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복음이 만든 사람" / 강정규 목사

2024-06-09 · 사도행전 12~1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사도행전 여섯 번째 설교입니다. 저에게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배우고, 그를 통해 지금 나에게 하고 계신 일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해나가실 일도 소망하게 됩니다.

물론 저는 사도들의 특수성에 대해서 인정합니다. 저는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사도가 되기 위한 조건을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기에, 그 조건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본 자라는 단서가 있기에, 오늘날 그들과 동일한 의미의 사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시대의 몇몇 단체에서 주장하는 ‘신사도 운동’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신사도 운동이란, 지금도 사도가 존재할 수 있고, 그들은 직접 계시를 받으며, 사도적 권위를 갖는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성경의 권위가 가장 우선된다고 보기에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인 베드로, 바나바, 바울 그리고 아나니아 같은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 사명, 그에 따른 영적 권위는 믿지만,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감당했던 특수한 사명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을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만들어 신격화해서도 안 되고, 또 그들은 특수한 존재라는 변명 속에 그들과 우리는 다르니, 우리는 그들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자주 언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존재라고 말하지 않아요. 같은 존재다. 그리고 자신들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바울

(행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대표적인 두 사도는 동일한 말을 합니다. 그들도 연약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 베드로의 부족한 모습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다투고, 후에 바울과 베드로도 다투기도 합니다. 또 다 잘 해결하여 동역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이 ‘사람 냄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사람 냄새가 참 좋습니다. 그것이 저의 연약한 모습에 대해서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도, 평생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갔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그런 삶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또한 빌립보서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즉, 바울은 자신을 본받는 사람들을 권면하며, 그들을 보며 또 이 길을 걸어가는 자들을 눈여겨보며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성도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양 떼를 먹이되, 자진하여서 하고,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양 무리의 본이 되십시오.”

그러니까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야’ 말하는 자들에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듯 함께 닮아가자고, 닮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바울, 바나바 같은 사람들의 삶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살게 된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이 고백하는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새로운 생명이며,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나아가는 삶입니다.

성경은 신화가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성경 시대에도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또한 어느 시대에나 우리를 향한 반대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배경에는 기독교를 향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 지역의 통치자 헤롯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행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행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왜 죽였느냐? 정치적 판단에서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유대교와 다른 기독교인이 생겨났는데, 그들의 인원은 여전히 소수입니다. 그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은 ‘정의’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방법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기로 결정합니다. 정치적인 계산이었죠.

12사도 가운데 대표급인 베드로와 요한을 한 번에 치기는 좀 부담스러우니, 야고보를 시험 삼아 먼저 잡아서 사형에 처합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이것이 먹힌다고 생각을 했죠. 바로 다음 타겟으로 베드로 사냥에 나섭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것이죠. 당시가 유월절 주간이기에, 유월절이 지나면 베드로를 공개 처형해서 자신의 입지를 높일 예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4명씩 4개 조로 구성된 병사들에 의해서 감시당하며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고, 온 교회는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가장 엉뚱한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드디어 헤롯이 그를 끌어내어 처형할 때가 다가왔다. 그날 밤, 베드로는 양쪽에 한 명씩 두 병사 틈에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도, 아기처럼 잘 잤다.’

여러분은 다음날 처형이 확정된 이 순간에 저렇게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요?

바울은 어떤가요? 그도 훗날 감옥에 갇히고 죽을 위기 앞에 서게 되는데, 그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 1: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빌 1:24)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을까? 아닙니다. 죽음은 그들에게도 실제적인 위협이었어요. 그러하기에 그들도 박해를 피해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온 교회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했고, 자신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기한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끝이 하나님의 때라면 소망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였죠. ‘지금 데려가시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인가보다’라는 마음이 있었으니 평안히 잠을 자고 있었겠죠.

여러분,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를 걸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자신의 명예나 재물의 욕심에 대해서 넘어서면, 사탄이 공격할 것이 상당히 줄어듭니다.

밭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의 실패는 무엇 때문입니까? 지나친 근심, 재물에 대한 욕심, 자기 삶의 즐거움에 대해서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요. 사탄은 그것을 공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그렇다고 해도,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 마음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성장의 과정이 있습니다. 바울도 그랬어요.

