은 주인의 명령을 다 행했다고 우쭐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여기는 것이 종의 태도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명령을 다 수행하고 행하며,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보여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다면 이것을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로 여기는 무익한 종의 태도입니다. “주님, 저는 가치 없는, 쓸모없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런 저를 주님의 나라를 위한 일에 사용해 주심이 그저 감사합니다.” 다른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일에 참여한 것 자체에 의의를 두는 그 모습이 주님의 참된 제자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그 나라를 보여줄 유일한 통로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회복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회복은 말씀 앞에 신실한 종이 된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제자들로 인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교회가 여전히 주님의 꿈을 담은 소망입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주의 말씀을 붙들고 내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여 붙들고 삶으로 녹여내기를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동행하심으로, 우리가 머무는 자리마다 기적 같은 그 나라의 흔적이 새겨지길 소망합니다.
당신의 삶에 그의 나라가! 보여지기를, 느껴지기를, 새겨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