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는 3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은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구브로와 갈라디아 지역을 여행한 것이었고, 2차 선교여행은 팀이 나눠지죠. 바울을 기준으로 보자면, 실라와 함께 팀을 이뤄서 1차 선교를 했던 갈라디아 지역을 한번 돌아본 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따라서 ‘마케도니아-아가야-헬라’라고 불리는 지금의 그리스 지역 선교를 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죠.
2차 선교여행 중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사역지는 ‘고린도’였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 한 도시를 위해 사역합니다. 나중에 작성된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이곳이 향후 바울의 아픈 손가락이 된 교회 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만큼 바울이 애정을 쏟았던 곳이기도 하죠.
고린도 사역은 실라와 디모데 뿐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팀을 이뤄 사역했습니다. 2차 선교를 마치며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서의 삶을 정리한 후, 바울의 사역에 오롯이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함께 떠납니다. 바울 만나서 인생이 바뀐 것이죠.
모든 선교여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고 ‘안디옥’으로 귀환합니다. 그러므로 2차 선교여행을 마치며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중간에 경유지로 에베소를 거쳐서 귀환하게 됩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입니다. 에베소는 2차 선교여행의 목표 도시는 아니었고, 돌아가는 길에 들른 경유지였으나, 그 짧은 여정 속에도 바울은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행 18:20) 그들은 바울에게 좀 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으나, 바울은 거절하고,
(행 18:21)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작별 인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났다.
(행 18:22) 바울은 가이사랴에 내려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문안한 뒤에, 안디옥으로 내려갔다.
바울은 에베소에 갔을 때, 이 도시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이 도시에 머물러 복음 전도사역을 맡아서 행해주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 교회로 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세 번째 선교여행을 출발합니다.
이 시기를 연대기로 정리해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AD 30년경이고, 바울의 회심과 준비의 시간이 지난 후, 1차 선교여행을 떠난 시점은 47~48년입니다. 그 후 예루살렘 공회를 마치고, 2차 선교여행은 49~52년까지 이어졌고, 이어서 52년 후반기에 3차 선교여행이 시작된 것이죠. 그러니 바울이 세 번째 선교여행을 시작한 시점은 예수님의 승천 후 2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점입니다.
(행 18:23) 바울은 얼마동안 거기에 있다가, 그 곳을 떠나 갈라디아 지방과 부르기아 지방을 차례로 두루 다니면서, 모든 신도를 굳세게 하였다.
3차 선교여행의 시작 기록이 심플하죠. 안디옥에 잠시 갔다가 그곳을 떠나며 3차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1차 선교여행 때 복음의 씨를 뿌렸던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먼저 갑니다. 2차 선교 때도 이곳을 방문하여 교회를 돌보았고, 그때 디모데를 동역자로 발탁합니다. 3차 선교여행이 시작하자 다시 그곳에 갔다는 것은 바울이 자신의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한번 만났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목양하기 위해 힘썼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풍삶초를 하면서 복음에 대해서 나누고, 다시 가서는 풍삶첫을 하면서 초기 양육을 하고, 다시 가서 풍삶기를 하면서 제자로 세워가는 일을 하는 것이죠. 제가 바울은 사람을 세워갈 줄 아는 전문가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단계별로 성장을 돕는 것이죠.
3차 선교여행 이야기와 함께 성경은 에베소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볼로라는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행 18:24)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왔다.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행 18:25) 그는 이미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다.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아볼로가 가진 강점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어요. 그가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성경에 능통하지만, 복음을 선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구분될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 말입니다.
제가 풍삶초를 의사의 ‘청진기’에 비유합니다. 우리교회는 신앙경력이 수십 년인 분이 오더라도,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로 우리교회에 부임해서 오더라도 풍삶초를 하면서 복음에 대한 이해를 나눕니다. 아볼로 같은 경우가 얼마든지 많기 때문입니다.
2차 선교여행 후 에베소에 남아서 사역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아볼로가 교회에 왔을 때, ‘청진기’를 딱 데 본 것이죠. 그러니까 그가 장점도 많은데, 복음의 이해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를 도와주려고 합니다.
