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네. 네. 오늘 고난 주간 또 특세 3일차에이 새벽 기도에 나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 변화하지 않는 그 주님의 크신 사랑을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괜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깨끗해 우리를 깨끗해 한피는 무궁한 생명의 물일세 생명의 구원을 받은 자 하나님 찬양을 예수 예수는 우리를 깨끗해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이게 하시네. 주님의 거룩한 주님의
거룩한 보혈을 날마다 입으로 간증해. 담대히 싸우며 나가세. 천국에 들어갈까지십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예수는 우리를 깨끗해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힘이 한 더 예수는 우리를 예수는 우리를 깨끗해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게 하셨네. 아멘.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은 자로서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우리 다짐하고 선포하며 나아갑시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고합니다. 합니다.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 사랑합니다. 주 날 사랑하사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 다 그것쓰신 내 주오니이 전보다 더 사랑합니다. 내 평생에 내 평생의 힘 의무님 주 예수의 덕을 늘키리 리라 숨질 때에까지 내 할 말씀을 이전보다 더 사랑 우리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그 영광에 그 영광에 달라 나 들어가서 그 풍성한 은혜 늘 감사하리 금멸관세고 나 찬송할이 전보다 가 더 사랑합니다. 내 시간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결국엔 우리가 예수님께 하나님 예수님 이전보다 내가 더 사랑합니다.이 이 말씀을 듣기 원하시고 그러시기 때문에 그 고난의 길을 가신 그 예수님을 묵상하며 또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 하신 일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그 시간들을 우리가 기다리며 함께 오늘의 예배를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시 한번 그 큰 해를 주시려고 다시 한번 그 큰 특권을 누리게 하시려고 하께서 오늘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님 이시간 우리가이 자리에 들어왔을 때보다 주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의 마음에 새기며 나아갈 때 이전보다 더욱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고백이 정말 주님의 기과에 주님의 그 마음 가운데 울려지길 간절히 소망하며 나아갑니다. 주님를 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 길을 걸어가신 그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그 발걸음을 우리가 정말 기억하며이 시간을 통하여 또 한번 말씀하시는 그 주님의 크신 은혜 그 크신
사랑만을 기다리 하나님 오늘 득세 3일차 하나님께 함께 또 예배로 우리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시고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이 예배를 허락하셨사오니이 예배에서 주님이 함께하시고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깊이 놓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말씀의 시간에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필요한 나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옵시고 우리가 그것이 잘 반응하고 순종하며 마음에 새기며 나아갈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네. 네. 우리차이 세배에 오신 분들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 함께 볼 말씀은이어서 요한복음 18장 39절부터 19장 16절까지의 오늘 메일 성경 본문을 같이 말씀으로 나누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특세 4일을 하고 십자가 기도회를 하는데 모두 그날 매일 성경을 따라서 하고 특별히 이번에 십자가 기도회는 우리 아주 오랜만에 토파보기 형식으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또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결단의 세안들을 함께 찬양하면서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통해서 십자가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는 것이 이번 한 주간에 저희의 말씀에 대한 그러한 목표입니다. 예수님은 대상의 가문인 안나스와 그다음 가야와 장인과 사이라고 했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의 종교 권력들에 대한 신문을 받으세요. 그다음에 로마의 총독에게 보내져서 빌라도의 관저로 보내집니다. 이유는 명확해요. 예수님을 단순히 미워하는 것을 넘어서 공식적으로 법정에서 예수님이
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적대 세력이라 한다면 대제상 대제사장과 그의 동주와는 일파들이 대표적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좀 더 지도자 혹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즉 유대 사회의 기득권층인 뭐 대제장 가문 그다음에 사도개인 바리새인 이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처단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즉 기존 유대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영향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흔들고 있다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 질서에 이끄는 자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그러나 유대 사회는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규정하거나 출교할 수는 있어도 사형 집행과 같은 법정인 최종 처벌을 위해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이 적대 세력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극형인 십자가 형에 처하도록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하필 십자가였을까? 십자가형은 로마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냐면 로마 사회 안에서는 로마에 대한
