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빛과 밤 사이에서

2026-03-19 (올린 날짜) · 요한복음 13장 1~30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네. 평일에 삶이 고단함이 있을 텐데 그래도 오늘 이렇게 또 예배를 선택해서 나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네. 자,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은 요한복음 13장에 대한 우리 메일 성경 말씀을 여러분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과 제들의 유월절, 유월절 만찬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래는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셨던 예수님이 제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니까 이제는 어 제자들도 그렇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어떤 기대감 어 설렘

두근거림 이것이 가득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 제자들은 과연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까? 이런 기대감 속에 더 있었다면 어쩌면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이들의 곁에 떠나야 한다라는 그 사실에 조금 더 마음을 두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 1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읽어 볼까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떠나 아버지 과시고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하라. 네. 수정은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날 때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있습니다.이 시기에 이런 예수님 마음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일을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제대로 헤아린 사람은 앞장에 나오는 향를 부 여인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 앞에 있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일을 알지 못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어 그 사명을 이어가야 될 텐데 그러기에는 부족함도 많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에게는 사탄에게 자꾸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유다의 모습도

보이셨겠죠. 13장은 그런 유다에 대한 이야기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리고 사람의 삶을 잘 지켜보면 우리의 어떤 변화에는 다 맥락이 있습니다. 뭐가 있다고요? 맥락이 있어요. 제가 예전에 그 다윗의 무너짐에 대해서 설교했던 적이 있는데 갑자기 아무런 문제 없던 다윗이 발세바가 목욕하는 거를 봤다고 갑자기 흔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보면 성경에도 그 전에 전조 증상이 나타나요. 제가 이것을 붕괴의 전조 증상이다라고 표현했었습니다.

가련 유다에게는 이런 전조 증상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다 맥락이 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어떤 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어떤 부분에는 왜 저렇게 해라는 반감이 생기고 못마땅한 마음들이 찾아왔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어쩌면 그 세월이 아깝다 혹은 속았다라는 어떤 마음의 불편함 혹은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원망도 싹트고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서도 경험하지만 사람 안에 그런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면 우리가 그걸 느껴요, 안 느껴요? 느껴요. 네. 느낍니다. 여러분, 저도 이렇게 여러분이 예비안의 모습을 계속 보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이 예배하는 모습 잘 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것들도 있고 관계하다 보면 느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 가련 유다 안에 있는 지금 약간 불편한 마음이 아마도 있을 때 그의 눈빛도 좀 전과 달랐을 수 있고요. 말투도 달랐을 수 있고 행동하는 것에도 좀 뭔가 진정성이 없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성경에서

고발하는 것처럼 유다가 돈꾀에서 돈을 훔쳐간 것도 그저 욕심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이 공동체와 별로 같이 앞나를 도모하고 싶지 않고 지난 3년에 내 시간 낭비를 어쩌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보상하려는 마음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12장의이 마리아 향유이 사건은 어쩌면 지금 13장에 나오는이 유다의 그 마음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그 마음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마리아가 보였던 계산하지 않는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그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꿈꾸고 내가 하고 싶은 어떤 것을 그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을 유다가 배반한 이유에 대해서 유다는 원래 이런 어떤 형태의 새로운 혁명을 원했으나 점차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그것과 다른 것서부터 시작됐다고 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는 것을 유다가 누구보다 예리하고 유심히 지켜봤을 때 예수님이 자신이 자신과 다른 것을 꿈꾸고 다른 길을

하 가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겠죠. 아무리 높게 봐도 예수님을 자신의 꿈을 이뤄줄 존재 정도로 봤던 유다에게 그 대상을 향해서이 사람을 내 필요가 아니라이 대상 그 자체를 향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는 마리아의 마음은 유다에게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마음을 모릅니다. 유다는 어차피 예수님에게 그만한 마음을 들여본 적이 없으니까요. 더 나아가 유다는 제자들을 향해서도 그냥 이들이 함께 나와 함께 어떤 혁명의 이룰 동지일뿐

그 이상도 그도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베드로는 유다와 또 다른 대척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런 유다와 같이 마음을이 공동체나 나에게 온전하게 쏟지 않고 아직은 좀 뭔가 확 다가오지 않고 뭔가 혹은 마음이 꽃이 엇나가 있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만날 때가 당연히 있어요. 한 번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확 그렇게 할

