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부터 묵상을 시작한 요한복음에 대해서 첫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계속 짧은 분량의 책을 다루다 보니 그 책에 대해 한 주에 모두 다뤄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한복음은 우리와 조금 오랫동안 동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2월 17일까지 요한복음 1-13장까지를 묵상할 예정입니다. 요한복음의 남은 14장부터 21장은 4월에 부활절에 맞춰서 묵상하게 될 예정입니다.
마침 2022년이 되면서 내가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을 해볼까 고민해보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아직 못 정하셨다면, 성경읽기와 말씀묵상을 해보기를 추천합니다. 마침 복음서로 시작하는 한 해이니, 요한복음을 읽어보면서 말씀과 친밀해지면 좋을 듯합니다.
왜 말씀을 읽어야 하나요? 만약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아는 만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예화를 잘 씁니다. 저는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특히 NBA라는 미국 프로농구를 좋아하는데, 한 경기가 2~3시간 됩니다. 제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직관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선수들도 다 알고 있기에 하루에 3경기를 봐도 매우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러나 저희 아내가 만약 동행해서 3경기를 연달아 본다면, 그 시간은 아내에게는 곤욕일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보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알리신 계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말씀과 친밀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말씀을 듣는 시간은 즐겁기 마련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특별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기에 매우 좋은 책입니다. 1~2월 중에 주일설교로 6번 정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첫 시간은 역시나 제가 여러분에게 요한복음을 소개하고 1장의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네 편의 복음서
우선 요한복음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네 편의 복음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이니, 요한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소식을 전해주려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이죠.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원래 ‘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 사회에서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단어였습니다. 황제의 탄생, 황제의 즉위, 전쟁의 승리 소식을 전할 때 ‘유앙겔리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은 보통 복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휘를 빌려 쓰되, 그 안에 새로운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집어넣고 ‘단수’로 사용했죠.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단 한가지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가 전하고 외칠 유일한 복음이라는 것이죠. 정리하면, 4편의 복음서는 4명의 각기 다른 저자가 복음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4편이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시험이고 누군가에게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늘 그랬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전한 4개의 복음.
시험이라 함은 이런 것이죠. 4편의 복음서를 대조해서 읽다 보면, 서로 이야기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성전 청결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의 일로 기록됩니다. 그래서 가나의 혼인 잔치 이후에 바로 성전 청결 사건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와요.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 십자가에 박히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그럼 언제 일어난 일인가? 예수님의 사역 초반인가, 예수님의 사역 후반인가? 이것은 성경을 깊이 읽다 보면 종종 마주하는 문제입니다. 분명 성경은 오류가 없고, 완전한 진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것, 즉 진리가 아닌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만약 복음서가 한 권이라면 이런 고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복음서가 4편이라서 우리는 피곤합니다. 저도 팩트체크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입니다. 그러니 저도 성경을 배워가고 신학을 하면서 이러한 차이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굉장히 고민했던 시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공부를 하면서 그것이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조금 설명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시작 부분을 기억하시나요?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정확하게)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질서정연하게)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눅 1: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2000년 전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과 말씀의 일꾼들이 전하여 준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쓴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죠. 저자도 그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자는 자신이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정확하게 미루어 살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저자가 ‘정확하게’, ‘질서정연하게’ 예수님의 일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복음이 4개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나머지는 틀렸을까요? A.D 130년경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파피아스’는 마가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는... 주님에 의해 말하여지고 행하여졌던 것들을.. 정확하게 하지만 순서대로는 아니게 기록하였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는 삼국시대 초기라고 했습니다. 거기다 이곳은 문화권도 다릅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 오류가 생기는 이유입니다. 그 시대의 관점과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다가서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확성’은 사건 순서의 정확성보다는 ‘수사학적 정확성’을 의미합니다. 수사학이라는 것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을 가장 우선에 두고 기록했다는 것이죠. 그 방법이 시간의 순서보다 설득하기 위해 구성된 구성의 순서대로 기록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복음서는 각자가 전달하고 싶은 것,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복음인지를 전달하기 위한 최고의 수사학적 구성을 했다는 것입니다. 각 복음서의 저자가 다르고, 대상이 다르고, 보여주고 싶은 강조점이 다르다 보니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배열순서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이것을 가장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예화로 ‘그림 세대’와 ‘사진 세대’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 사진들은 누가 찍었든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관점으로 팩트를 체크합니다. 아쉽게도 이순신 장군은 사진이 없습니다. 다만 그에 대해서 그린 수많은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 많은 초상화가 있지만, 각각이 모두 다릅니다. 그러면 뭐가 진짜 이순신입니까? 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그린 것입니다. 다 이순신 장군을 잘 보고 느끼는 대로 그린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지금 우리가 보면서 비교해서 누가 그린 눈이 맞느냐, 누가 그린 입술이 맞느냐 하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복음의 전달자들이 각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강조하여 보여주고 싶은 그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성경을 읽어간다면 성령이 주시는 감동과 인도를 따라서 복음이신 예수님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 네 편이 각각 비춰주는 각도가 다르기에 좀 더 입체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복음의 풍성함은 복음서가 한 권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죠. 그러므로 복음서가 네 편인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요한복음의 특징