(행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하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의 말을 듣고서, 따로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그를 데려다가 양육합니다. 아볼로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볼로가 두 사람의 가르침을 거절하지 않고 잘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볼로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아볼로는 학문과 성경에 뛰어난 유대인 출신입니다. 그런 그가 생면부지 이방 출신 여성 브리스길라에게서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아볼로의 놀라운 겸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배움을 가장 막아서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자는 배울 수 없습니다. 아볼로의 겸손을 기억하십시오.
아볼로는 에베소 교회에서 신앙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성장한 후, 함께 사역하다가 고린도 교회를 품고 떠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를 위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여 그를 파송합니다. 고린도교회는 2차 선교 후, 리더십의 공백을 겪고 있었기에 아볼로가 그곳으로 가서 그 부족함을 또한 채우게 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의 부족함을 채우는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는 유명한 말씀이 등장하죠.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볼로가 고린도로 건너간 이 시점이 바울이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돌아보던 시점이었고, 드디어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약 1년 전 에베소를 경유할 때,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약속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 이야기를 보면 재밌습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똑같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소위 에베소 교회 안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묻습니다. 제자들이라는 표현에 미루어 볼 때,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또한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이들은 아볼로보다도 더 심각했어요. 왜냐하면 성령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행 19:2)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저도 여러번 경험하지만, 신앙생활을 정말 열심히 하면서도 아주 초보적인 것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이가 없거나, 정리할 기회가 없어서 모르고 있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모르고 열심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반쪽짜리 신앙이 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가장 급한 전도는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의 전도입니다. 우리는 간혹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를 교회 데리고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렇죠. 그러나 전도는 ‘복음으로의 초대’입니다. 진리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전도는 교회 안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볼로도 그렇고, 본문의 제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그렇고, 교회 안에 있으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도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우면 성장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강점은 열정입니다. 반면 약점으로 지적받는 것이 교회 안의 반지성주의입니다.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 열려있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열정적이긴 하나, 방향을 잃어버린 경우가 있어요. 반대도 문제죠. 알지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문제죠. 이것에 대한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감추고 싶어 하죠. 사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래도 초보신자는 오히려 이 부분에서 자유한데, 교회 안에서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 온 분들은 자신이 ‘복음과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도, 모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의 연차가 길고, 그로 인해 직분도 받아서 섬기다 보면, 오히려 나중에는 그런 외적인 지표들 때문에, 더 배움의 길이 막히기도 합니다. 사역과 직분 등 외적인 부분이 내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의 교회에서는 잘 점검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그대로 쭉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저 예배 잘 참석하고 봉사하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으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면, 자리에 앉아서 잘 듣고 있는 것으로 마치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죠. 신앙에 대해, 진리에 대해, 복음이 선명하지 않으면, 교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눠도, 내가 자신 없으면 다른 대화 주제만 말하면서 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희교회는 그런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죠. 일대일로 양육도 해야 하고, 여러 형태의 나눔도 합니다. 양육을 하면서 내가 아직 모르는 부분들이 드러나게 될 수도 있고, 나눔을 하다 보면 부족한 부분들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런 모임에 참여하기를 더 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는 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점검해야 하는 것은 자칫 우리교회 안에 변화되지 않은 아볼로, 변화되지 않은 제자들의 상태로 쭉 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각자 갈고 닦은 분야에서는 여러분이 전문가이죠. 그러나 한순간에 전문가가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신앙에도 여정이 있습니다. 내 부족함이 있으면 최대한 빨리 채워가는 것이 유익합니다. 배움은 용기를 내는 만큼 얻는 법입니다.
니고데모가 그랬잖아요.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자 힘썼을 때,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신앙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선교지에서 정말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고 표현합니다.
(행 19:8)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다.
3개월에 걸쳐서 하나님 나라를 열심히 가르쳤다는 것이죠. 그런데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구약성경을 토대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이죠. 자신들이 믿어왔던 것과 다른 복음에 대해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합니다.