(빌 3:7)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빌 3: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a)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도 그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추구하는 것들이 있었죠.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한 후, 그에게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해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관점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이것이 유익한가?' 이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이것으로 바울을 유혹할 수도 없죠.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다고요. 그들이 회심한 후 삶의 많은 부분에서 관점과 생각, 주권이 달라졌어요. 그러니 이제 남은 하나를 가지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이죠. 사도들도 예수님과 동행하다가 실패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들이 더욱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죽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주권을 드리게 되니, 사실상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의 공략지점들은 뻔합니다. 몇가지 안 돼요. 사탄이 교만하게 하려고 해도,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이전에 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로 유혹해도, 이제 그런 것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해도, 죽음으로 위협해도 그 또한 주님이 정하신 일이라면 받아들인다고 하니, 말 그대로 이런 사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께도 저는 이런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함께 일할 사람을 찾으시는데,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보시면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저는 하나님은 사람을 늘 찾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떤 의미에서는 보호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해 일어날 놀라운 일, 이들을 통해 돌아올 영혼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던 헤롯은 어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그의 교만함을 더는 볼 수 없으셔서 그를 치십니다. 사도행전 12:2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어떤 일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적이 없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떤 악인에 대해서도 기회를 주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악인 사울은 하나님의 싸인 앞에서 반응했고, 헤롯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길로 가다가 결국 심판을 당합니다.

사도행전을 연구하다 보면, 이 책에는 중요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항상 고난이 와요. 박해와 핍박, 투옥 같은 교회와 성도를 둘러싼 위협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러 모습에서 막아서지만, 성령을 의지하여 그것을 돌파해 갑니다. 그리고 그 끝에 항상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행 12:2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누가 더 센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더 셉니다. 복음이 이깁니다. 본질이 승리합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여 주시기 위해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던 바나바와 바울을 부르십니다. 지난 설교에서 봤듯이,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 지도자들이 모두 이 일에 순종합니다. 아쉬움도 있겠죠. 그래도 하나님의 결정을 따릅니다.

여러분, 저는 사귐의교회가 저의 삶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큰 만큼, 가끔 일부러 마음에서 경계하며 스스로에게 주문하듯 말하기도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여기까지다. 말씀하시면 떠나야 해.’ 물론 저는 하나님이 ‘여기서 뼈를 묻을 때까지 힘써라’ 말하면 그 또한 순종하고 싶습니다. 그냥 저도 여러분 앞에서 늘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제식 훈련에 있어서 늘 순종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이 둘 가운데 리더는 ‘바나바’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바나바가 바울의 조력자인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성경에서는 영적으로 더 권위 있는 사람의 이름을 앞에 사용합니다.

(행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특별히 이방 선교를 떠나기 전까지는 항상 ‘바나바’가 먼저 기록됩니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제우스와 헤르메스에 빗대어 표현할 때가 있었죠. 누가 제우스입니까? 바나바였습니다. 또한 바나바와 바울이 처음 떠난 이방 선교도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 섬’이 첫 번째 목적지가 됩니다.

그러나 이방 선교 사역이 시작되며 둘의 권위가 비슷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바나바가 앞서기도 하고 바울이 앞서기도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팀을 이뤄서 선교했던 것은 1차 선교여행이 유일합니다. 이들은 어떤 도시에 도착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회당’부터 갑니다. 거기에 가면 구약에 대해서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없는 사람보다는 신앙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복음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첫 선교지인 구브로 섬은 지중해의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선교팀은 살라미에서부터 섬 전체를 횡단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구브로 섬의 중심도시 ‘바보’(파포스)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총독 ‘서기오 바울’과 마술사 ‘바예수’를 만납니다. 고위 관료인 서기오 바울이 점성술사인 바예수를 의지하고 있었고, 그에게 정서적 지배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죠.

바울과 바나바 때문에 서기오 바울에 대한 자신의 영적 영향력을 잃어버릴까 염려한 ‘바예수’는 선교팀에 저항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때 성령충만한 바울이 악한 마음으로 대적하는 바예수에게 선포합니다. 그때, 마치 악한 일을 하던 사울의 눈이 멀었던 것처럼, 바예수의 눈이 멀게 됩니다. 이것을 본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주님을 믿게 됩니다.

