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부활 : 가장 위대한 표적" / 강정규 목사

2022-04-17 · 요한복음 2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은 21장으로 이뤄져 있지만, 21장은 베드로와 관련된 별책부록과 같은 이야기이기에, 실제 요한복음의 내용은 20장에서 종결됩니다. 그래서 20장의 가장 마지막에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목적이 기록되며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요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즉,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초상화와 같다고 했습니다. 초상화의 화가는 실제 인물을 보고 그리는 것이죠. 화가는 실제를 보고 우리는 화가가 실제를 보고 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화가를 통해 실제를 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어요. 이것이 복음서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실제로 본 증인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역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네 편의 초상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각기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복음의 전달자가 되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초상화를 그릴 때, 화가는 인물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각자가 그 인물에게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특징적으로 묘사하게 됩니다. 네 편의 복음서는 각기 예수님의 생애를 다룰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주제로 하여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중 사도 요한이 주목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사건들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표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위 세상의 진리(실체)를 아래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물리적 세계의 현상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일종의 사인(sign)이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일으키시면, 사람들은 그 현상에 우선 놀라고 반응합니다. 당연하죠. 그러나 단순히 그 현상에 주목하면 그것은 ‘기적 사건’일 뿐입니다. 기적에 놀라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표적이란 그것을 통해 계시되는 예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표적 사건 이후에 사람들의 오해가 생기면, 오해하는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치시는 설교를 하십니다.

그래서 표적 이야기들은 대개 ‘표적 + 오해 + 설교’의 구조로 전개가 됩니다. 설교가 예수님이 스스로의 존재를 설명해주심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잡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I am saying(나는 ~이다, 에고 에이미)’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안에는 표적 사건이 7개 등장하고, ‘I am saying’ 메시지도 7개 기록됩니다. 성경의 완전수인 7을 이용해서 완전한 복음이신 예수님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큰 틀입니다.

그런데 표적 사건에도 포함되고, ‘에고 에이미’ 구절에도 포함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죠?

우선 표적 사건부터 정리해 봅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듦(2장),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심(4장), 38년 된 병자 치유(5장), 오천 명을 먹이심(6장), 눈먼 자를 고치심(9장), 나사로를 살리심(11장). 여기까지가 6개의 표적 사건입니다. 그럼 일곱 번째 표적 사건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은 가장 위대한 표적 사건이며, 예수님이 스스로 밝히신 ‘에고 에이미’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에서 구원을 표현하는 방식은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영생이라고 했죠. 그 생명을 얻고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바로 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죽은 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하여 부활의 몸을 입고 예수님 앞에 설 것이고,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면, 우리의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여 예수님 앞에 섭니다. 부활은 생명의 몸을 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추상적이지 않는 실제로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으면 다 믿는 것이죠. 믿음과 소망의 핵심입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람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생명을 누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행복함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나무에 달린 가지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가지에 열매가 맺히는 이유는 나무로부터 생명의 힘이 흘러들어와서 우리에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삶이라고 표현된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정말로 주고 싶으셨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즉, 우리가 뭔가를 행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죠.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만 살아야 하죠. 바로 그 일이 일어난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살아가기 싫어요. 나도 하나님처럼 될 거예요!” 이렇게 하면서 스스로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탄의 거짓된 속삭임이 있었고, 그것에 속은 인간의 무지함과 죄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벗어나면 자기가 주인 되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 결과는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지니까 이제 자기 힘으로만 살아남아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선악과 말씀을 주시면서 경고하셨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지 않죠? 그런데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나요? 우리가 이것을 독사과 먹는 것처럼 이해하면 안 죽은 것이죠. 그런데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를 생각해봐요. 그 가지의 상태가 어떻죠? 죽음을 향해 가는 삶입니다. 생명의 공급이 없으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에게 나타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지음 받았어요. 창조주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행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늘 알 수 없는 공허함에 허덕이게 되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우리가 니고데모 이야기나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본 창조주의 흔적이잖아요. 그분으로 인해서만 채워지는 것.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괘씸해요. 하나님은 사랑으로 지으시고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고 행복을 주려고 하시는데, 사람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하고, 하나님의 품이 싫다고 스스로 떠났으니까요. 그 결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공허하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니, 자승자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생명을 잃고 고통받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다시 회복시킬 방법을 주십니다. 잘못은 우리가 저질렀는데 해결은 하나님이 해주십니다. 왜요? 그것이 진짜 아버지니까. 아버지의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이죠.