수 없고요. 마리아처럼 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유다처럼 우리 안에 함께 있지만 마을 완전히 주지 않고 어떤 분 좀 계산하고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마음은 그런 유다도 예수님의 꿈과 예수님의 공동체 예수님의 사랑과 연합 안에 초청하고 싶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아직 거기에 오지 못한 유다의 마음 당황하고 있는 유다의 마음 그의 영적 상태를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우리도 가까이서 시간에 보내면 알게 되는 그것을

예수님이 모르셨겠습니까? 유다에게서 느껴지는 관계적인 냉기, 영적인 냉소, 마음의 위기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우리 안에도 언제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유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뭐 완전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 아니라 우리 안에 유다의 마음이 얼마든지 있고 혹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런 유다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유다는 예수님의 섬김과 유다가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 또한 말씀의 권명 가운데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의 발에 씻기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씻셨을까요? 제가 봤을 때는 어쩌면 좀 엄지 힘을 좀 더 줘서 야, 너 좀 깨달아라고 하면서 약간 때가 나올 정도로 유다의 발을 시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발에 씻어 주라는 관계를 씻어 주는 관계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발을 시켰다는 것은 뒤에 나오지만 내가 나와 관계가 있다라는 예수님 마음 표현입니다. 즉 유다에게도 예수님은 그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라고 했던이 말씀은 상대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리한 질문을 한 가지 던질 수 있습니다. 어 그런데 어차피 유다는 배신나의 사람이었던 것 아닙니까라는 질문이에요. 한번 우리가 오늘 그 말씀을 좀 더 분석해 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번이어서 읽어 볼까요? 시작. 이 한자는을 필요가 없이라 기하라 너희가 하나를 할 자가 있다 하시라 그러므로 당히 하지 아니하다 하시라네 그러니까 예수님은이 세족식을 행하시면서 유다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기 안에 내가 나는 차별하지 않고 나는 어쩌면 기대감을 가지고 발을 다 시켜줬고 발을 다 시켜줬던 것은 너희가 이제는 전과 다른 회심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만다는 아니야. 발은 시켰지만 아직 마음이 나에게로 완전 돌아서지 않은 사람이이 안에 있어. 이런 얘기잖아. 그의 마음 안에 다뤄야 할 엇나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여전히 알고 계십니다. 그가 제자 공동체 안에 함께 있지만 오늘 시탁의 자리에 함께 참여하고 있지만 함께 예배하고

사역하고 있지만 그럼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비슷한 언급을 하시는데요.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이를 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들이 아라 그러나내는 자가 어다를 말하 것이니라 지금부터 이하기 전에 너희에게 이할 때에 내가 인을 너희가게 하려 하느라네 여기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밝이 들었다 하는 성경의 말씀이란 것은 시편 말씀이에요.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시는데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의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그가 배신과 멸시를 당한다는 내용입니다.이 말씀은 시편에서선 다윗에게 적용됐던 건데 다윗을 넘어서 메시아에게 적용되고 성취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이 얘기를 하신 이유 뭐냐면이 말씀을 너희가 기억하고 있다면 만약에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하는 증거가 될 거라는 이야기예요. 즉 예수님에게 배신이 일어났다고 예수님이 능력이 없거나 뭔가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리더가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사실 이걸 통해 드러난다라고 예수님 말씀하고 있는 증거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어, 그리고 우리는 또한 이런 맥락에서이 성경 말씀을 쭉 읽다 보면 성경이 혹시 유다에 관련 특별히 운명론을 말하고 있다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정한 대로 다 되는 거 아니야. 여기서 말한 운명이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결정한 대로 그 결정대로 우리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이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 보면 어 조금은 그렇게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하나님은 거기에 대한 강력한 구원 계획 프로젝트를 갖고 계셨지만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앞두고 어떻게 기도하는지 아시죠? 어떻게 기도합니까? 내가 감당하게 하다라고 기도해요. 피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히브리서는이 예수님의이 사역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한번 주의 있게 잘 읽어 봅시다. 시작. 이실 때에 자기를 죽으면서 이미 범하시기에 친한 복과로

과을 고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드리시며 그가 드리시도 같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서들 다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시고네이 말씀은 어떤 말씀하고 있냐면 예수님께서 감당하셨던 그 십자가조차도 하나님이 결정했으니까 뭔가 운명론적으로 작동된 결과라고 보기보다 예수님의 순종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순종이란 것은 자기 결정권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렇죠? 내 결정권이 전제되 있어야지 내가 순종할 수 있어요. 십자가조차도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결과라면 유다의