반역자나 로마의 중범죄자에 내리는 즉 정치적인 처형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정치적인 처형의 그런 의미가 있었고 즉 로마의 반역자 혹은 로마에서 극한 범죄자 유대인에게도 또 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신명기 말씀에 따라서 나무에 달린 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제 신명기는 물론 십자가를 앞두고 얘기한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유대인들의 정서에서는 나무에 달려 죽게 하는 것이 가장 저주받은 죽음 어쩌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완전하게 실패한 자 저주받은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이를 위해서는 당시 유대 지역에 파견된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승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제 설교에서 나온 것처럼 예수님을 빌라도가 신문하게 됐을 때 그러나 빌라도의 마음은 뭐였냐면 나는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다라는 것이 빌라도의 입장이었어요. 이제 여러분 말씀을 보다 보면 빌라도의 태도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보면 빌라도가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해서 혹시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뭔가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떤 부분 때문에 빌라도에 대한 옹호를 하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냉정하게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말하거나 예수님의 사건에 대해서 어떤 판결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게는 지금 무엇이 진리이냐가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어요. 그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이
예수님의 사건을 다루는 골치 아픈 문제에 깊이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그 지배 아래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기가 다스리는 정치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겁니다. 밀란이 나지 않는 거예요. 그니까 총독들이 바뀌었거나 분봉왕이 쫓겨났던 사례들은 대부분 다 로마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어떤 로마 안에서 그런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서 로마의 어떤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로마의 가장 끝에 있던이 갈릴리 지역은 그런 부분에서
취약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총독들은이 부분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뭐 쉽게 말하면 우리 군대에서도 지위관이 그 부대에서 어떤 사건이 터지는 걸 가장 염려하고 싫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럼 빌라도는 정의를 세우기보다는이 골체 아픈 사건에서 최대한 자기의 손을 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 오늘 본문은 예수를 반드시 죽이고 싶어 하는 어떤 무리들과 정의보다는 자기의 정치적 안의를 더 중요하게 여긴 빌라도 사이에 철저한 서로의 계산이 부딪히는 장면입니다. 먼저 빌라도가
그래서 이렇게 포문을 여는 것입니다. 한번 말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여덟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도와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서이는 내가 이제와 너희에게 도와주기를 원하니 하니. 네. 빌라도는 나름 계산을 하여서 거래를 좀 제안하는 것입니다. 소위 예수님이 그래 너희 의도도 틀린 건 아닌데 그래도 예수님에 대한 지지색도 있으니 이걸 특별 사면식으로 어 처리하자라는 의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로마에 대한 적어도 반란 세력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종교적 자기들의 종교적 문제로 인해서 어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제기한 것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 이름으로 십자가형을 허락한다는 것은 여러 정치적 이력에 불리한 수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게 그는 이것을 로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 안에서의 문제라고 선을 긋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어떤 주장에 대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이는 또한 역설적입니다. 정장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은 예수님을 왕으로 지금
인정하는 것이 아닌데 아이러 이방 총독의 입에서는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님을 향해서 계속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반복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슬금원이 예수님을 풀어 주기 위해서 사면에 대한 관래나 이런 것들을 꺼내자 유대 지도자들은 이것을이 빌라도의 계략을 알아채고 갑자기 한 인물에 대해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가 바로 바라바입니다. 차라리 바라바를 사면해 달라라고 외치기 시작한 겁니다. 마침 바라바는 십자가의 처형 대상 중에 한 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빌라도의의
중에 애초부터 예수냐 바라바냐 사면의 최종 후보 두 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예수와 바라바 중에서 고르라고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은게 아니라 예수를 사면에서 자신의 난처한 결정을 피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민중들이 유대 지자들이 바라바를이 일에 대체자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럼 바라바는 누구인가 말씀에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를 이되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니 바라는 강도였다. 네.이 이 말씀에 나오는이 강도라는 표현을 잘 해석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왜 지금 갑자기 바라바가 튀어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없어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군중이 예수님 대신에 사면의 대상으로 선택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하지만 빌라도가 지금 짠 판에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예수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강도 바라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라바에 대한 사복음서의 표현에 모아서 보면 이렇게 나와요.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 성중에서 일어난 밀란과 살인으로 된 자 즉바라바가 살인한