제가 올해 우연히 보게 된 영화 가운데, <침묵>이라는 최민식 주연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재벌이에요. 아내는 죽고 하나 있는 딸은 이제 성인이 되었어요. 중년이 넘은 나이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둘은 약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약혼녀가 의문의 차 사고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용의자로 자신의 딸이 지목됩니다. 왜냐하면 약혼녀가 죽는 날, 마지막에 딸이랑 만났거든요. 딸이 약혼녀를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날 싸움이 있었고, 약혼녀가 죽게 된 것이죠. 딸은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여서 아무 기억도 못 합니다. 딸이 피의자 신분으로 입건됩니다. 약혼녀는 죽고 딸은 살인자가 될 상황이죠.

재벌인 그가 있는 힘을 다 동원해서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힘씁니다. 그러다가 CCTV 영상을 입수하게 됩니다. 나중에 그 CCTV의 존재를 검찰도 알게 되고, 그것을 법정에서 틀게 되는데, 그 영상 속 약혼녀를 차로 받아 죽인 사람은 최민식이 연기한 임태산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딸은 풀려납니다. 이렇게 끝나면 흔한 치정을 다룬 영화가 되지만, 사실 이 사건에는 비밀이 숨어있었어요.

임태산이 입수한 CCTV에는 사실 자신의 딸이 인사불성이 되어 차를 운전하다가 자신의 약혼녀가 죽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딸이 범인입니다. 그런데 아직 어리고 미숙한 딸이 살인자로 살아가면 자신이 사랑하는 딸의 인생마저 끝나버릴 것으로 생각한 아빠는... 그 CCTV 속 모습과 똑같은 세트장을 외국에 만들고, 그 주차장 안에 있던 차들도 똑같이 배치하고, 자신의 약혼녀와 가장 비슷한 사람을 섭외해서.... 자신이 차로 죽인 것과 같은 CCTV를 찍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자기가 끝까지 숨기려던 원본 CCTV인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 검사와 판사가 법원에서 보게 만듭니다. 즉, 딸을 대신하여 자기가 살인자로 살아가고자 선택한 아빠의 선택을 다룬 영화입니다.

저는 우연히 이 영화를 보고, 좀 여운이 남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저도 아빠니까요. 물론 이 영화의 설정은 정의롭지도 못하고 그리 아름다운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임태산이라는 인물이 좋은 인물도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자기 딸을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은 공감이 되었어요.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악한 자라도 자식을 위한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찌 그보다 작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모든 방편을 스스로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수도 손바닥이 맞아야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초청과 해결책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지금의 상태가 원래 우리의 상태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물고기는 물 밖을 모르고 물속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도 우리가 느끼고 볼 수 있는 그것, 딱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속 사람들의 오해도 그것이 아닙니까? 주님은 인간에게 허락된 영역 안에서 최고로 선하고 고결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갖고 있었던 니고데모에게 그것을 말해주죠. ‘이것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생명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거듭남(아노텐)’ 위로부터 태어나다.