이렇듯, 선교의 중요한 순간마다 성령님은 일하시며, 복음이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선교팀에 또 다른 위기가 옵니다. 구브로에서의 사역을 마친 후, 배를 타고 소아시아 대륙의 ‘버가’에 이르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이 선교팀에 있었는데, ‘버가’에 도착하자마자 선교팀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학자들은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는 안디옥 사역에 동참하고자 왔고, 화려한 도시인 안디옥에서 살 것을 꿈꿨는데, 갑자기 바나바와 함께 고된 선교여행에 차출되자 어려움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간 것으로 추정합니다. 혹자는 이 팀에서 바나바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점차 바울에게로 리더십이 변화되는 것에 마가가 불만을 품고 팀을 이탈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마가의 이탈 사건이 단초가 되어,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는 ‘마가’를 다시 선교팀에 합류시킬 것이냐를 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충돌하게 되죠. 결국 이 일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팀이 쪼개집니다. 바나바와 마가가 팀이 되고, 바울은 실라와 팀을 이뤄서 선교를 하게 되니까요. 성령충만은 ‘슈퍼파워’가 아닙니다. 성령충만하여 사역했던 사람들이 때로는 고작 이런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인간적인 다툼의 면모도 보여주지만, 후에 바울은 마가와 화해를 하고, 마가는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역자가 됩니다. 저는 그 또한 성령의 역사라고 믿어요. 사도들도 넘어질 때도 있지만, 결국은 선을 이루어 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더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도 늘 그래야 해요. 연약함 속에 갈등도 있고 다툼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도를 늘 받는 것이고, 결국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그분 안에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에서 마가는 떠나버렸고,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합니다. 안디옥이라는 이름이 익숙하죠. 원래 바나바와 바울이 사역했던 곳은 ‘수리아 지역의 안디옥’입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은 다른 지역입니다. 여기서도 선교팀은 우선 유대인이 모여 있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회당에 모여 있는 유대인은 ‘구약성경’에 대해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구약을 읽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죠. 바로 바울은 그 구약이 바라보는 예언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을 근거로 전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원래부터 성경에 대해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러나 회심 전에는 그의 뛰어난 지식으로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주님과의 만남 이후 회심하며 정리되기 시작하였고, 고향에서의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복음을 누구보다 생동력 있게 전할 수 있는 설교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죠.

안디옥에서의 복음 전파는 많은 열매를 낳습니다.

(행 13:42) 그들이 회당에서 나올 때에,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 달라고 청하였다.

(행 13:43) 회중이 흩어진 뒤에도, 유대 사람들과 경건한 개종자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많이 따랐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말을 걸면서, 늘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다.

(행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동네 사람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여러분, 저는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20대에는 한국에서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꿈은 선교에 있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생각으로는 ‘이렇게 한국에 교회가 많고, 이미 들을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다 복음을 들었을 텐데, 그래도 안 받아들이는 것이면 그냥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지 가서 복음을 전하면 반응이 뜨겁거든요. 20대에 제법 많은 선교지를 나가게 되었는데, 즉각적인 반응이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런 곳에 복음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죠.

그러나 지금 저의 눈에는 2024년의 한국, 이곳이 또 하나의 복음의 불모지이며, 지금 이 시대에도 복음은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충격적인 이야기이며, 그리고 이것은 진리이기에 지금도 우리의 삶을 바꿀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저는 믿고 싶은 것보다,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저에게 어색하고,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몰라서 그랬을 뿐, 여전히 이 시대에도 복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교회 안 성도들과 교회 밖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그들이 회복되고 돌아오고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저는 정말로 목회하면서 종종 감탄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만나는 성도님들로 인해서, 더 하나님을 굳건히 믿게 됩니다. 저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일들이, 성령님 안에서 저와 또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사역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는 그 지역 곳곳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시기와 모함도 여전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

(행 14:1)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였다. 그래서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많이 믿게 되었다.

(행 14:2) 그러나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하였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같은 복음을 들어도 전혀 변하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으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 나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리고 효과를 거둡니다. 믿고 잘 자라가려는 사람들 안에 사도들을 향한 나쁜 감정을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가장 큰 적은 복음에 대한 공격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공격이고, 사람의 마음을 선동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 대부분의 교회가 겪었던 일은 바로 이런 일입니다.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지도자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품게 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는 마음 상태로 만든 것입니다. 마음이 막히면 귀가 막히는 법입니다. 메신저를 신뢰하지 못하면 메시지도 힘을 잃는 법입니다.

사도들도 이 도시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저항과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도시를 마음에 품고 오랫동안 머물면서 담대하게 복음 사역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이적으로 이들의 복음이 생명력 있는 주님의 말씀임을 뒷받침해 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복음 전파를 위해서 강력하게 일하셨고, 사탄도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막으려고 열심을 다했던 곳이 ‘이고니온’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 14:4)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더러는 유대 사람의 편을 들고, 더러는 사도의 편을 들었다.

