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이사야 8-10장 / 하나님의 열심 / 강정규 목사

2020-07-26 · 이사야 8-1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목사님이 직접 쓰신 설교 원고입니다. 실제 예배에서는 원고에 없는 말씀을 더 나누시기도 하니, 그날의 온전한 설교는 위 영상으로 들어 주세요.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 주 오셔서 구하시리 / 온 땅과 만민들아 / 임마누엘(마커스)

이사야에 대한 세 번째 설교입니다.

이사야서 1부는 1-39장까지라고 했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8월말까지 묵상하게 될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위협 앞에 있던 남유다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웃-요-아-히’ 시대입니다.

이 중, 이사야 1-6장이 서론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7장부터가 본격적인 예언 모음이죠. 그런데 7-39장의 예언 모음 양 끝에는 2개의 ‘왕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배치를 하고 있는 것이죠. 문학적 장치인 셈이죠. 앞부분인 7-9장에 나오는 것은 ‘아하스 왕 이야기’이고, 끝부분인 36-39장에 나오는 것은 ‘히스기야 왕 이야기’입니다.

즉, 이사야서 1부의 긴 예언을 다룸에 있어서,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왕에 관련된 이야기를 배치하는 것이 매우 특징적인 것이죠. 사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는 ‘아하스의 길’을 갈 것인가, ‘히스기야의 길’을 갈 것인가?

이 시대의 가장 큰 고민과 신학적 화두는 무엇이었는가? 나라의 위기 순간에서 여호와를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다른 대안을 붙잡을 것인가 이것이죠.

이 질문이 7장에서 ‘아하스 왕’에게 한 번 던져지고, 36장에서 ‘히스기야 왕’에게 다시 던져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하스는 실패하여 심판의 예언을 받고,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이 질문이 이 시대와 이 글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던져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큰 그림과 주제입니다.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봅시다.

7장의 아하스에게 찾아온 구체적인 위협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위협입니다.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이 주전 740년경부터 원정에 나서자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의 나라들은 대부분 항복하고 조공을 바쳤지만, 아람의 왕 ‘르신’을 중심으로 앗수르에 맞서는 ‘반(反) 앗수르 동맹’을 구축합니다. 북이스라엘도 여기에 동참하죠. 그리고 남유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거절하죠. 그리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유다 왕을 쳐서 무너뜨리고 왕을 교체하려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하나님은 그 때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십니다.

(사 7: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이라는 장소는 이사야서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장소에서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사 36:2)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

왜 항상 이곳일까요? 나라의 위기 앞에서 왕들은 왜 이곳에 갔을까요? 아하스가 그곳에 간 목적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할 경우 대비하여 수로 시설을 점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지켜야 수성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이곳으로 보내신 이유는 뭘까요? ‘윗못 수도’가 아닌 여호와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생명수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정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네게 닥친 이 상황에서 다른 것이 아닌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원한다면 표징을 구하라고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거부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그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이번 일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죠. 이 일은 정치적인 일이고, 정치적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은 것입니다.

아하스의 머리가 내린 최선의 결정이란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었죠. 이것이 현실적인 최선이라고 그는 판단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과 앗수르 중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택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이것은 ‘우상숭배’로 치부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의 이 어리석은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사 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아람과 시리아가 쳐들어왔는데, 먼저 이들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선포됩니다. 이것은 유다에게는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사 7: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그러나 아하스가 의지하며 붙잡았던 앗수르라는 끈은, 생명의 줄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올 줄이었습니다. 앗수르를 통해서 너희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아하스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커다란 종이를 한 장 가져오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으라고 하시죠.

‘마헬-살랄-하스-바스’ (노략 - 빨리 온다 – 약탈 – 서둘러 온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의 말씀인 것이죠.

이 말씀은 이사야의 가정을 통해 실현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일 후, 하나님은 이사야의 가정에 아기를 허락하십니다. 이사야 가정의 둘째 아들이죠. 아들이 태어났고, 그 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아기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어라.” 바로 이 이름이 이사야의 둘째 아들에게 붙여집니다.

(사 8: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곧 다메섹과 사마리아, 즉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 이사야에게 다시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집니다.

(사 8: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실로아 물’이라는 것은 성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에서 수로를 통해서 성 남서쪽에 있는 저수지에 물을 공급했습니다. 이것을 실로아 물이라 불렀고, 후에 히스기야는 이것을 갖고 ‘실로암 연못’을 만들게 됩니다.