그런데 4편의 복음서 가운데서도 마태/마가/누가 세 편은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관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 편은 상당히 비슷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으로 묶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요한복음은 앞선 세 편의 복음서와 시각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독특하고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가 성탄절 설교를 요한복음 1장을 본문으로 했어요. 사실 그때까지도 저는 1월 본문이 요한복음인 것을 몰랐어요. 공교롭게도 우리가 예습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바로 예수님의 존재를 신적인 존재로 알리는 것입니다. 이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완전히 다르죠. 거기서는 족보로 시작을 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다뤄요.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는 신이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둘째, 복음서의 기록목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서 생명을 얻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즉, 오늘 여러분에게도 요한복음은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는 일을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16에도 나오지요.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다는 것이죠. 공관복음에서는 구원의 표현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면, 요한복음의 표현법은 ‘영생’입니다.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이고 그것이 곧 우리의 소속과 존재가 바뀌는 것을 의미해요. 같은 것을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 것뿐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독생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틀에서 생각하다 보니, 약간의 오해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독생자는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대체로 이 말씀을 독자, 즉 외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아들이 하나 있다는 의미로 이 표현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독생자’가 갖는 가장 중요한 초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쓰는 언어 가운데 미세한 표현의 차이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다른 경우들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천주교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다르죠?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유일신 의미에요. 천주교는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독생자 예수’라고 말할 때도 이 표현은 ‘독자 예수’와는 달라요.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해요. 이것은 외아들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여러분, 영어로 외아들은 ‘only son’이라고 씁니다. 말 그대로 아들이 하나라는 의미이죠. ‘독생자’는 어떻게 쓰는지 아세요? ‘only-begotten son’입니다. 표현을 일부러 달리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외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존재, 단일 종류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존재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자의 새끼는 사자입니다. 호랑이의 새끼는 호랑이입니다. 같은 종류라는 것은 그것에 초점을 둔 표현이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라는 의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초점이 아니라 ‘같은 존재’에 초점이 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이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되지만 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세계보다 크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을 주려고, 영생을 주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해주는 것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예수님을 의미해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계셨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하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삼위일체의 교리를 담은 것이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예수님을 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공관복음서에 없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사건들이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장), 니고데모 이야기(3장),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4장), 선한 목자의 비유(10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13장), 성령의 약속(14장),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15장), 예수님의 기도(17장)
네 편의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이 가장 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먼저 기록된 복음서에 없는 내용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고 요한복음은 밝히고 있습니다.
(요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부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의 사귐이 시작되면,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3. 말씀이신 예수
여러분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나요? 청파교회의 김기석 목사님은 이런 방식으로 설명을 하시더군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그분이 가르쳤던 것들을 기억하며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주님이 그때 말씀하셨을 때의 그 눈빛 기억나?”
예배당을 짓고 모인 것이 아니라, 오늘은 우리 집에서, 내일은 이 사람의 집에서... 그렇게 모이던 것이 교회의 출발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짓고 나서 사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억을 공유하며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런 기억을 나누면서 지금 육신으로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시지만, 말씀으로 남아 있는 주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안에 여전히 그리스도가 추구하던 그의 비전과 그의 나라가 머무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은 언젠가 떠나지만, 말씀은 우리 안에 지금도 남아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본질인 그의 말씀이 오늘 우리 가운데 남아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렸던 자를 되찾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고, 그 안에서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고 평안하고 자유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손잡으며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그런 우리를 주님이 찾아오셔서 다시 살리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췄다.” 그러나 인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구약에서도 아주 작고 연약한 민족.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때로는 선지자를 보내어 알려주셨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며 깨닫게 하셨어요.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 신약시대,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리시려고 한 사람을 먼저 준비시킵니다. 그를 통해 강력한 메시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깨닫도록 합니다. 바로 그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조금 먼저 세상에 등장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리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40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한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지 않습니다. 침묵기가 있었습니다. 폭풍의 전야와 같은 것이죠. 제가 예배팀 연습할 때마다 후렴이 전까지 조용하게 불러야 후렴이 강조된다는 표현을 잘 씁니다.