두 편이 생겨버렸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잘 뿌려졌는데, 사탄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회복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도 나오지만 ‘씨’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 씨’가 떨어져도 밭의 상태에 따라서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악은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사도들을 적대하던 사람들은 더 악한 마음을 드러내었고, 뭉쳤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드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피신하여 도망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들의 두려움에 따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보면 이들은 때로는 돌 맞음과 죽음도 각오하거든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주변 도시가 많기에,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은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받아들이고, 피신하여 옆에 있는 ‘루스드라’로 옮겨갑니다.

루스드라에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준비된 것과 믿으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치유사역을 행합니다. 걷지 못하던 자가 걷게 된 것입니다. 이 치유사건으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높이려 하죠. 그들이 황급히 말리며, 자신들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전에 복음을 전했던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적개심을 품은 유대인 무리가 이곳 루스드라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도들의 복음 사역을 가로막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앞서 성공했던 특기가 있지 않습니까?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메시지 성경은 ‘무리를 충동했다’는 것을 풀어서, ‘무리를 부추겨 그들에게 악감정을 품게 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 두 사도를 신으로 추앙하려던 사람들이 변모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는 일에 동참합니다. 바울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맞고, 성 밖에 버려집니다. 악은 참 놀랍습니다. 악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있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예수님에게 수많은 인파가 환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몇몇 거짓 증언자들을 세워 무리를 충동하자 그들은 어느새 예수님의 안티 세력으로 변모하여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는 일에 동조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쩌면 사람의 냄새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추악한 사람의 냄새이죠.

우리가 그 안에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과연 달랐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군중의 힘은 실로 무섭습니다. 사실 진짜 악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은 ‘악한 것’에 더 쉽게 반응합니다. 우리교회 안에 만약 미담과 부정적 이슈가 함께 전해진다면, 뭐가 더 힘을 발휘할까요? 아마도 미담은 힘이 약하고, 부정적 이슈는 점점 살이 붙어서 타오를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모임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세상의 논리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는 다른 논리가 적용되어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때 이곳은 정말 하나님 안에 성숙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의 악함을 덮은 곳.

교회가 성숙하다는 것은 이곳에 속한 사람들이 성숙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 모임입니다. 좋은 사람들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악함과 약함, 그것을 깨닫고 힘써 훈련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교회는 견고해 보이지만,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 위의 성처럼 됩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더욱 힘써 나아가, 나의 본성과 죄성은 악함을 성령 안에서 다스리며, 성령님이 원하시는 일에 내 온 마음과 정성을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사귐의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저도 못 믿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에, 그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더욱 성숙한 공동체로 만들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이 교회는 그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반 죽음의 상태가 되어 성밖에 버려진 바울. 죽을 위기를 겪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튿날 ‘더베’로 이동합니다. 60km 떨어진 가장 동쪽 도시입니다. 이곳이 1차 선교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였습니다.

더베 사역은 사도행전에서 딱 한 줄 나옵니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이것이 더베 사역에 대한 유일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많은 회심자를 얻고, ‘가이오’라는 동역자도 얻게 됩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아픈 몸을 끌고 60km를 가서 만난 더베. 어쩌면 이 도시는 두 사도에게 몸과 마음과 정신을 회복하게 했던 그런 오아시스 같은 도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에게 더베 같은 사람들이 되어주십시오. 특히 여러분을 위해 섬기는 목회자와 목양자들에게, 양육을 도와준 이끄미들에게, 사역에 힘쓰는 교회의 교사와 일꾼들에게 더베 같은 위로를 주시고, 동역자가 되어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더베는 선교의 출발과 종착지가 되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이제 사역을 다 마쳤으니 곧바로 안디옥으로 돌아가면 편히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대적자들이 가득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으로 되돌아갑니다. 저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행보였습니다. 죽다 살아난 곳, 적대자들이 가득한 곳, 그 위험한 곳으로 그들은 다시 돌아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믿기 시작한 성도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고난을 당하며 떠난 모습을 보고, 신앙을 놓아버릴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기 위해 사도들은 다시 위험을 감수하고 양들에게 갑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모함을 받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의 삶이지만, 여러 아픔과 여러 고민과 여러분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바울이 죽을 뻔한 그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복음전파로 회심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디모데’입니다. 바울의 믿음의 아들. 복음 앞에 헌신하여 살아가는 또 한 사람, 바울의 뒤를 이어서 사역한 디모데.

그렇게 본다면, 바울이 만약 다시 루스드라로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곳의 신자들을 다시 한번 목양하며 세우지 않았다면, 디모데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루스드라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루스드라는 어디입니까?

두렵지만, 무섭지만, 힘들지만, 포기하고 싶지만... 주님이 주신 마음에 반응했을 때, 그 안에 그런 열매가 있는 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면, 그 길에 주님이 하시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