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흔적" / 강정규 목사 (2022.01.16) - 1부

2022-01-16 · 요한복음 2-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요한복음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창조주이며, 세상에 찾아온 빛이라는 것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어서 2장부터는 그분이 이 땅에서 행하신 표적의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2-12장까지 기적과 같은 사건이 기록되는데, 학자들은 이 부분을 ‘표적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표적(shmei/on)은 기적과 강조점이 좀 다릅니다. 이것은 기적적인 사건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을 통해서 밝혀지는 예수님의 정체가 중요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단서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즉,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찾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표적의 책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거나, 자신에 대해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면 언제나 사람들 안에서 오해와 논란이 발생합니다. 즉, 그 상황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한 것처럼, 복음서는 각 독자들에게 복음이신 예수님을 가장 잘 전할 방법을 우선하여 고려한 ‘수사학적 구성’을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사건의 실제 진행순서보다는 필요하다면 사건의 재배치를 통해 의미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서도 ‘플래시백’이라는 기법을 사용합니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결론을 영화 도입부에 먼저 배치하는 등의 효과를 통해서 극적인 요소와 흥미있는 구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죠. 쉽게 말하면 복음서의 구성도 그와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통해 다 소개하지 못하지만, 요한복음을 공부해보면 그 구조가 놀랍도록 탁월합니다. 어쨌든 저도 신학만 20년 정도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름 신학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대하면 대할수록 정복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깊이 앞에 압도당합니다.

개척 초기에 제가 갖고 있던 성경을 보는 눈과 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의 깊이는 다름을 느낍니다. 개척 후 담임목회를 하는 5년 동안만 하더라도 수백 편의 설교를 준비 해왔으니, 자연스럽게 축적된 이해함의 깊이가 더 있는 것이죠. 그러나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그 깊이 앞에 좌절하기보다는 그것이 제게는 기대함과 소망함이 됩니다. 내가 이것만 붙들고 살아도 평생을 말씀을 따라서 쫓아서 살아갈 수 있겠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사람의 힘으로 기록할 수 없는 그런 글이라고 느낍니다. 작정하고 써도 이렇게 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성령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 이 말씀이 오늘도 우리 안에 생명의 양식이 되고 살아 움직이는 주님의 음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분을 의지하며 마음을 열고 말씀을 따라가봅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 (요한복음 2장)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는 본래 갈릴리 사람들이고, 호적 명령에 따라 이동하던 중, 부득이하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여행길에 아이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조차도 구약의 성취로 사용된 것이죠.

갈릴리 지역에 속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님이었기에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갈릴리 출신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유대 지역이죠. 유대 지역이 수도권이고, 예루살렘이 중심도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는 변방입니다.

예수님의 첫 표적은 갈릴리 가나에서 벌어진 혼인잔치가 그 배경이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결혼은 마을의 잔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마을잔치였던 것을 아시니,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중동지역의 잔치에 있어서 포도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날 만큼은 마을사람 모두가 마음껏 포도주를 마시며 함께 축하하는 그런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결례입니다. 마리아가 그 이웃이 처한 어려움을 알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사양하지만, 결국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첫 번째 표적 사건입니다.

그럼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사건이 도대체 하나님 나라의 일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혹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과는 어떠한가요? 가나 혼인 잔치 표적이 진정으로 뜻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을 ‘잔치’에 비유하곤 합니다. 특히 이사야서에 보면 메시아의 나라는 좋은 포도주가 가득한 잔치와 같다고 말합니다.

원래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잔치와 같습니다. 그분이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그분께 속하여 있으면 엄마 품에 잠든 아기와 같이 모든 것에 있어서 평안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세상인 에덴에는 결핍이 없었습니다. 부족이 있어서가 아니라,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죄와 손잡습니다. 결국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끊어져 버린 인간의 삶은 결핍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삶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마주하며 살아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 거하는 것이 ‘잔치’와 같은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은 우리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표상을 사용합니다. 구원을 잔치에 비유한 것이죠. 잔치 중에서도 가장 흥겹고 행복한 것은 결혼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첫 표적이 결혼잔치를 완성하는 일로서 나타난 것은, 이제 예수님에 의해 구원의 잔치가 열리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분이 이 잔치를 여셨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는 세부적인 2가지 교훈이 더 있습니다. 첫째, 혼인 잔치 마당에는 여섯 개의 돌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위한 것이었다고 6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몸을 씻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항아리들이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예식을 좋아하는 유대교의 신앙은 포도주가 떨어져서 파장하는 잔치와 같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이 표적 사건이 행해지는 과정에 두 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요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기적 사건에서, 무슨 말씀이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그 일의 도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도구는 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인이 됩니다.