이 백성이 실로아 물을 버리고 아람의 왕인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왕인 베가(르말리야의 아들)를 기뻐했다는 것은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원래 남유다는 ‘친애굽’ 정책을 펴는 나라입니다. 그러다보니 앗수르가 강력한 국가가 된 후, 아하스 왕이 ‘친 앗수르’ 정책을 펴고자 할 때,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게 유다 내부에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모든 나라들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앗수르에 머리를 조아릴 것인가, 아니면 맞설 것인가? 아람(시리아)을 중심으로 ‘반 앗수르 동맹’이 펼쳐졌을 때, 유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입니다. 아하스 왕이 반 앗수르 동맹에 들어가길 반대하면서,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침략을 하게 된 것이 정황이 아닙니까? 이때에 유다 안에는 반앗수르 연합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죠. 바로 그들이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실로아 물은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조’를 의미하는 것이고, 다윗 왕조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예언이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친 앗수르 노선을 따르는 자들이나 반 앗수르 노선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모두 여호와께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도 심판을 당하는 것이죠.

(사 8:7) 나 주가, 저 세차게 넘쳐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 곧 앗시리아 왕과 그의 모든 위력을, 이 백성 위에 뒤덮이게 하겠다. 그 때에 그 물이 온 샛강을 뒤덮고 둑마다 넘쳐서,

(사 8:8) 유다로 밀려들고, 소용돌이치면서 흘러, 유다를 휩쓸고, 유다의 목에까지 찰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신다.

주님은 앗수르를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프라테스의 강물이 이 백성을 홍수처럼 뒤덮을 것입니다. 유프라테스에 위치한 앗수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강물은 유다를 휩쓸고 유다의 목에까지 찰 것입니다.

바로 1장에서 언급한 그 배경입니다. 지금 아하스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펴지만, 결국에는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죠. 48개 성읍을 모두 차지하고 오직 예루살렘 성만 남겨둔 상황에 대해서 설명 드린 바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유다의 목에까지 앗수르의 강물이 차오른 상황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요.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십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다윗 왕조를 위협하는 아람(시리아/다메섹)-이스라엘(에브라임/사마리아)입니다.

2) 아람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다윗 왕조의 결정에 선 백성들입니다. (반앗수르 노선)

3) 여호와를 의지하기를 거부하는 유다 (아하스 왕을 대표하는)

4)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민족들 (앗수르를 대표하는)

(사 8:9) 너희 민족들아! 어디, 전쟁의 함성을 질러 보아라. 패망하고 말 것이다. 먼 나라에서 온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싸울 준비를 하여라. 그러나 마침내 패망하고 말 것이다. 싸울 준비를 하여라. 그러나 마침내 패망하고 말 것이다.

이사야는 계속 선포합니다. 민족들이 전쟁의 함성을 질러보아도 마침내 패망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 8:10) 전략을 세워라. 그러나 마침내 실패하고 말 것이다. 계획을 말해 보아라.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전략을 세워도 실패할 것이요, 계획을 세워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이사야는 굉장히 스케일이 큰 책이에요. 이것은 유다라는 한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 땅을 두루 살피시고 운영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한 궁여지책을 ‘지혜’라고 말하는 인간의 짧은 판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을 엿볼 수 있는 그러한 책입니다.

유다는 항상 예루살렘 성전, 다윗 왕조의 언약 등에 기대어 그것이 있으니 구원받는다는 좁고 좁은 신앙으로 살았어요. 하루아침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하나님은 깨닫게 하시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기대야 할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한국교회가 얼마나 그동안 세계의 다른 나라 교회들과 비교하며 우월함을 가져왔습니까?

“우리는 세계에서 크다고 손꼽히는 교회가 즐비하고, 아직도 예배당에는 사람이 꽉꽉 차고 있고, 수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나라야.”