여러분. 분명 설교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다고 우리가 모든 것을 무조건 수용하면 안 됩니다. 저도 목사이고 수많은 설교를 들어왔지만, 설교라고 행해지는 것 중에 설교가 아닌 것들이 많아요. 분별해야 해요. 대신 분별은 기준이 있습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설교에 대한 신뢰, 설교자에 대해 신뢰해야죠. 그러나 그를 위해서 판단할 기준은 ‘성경의 사실에 입각하는가?’입니다. 교회의 암흑기였던 중세에 성도들이 성경을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분별이 어려웠어요. 그런데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충실하게 설교로 전하고 있는가? 만약 설교가 아무리 여러분 마음에 안 들어도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한다면 힘써 들어야 합니다. 설교가 아무리 좋게 느껴져도 그것이 성경과 거리가 먼 설교자 개인의 생각과 사상이라면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해 봐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많은 사람들이 ‘짧은 설교, 웃긴 설교, 내게 만족이 되는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여긴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에게 감사한 것은, 그런 기준을 가진 분은 애시당초 다 도망갔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모두에게 맞는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밥때가 제일 중요한 사람은 우리교회 못 다니죠. ‘우리교회는 숨어서 신앙생활 하기 어렵다. 예배당 구조 자체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저는 설교 시간에도 휴대폰이나 할 사람은 이미 다른 교회로 다 갔다고 봐요. 그러므로 적어도 이 교회를 택한 분들은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말씀은 전하고 싶습니다.
저한테는 거의 못 그러지만, 예진 전도사님이 설교할 때 ‘빨리 끝내달라’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하셔야 합니다. ‘전도사님, 최선을 다해서 설교해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말씀으로 잘 듣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전도사님에게도 힘을 주고 돕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3개월 동안 사역한 후 장소를 옮깁니다. 그는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말씀 사역을 합니다.
(행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행 19: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서원’이라고 번역된 ‘스콜레’는 ‘강연장’입니다. 다른 고대 사본에 보면 바울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5시간씩 매일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시간은 이 지역에서 가장 무더운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강연장이 비는 시간이었고, 주인은 기꺼이 바울에게 빈 강연장을 빌려주었을 것입니다. 가장 무더운 시간에, 5시간 동안 복음을 전한 바울의 열정. 그렇게 2년을 꼬박 말씀 사역을 합니다.
사도행전은 2년이 지났을 때 아시아에 사는 자가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과장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적어도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들을 수 있도록 바울이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성령의 열심, 사탄의 열심, 바울의 열심.
바울이 얼마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진심이었는지 느껴지는 장면이 3차 선교여행에서 또 있었죠. 에베소 사역을 마친 후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행 20:7) 주간의 첫 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행 20:8)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바울이 다음날 떠나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밤이 깊도록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보통은 ‘다음날 일정도 있으니 여기까지 합시다’ 할 텐데,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긴 것이죠.
당시의 밤에 집회하려면 등불을 켜야죠. 등불 아래서 밤새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어요. 그는 창문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졸음을 이기지 못한 것이죠.
저는 교회 와서 조는 것이 집에서 자는 것보다 낫다고 확신합니다.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 알아요. 조는 것이 부끄럽죠. 그럴 바에 집에서 자면 나도 편하고 사람들 눈치도 안 보고 좋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와서 조는 성도가 더 귀합니다. 물론 안 조는 성도가 짱입니다.
이 구절의 교훈 한가지는 ‘졸릴 때는 위험한 데서 설교 들으면 안 된다.’ 창문에 걸터앉아서 졸았던 것은 위험하죠. 그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 층 높이에서 떨어집니다. 대형 사고죠. 사람들이 가보니까 죽은 상태였습니다. 바울도 급히 달려가 그를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운이 좋아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를 품자 하나님께서 유두고를 살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건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행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이 정도의 사건을 겪으면, ‘우리가 너무 무리하긴 했구나’ 생각하고 ‘이제 마칩시다’ 해야 하거든요. 집회를 밤새 하다가 사람이 죽을 뻔했잖아요. 그런데 다시 이어서 말씀을 나누다가 밤을 새우고 떠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보인 모습입니다.