(요 2:9a)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2. 성전 청결 (요한복음 2장)

앞선 잔치는 일종의 복선과도 같습니다. 바로 유대교 신앙의 한계와 오류를 드러낸 것이죠. 유대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실체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처소입니다. 다만, 거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죠. 두 번째 이야기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요한복음에서 가장 파격적으로 순서를 재배치한 사건이 성전청결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성전의 역사를 이제는 조금은 아시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성막이 성전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첫 성전은 바벨론의 공격으로 무너집니다. 포로로 끌려가던 때이죠. 페르시아 시대 귀환한 백성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것이 두 번째 성전입니다. 구약 말미의 일이죠. 그리고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전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그 성전을 보수하며 더 크게 증축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던 성전은 바로 헤롯에 의해 리모델링 되고 있던 성전입니다. 공사는 46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전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하십니다. 후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성전은 파괴됩니다. 약 40년 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파괴하죠. 그때 남은 성전 외벽 일부가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볼 수 있는 통곡의 벽입니다. 성전은 다 무너지고 외벽이 조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는 성전 파괴 이후입니다. 이미 성전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성전이 없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성전이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건물 성전 시대가 끝난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복음의 앞부분에 배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요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여러분. 성전 제사를 위해 이런 행위들이 필요했을까요? 정답은 필요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흩어져 살아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1년에 한 번이라도 성전에 방문하여 예배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것이 있죠. 동물입니다. 빈손으로 나와서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물도 아무것이나 드릴 수 없었습니다. 흠 없는 것을 드려야 했죠. 그런데 당시에 차도 없는데, 멀리 사는 사람이 집에서부터 동물을 데리고 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는 도중에 동물이 다치거나 죽으면 다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 감람산에는 성전 제사를 위한 시장이 형성됩니다. 여기서 합법적인 상행위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제사에 사용할 동물을 구입하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 성전에서 사용되는 돈으로 환전을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 시대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감람산에 있던 시장을 성전 뜰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전 뜰이 시장으로 변했고, 그 시장의 관리를 성전의 관리를 담당한 대제사장 무리가 갖게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막대한 수익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동물 제사가 잘못이 아니고, 판매도 잘못은 아닙니다. 율법에 따라 성전세를 내기 위한 환전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자신들의 이익으로 삼기 위해서 성전 안으로 가져와서 행했다는 것은,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여러분. 교회에서도 헌금을 드리는 의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의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좋은 것일지라도 변질시키는 것은 사람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여러분들도 잘 이해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본질을 잘 지켜내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도 표적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요 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유대교의 한계와 건물 성전 시대의 종말.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예수님은 건물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삼일 동안 일으킨다는 성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이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 이야기를 듣는 유대교의 관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도 알지 못했고, 부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 예수님은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며 이스라엘과 예배를 통해 만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섬겨야 할 종교인들이 타락했고, 성전은 시장과 같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섬기는 예배자들과, 예배의 처소가 모두 변질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종말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성전에서의 제사를 통해 그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체 안에 거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성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후에 육으로 오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성령. 그러므로 성령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건물 성전의 종말을 고하는 이 사건은 우리에게는 축복이며, 이 또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인 것입니다.

3. 랍비 –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요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에 대한 성경의 소개는 그가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이라 함은 율법에 정통한 종교인이었다는 것이고,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함은 그가 산헤드린 위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일부 자치 권한이 주어졌는데, 70명의 위원과 대제사장 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가 유대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것이죠. 일종의 국회입니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에서는 굉장히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던 셈이죠. 그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밤’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밤에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무명의 젊은 선지자를 찾아간 것은 이목을 끄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도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가 ‘밤’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아직 그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이죠. 영적 어두움 가운데서 그는 해답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에게 해답이 필요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삶의 해답을 찾는 일조차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갈급함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그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니 그 공허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러므로 저는 그 갈급함을 창조주의 ‘흔적’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 모든 인간은 그 공허함을 마주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마주하는 실존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공허함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아도, 외부와 접촉하지 않은 종족에서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신을 예배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 세계의 유물을 봐도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장례 문화를 나름의 방법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죽음 이후의 어떤 세계에 대한 알 수 없지만 갈망함이 있습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창조주의 흔적이다.