코로나 이후에 그 큰 예배당은 모일 수도 없게 되었고, 진짜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은 온라인 예배에서조차 멀어지며 사라져가고, 각 나라마다 방역을 위해서 모든 길을 막아서는 상황에서 수많은 선교사들도 철수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눈에 보이던 지표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만약 모임 예배가 더욱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 전면 통제를 당한다고 치면...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예배당에 모일 수 없게 되는 상황이 1년씩 지속되면... 진짜 성도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진짜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든 방법을 찾는 것이죠. 왜냐면 그들은 상황과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코로나 전에도 가끔 예배 시간마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모이기에 힘쓰지만 흩어질 수 있는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때 예로 질병이 아니라 전쟁을 들었죠. 질병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쟁이 나서 우리가 다 흩어졌을 때, 그곳에서 홀로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저의 목표라고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이 나를 향한 음성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해야하는 것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최선과 우리의 최선이 만나는 곳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만 이곳이 단순히 건물 교회를 넘어서서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는 예배 올 때와 갈 때의 표정이 달라져야하죠. 설령 예배 올 때, 한주간의 피로와 나를 둘러싼 근심과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어둡게 나아왔다고 할지라도... 이곳에서 주님을 예배하며 주님을 경험하며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문제에 주님이 함께 하시니 나는 주님 의지하리라.”

예배 후부터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는 것이죠. 이곳에서 흩어진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고, 흩어져서 삶에서 거룩한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바뀌면 여러분 주변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이 바뀌어갈 때,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배드렸거든요. 성전에서 예배했거든요.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을 바꾸지 않는 그의 예배는 헛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믿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아하스의 행동을 보면서 저건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사 8:11)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성경을 왜 주셨겠습니까? 보라는 것입니다. 보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길이 망하는 것을 봤으면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8장 19-20절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점쟁이들을 한번 찾아가 보지 그래. 영매들에게 물어보지 그래. 영계에 들어가서 죽은 자들과 접촉해 보는 것이 어때?”라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아니,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것이다.” 다른 길을 시도해 보는 자는 결국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막다른 골목이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답답하죠. 빨리 내게 나타나서 바로 해결책을 말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 눈에 보이는 점 보러 다니고, 누군가에게 듣고 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에 보이시지 않으므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경’이에요.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 이사야서가 가르쳐 주는 것.

내 삶에 주님이 해답이 아닌 영역은 없어요. 여기까지만 주님이 하실 영역이고, 이 부분은 내 지혜가 옳다 이런 것은 없어요. 우리를 지으신 분이 주님이심을 믿는다면, 지으신 이에게 우리의 정답이 있고, 이 땅을 운영하시는 이가 주님이시라면 그분께 우리의 모든 문제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9장과 10장에서 모두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닥칠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북이스라엘은 멸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경고에도 돌이킬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 9:10) "벽돌집이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다시 쌓고, 뽕나무가 찍히면 백향목을 대신 심겠다" 한다.

(사 9:11) 이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르신의 적을 일으키셨고, 그들의 원수를 부추기셨다.

거대한 제국 앗수르도 하나님께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몽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렇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사 10:11) 내가 사마리아와 그 조각한 우상들을 손에 넣었거늘, 예루살렘과 그 우상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겠느냐?"

(사 10:12) 그러므로 주님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다 이루시고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앗시리아 왕을 벌하겠다. 멋대로 거드름을 피우며,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는 그 교만을 벌하겠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쓰러뜨린 나라에 있는 우상 정도로 보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긴 것이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고작 힘없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우상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이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보여줍니다. 앗수르는 주님의 예언대로 멸망하고 맙니다. 앗수르 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강대국들의 역사도 성경에서 예언한 주님의 예언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참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아주시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심판하십니다. 고난을 막아 주시지 않고 직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그 일 가운데서 깨닫고 돌이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아니라, 이 일을 보며 깨닫고 돌이킬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눈으로 보고 들으면서 돌이켜 깨닫는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사야는 이렇듯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구원으로 나아올 자들을 위해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열국들을 통해서도,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도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은 돌이켜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에는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저는 이 표현이 너무 멋진 것 같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오늘도 이 시간도 ‘열심’으로 일하고 계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진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만, 구약에서 매번 마주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지만....그들을 돌이켜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그로 인해서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기쁨으로 기대하시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최선으로 그분을 향해 한걸음 더 마음으로 삶으로 나아가야할 때입니다.

우리를 향한 이 열심 앞에서 우리도 성실히 반응할 수 있다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구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여러분의 삶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깨달으십시오. 오늘 이 순간, 깨닫고 돌이키는 분이 있다면... 이 순간은 그러한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순간입니다.