400년의 침묵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그런 준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침묵을 깨고 세상에 뜻을 선포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그 도구입니다.
(요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요 1: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를 끝내고 이스라엘을 다시 다윗의 때와 같이 번영으로 이끌 그런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 피폐하고 힘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삶이 너무 평안하면 구원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가 번영한 로마 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갈망했어요.
구원자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무르익은 그때, 갈라디아 4:4의 표현에 따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시작되었음을 요한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하나님의 선지자.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요한에게 주목합니다.
(요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성경은 앞서 8절에서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도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요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요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처음 죄가 시작되었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을 피조물로 지음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숨기지 않고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앞에 와서 그를 전하는 복음의 전달자일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빛이 아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에 맞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여러분, 요한복음 1장의 놀라운 장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례 요한의 곁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맨 먼저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요한이 멀리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갔던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안드레를 통해서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전합니다.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은 먼저 그것을 맛본 사람들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가를 평가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런 자격과 기준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아요. 그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눈에는 생명의 빛이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구원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죠.
그 빛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빛이 한 사람 안에 들어와 그를 밝히고,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행동, 그 사람의 삶의 변화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를 달에 비유했어요. 달은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밤을 밝혀줍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에 찾아온 빛은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과 말속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전파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4. 예수님에 대한 일곱 가지 증언
요한복음 1장 후반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대화’와 ‘외침’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어린 양 _ 세례 요한
(요 1:29)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 _ 세례 요한
(요 1: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3) 랍비 _ 요한의 두 제자
(요 1: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4) 메시아 _ 안드레
(요 1: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5) 나사렛 예수 _ 빌립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6) 이스라엘의 왕 _ 나다나엘
(요 1:49)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7) 인자(완전한 인간) _ 예수
(요 1: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일곱가지 증언. 성경에서 숫자 7은 완전수라고 부릅니다. 이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일곱이라는 완전수를 통해서 그분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7가지 칭호는 연결해보면 그대로 메시지가 됩니다.
“완전한 인간(인자)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는 우리의 선생(랍비)이고,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자(메시아)가 되셨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싶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이 이 복음서를 읽어가는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복음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빛이 비춰졌고, 말씀이신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어차피 능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이 말씀을 받아서 잘 묵상해본다면... 아니 고민이라도 해본다면,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빛이 되고 생명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회자하며 서로 얘기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달았노라고.
독생자 예수. 빛이신 그분이 어두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연히, 어쩌다가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어두움에 살던 사람들은 구원의 빛이 왔으나 알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빛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사명을 다하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이긴다는 그 진리를,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이 여전히 그의 제자들에게 남았고, 그들이 말씀의 전달자가 되어 그 복음의 말씀은 나누고 누리고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듣고, 믿고, 전하는 곳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전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경험한 그대로 내가 만난 복음을 증언할 뿐입니다.
누군가는 기독교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2000년 전,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팔레스타인의 신을 왜 우리가 믿느냐?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 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2000년 동안 해왔던 일이...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빛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던 것이고, 그 결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파란 눈을 가진, 다른 피부를 가진 그 사람들이 괴물 소리를 듣는 이 한국 땅에 수없이 찾아왔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사람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 안에 그들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들이 스스로 정해놓은 경계를 뛰어넘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움직이고 전하게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을까요? 빛의 전달자, 복음의 전달자.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누군가에게 제 생각과 능력으로 전할 능력도 부족하고, 제 이기적인 마음은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시간을 써서 전할 만큼 넉넉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찾아온 빛이 그 어두움을 몰아내었음을 우리는 깨닫기에 그 놀라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도 다시 회자되며, 말씀이 우리에게 스며들었으니, 이 말씀의 씨앗이 생명력을 발휘한다면, 능히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정해놓은 한계와, 우리의 불가능을 바꾸는 능력이 될 수 있으리라 저는 믿어봅니다.
요한복음을 묵상하는 이 시간들 속에, 말씀으로 남아서 우리 안에 역사하는 그분을 우리가 함께 만나고, 경험하고, 더욱 깊이 사랑하며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