소생과 부활의 차이도 이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은 상태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몇 개 있잖아요. 대표적으로 나사로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생입니다. 소생은 인간이 처한 죄로 인한 심판인 죽음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소생해도 결국 다시 죽습니다. 결국 죽음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치유사건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없는 삶이 처한 한계의 ‘끝판왕’입니다. 결국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얻었다면 그 죽음을 이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재림하시면, 그때 주님의 나라는 완성이 됩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죄가 있기 전의 상태,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이 성취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죄로 인해 깨어진 모든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다는 성경에서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사망’도 없습니다. 죽음의 증상들이 아픈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 것은 육은 다 소멸되고, 영만 부활해서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식의 이해를 하는 것은 ‘물질’은 악하다고 생각하고 ‘영’은 선하다는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에 불과합니다. 사실 죄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깨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래서 우리는 몸의 부활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부활의 몸을 입습니다. 초대교회가 믿어온 기독교 진리를 담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영혼만 둥둥 떠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몸이 죽지 않고 썩을 목임 썩지 않는 몸을 입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지 못하면 이해할 수가 없잖아요. 믿을 수가 없잖아요. 사두개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부활’을 아예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세력입니다. 그들이 부활을 안 믿었어요. 인간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 하니까요. 부활은 꿈같은 이야기죠.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는 영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부활을 완성하여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예수님의 부활은 신호탄입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하나님 안에 속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도 그 부활에 참여하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의 죄의 시작점이 된 것을 여러분이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시작점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시대로부터 발생한 모든 인간의 이해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부활을 경험해보지를 않았고, 직접 보지를 않았으므로 믿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쓰여진 것이니까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금요일 오후 3시입니다.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6시까지가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토요일이라고 말하죠.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안식 후 첫날’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이날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 제자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에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방문합니다. 아마도 사랑의 마음으로 조문을 온 것이겠죠. 당시의 무덤은 동굴처럼 되어 있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아두었는데, 예수님의 무덤에 입구가 개방된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부활하셨다?’, 아닙니다. 성경 속 인물들도 우리와 똑같아요. 부활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2절에 보면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말하지요. ‘주님을 어디 두었는지...’ 마리아는 예수님을 어디에 ‘두는’ 존재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현재 예수님의 상태를 이제 사람이 여기 두고 저기 둬야 하는 생명이 없는 상태, 즉, 시체로 생각하고 말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로마군이나 대제사장 무리가 군인들을 세워놓고 시체를 빼돌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의 시체를 되찾고자 베드로와 요한 등 제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즉, 그녀는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죠. 이것이 세상 속에서 세상의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마리아를 통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빈 무덤을 확인합니다. 그럼 이들은 어땠을까요? 베드로와 요한 정도의 사도이니,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요 20: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요 20: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서 보고 믿은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본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짜 누가 시체를 가져갔구나’, ‘마리아 말이 사실이구나.’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by faith, not by sight.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보는 것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지만, 아직 제자들은 by sight, 보는 것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그곳에 여전히 남아 슬픔 가운데 있던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이 가시죠.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자,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는데, 여전히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뭐 하시려고요? ‘평강’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기 전에도 제자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문들이 닫혀 있는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영으로 떠돌아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죽을 몸으로 소생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죠. 이때 이곳에 없던 제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이름, 도마. 그런데 그도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제자들이 믿지 않았던 것처럼. 제자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도마는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by sight.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요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그래서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왜 오셨을까요? 도마 때문에 왔습니다.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요 20:27)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에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주님이 오신 것이죠.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실로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도마는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고백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매우 중요한 고백을 드립니다. 여러분, 도마가 이후로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아시겠지만 도마 같은 스타일의 사람은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습니다. 그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인도에는 ‘도마 교회’라는 기념교회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대하시는 진정한 믿음은 ‘by sight’가 아닙니다. 때로는 직접 눈을 보지 못하여도 믿는 것. 그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이 이야기 안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논점을 정리해봐야 합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이 있었던 사실입니다. 대제사장 무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했고 자신들이 그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객관적으로 누구의 말이 믿음직해 보입니까? 신앙을 내려놓고 냉정한 우리의 이성에 충실하면, 제자들의 말보다는 훔쳐 갔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뿔뿔이 흩어졌고, 두려움 가운데 숨어버렸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그럼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가서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왜요? 제자들이 왜 그런 짓을 해야 할까요? 기독교가 유지되어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익이 있나요?

그리고 만약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면,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이 부활 사건 이후로 세상 앞에 등장합니다. 그것도 아주 달라진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제자를 다시 세웁니다. 가룟 유다의 자리가 비었으니까요. 그때 보면, 거기에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행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사도들과 제자들을 만나서 회복시키러 다니십니다. 두려움에 빠진 그들, 신앙을 잃어버리고 실족한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를 회복시킨 예수님의 이야기를 지난주에 봤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120명 정도의 사람이 제자 그룹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사도를 세우는 것인데,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사도를 세운 목적입니다. 즉, 진정한 제자는 부활의 증인이 되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정말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3,000명의 사람 앞에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들이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이죠. 그 믿음 안에서 교회를 이루고, 모든 것을 나누어 쓰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다가 걷지 못하는 자가 구걸하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며 치유합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사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만약, 정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면, 그들이 그 죽은 종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이 계실 때도 두려움 가운데 다 도망쳤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순교하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들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만한 무언가가 있었기에 이들이 이렇게 변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쉽게 변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진짜 뭔가를 경험하면 변하니까요. 저는 이들이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사명을 받았잖아요. 그것이 그를 완전히 회복시키고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었고,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베드로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초대교회 성도들,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그 시대의 성도들의 믿음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 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했던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의 복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의 기록목적대로 말씀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자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말하는 즐거움과 영광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오늘 이곳에서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을 마무리합니다.

다루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으나, 11번의 설교로는 다루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주어진 말씀을 보며 채워가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을 사도 요한이 기록하며 바랬던 것,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보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되찾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도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르는 이 길을 더욱 힘써 담대하게 걸을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