‘예배 빨리 마치고 우리 교제 합시다’, ‘예배 후딱 해치우고 우리 밥 먹읍시다’ 제가 가끔 수련회 계획을 짜오면 항상 보는 것이 있습니다. 뭐가 중심에 있는가. 가장 사람이 많은 시간, 가장 중요한 시간에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왜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는 성경처럼 역사하지 않으실까?’ 말하기에 앞서, 나는 그들만큼 예배에 대한 사모함,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도 사도행전 시대처럼 말씀을 사랑하면, 말씀이 우리를 정말 변화시키는가? 네. 저는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사역에서도 또 양육에서도 말씀 나눔을 하면 설교자인 저는 그 사람이 말씀을 얼마나 소화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잠깐만 들어도 이 사람이 말씀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지,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 압니다. 저는 그래서 겉모습을 잘 안 봐요. 삐딱하게 앉아 있어도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있고, 초롱초롱하게 앉아 있어도 사실은 다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거든요.
말씀의 시간에 앉아 있었다고 끝이 아니라, 잘 들었는가? 잘 들었다면 잘 이해했는가? 저는 그것을 항상 확인하며 그 사람의 영적 건강함을 체크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소화하는 만큼 그 삶이 더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이제는 제법 많은 임상을 통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망가지고 깨어지고 엉망인 상태에서 시작해서 말씀으로 수술 되어, 진리 안에서 꼴을 먹으며 자라갑니다. 말씀을 먹을 때 바르게 성장해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새기지 못하는 사람은 변화에 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은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말씀충만’은 잘 이야기하지 않죠. 그러나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서 말씀의 충만함은 곧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엡 5:18b)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엡 5:20)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골 3:17)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각각 말하는데, 한 곳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말씀의 충만함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충만’과 ‘말씀충만’이 바울에게는 같아요.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어떤 기적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과 내면에 충만하게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말하는 성령행전입니다. 동시에 말씀행전입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 13: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행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곧 말씀의 역사입니다. 에베소에서 2년 동안 말씀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삶이 바뀝니다. 삶이 바뀌는 사람이 많으면 공동체가 바뀌고, 더 나아가 도시가 바뀝니다.
바울이 말씀 사역을 하면서 그를 통해 치유가 일어나기도 하자,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바울이 하는 말과 행동에 주목합니다. 마치 어떤 ‘주문’이 이 일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도 그렇게 바울 흉내를 냅니다.
(행 19:13)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다.
(행 19:15)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일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롯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은 ‘흉내’로 따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지를 깨달아 갑니다.
(행 19:17)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에게 알려지니, 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당시 에베소에는 주술과 마술을 의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지금 이 시대도 점, 운세, 타로, 사주 같은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죠.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것에 영향을 받고 있으면 돌이키셔야 합니다. 에베소에서도 복음이 사람들을 바꾸어 갑니다.
(행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당시의 마술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면 유익하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당대의 어떤 가치관입니다. 의지하는 어떤 세상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점을 보던 것을 보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마술을 생계 수단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복음을 만난 후, 삶의 방식을 완전하게 바꿨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의지했던 믿음의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의지의 대상, 믿음의 대상, 헌신의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삶의 기준과 방식도 바뀐 것입니다.
그들이 이날 불태운 것은 ‘5만 드라크마’, 약 137년치 연봉입니다. 완전한 결단입니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별 수 없습니다. 가치관이든, 세계관이든, 누구의 가르침이든, 성공비법이든, 아니면 통장이든, 직업이든, 나 자신이든. 그런데 그것이 틀렸구나 복음을 들은 후 깨닫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복음은 직업을 바꾸게 합니다. 복음은 삶의 방식을 바꾸게 합니다. 복음은 인생을 바꿉니다.
에베소에서의 변화는 이것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도시가 뒤집히는 일이 생깁니다.