배신이 유다와 무관한 운명론적 작용일 수는 없습니다. 즉 유다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선택하여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요한복음은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유다가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전조 증상과 함께 그가 점점 더 돌이켜할 때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더 사탄의 권세 아래로 걸어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의 발을 씻기시고 또한 경고하시고 유다가 아라 사인을 주시는 것은 유다를 향한 마지막

돌이킴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 전수님이 저를 배신하기로 지금 마음 먹었습니다. 근데 전사님 배신할 대상인 내가이 배신을 알고 있다는 것만큼 강력한 방지턱은 없어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주시고자 한 사인은 사실 어쩌면 유다가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27절에 보면 결국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지속적인 잘못된 선택들이 결국 그의 마음을 사탄에게 완전히내어 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내 마음을 사탄에게내어 줄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이것이 가능하다고 인정할 때 우리가 내 마음을 하나님께내어 드릴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있는 거예요. 반대로 말하면 내가 내 마음을 하나님께내어 드릴 수 있다면 반대로 내가 내 마음을 사탄에게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이 본문은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너짐에는 과정이 있고 그 안에 있는 돌이킴의 기회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분에 혼동하다 보니까 가끔 이렇게 단정하곤 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혹은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미 늦은 거 같아. 내 상태는 이미 정해진 거 같아.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운명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운명론에 우리가 왜 자꾸 빠지냐면 운명론은 책임으로부터 회피가 가능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에 대해서 이건 내가 한게 아니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회피가 아니라 바른 선택이에요. 가장 중요한 돌이의 기회는 오늘 말씀에 나오지만 말씀 앞에서 주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하는 그 순간이 내가 돌이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입니다. 예배의 시간마다 또 이렇게 묵상하면서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 순간 순간들을 유다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돌이키기 바라면서 권면하셨던 그 말씀처럼들을 수 있어야 돼. 깨달음의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이키면 우리가 주님께 한걸로 나가설 수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주께

향해서 돌아서면 주님께 내가 한걸로 나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주님께서 우리 붙으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무너진 분을 고치십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은 내가 나를 방치하면 안 합니다. 유다의 배신을 이야기하면서이 예수님 마음이 어땠는지 21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하시고이 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거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살리라 하시. 네. 유다의이 모습들이 얘기를 하면서 괴로워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성경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다가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주로 태어났구나. 그렇다면 느끼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악격이 그냥 악격을 한 거니까요. 그 예수님에게 유다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유다를 버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이 유다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는데요. 유다에 관한 에피소의 마지막 절입니다. 읽겠습니다. 시작. 네. 여러분, 요한복음 3장 앞에 있는 요한복 3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의 죄다. 유다에게도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나 유다의 행위가 악하였고 유다는 그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어떤 의미입니까? 리고데모의 밤. 그다음에 오늘 유다의 밤. 영적인 어둠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만약에이 구절이 이렇게 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서 부끄러움으로 통하며 펑펑 울었다. 만약에 유다가 그 한 조가를 받고 나가서 깨닫고

마치 베드로가 나중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왜 이렇게 했을까? 내가 왜 이런만 먹었을까? 통의하며 우울 수 있었다면 적어도 유다의 삶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는 유다의 밤 어둠에 붙잡히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하셨는데 결국 그는 밤을 택하여 떠나갑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안에도 자꾸 찾아오는 밤의 영향력, 밤의 세력, 내 안에서 싹트고 있는 그런 마음들이 혹시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나에게 있는 나의 내면의 태도는 어떤 방향 가고 있는지 나의 영적 상태를 잘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유다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어둠에 빼앗껴 있는 나의 모습, 나의 태도 냉소적이고 계산적인 마음들이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이 시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로부터 벗어나 결단하여 바꾸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라는 날마다의 갈림길 안에 오는 있습니다. 요단은 밤을 선택했고 베드로도 비록 넘어졌지만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내 마음의 붕괴, 전조 증상들이 혹시 나에게 있다면 무너짐이 오지 않도록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다시 한번 나를 점검하고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이 예배 안에서도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머물러서 그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혹시 내가 뒤돌아서서 있는 것 같 느껴지고 주님부터

지금 한 걸음 멀리 있는 거 같다면 용기 내시고 결단하셔서 주님께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