것은 맞는데 그가 로마에 대한 반란 중에 로마에 대한 어떤 반란 사건 중에 성중에서 일어난 밀란 사건 중에 살인한 자입니다. 즉 맥락상 로마에 대해서 반로마 저항 운동 조금 뭐 좋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행했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민중의 입장에 보면 그는 일종의 과격한 독립 저항 운동가라고 이해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 민중 일부에게는 바라바가 단순히 흉합범이 아니라 로마에 맞서는 인물처럼 누군가에게는 여겨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시 대중들이 원하는 구원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어요. 그럼 바라바가 상징하는게 뭐였겠습니까? 바라바라는 인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로마의 앞지에서 힘으로서 해방하는 거. 적을 죽여서 승리하는 거. 로마를 무너뜨리는 구원자. 즉각적인 정치적 해방을 위해서 일하는 자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길. 칼이 아니라 십자가. 그리고 단지 로마라는 정치적 압재에서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죄와 악의 문제에서
해방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메시아,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메시아에게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사실 예수님은 지금의 타이밍에는 점점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그가 입성하시면 로마를 향해서 무언가 결정적인 어떤 행동들을 할 줄 아는데 정장 예수님은 로마를 향해서 무엇을 하기보다는 성전의 체제를 뒤은드는 그런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바라바가 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해방자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바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자 민족들은 그 외침을 따라서 예수님보다는 바라바를 사면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요구는 빌라도가 생각하지 못한 거였고 훨씬 더 거했습니다. 결국 빌라도와 유대 사이에이 악의 게임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이깁니다. 빌라도는 두 번째 술을 모색합니다.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한 것입니다. 십자가형까지는 아니더라도 너희들의 분노가 정당하다. 그들의 분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로마도 예수를 죄인으로 취급한다라는 액션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기 시작하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영을 낸 인물이 자기가 되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너희가 친이 되다가 십자가 못 박으라. 나는이 사람에게 그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 빌라도는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여전히 많고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지만 자기가이 결정을 내렸을 때 가지게 될 부담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외칩니다. 우리에게 있는 율법대로라면 이자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르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을 본문에 보면 지금 빌라도의 법정에 모여 있는 민중들의 분노는 어떤 부분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나왔습니다. 종교 지도들이 심어 놓은 사람들이 어떤 선동적
발언을 할 때 민중들이 그 분위기로 쭉 여론이 몰려가고 있는 한번 달아오른 그 분노가 가스러지지않 사그러지지 않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면 빌라도가 제일 두려워하는게 뭐예요? 네. 민중들이 로마의 어떤 정치에 대해서 반란적인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그럼 로마 입장에 봤을 때는 빌라도가 잘 못 다스린 거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두렵을 느낀 나머지 예수님을 찾아가 다시 죄목을 찾기 위해서 몇 가지 대화를 해 봅니다.
근데 또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 뭔가이 존재가 아 보통 사람은 아니어서 함부로 죽이면 안 될 거 같은 또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런 정치적인 그의 줄타기에 방점을 찍는 민중의 발언이 등장합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서 예수를 도와주려고 있었다. 그러나이 사람들은이 사람을 도와주면 성동님은 황백태아의 중심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져라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아를 가족하는 자고네 빌라도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력입니다. 근데 그런 글을
가장 압박할 만한 최후의 수를 지금 던진 겁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면 당신은 로마 황제 폐하를 따르고 있지 않은 겁니다. 황제의 충신이 아닙니다.이 이야기가 빌라도에게는 가장 어쩌면 피하기 힘든 이야기였어요. 자존심이 겨진 빌라도는 종교 지도들과 민중의 요구를 받아주기로 마음 먹습니다. 유대 지사들의 프레임 공격이 통한 것이죠.이어서 한번 내용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이고 그나는 자는 이고는 나를 주실지라 빌라가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요 당신들의 왕이요
그들 외쳤다 없애버리시요 없애버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하시오자 그들에게 말하라 당신들의 왕이 십자가에 못하요 자들이 하이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말하다. 그들의 여러분 여기 잘 보시면 빌라도의 합법을 보면 그는 끝까지 예수의 죽음에 따는 책임을 전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돌리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정치적 수작과 달리 여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가득합니다. 그는 계속 예수님을 유대인 왕이라고 말하고 있고 당신들의 왕이라고 어쩌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은 반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아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로마의 황제만이 유일한 왕입니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는 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자신의 왕과 자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제국의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다른 듯 보이지만 지금이 장면을 통해서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뭐에 하나가 됐습니까? 로마의 황제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에는 결국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럼 오늘이 설교를 가지고 우리의 모습을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는 예수를 죽이라는이 본문을 읽을 때면 너무 쉽게 빌라도와 유대인의 비난하고 끝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정말 달랐겠는가?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어떤 태도를 보였겠는가?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잠깐 물어보시겠습니까?