(행 19:23) 그 무렵에 주님의 '도'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어요. ‘아데미’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파르테논 신전’이 유명하죠. 지금도 우리가 이것 보려고 그리스 아테네에 가잖아요. 그런데 아르테미스 신전은 이보다 훨씬 큽니다. 기둥의 높이는 2배이고, 면적은 4배입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무너지고 터만 남아있습니다.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숭배를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이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의 중심지를 에베소로 잡은 이유였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지역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끼고 살며, 그것으로 밥벌이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회심하고 아르테미스를 ‘우상’으로 보며 더 이상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 중에 상당수가 아데미 여신의 조각상을 만들어 판매하였는데, 다 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제일 무서운 것이 ‘노조’이죠. 신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더메드리오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합니다.
(행 19:25) 그가 직공들과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행 19:26)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 걸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행 19:27)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도 무시당하고, 또 나아가서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배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이들이 더메드리오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바울과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을 죽이려고 달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이들에게 붙잡혀 원형 극장에 끌려가는 등 죽을 뻔한 위기를 겪습니다.
여러분. 더메드리오의 관심이 정말 아데미의 위신이었을까요? 아니죠. 그의 관심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복음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피해를 주자 반발하며 나선 것입니다. 언제나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하죠. 아데미는 그에게 그런 명분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듣고 자신의 삶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삶을 바꾸지만, 누군가는 복음이 자신의 밥그릇을 위협하자 복음을 전하는 자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명분은 필요하죠.
(행 19:28)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데미여’라고 외치고 있지만, 사실은 ‘돈이여’라고 외치는 것이 에베소에 있는 복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복음은 전해지는 곳에는 언제나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군가는 복음으로 인해서 삶을 바꾸고,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더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대적합니다. 깨어진 세상을 바꾸는 일이 ‘복음’의 역사이기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복음은 ‘칼’입니다. 진리는 타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듣고 난 후,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일컬어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깨어진 세상을 소란케합니다. 복음은 깨어진 당신의 인생을 바꾸려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회심이 나타나고, 회심이 나타난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를 중심으로 3차 선교여행을 진행했던 바울은 그 후 2차 선교여행을 통해 복음을 심은 교회들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세워갑니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이 이제 모든 선교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압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이제 그가 투옥당하고 환난을 당하는 것임을 그에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 일은 궁극적으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령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라는 곳을 경유하는데, 그는 모든 선교지 중에 가장 오래 사역한 에베소 교회에 연락합니다. 바울의 소식에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은 3일 길을 달려 밀레도로 옵니다.
(행 20:22)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행 20: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그는 매우 유명한 고백을 남기죠.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정말 이 메시지대로 그렇게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 교회에 있는 자신의 동역자, 자신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은 작별의 날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다시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기에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다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나 양 떼인 회중을 위해서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사람들을 맡기셨고,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나자마자 흉악한 이리들이 나타나서 양들을 맹렬히 공격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복음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늘 깨어서 경계하십시오. 지난 삼 년 동안 내가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견디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 마음을 쏟았던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그들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나누며, 그들에게 다시금 일깨운 것이 있습니다.
(행 20:32)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을 맡긴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그들을 맡겼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함께하지 못하지만, 말씀은 이들 안에 남아서 역사할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사람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사람들 안에 머물게 합니다.
바울은 말씀을 심었고, 그들 안에 자란 말씀을 보았고, 마지막에도 이제 그 말씀이 그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며 떠나갑니다. 그들의 삶, 그들의 교회를 지키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렇게 함께 말씀을 풍성히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입니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이 시간이 힘들고 따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이 그 사람에게도 역사할 때, 바로 그 사람에게도 이 시간이 일주일 중 가장 값진 시간으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그렇게 변해가는 사람들을 계속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해진 곳에 일어났던 두 가지 반응을 기억하십시오. 거기에는 복음을 듣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사람과, 자신이 추구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복음으로 인해서 내 삶이 바뀌어 가는 놀라운 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으므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이후로 우리의 구원을 흔들만한 공격과 위기가 있음을 깨닫고 믿음을 잃지 말고 견디어 내라는 부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선 성도는 승리할 줄 믿습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선 교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찾는 것은 바로 그렇게 살겠다는 '한 사람' 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함께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