그런데 사탄도 인간의 그 공허함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사탄은 인간 전문가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라고 속삭입니다.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다고 말입니다. 즐거움, 사람들의 인정, 힘과 권력, 부와 성공 등으로 그것을 채우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저는 세상이 여전히 지금도 우리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아직 못 누려봐서 그래.”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행복과 만족을 얻고자 애씁니다. 잠깐은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갈급합니다. 조금 더 가면, 조금 더 맛보면 괜찮을까? 쉼 없는 경주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러다가 지치면, 이내 그 공허함에 머뭅니다. “삶이 다 그런 거지.” 끝내 그 공허함 속에서 살다가 갑니다.

바울도 그러한 헛된 발걸음으로 삶의 상당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니고데모는 더욱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누가 보더라도 흠모할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사회적 성공, 인정, 자신의 지식이 오히려 예수님을 찾는 발걸음을 늦춥니다. 왜냐하면 약간의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그것이 잠시간의 자랑일 뿐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인생의 공허함은 창조주가 우리를 부르는 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찾아야 해. 나에게로 와야 해”라는 메시지가 느껴지도록 피조물인 우리에게 주신 그의 흔적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흔적을 고민했습니다. 산헤드린 위원으로, 바리새인으로, 인간이 누릴 최고의 영광을 누렸지만 끝내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고민해봐도 답을 얻지 못하였기에, 그 문제의 해답을 찾아보다가 예수께 나아갑니다.

니고데모의 말 속에 문제가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즉, 임마누엘이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분을 마주하고서도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적 동의까지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해왔던 메시아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 예수님 앞에 아직 자신의 삶을 맡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잘 나왔어요. 그러나 아직 내딛지 못한 한걸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저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적으로는 예수님을 알아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분께 내 삶을 맡기지는 못한 채 그 근처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오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니고데모들이여. 자신들의 삶의 해답이 되는 예수님 찾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니고데모는 이 만남 이후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야곱의 우물 –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 4장)

그런데, 여러분. 데칼코마니처럼 마주한 요한복음 4장에는 더욱 놀라운 메시지가 있죠. 그것은 사마리아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모습과 상황이 니고데모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상하게, 그렇게 고차원적인 질문을 품고 답을 찾아 나서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하루하루 쉼 없이 살아갈 뿐이죠. 인생의 해답을 찾는 여유가 사치인 경우도 많습니다. 우물가에 있던 여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종교를 갖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갔던 사람이라면... 이 여인의 삶은 정반대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기에 어려움이 없는 유대인 남자로서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다면... 이 여인은 유대인과 원수지간인 사마리아 사람이요, 여인입니다.

당시의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사실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스스로 꺼리고,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입니다.

니고데모가 스스로 가진 체면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찾을 생각조차 못하며 살아가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도 삶에 대한 여러 회의감과 고민들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현실은 늘 똑같이 돌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세월을 낭비하며 주어진 삶을 방황하듯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올 수 없는 그녀이기에, 예수님이 이번에는 그녀를 찾아가십니다.

이 여인에게도 있는 창조주의 흔적. 그녀는 삶의 공허함을 나름의 방법으로 풀어가고 있었어요. 그것은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안에는 수많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이 다 기록되지는 않지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어떤 남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합법적인 남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추구한 어떤 방법으로도 마음 속 깊은 곳의 갈급함은 채워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뻔한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우물가에서 만난 유대 남성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일이 예수님의 수작으로 보였는지, 혹은 사마리아 땅에 와 있는 예수님의 모습 자체가 금기를 깬 것이기에 그랬는지, 그녀는 철벽을 치고 예수님과 거리를 두며 냉소적으로 대할 뿐입니다.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 세상이 만들어놓은 구분. 경계. 벽. 때로는 우리는 스스로 그것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듣는 것은 저희 집안이 다 불교라서. 혹은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상처와 부정적 이미지들이 그런 벽이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벽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5. 해결책