당신이라면 그때 어떻게 했겠어요? 여러분은 그 상황의 군중으로 여러분이 있었다면 여러분 어떻게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빌라도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내가이 선택을 하는 건 내가 만약에 예수를 나는 죄가 없다고 진짜 생각하고 있는데 죄가 없는 사람을 내가 사면하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을 정의롭게 하는 것이 나의 가족의 피해가 너무 크게 보입니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거 같은 그런 예수에 대한 분노가 가득합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비겁함을 보며 손가락질하지만 우리 역시 때로는 진짜 해야 될 일보다 내 자리에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군중의 외침을 보면서 놀라지만 우리 역시 십자가의 기보다 당장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어떤 것을 더 원하며 그것을 더 붙들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왕입니다라고 말하지만 나의 삶의 실제 선택에서는 세상에서의 어떤 인정하는 힘과 가치 이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혹은 세상에 충성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더 우선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의 재판장은 2,년 전만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똑같이 날마다 선택을 합니다. 오늘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러 점검해 봐야 될 것은 나는 무엇을 진짜 향해 있는가? 나의 충성은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의 선택 속에서 정말 내가 예수를 위해서 때로는 내가
감당해야 될 것을 감당해 내고 예수를 붙들기 위해서 내가 세상에서 말하는 정말 힘과 어떤 옳다고 하는 것을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진짜 나의 삶에 있을 수 있는가?이 이 본문 안에서 우리가 질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이 아침에 예배함으로 시작합니다. 어쩌면 오늘 하루도 우리가 살아갈 때 수많은 선택을 우리는 크고 작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흔히 선택하는 그 방식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왕으로 모신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하는 우리의 삶의 길이 조금은 다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라는 것이 그냥 우리의 예배 시간에만 있는 공허한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다해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따를 수 있는 우리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 그런 마음으로 같이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에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거의 제가 늘이 고난 주간이 되면 한 번씩 부르는 찬양인 거 같은데 얼마나 아프실까라는 찬양입니다.이 찬양의 가사를 볼 때 어쩌면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그 이야기 속에서 주님이 일셨던 또 하나님이 일셨던 그 마음에 대해서 우리가 서보는 겁니다. 우리 찬양을 고백하면서 같이 기도로 또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에 인간들을 위하여 아들을 재물로 삼으시네.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몸과 마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물되신데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 가슴을 독생자 주셨것만 인간을 부족하다 원망할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심명을 자신을 주셨것만 사람들 부인하며
욕할 때 얼마나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심령 자신은 주셨것만 사람들 부인하며 욕할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아픔은 예수님이 당하게 된 십자가에 고통이 주는 아픔은 아닐 것입니다. 그거보다 더 큰 아픔은 정작이 십자가 가진 의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하나님은 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셔서 우리 위해서이 길을 가고 있지만이 길이 가진 의미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도 다른 것만 추구하고 살아가면서 외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아픔입니다.이 이
길이 가진 의미를 알아야지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지 예수님 왕으로 고백해야지 저자 십자가가 주는 그 구원의 대상이 될 텐데 십자가 무관나한 삶을 계속 가고 있는 그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아픔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아픔이기보다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되어서 주님의 길을 선택하고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우리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그런 마음으로 같이 주님 내가 주님의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길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이 하루를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우리 그런 몸으로 함께 같이 기도하며 나가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