니고데모와 우물가 여인. 각자가 예수님을 만난 삶의 자리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사람도 다르지만... 그들 모두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가 되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주신 가르침은 거듭남에 대한 것입니다. born again.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황당했을 것입니다. 자신보다 더 어린 예수라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니 황당하죠. 니고데모가 정중하게 다시 묻습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여기서 ‘거듭나다’라는 단어는 ‘아노텐’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가진 의미가 ‘다시’라는 것인데,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즉, 두 가지 이중적 의미가 함께 해답이 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똑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생명 안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던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면서 헤매고 있으니, 다시 그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안 보여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서 바람이 있는 줄 안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그 변화를 보면, 우리가 그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어도, 그 성령으로 인해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듭남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 이것은 지금 우리의 이 결핍된 삶이 계속 연장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끊어진 가지가 다시 하나님의 생명에 잇대어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것을 갖고 살아가면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잇대어 살아가면, 내가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고자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영생을 주시려고.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생과 심판은 죽음 이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후세계를 바꾸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부터입니다.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하죠. 죄의 습성은 선을 싫어합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으면 같은 죄인이 편해요. 나와 다른 존재, 선은 불편해요. 왜 그러냐면 죄인이 죄인을 만나면 죄의식이 사라지는데, 선한 사람이 있으면 정죄를 받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악은 악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를 미워합니다. 예수라는 존재는 불편합니다. 내 삶을 바꾸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지거든요. 그것이 죄가 우리 안에 새겨놓은 생각이고 기준입니다.

죄에 잇대어 살아가며, 자기 기준대로 살아가고, 그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긍휼함을 갖고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신 이유는 구원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명에 잇대어 살아가며,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아가고 서로를 바라보게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음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뀔 기대감도 갖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치유를 경험해요. 온전함과 거룩함이 회복됩니다. 자유를 느껴요. 이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즉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는 심판을 이미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삶 자체가 심판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삶, 잃어버린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이 심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물을 달라고 하던 예수님이, 도리어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합니다. 바가지도 없는 예수님이 물을 주겠다고 하니 여인이 황당합니다. 니고데모가 느꼈던 황당함과는 다른 것이죠.

복음은 처음 들으면 황당합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와 여러분은 운이 좋아서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이것을 들었기에 거부감이 없는 것이지, 성인이 되어 나름의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은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황당함을 넘어서야 해요.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를 주겠다는 이 이야기가 여인에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여인은 ‘헛소리하는 이상한 사람’ 만났다고 여기며 돌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남편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여인은 예수님과 더 대화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을 바꾸는 시작점이 됩니다.

어쩌면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이날의 만남은 우연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를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아서 만나는 것이 아닐 수 있어요. 예수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생명력을 잃고 타락한 유대교. 신앙의 가장 기본인 성전마저 본래의 뜻과 멀어져 버린 종교의 타락. 예수님은 유대교와 건물 성전의 종말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필요가 강력한 그 시대가 되었기에, 때가 차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생명의 빛을 비춘 것입니다. 어둠뿐인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첫 표적인 가나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 그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는 그 시대의 극과 극의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 하나님 없는 삶은 공허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에는 구별이 없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산헤드린 공의회 지도자나 동네에서도 소문난 여인의 삶이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창조주가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없는 우리의 삶에 남겨진 ‘흔적’이 있습니다. 내 삶이 거룩하고 선하게 보여도 그것으로 내 삶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삶이 부정해 보여도 주님은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동족 유대인은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했고, 그 땅에 들어가면 부정해진다고 여겨서 그 땅을 피하여 한참을 돌아서 다니곤 했습니다. 그곳은 부정한 땅이라고 세상은 구별합니다. 세상은 나와 다르면,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포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정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이 사마리아 땅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오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만나면 그 안에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하늘에 잇대어 사는 영원한 생명의 삶과,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영원한 생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해서 누군가에게는 거듭남의 초청이, 누군가에게는 갈급함 가운데 충만함이,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걷는 길에 대한 확신과 위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